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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2화 (2/100)
  • 2화

    17년 후, 칼리스토 대공령 칼리스타 앞바다.

    달빛을 받아 더 은은하게 빛나는 깨끗한 은발의 남자가 배 갑판 난간에 팔을 대고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저더러 파르미온 공주를 데려오란 겁니까?’

    ‘어차피 네가 직접 살피러 갈 것 아니냐? 파르미온 왕국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꾸미는 건 아닌지. 간 김에 약혼녀도 함께 데려오라는 거다.’

    ‘하아-, 파르미온의 공주도 알고 있습니까? 자신이 볼모라는 것을. 말이 약혼이지 볼모 아닙니까. 그리고 진짜로 하는 약혼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쪽이 목줄을 쥐고 있어야 쓸데없는 일을 벌일 때 숨통을 조일 것 아니냐. 그리고 제국 내에 데리고 있어야 허튼짓을 하지 못할 것이고.’

    그건 저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왜 하필 제가 엮여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한데, 왜 하필 접니까?’

    ‘파르미온 왕국에는 왕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 왕자가 있어야 로에나를 가짜 약혼이라도 시키지. 그리고 설령 파르미온 왕국의 왕자가 있다 한들 로에나에게 위험한 일을 시킬 수 없지 않느냐.’

    ‘형님이 후궁으로 들이십시오.’

    ‘나에게는 황후 벨이 있지 않느냐. 그리고 진짜 파르미온 공주와 결혼하라는 것이 아니야. 진짜 약혼도 아니고. 필요에 의한 것임을 너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분명 파르미온 왕국 근처에서 사라졌다. 환영족의 뒤를 쫓던 네가 더 잘 알 것 아니냐. 전부 쓸어버린다면 편하겠지.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한 번은 봐주겠다는 심산이었다.

    ‘·······.’

    ‘플루투스 제국에서 쌍둥이 용의 이름을 미들 네임으로 받은 것은 너와 나 단둘뿐. 그리고 어느 나라에서나 나와 네가 제일 두려운 존재지. 오벨리스크와 에펜하르트. 플루투스 제국에 내려오는 전설 속 쌍둥이 수호룡. 오벨리스크의 이름은 오직 황제와 황위 계승자인 황태자에게만 내려지는 미들 네임. 그리고 에펜하르트는 어둠의 계승자에게만 내려지는 미들 네임. 칼립스가 아닌 네게 내려졌지. 어머니는 다르지만 너는 그 미들 네임을 지닐 자격이 있다. 자격이 없던 것은 칼립스지.’

    오벨리스크는 빛. 에펜하르트는 어둠. 빛과 어둠.

    나이는 같지만 제 이복형님이자 플루투스 제국의 황제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뒤로 그와 비슷한 나이의 기사가 다가왔다.

    “전하.”

    “공주는?”

    은발 머리의 남자는 자신의 뒤로 선 기사에게 물었다.

    “약은 드셨지만 뱃멀미가 심하신지 선실에 누워 있습니다.”

    “그럼 됐다.”

    “전하께서 한번 가 보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내가 왜?”

    “전하의 약혼녀이시지 않습니까.”

    약혼녀? 그래, 그랬었지. 대외적으로는 약혼녀지. 진짜 약혼녀도 아니고 원하지도 않은 약혼녀지만.

    “공주님이 전하를 찾으시더군요.”

    “윌리엄 러셀 후작.”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있던 남자가 뒤에 선 기사의 풀 네임과 작위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대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평소에는 자신의 이름을 편히 칭하던 그가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듯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기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 경계나 신경 쓰도록 해.”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그 자리를 떠났다.

    “전하께서 원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시는 분이 왜 그런 말을 하신 겁니까.”

    “다니엘 경.”

    윌리엄이 돌아본 곳에는 검푸른색 머리의 청년이 서 있었다. 그의 말대로 윌리엄도 알고 있다. 파르미온 왕국의 공주와의 약혼을 자신의 주군이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다니엘 경은 어떤가? 이 바다 위에 있으니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인가? 경에게도 가족이 있을 텐데.”

    “갑자기 화살이 제게로 날아왔군요.”

    다니엘은 난간을 붙잡고 바다를 바라봤다.

    “제 가족에게 저는 이미 죽은 사람일 겁니다.”

    어린 시절 호기심에 물 위로 올라왔다가 이종족 노예 상인에게 잡혀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모든 것을 빠르게 습득하고 터득한다 할지라도 그때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어른들처럼 완벽하게 힘을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꼼짝없이 잡혀 구속구까지 찬 채 갇혀 있다가 구해졌다. 플루투스 제국의 황제와 그 아우인 칼리스토 대공 전하 손에 의해서.

    “전하께서는 지금이라도 자네가 돌아간다면 붙잡지 않을 걸세.”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전하께 은혜도 갚고 싶습니다.”

    콰앙-!!

    그때 뭔가에 배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면서 선체가 크게 흔들렸다. 배가 뭔가에 부딪힌 것인지 주변을 살폈다. 거대한 뱀의 세로로 길게 찢어진 붉은 눈이 배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거대 뱀?”

    겨우 중심을 잡은 윌리엄이 주변을 살피다 거대한 뭔가를 발견했다.

    “오로치입니다.”

    “오로치?”

    “바다에서는 재앙급의 마물입니다. 어릴 적에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설마 오로치를 만날 줄이야.

