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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1화 (1/100)
  • 1화

    심해 깊은 곳에는 인어족만 사는 것이 아니다. 인어족처럼 꼬리지느러미가 있는 것도 비늘이 있지도 않은, 인간과 똑같이 생긴 종족도 살고 있었다. 인간과 다른 것이 있다면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고 물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그 이외에 사람들과 다른 것은 없었다. 그들은 바다 종족, 마린족이라고 불렸고 잊혀진 종족이었다.

    그리고 지금 심해 깊숙한 곳의 마린족이 살고 있는 아틀란에는 바깥세상을 동경하고 꿈을 키워 가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예닐곱 정도의 여자아이가 침대 위에 누워서 옆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들려주는 여인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 자야지.”

    “그러지 말고 이야기 더 해 주세요. 네?”

    “매일 들려주는 이야기잖니. 내가 보기에는 이미 결말을 외우고 있을 것 같구나.”

    “하지만 질리지 않는걸요. 그래서 그 인어족의 공주님은 인간과 결혼해서 행복해졌잖아요.”

    “거 보렴. 이야기의 결말을 전부 외우고 있지 않니.”

    “알고 있어도 계속 듣고 싶은걸요. 한 번 더 이야기해 주세요.”

    나도 이야기 속의 인어 공주처럼 바깥세상에서 인간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어. 내 반려도 분명 물 밖 세상에 있을 거야.

    “안 돼. 그만 자야 할 시간이라고 했잖니.”

    “엄마-.”

    “자지 않고 이렇게 떼를 쓰면 이야기 속 인어 공주는 불행해질 거야.”

    “치-,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러니 그만 자려무나.”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방을 나갔다.

    아이의 방에서 나온 여인은 복도를 걷다가 멈춰 서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딸에게는 행복한 결말을 이야기해 주었지만 진짜 결말은 불행한 결말이었다.

    인어족의 공주는 인간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간 남자는 다른 여자와 결혼했고 인간 남자의 아이를 품은 것을 알게 된 그녀의 아버지는 분노해서 자신의 딸을 가두었다. 그리고 인어족의 공주는 인간 남자와의 아이를 낳고 아이가 죽자 미쳐 버린다.

    이야기는 그렇게 비극적으로 끝나지만 차마 자신의 어린 딸에게는 진실을 말할 수 없어 잘 포장된 결말을 이야기해 줬을 뿐이다.

    “세레스. 방에 있지 않고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던 것이오.”

    “아, 아일라에게 이야기를 들려줬어요.”

    “또 그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오?”

    “아일라가 좋아하니까요. 일은 전부 끝낸 건가요?”

    “그렇소.”

    여인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좋지만 아일라가 바깥세상을 동경할 것이 걱정이오.”

    “·······.”

    “아일라는?”

    “재우고 나온 길이었어요.”

    “그럼 우리도 방으로 갑시다.”

    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감싸며 걸어갔다.

    남자와 여인에게는 지금 방에서 잠들어 있는 어린 딸이 바깥세상에 관심을 갖고 동경하는 것이 걱정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좋아하는 이야기의 진실을 말해 줄 수는 없었다.

    여인이 나가고도 잠이 오지 않아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던 어린 소녀는 이불을 걷고 침대 밖으로 나와 원형 창틀에 팔을 대고 밖을 내다봤다. 밤인 데다 심해 깊숙한 곳이라 어둡기만 했지만 아이의 눈은 초롱초롱하고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나도 언젠가는 바깥세상으로 나가서 내 반려를 찾을 거야.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 속 인어 공주처럼 행복해질 거야.

    이야기 속처럼 물 밖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소녀는 알지 못했다.

    바깥세상은 어떤 곳일까? 정말 궁금하고 기대가 돼.

    “물 위로 올라가 보고 싶다. 그리고 인어족 공주처럼 인간을 반려로 삼아 행복해지고 싶어.”

    헉! 아무도 못 들었겠지.

    소녀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하고는 놀라서 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좌우로 돌려 누군가 들은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다.

    자신의 방에 다른 누군가가 있을 리가 없는데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안을 훑어보고는 몸을 창밖으로 길게 빼고는 밖을 둘러봤다.

    “휴우-, 다행이다. 아무도 없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소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위만 올려다봤다.

    “물 위로 올라가 보고 싶다.”

    올라가 보고 싶으면 올라갔다 오면 되잖아. 날이 밝기 전에 돌아오면 되는 거야. 들키지만 않으면 되지 뭐.

    그렇게 생각하고는 창밖으로 빠져나가 위로 힘차게 헤엄쳐 올라갔다.

    소녀가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었을 때 달이 구름에 가려 너무 캄캄해 잘 보이지 않았다.

    “낮에 올라와야 잘 보일 것 같은데··· 하지만 낮에 올라오는 건······. 어? 목소리?”

    아이는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헤엄쳐 갔다.

    이쯤에서 들린 것 같은데. 위쪽인가?

