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106화 (외전 완결) (106/106)

외전 7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어이가 없어 실소를 뱉고 보니 한숨이 뒤따랐다. 지극히 충동적이었던 제 말이 결국 부담을 줬던가. 먼 길에서 돌아와 대뜸 그 말부터 꺼내게 했을 만큼.

승원은 미안하고 난감한 얼굴로 이마를 문질렀다.

“내가 섣불렀어. 괜한 고민하지 마. 싫으면 강요할 생각 전혀 없으니까.”

- 싫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한테 질투했나 봐. 아직은 영감님 사랑 나눠 가질 준비가 안 됐단 말이에요…. 나 너무 웃기죠?

“…….”

승원은 순간 벙찐 얼굴이 됐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이유였다.

서지안이 질투라니. 그것도, 제 말마따나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 오해했다면 미안해요. 내 맘이 너무 부끄럽고 유치해서 선뜻 말할 수가 없었어요.

멈춰있던 그의 입술이 점점 늘어지고 있었다. 가뜩이나 없던 주름이 팽팽하게 당겨지기 직전이었다.

“너는 대체….”

한순간 소양감이 차올랐다. 어디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으나, 심장 어디쯤을 깃털로 마구 간질이는 기분이었다.

- 나도 영감님 닮은 아이 갖고 싶어요. 어떻게 싫을 수가 있겠어….

어느새 1층에 다다른 엘리베이터가 묵직하게 멈추었다. 곧장 열린 문밖으로 익숙한 광경이 펼쳐졌다. 오늘도 지승원 이사의 팬클럽을 자처한 직원들이 로비에 바글바글 진을 치고 있다. 언제 봐도 진귀한 광경에 병천은 혀를 내둘렀다.

하나 자신을 향한 시선들 따위가 보일 리 없는 승원은 그 틈을 유유히 지나며 통화에만 집중했다.

- 대신, 우리끼리 조금만 더 깨 볶고 난 다음에. 아이한테 사랑 나눠줘도 질투 나지 않을 때쯤, 그때 매일매일 밤마다 노력해봐요.

결국 웃음소리가 입 밖으로 새고 말았다. 아이를 갖기 위해 밤마다 노력하자는 말이 천 년을 통틀어 가장 야하게 들리다니. 수많은 눈을 사위에 두고 아랫도리가 느닷없이 웅변이라도 할 기세다.

- 물론 그런 날이 언제쯤에나 올진 장담은 못 하지만….

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로비를 성큼성큼 가로지르는 그에게서 숨기지 못한 행복감이 풀풀 흩날리고 있었다. 순간이동을 할 수 없음이 또 한 번 통탄스럽다.

“네 뜻대로 해. 얼마든지 기다릴 테니까.”

아니, 혹여 그날이 영영 오지 않는다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저를 향한 지안의 이 깜찍한 마음 하나면 충분했으므로.

- 그런데 그 전에… 해야 할 게 있어요.

정문으로 냅다 달려간 보안 직원이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었다. 덕분에 거칠 것 없이 사옥을 나서던, 그 순간이었다.

“그게 뭐….”

저벅저벅 시원하게 내딛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내내 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오던 소란이 일순간 그의 전신을 와락 덮쳤다.

“…….”

번쩍번쩍 사방에서 섬광이 터졌다. 사옥 앞을 가득 메운 인파는 지승원 이사의 팬들이라기엔 그 수가 지나치게 많다.

하나 이 난리 통에도 그의 눈에 보이는 이는 오로지 한 사람, 10m 앞 보도블록 위에 서서 어여쁘게 웃고 있는 그녀뿐이다.

“너….”

어리둥절하게 깜박이던 그의 눈이 뒤늦게야 지안의 머리 위로 힐끗 들렸다. 수아와 우진이 싱글벙글 웃으며 하늘 높이 들고 있는 저것은 그러니까….

< 지승원 씨, 우리 결혼부터 합시다! >

“…하. 뭐야, 이게….”

탄식에 가까운 소리가 겨우 흘러나왔다. 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던 얼떨떨한 웃음이 붉은 입술에 걸린 채였다.

