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104화 (104/106)
  • 외전 5

    뾰족한 볼펜 촉이 결재 서류 위를 톡톡 두드렸다. 애초에 희미했던 점은 시간이 갈수록 짙고 굵은 얼룩이 돼가고 있었다. 그가 하염없이 한 자리만 내리찍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뜻이었다.

    병천은 마치 기계처럼 서류에 콕콕 박히는 볼펜 촉을 바라보며 심심한 어투로 말했다.

    “그리해서 종이가 뚫리겠습니까. 차라리 송곳을 가져다 드릴….”

    “역시 섣불렀나….”

    말허리를 가르고 흘러나온 음성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창 너머로 뻗쳐 있는 그의 눈빛 또한 깊은 상념에 빠진 채였다.

    이사실에 들르기 전, 병천은 수아에게 이미 이 근심의 연유를 듣고 온 참이었다.

    ‘ 월호 님이 글쎄, 지안 님께 아이를 갖자 하셨다지 모예요? 한데 지안 님은 그냥 확답 않고 넘어가신 모양이구… 그 상태로 괌으로 떠나버리셨으니 월호 님의 복심이 얼마나 어지러우시겠어요? ’

    아휴우…. 우리 월호 님은 인간이 되어서도 어찌 이리 변함없이 막무가내이신지. 그저 육체가 세월의 흐름에 순응하게 된 것 말고는 조금도 달라지신 것이 없는 듯싶다.

    그 모르게 한숨을 삼킨 병천은 꾸중하듯 못 박았다.

    “성급하셨습니다.”

    내내 창밖만 바라보던 그의 눈길이 그제야 병천을 향했다.

    “한창 배우로서 입지를 다지고 계신데 갑자기 아이라니요? 여배우에게 출산이란 그리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아이가 생긴다면 맡게 될 배역도 한정될 것이고요. 허니 지안 님께는 응당 고민이 될 만큼 중차대한 일이겠지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도 모르지 않았다. 하나 이미 일을 쳐버린 지금은 그저 잔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마뜩잖게 눈가를 찌푸린 승원은 던지듯 펜을 놓고 창가로 향했다.

    “알아. 속 시끄럽게 떠들지 마.”

    “아신다는 분이 다짜고짜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

    그러게. 왜 그리 성급했을까. 실은 말을 꺼냄과 동시에 아차 하며 후회도 했던 참이었다. 나름의 고민도 꽤 깊었으나 대뜸 내뱉고 만 것은, 지극히 충동적인 기분에 휩쓸린 것이었다.

    먼 해외로 떠나보내려 하니 불안하기라도 했던 걸까. 그래 봤자 고작 일주일, 그것이 뭐 그리 대수라고.

    할 말이 없으니 그는 버릇처럼 담배만 꺼내 물었다. 대꾸 대신 뽀얀 연기만 풀풀 흩날리자, 병천은 한층 진중해진 얼굴로 덧붙였다.

    “월호 님께는 50년이 쏜살과 같으실 테니 조급한 마음은 이해되오나, 지안 님은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날이 더 많지 않겠습니까. 비교적 여유로울 수밖에 없을 테지요.”

    그 또한 반박할 수 없었다. 이미 넘칠 만큼의 세월을 경험한 그는 남은 생을 살아갈 이유가 오로지 그녀뿐이었으나, 지안에게 그는 단지 생의 한 부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영원할 수 없는 인간의 생. 젊음 또한 그러할 테다. 한 번뿐인 인생을 사는 동안 하고 싶은 일도 많을 터였다.

    “그러니 그저, 속도를 맞추어주십시오. 어렵사리 이뤄낸 꿈을 즐길 시간도 충분히 주셔야지 않겠습니까.”

    잘 알기에 여태 잠자코 기다린 것이었다. 하루 중 잠든 모습만 겨우 보는 날이 잦아져도, 다른 놈과 진한 애정씬을 찍어도 끓어오르는 질투심마저 애써 꾹꾹 누르며 견뎌왔건만, 이제 와 왜 이리 조급하고 옹졸한 마음이 드는지 그로서도 환장할 일이었다.