    아이가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봤을 때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 덕에 멀지 않은 절벽 위에 몇몇의 그림자가 보였고, 그중에 작은 그림자가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어? 떨어진다.

    아이가 떨어지는 절벽 밑을 향해 빠르게 헤엄쳤다. 절벽 위에서 떨어진 작은 아이를 붙잡고 헤엄쳐 그 자리를 벗어났다.

    육지로 끌어올려 심장에 귀를 가져다 대 보고 얼굴을 찰싹찰싹 때리기도 했다.

    “정신 차려 봐. 정신 차려 보라니까.”

    근데, 이 아이······.

    “예쁘다.”

    아이의 얼굴과 머리색을 본 소녀는 저도 모르게 입밖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으- 콜록! 콜록!”

    “정신이 들.”

    정신이 드느냐고 물어볼 때였다.

    “시스! 카시스!”

    “전하-! 황자 전하!”

    제가 구한 아이를 찾는 것인지 멀리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소리가 들린 방향을 잠시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정신은 잃고 있는 남자아이에게로 향했다.

    “이거 먹을 수 있겠어?”

    “······”

    소녀가 물었지만 아직 의식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소년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대답을 기다릴 수 없던 소녀가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진주알을 꺼냈다. 그리고는 소년의 입 안에 넣어 주었다.

    “은혼단이야. 이걸 먹으면 금방 나을 거야.”

    ‘저기 누군가 있습니다. 2황자 전하 같습니다.’라는 소리를 들은 소녀는 소년에게 은색의 작은 진주알을 먹이고는 바다로 뛰어들어 멀찍이 헤엄쳐 갔다. 곧이어 두 명이 도착해 소녀가 구해 낸 소년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데리고 갔다.

    “다행히 일행인가 보네. 또 만날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만 돌아가야겠다.”

    그들이 소년을 데리고 가는 것을 보고는 다시 아틀란으로 향했다.

    이것이 카시스는 기억하지 못하고 아일라만 기억하는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아틀란으로 돌아와 방을 나갔을 때처럼 창문을 통해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왔다.

    “휴우-. 들키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달빛에 비친 옅은 은발 머리에 갸름한 얼굴의 소년이 자꾸만 떠올라 잠이 오지 않았다.

    뭐지? 가슴이 자꾸 두근거려. 왜 이러지?

    “그 아이 괜찮을까? 괜찮겠지. 은혼단을 먹였으니까. 그래, 괜찮을 거야. 그런데 그 아이 남자애였지? 참 예쁘게 생겼던데. 인간들은 전부 그렇게 예쁘게 생긴 건가?”

    마린족에도 곱상하게 생긴 남자아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더 반짝이고 예뻤던 것 같아.

    “또 만났으면 좋겠다.”

    하지만 소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보름이 지나도록 자신이 구해서 데려다 놓았던 해안가에 가서 그 소년이 오기를 기다려 봤지만 소년은 오지 않았다.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포기할 수가 없어서 계속 물 위로 올라갔다.

    그러다 몰래 물 위로 올라갔던 것을 부모님께 들키는 바람에 소녀는 벌로 외출 금지에 감금까지 당해야 했다.

    그렇게 소녀가 소년을 다시 만나지 못한 채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다.

    * * *

    “하아- 하아-!”

    백발에 가까운 옅고 깨끗한 은발 머리의 소년이 절벽 끝에 몰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를 어쩌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구나. 아무리 검술 실력이 뛰어나도 어린애는 어린애일 뿐이지.”

    소년은 앞에 있는 복면을 쓴 암살자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암살자의 말이 맞았다. 제가 아무리 검술 실력이 뛰어나도 아직 어른, 그것도 암살자 여럿을 상대할 실력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부상당한 몸으로 들키지 않게 최대한 인기척을 죽이고 이동했다. 하지만 뒤를 밟혀 절벽 끝에 몰려 버렸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어머니의 말씀대로 난 단 한 번도 형님의 자리를 넘본 적이 없었는데. 어머니께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내 자리가 아니니 절대로 황태자가 될 생각은 하지 말라는 말을 들어 왔다.

    그래서 단 한 번도 황태자의 자리를 원한 적이 없었고 욕심도 없었다. 저는 그냥 가만히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제가 왜 매번 목숨이 위험해져야 하는 걸까.

    어째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뭘 그리 잘못했기에 황후 폐하는 나를 죽이려는 거지?

    “억울해하지 말고 그만 죽어라.”

    챙!

    “윽!”

    다친 팔과 부상당한 몸으로 암살자의 검을 막아 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힘에서 밀려 뒤로 물러나 발을 헛디뎌 절벽 밑으로 떨어질 뻔했지만 겨우 중심을 잡았다. 하지만 두 번째 공격에서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절벽에서 떨어진 소년은 바다에 빠지면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소년과는 반대로 플루투스 제국의 상징인 검은 머리와 짙푸른 눈동자를 지닌 소년과 같은 나이의 형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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