- 인간적으로 웨딩드레스는 입혀줘야지. 애부터 갖자는 건 너무했어, 솔직히.

아… 진짜.

“그래서.”

진짜 미치겠다.

“청혼하는 거야, 지금?”

어떤 말로도 지금의 기분을 표현할 수가 없다. 그냥 미치겠다.

- 말하자면 그렇긴 한데… 카메라 때문에 놀랐죠?

지금은 물론, 이전에도 앞으로도 그를 놀라게 할 사람은 오로지 서지안뿐임을 정작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다.

- 내 애인은 권재혁이 아니고 지승원이라고 제대로 알리려고 한 건데, 생각보다 너무 많이 따라 왔어…. 좀 부담스럽죠?

그러게, 참 많기도 하다. 쉴 새 없이 펑펑 터지는 플래시 덕분에 마치 불꽃놀이라도 온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안에게만 붙박인 그의 시선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짐짓 여유를 되찾은 양 짓궂게 웃었다.

“난 괜찮은데, 네가 괜찮겠어?”

뽀얗고 예쁜 얼굴이 까딱 기울었다. 동그랗게 뜬 채로 깜박이는 다갈색 눈동자가 그냥 예뻐죽겠다.

- 뭐가요?

멈춰있던 그의 구둣발이 성큼 바닥을 디뎠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은 사위의 소음을 뚫고 그녀와의 간격을 좁혀갔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지안의 목은 급격히 경사가 졌다. 커다란 그림자와 묵직한 우디향이 밀려드는 순간, 그의 팔에 꽉 휘감긴 지안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동시에 미소가 만개한 입술이 뜨겁게 맞붙었다.

“꺄아아, 어뜩해, 어뜩해!”

두 손을 맞잡은 수아와 우진이 제자리를 방방 뛰어댔다. 인파에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감격해 눈물을 훌쩍이는 병천은 오늘도 여전히 주책없다.

살랑 불어온 바람이 뜨겁게 키스를 나누는 두 사람의 주위를 뱅글뱅글 맴돈다.

가을의 끝자락이었다.

지난날 그를 떠나보내야 했던 이 가을의 끝자락이, 이제 더는 시리지 않다.

온전히 함께. 비로소 완전한 행복이었다.

번외

“아아따, 워째 그래 얼라를 안 갖는지, 내 똥줄이 바짝 타더랑게.”

범화의 턱이 목주름이 팽팽해지도록 바짝 쳐들렸다.

“그려서 나가 삼신 할망구 옆구리를 오지게 찔러븐 거 아이냐. 안 그렸으믄 석이 늬는 시상 구경도 못 혔어. 헛허허!”

걸쭉하게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골목 어귀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의 앞에 턱을 괴고 앉은 은석은 나른하게 눈을 끔벅였다.

그가 삼신의 옆구리를 찔러 저를 점지하게 했노라는 이야기는 이미 수백 번도 더 들었다. 결론은 지금 범화가 꽤 거나하게 취한 상태라는 것이었다.

“워쨌거나 느그 어메 압씨도 낳아놓은께 이뿌다고 환장을 안 혔냐? 갸들은 낸테 절이라도 해야 헌당께.”

다음에 이어질 레퍼토리는 불 보듯 뻔했다.

곁에 두었던 막걸릿잔을 내밀고, 찰랑찰랑 얼음이 헤엄치는 주전자를 들며 검은 치아가 반짝이도록 싱긋 웃으시겠지.

“그런 으미에서 시원허니 한잔 빨어봐. 삼춘이 아주 기가 맥히게 맹글었응게.”

역시. 이 불변의 레퍼토리야말로 그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은석에게 술을 가르치려 시도한 것이 2년은 족히 되었으니, 초등학교를 갓 졸업했을 무렵부터였을까.

물론 음주에 대한 호기심은 왕성했으나, 은석에게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이 술 한 잔에 머리털이 몽땅 잘려나갈 수도 있음이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진하게 넘실대는 막걸리가 자꾸만 호기심을 부추겼다. 은석에게도 호환 마마보다 무섭다는 사춘기가 온 것이었다.

