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105화 (105/106)

외전 6

장난임을 알면서도 은근히 기대가 되는 건 또 뭔지. 지난 일주일은 그녀에게도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여느 때보다 그의 품이 못내 그립다.

- 네가 옆에 없으니 허전해. 순간이동을 못 하는 게 이럴 땐 참 아쉽네.

엷은 미소가 걸려있던 지안의 입술이 아쉬운 듯 늘어졌다.

“그러게. 안 그래도 나, 여기 있는 내내 그 생각했어요. 휙휙 날아오면 참 좋을 텐데, 하구.”

실은 한국에 있을 때도 그런 생각은 종종 하곤 했었다. 촬영을 하다가도 간혹 그가 생각날 땐 문득문득. 아니 꽤 자주.

어느 날엔 촬영장 어딘가에서 모습을 지운 채 저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을까, 괜히 스탭들 사이를 두리번거리기도 했었다.

물론 사라진 그의 능력이 이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때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 곧 떠나야 할 그를 두고 1분 1초를 맘 졸이며 보냈던 시간은, 정말이지 아프고 힘들었었다.

“…영감님.”

입가에 머물러 있던 미소가 불현듯 옅어졌다.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도 웃음기가 조금 가셨다. 그도 느낀 모양인지 대답은 약간의 정적이 흐른 다음에야 건너왔다.

- 듣고 있어. 얘기해.

요 며칠 평소와 다름없이 통화를 이어갔지만 그와 아직 풀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 우리 아이 가질까? ’

‘ …가, 갑자기요? ’

천천히 생각해보자며 얼렁뚱땅 넘어간 후로 어쩌다 보니 일주일. 먼저 운을 떼지 않으니 그 역시 더는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분명히 한편으론 찝찝하게 남아 있을 재혁과의 스캔들도 그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사소한 언쟁도 하고 싶지 않은 듯이.

그는 늘 그랬었다. 매사 저를 믿고 배려하고 이해하려 애쓰며 본인의 감정은 뒤로 미루고 억눌렀다.

덕분에 사소한 말다툼도 할 일이 없었으나, 이번만큼은 외려 제 마음이 찝찝했다. 더 깔끔하게 해명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조금의 의구심도 남지 않게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은데.

그리고 아이는….

살며시 깨문 입술이 잇새로 꾹 말려 들어갔다. 어떤 말도 목소리만으론 제 진심을 오롯이 전달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래, 잠시만 미루자. 이 밤이 지나면 곧 만날 테니까.

막간의 고민을 삼킨 지안은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냥, 보고 싶다구요. 엄청 많이.”

건너편에선 옅은 웃음소리만 건너왔다. 어떤 말을 할까, 그도 내심 긴장했을 것이었다.

잠시간 웃음 짓던 그는 다시금 장난스레 말했다.

- 난 울 뻔했어. 보고 싶어서.

“에이, 난 이미 대성통곡했는데?”

파도에 부딪히는 웃음이 아이처럼 천진했다. 얕은 물에 찰박찰박 발장난도 치고, 영감님 선물을 발견했다며 예쁜 조약돌을 주웠다가 쓸데없다고 잔소리를 듣기도 하며, 통화는 휴대폰이 뜨끈해질 만큼 오래도록 이어졌다.

어느새 깊어진 밤.

그와 통화를 끝낸 후로도 지안은 백사장에 우두커니 서서 일렁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저 먼바다처럼 상념이 짙어졌다.

문득, 오늘 낮 우진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 이제 웬만큼 정리는 끝났습니다. G사 화장품 광고는 반년 정도 계약 기간이 남아있긴 하지만, 관련 사항에 대한 규제는 없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고요. ’

“반년….”

모든 계약에서 자유로워질 날이 이제 반년이 남았다. 그만둘 때 두더라도 무책임하게 돌아서고 싶진 않아 지난 10개월을 버텨왔다. 그것이 10여 년 몸담아온 업계는 물론, 제 꿈에 대한 예의겠거니 생각하며.

한데, 그러는 동안 승원의 초조함과 불안감이 깊어지리란 것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러니까, 식도 올리기 전에 아이를 먼저 생각할 정도였을 줄은.

며칠 전 통화에서 수아는 말했었다.

- 지안 님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신수들에게 50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어요. 하물며 천 년을 살았던 월호 님은 오죽하실까요. 더군다나 두 분 어렵게 다시 만나셨으니 더더욱…. 그저 함께 하지 못하는 시간이 아까우신 걸 테지요. 월호 님껜 지안 님이 전부이니까요.

그와 모란을 연달아 떠나보낸 후 무엇보다 컸던 마음은 후회였다. 이렇게 허망하게 떠날 줄 알았더라면 조금만 더 같이 있을걸. 한 번 더 손을 잡고, 열 번 더 안아볼걸.

해서 꿈처럼 다시 만난 그와의 시간은 제게도 몹시 소중했다. 이미 계약된 스케줄을 하루빨리 소화하고 은퇴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을 만큼. 그 후엔 다른 누구에게도 그와의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 않을 만큼.

설령 그 누군가가 그와 자신의 아이라 하더라도.

밀려오는 파도만 말끄러미 바라보던 지안은 문득 휴대폰을 들어 포털사이트를 열었다. 정정기사가 나고도 여전히 저와 재혁의 이름은 검색어 순위에 떠 있었다. 기사의 댓글에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냐며 여전히 믿지 못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았다.