    “무슨 일이냐!?”

    선실로 들어갔던 남자가 배가 뭔가에 부딪히면서 크게 흔들리자 다시 밖으로 나왔다. 상항을 파악하기 위해 빠르게 주위를 살피던 그의 시야에 거대한 흰 뱀이 보였다.

    “전원 전투태세를 갖춰!!”

    “무슨-. 꺄아악-!!”

    “독침입니다. 조심하십시오!”

    무슨 일이냐고 물으며 뒤따라 나온 적갈색 머리의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여자가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거대한 흰 뱀이 입을 쩍 벌리니 배를 향해 날카로운 독침이 날아들었다.

    “으악!”

    “꺄악-!!”

    “젠장-!”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던 갑판 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자신의 기사단인 검은 늑대 기사단과 파르미온 왕국에서 공주의 시중과 호위를 위해 온 시녀와 기사들이 독침에 맞는 것을 보고 욕을 내뱉은 은발의 남자는 곧바로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다니엘이 뭔가를 하려는 것을 보고는 카시스가 그에게 말했다.

    “나서지 마라, 다니엘. 네 정체는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아.”

    “전하께서 강하신 건 압니다. 하나, 바다 위에서는 제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발판만 있으면 괜찮다. 그러니 나서지 마라.”

    다니엘의 말대로 인간이 바다의 마물을 상대로 바다에서 싸우기란 육지가 아니고서는 힘이 든다. 하지만 배의 갑판 같은 발을 디딜 곳이 있다면 말은 달라진다.

    발판이 되는 배가 아직 부서지지 않았고 바다에 떨어지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다. 하지만 배가 얼마나 버틸지 모르는 일이니 최대한 빨리 승부를 내야 한다.

    은발의 남자는 검을 힘주어 잡았다. 그러자 검에 은은한 빛을 내는 기운이 실렸다.

    콰지직!

    그때 오로치가 배를 감고 옥죄여 왔고 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배를 박살 낼 생각이군.’

    배를 휘감은 오로치를 기사들이 공격했지만, 단단한 비늘이 검을 튕겨 냈고 오로치는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전하, 오로치의 비늘은 단단합니다.”

    “그런 것 같군.”

    촤아악-!

    “크아아-!!”

    하지만 남자의 검이 오로치의 단단한 비늘을 뚫고 들어가자 괴성을 질러 댔다.

    ‘역시 대공 전하께도 수호룡의 이름을 이어받은 플루투스 제국의 황족이시군.’

    “대열을 갖춰라. 칼리스토 전하께서 신경 쓰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키고 파르미온 왕국 공주님을 지켜라!”

    오로치와 맞서는 칼리스토 대공을 흐뭇하게 바라본 윌리엄이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싸움이 지속될수록 배는 점점 부서지고 발 디딜 곳도 그만큼 사라지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다니엘이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짓씹었다.

    ‘잠시만, 아주 잠시나마 오로치의 움직임을 막을 수 있다면······. 전하께서 힘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지금 이 배에 타고 있는 파르미온 왕국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내가 마린족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 마법사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마침 바다 위라 물은 충분해.’

    결정을 내린 듯 다니엘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리고 바다 쪽으로 손을 뻗은 순간 바닷물이 소용돌이치며 회오리처럼 솟아올라 오로치를 붙들었다.

    그것을 본 카시스의 미간에 실금이 그어지더니 자신의 뒤쪽에 있는 다니엘을 힐끗 쳐다봤다. 그러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꼬리를 피하고 높이 뛰어올라 머리 위에서부터 내리그어 오로치를 반으로 갈랐다.

    밑에서 오로치를 처리했다고 환호성이 들렸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마지막 발악이었는지 반토막 나 쓰러지던 오로치가 꼬리를 세차게 휘둘렀고, 아직 착지하지 못한 칼리스토 대공이 그 꼬리에 맞으면서 날아가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전하!”

    풍덩-!!

    다니엘과 윌리엄이 놀라 그를 부르며 바다로 뛰어들기 전에 옆에서 누군가 먼저 바다로 뛰어들었다. 동시에 뒤이어 들려온 비명과도 같은 소리에 바다로 뛰어든 것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크레타 공주님!”

    “어떻게 좀 해 봐요! 우리 공주님이 바다에 빠졌잖아요!”

    “빠진 게 아니라 뛰어든 것 같은데. 대공 전하를 구한다고.”

    윌리엄이 시녀의 말을 정정해 줬다. 곧이어 시녀가 비명을 지르듯 다시 소리쳤다.

    “우리 공주님 수영 못하신단 말이에요!”

    시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공주는 발버둥 치면서 가라앉았다 떠오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이내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지금 수영도 못하면서 바다로 뛰어들었단 말입니까.”

    수영도 못하면서 대체 왜 뛰어든 거지?

    “걱정 말게. 전하께서는 수영을 하실 줄 아시니.”

    다니엘이 황당해하며 말했다. 윌리엄도 마찬가지였지만 그의 주군은 수영을 할 줄 아니 공주를 건져 올라올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의 주군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젠장! 전하께서 오로치 꼬리에 맞지 않으셨습니까?”

    그제서야 카시스가 오로치 꼬리에 맞았다는 것을 생각해 낸 다니엘이 윌리엄을 보며 물었다.

    “그랬지.”

    윌리엄은 그게 뭐가 문제가 되느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이어지는 다니엘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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