“저 아직 열다섯이에요, 삼촌.”

이미 마음은 기울었으나 은석은 예의상 한 발 물러섰다. 그래도 그가 쉬이 술잔을 거둬가진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괜잖애, 괜잖애. 으른헌테 배우는 술은 술도 아니여. 기양 약수다- 생각허고 쭉쭉 들이켜브러. 사내놈이 그만한 배포는 있으야제!”

이로써 아버지에게 할 말은 생겼다. 삼촌이 약수라 해서 약수인 줄 알았을 뿐이온데….

과연 영악한 계획이 아닐 수 없다.

“그럼 곰방대도 좀 배워볼까요.”

“뒈지고 싶냐?”

“…….”

“슨은 늠지 마러라잉. 나가 늬 압씨헌테 참말로 뒤지는 수가 있응게.”

“우리 아버지 못 이기세요?”

“말이 그러체, 말이. 슬마 이 호랭이 님이 고깟 인간 하나를 못 이기겄냐? 아, 햇소리 말고 술이나 묵어, 어여. 식으믄 맛도 없응게.”

호기심에 패배한 은석이 결국 술잔을 들자, 범화의 광대가 만족스레 올라붙었다. 드디어 세상에 당당히 한 발을 내디딘 제 아들을 보는 양 뿌듯한 얼굴이었다.

“옳지, 옳지. 잘 헌다.”

생애 첫 막걸리를 겁도 없이 꿀떡꿀떡 비운 은석은 빈 잔을 텅 내려놓고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범화는 감탄하며 쩍쩍 손뼉을 쳤다.

“키햐. 우리 조카님 오지게 멋져브네! 늬가 참말로 월호 핏줄은 맞는갑다잉. 겁대가리 읎어, 겁대가리가.”

제대로 신이 난 범화는 곧장 은석의 잔을 또 채워주었다. 특유의 시원하고 구수한 맛에 매료된 은석은 주저 없이 잔을 들었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것. 한번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 무서운 법이다.

“생각보다 맛있네요. 그냥 음료수 같고.”

“근당께. 막걸리는 술도 아니여. 담뻔에는 고량주를….”

낡은 테이블이 덜덜 진동한 것은 그때였다. 동시에 한곳으로 쏠린 둘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 듯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은석은 사뭇 긴장한 얼굴로 진동하는 휴대폰을 들었다.

“네, 아버지. 아… 여기 범화 삼촌….”

말하지 말라며 얼른 손을 펄럭였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범화는 쯧쯧 혀를 차며 막걸리를 벌컥 들이켰다. 에레이 씨, 조져븟네, 구시렁대는 소리가 퉁명스럽다.

“예… 금방 들어갈게요.”

통화를 끝낸 은석의 얼굴에 짙은 아쉬움이 드리웠다.

“또 쌩지럴을 허제?”

“뭐, 그냥…. 삼촌이랑 가깝게 지내면 정신 건강에 해롭대요.”

“어허허! 무시혀. 개소린께.”

말은 그리했지만 술상은 빠르게 정리됐다. 물론 인간이 된 승원에게 힘으로 질 리야 없겠으나, 골방에 틀어박혀 저들과 노는 낙에 사는 몸이니 별수가 없다. 행여 발길을 끊겠다 협박이라도 하려 들면 백기는 제 몫이기 때문이었다.

“또 올게요. 잘 마셨어요, 삼촌.”

“오냐, 그래. 담뻔에 올 쩍엔 느그 압씨한텐 입 싸물고 와라잉?”

뻥 뚫린 벽 앞까지 은석을 배웅한 범화는 녀석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너른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늘 그랬듯 주름진 잇새로 깊은 탄성이 흘렀다.

“히어… 등짝 벌어진 것 좀 보소. 저것이 어델 봐서 열다섯이여.”

인간 나이 열다섯에 저런 육체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인가. 열다섯의 나이가 언제였던지. 워낙에 까마득하니 알 수는 없으나 확실히 보통의 아이들과는 다르다는 건 알 것 같았다. 나이답지 않게 묵직하고 기묘하게 풍기는 분위기만 보아도 그러했다.