“하… 그러게. 불도 안 땠는데 연기가 나네요….”

이 터무니없는 해프닝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은 역시 그뿐일까.

결코 짧지 않았던 고민을 말끔히 끝낸 지안은 사뭇 다부진 얼굴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 수아 님.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

꽤 깊은 밤이었으나 수아에게서는 금세 답장이 날아왔다.

[ 옛! 뭐든 말씀만 하셔요! ]

잠시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보던 지안은 사뭇 상기된 얼굴로 키패드를 두드렸다. 이번에도 수아의 답장은 재빠르게 건너왔다.

[ 꺄아! 정말요? 우앙, 대애박! ]

호들갑스런 수아의 반응에 절로 웃음이 났다. 덕분에 오랜 고민이 무색하게 낯선 설렘이 차오른다.

기분 좋게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보니, 다가올 내일이 못내 기다려졌다.

**

“진정 공항에는 안 나가보실 겝니까?”

병천의 물음에 승원의 시선이 자연스레 벽시계로 향했다. 검푸른 눈동자에 애타는 심정이 숨김없이 드러났으나, 그는 짐짓 태연한 척 말했다.

“어차피 픽업도 못 할 텐데 뭐하러. 괜히 방해만 돼.”

몰려있을 기자들과 인파를 뚫고 지안을 덥석 데려올 수는 없으니 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 역시 그녀를 위한 배려일 테다.

아이고… 우리 월호 님이 어쩌다 이리 꽁꽁 숨어 있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는가. 예전에야 세간의 관심이 귀찮아 부러 은둔하며 살았으나, 이젠 ‘저 여자가 내 애인이다!’ 말하고파도 할 수가 없으니 병천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내일 오전 미팅이나 좀 미뤄. 취소하면 더 좋고.”

“이미 모레로 미뤄두었지요. 제가 괜히 유능한 고양이겠습니까.”

“취소했더라면 한층 더 유능하다 했을 텐데.”

“이놈 비록 수장의 명패만 쥐고 있으나, 그래도 대표로서 회사 일을 그리 막무가내로….”

병천의 말이 길어지자 그의 보폭이 넓어졌다. 길쭉한 다리로 단 몇 걸음 만에 집무실을 나서버리니, 병천은 결국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머쓱하게 뒷덜미만 긁적였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지안을 맞을 준비를 해야할 테니 오죽 마음이 급할까. 병천도 응당 이해는 하는 바다.

성큼성큼 엘리베이터까지 앞서간 승원은 비어있는 비서실을 돌아보며 물었다.

“수아는 왜 아까부터 안 보여?”

“말도 마십시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사내를 만나러 간다고 꽃단장을 하고 나섰는데…. 뭐, 모르지요. 어느 가여운 사내놈 하나가 지금쯤 골로 갔을지도.”

“쯧쯧…. 가는 길이라도 편하게 지리 좋은 산에 묏자리나 알아봐.”

“예에. 그리합지요.”

농담을 진담처럼 나누면서도 표정 변화가 일절 없다. 그래도 병천의 농을 기껍게 받아치는 것을 보니 오늘은 그의 기분이 썩 괜찮은 모양이었다.

요 며칠 얼마나 지옥 같았던가.

가뜩이나 아이에 관한 일로 심중이 어지러운 마당에 애먼 놈이 지안의 짝으로 둔갑하여 스캔들까지 터져버렸으니, 그의 분위기가 그야말로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도술을 부리지 못해 망정이지, W 사옥 전체가 또 이글루가 될 뻔했다.

금세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오르려던 순간, 승원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의 눈이 놀란 듯 동그래졌다.

승원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인사도 없이 대뜸 튀어나간 질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행기가 아직 하늘을 날고 있을 시각에 전화가 걸려오니 놀랄 수밖에.

- 금방 날아왔어요. 하늘이 뻥 뚫려서.

이걸 지금 농이라고 하는 건지, 원.

덮어놓고 걱정부터 되니 장난을 받아줄 정신도 없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성마르게 물었다.

“장난치지 말고. 비행기가 안 뜬 거야, 뭐야.”

- 일찍 왔어요. 어쩌다 보니 시간이 당겨져서.

영문은 모르겠으나 그제야 굳었던 그의 얼굴에 안도가 번졌다.

“연락을 하지 그랬어. 더 일찍 퇴근했을 텐데. 그래서 어디야, 지금.”

어찌나 놀랐던지 엘리베이터에 올라서도 여태 버튼을 누르지 않고 있었다. 덩달아 혼을 빼고 그의 안색만 살피던 병천이 그제야 1층 버튼을 눌렀다.

- 대답하기 전에, 먼저 물어볼 거 있어요.

“뭘?”

전화 건너편이 조금 소란스러웠다. 지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세라 휴대폰을 조금 더 바짝 대었지만, 어쩐 일인지 지안은 말이 없었다.

“얘기해. 뭔데.”

그가 급한 성질에 재촉한 다음에야, 지안은 겸연쩍은 듯 웃음 띤 목소리로 물었다.

- 우리 아이 생겨도, 나 지금처럼 예뻐해 줄 거예요?

승원의 미간에 다시금 굵은 주름이 팼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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