마치, 아주아주 먼 옛날의 월호를 보는 기분이랄까. 해서 은석이 유난히 더 반가운 건지도 모르겠다.

“피는 못 속이는 법이제, 암만.”

세상 인자하게 미소를 머금던 것도 잠시, 범화는 돌연 사납게 미간을 구겼다.

“아, 근디 생각헐수록 섭섭네?”

별안간 성질이 나 콧바람을 쉭쉭 내뿜던 그는 구들장 위를 휙 쏘아봤다. 얼마 전 승원이 새로 가져다준 최신식 휴대폰이 깃털처럼 가볍게 날아왔다.

놈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누르는 손이 심히 신경질적이다. 한참이나 신호가 걸린 후에야 연결음이 끊어졌다.

- 여….

“에레, 잡놈아! 나가 늬 아들래미 잡아묵냐? 뭐슬 그만치 못 떼놔가 안달이여? 밥이나 좀 맥여 보낼랬두만, 쉐끼가 치사허게.”

- 네가 잘도 밥을 먹이겠다. 석이 좀 그만 불러. 네놈만 보고 오면 애 얼굴이 칙칙해지잖아.

“허! 참 내!”

배은망덕도 유분수라더니. 내가 석이 놈을 어찌 보듬었는데.

씩씩대며 의자에 철퍼덕 몸을 놓은 범화는 허공에 삿대질을 해가며 서운함을 토로했다.

“늬 볼쎄 잊아븟냐? 나가 늬 아들래미 똥끼저기도 갈고, 잉? 젖뱅도 물리고, 잉? 술도 가리치고 다 혔어! 그란께 낸테도 늬만치는 지분이 있는 것이제!”

- 기어이 술을 먹였어? 이게 진짜 죽으려고.

“고것만 줏아들었냐? 에라이, 귓구녕도 이기적인 새끼야.”

휘영청 밝게 빛나던 보름달이 어느새 먹구름에 가려졌다. 오래지 않아 어둑한 골목엔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 시끄러. 네놈은 아무튼….

- 승원 씨! 오래 걸려요? 나 먼저 씻을까?

- 아니야, 같이 씻어.

“뭐래냐. 남녀가 유별헌디 같이 씻기는. 씹어갈 놈. 여러 가지 허네, 참말로.”

- 닥치고 끊어.

세월이 흘러도 두터운 우애를 자랑하는 범화와 승원의 욕설이 진눈깨비 쏟아지는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같은 시각.

아쉬운 마음에 터벅터벅 느리게 걷던 은석은 무심코 캄캄해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음료처럼 달콤하기만 했던 막걸리가 이제야 효력을 발휘하는 걸까.

눈과 비가 뒤섞인 자연의 풍광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아래로 쏟아지다 다시금 솟구치는 모습이 착각인지 뭔지 기묘하다.

“이게 취하는 건가….”

어지러우나 불쾌하지는 않다. 아니, 외려 황홀한 기분이었다.

아비를 닮은 짙고 긴 눈매가 점점 가늘어졌다. 이내 검푸른 눈동자를 완전히 가린 눈꺼풀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얼마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선 채로 잠이 들었나 싶게 고요했던 은석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그사이 빗방울이 사라진 밤하늘엔 눈송이만 흩날리고 있었다.

새까맣던 머리칼에도, 검푸르렀던 눈동자에도, 하얀 눈송이가 사뿐히 내려앉는다.

얼마쯤 고개를 꺾어들고 밤하늘을 바라보던 은석은 불 꺼진 상가의 캄캄한 유리창을 돌아보았다.

먹구름 너머의 보름달과 범화의 막걸리. 그리고 눈 내리는 밤.

범화 삼촌이 심심찮게 말해왔던 ‘운명의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을까.

“…신기하네.”

유리창에 비친 백발의 소년을 물끄러미 마주하던 은석은 회백색 눈동자를 나른히 깜박이며 싱긋 미소 지었다.

- 달뜨는 밤 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