    얼마간 승원의 널찍한 등만 바라보던 병천은 탄식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인간이 되어 돌아와도 현실의 문제는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구나, 생각하며.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린 것은 그때였다.

    “월호 님!”

    “어익쿠, 깜짝이야.”

    어쩐 일인지 벌겋게 화가 오른 수아가 씩씩대며 집무실로 들어섰다. 잰걸음으로 승원에게 다가온 수아는 들고 있던 태블릿PC를 내밀었다.

    “이것 좀 보시어요!”

    태블릿을 받아든 승원의 미간에 엷은 균열이 생겼다. 무슨 일이랍니까, 하며 다가온 병천이 빠끔 고개를 내밀어 태블릿을 확인했다.

    병천은 대번 헛숨을 터트렸다.

    “허어. 이게 무슨….”

    “우씨!”

    콧바람을 쉭쉭 내뿜으며 열을 내던 수아가 소매를 바짝 걷어붙였다.

    “감히 우리 지안 님의 어깨에 팔을 둘러 이런 사달이 나게 하다니! 이자의 손목을 댕강 잘라버릴까요? 명만 내리셔욧!”

    “…….”

    수아의 호들갑이 무색하게 승원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내리뜬 눈으로 태블릿 액정에 떠 있는 기사만 바라볼 뿐.

    [ ‘서지안-권재혁’ 드라마 연인이 현실로? ]

    [ 서지안♥권재혁, 괌 촬영지서 ‘밀애!’ ]

    어느새 퇴근길에 오른 해가 먼 산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주황빛 노을이 내려앉은 그의 잇새로 뿌연 담배 연기가 나슨히 흘러나왔다.

    지안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로부터 5시간 후, 깊은 밤중이었다.

    **

    지안은 난감한 얼굴로 부산스레 같은 자리를 서성였다. 어둠이 내린 드넓은 투몬 비치에 지안의 발이 닿은 자리만 웅덩이가 생길 판이었다.

    “미안해요.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그걸로 기사까지 낼 줄은 몰랐어. 다른 동료들도 옆에 다 같이 있었거든요, 정말. 정정 기사 곧 날 거예요.”

    느닷없고도 뜬금없이 터진 스캔들이었다. 더욱이 황당한 것은, 현지 관광객이 개인 SNS에 올린 몇 장의 사진으로 이 사달이 났다는 사실이었다.

    < #투몬비치산책 #연예인실물 #서지안권재혁 #드라마커플 #선남선녀

    모야모야, 이 분위기 모야? 둘이 진짜 사귀는 듯. 진짜 대박 잘 어울림. >

    그저 우연히 보고 넘겨짚은 헛다리가 하루아침에 기정사실이 돼버리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러니까 그때가, 촬영이 끝난 후 간단히 맥주 한잔하며 피로를 달랬던 지난밤이었을까. 하물며 상대와 단둘이 있던 것도 아니건만, 재혁과 찰나로 장난을 치던 순간을 참 용케도 캐치했다.

    제작진과 동료 배우들은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라며 웃어넘겼지만, 지안은 마냥 웃을 수 없었다.

    하필이면 그의 곁을 떠나있을 때 이런 스캔들이 터지다니. 게다가 아이를 갖자던 그에게 확답을 해주지 못하고 떠나온 길이 아니었던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 서운했을 것이었다. 그 와중에 이런 기사까지 접했으니 그의 심정이 오죽할까. 촬영 탓에 곧장 연락하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똥줄이 바짝 탔다.

    “나 진짜 결백해.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해요!”

    그에겐 보이지도 않겠지만, 왼쪽 가슴에 손까지 척 올리며 당당히 결백을 주장했다. 수화기 너머로 엷은 웃음소리가 건너왔다.

    - 오해 안 해. 걱정하지 마.

    그제야 긴 숨을 뱉어낸 지안은 풀썩 쪼그려 앉아 이마를 짚었다.

    “하… 정말, 스캔들 같은 건 처음이라 너무 당황했어요. 기삿거리 되게 없나 봐.”

    그런가 보다며 건너오는 그의 말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다만 표정을 볼 수가 없으니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안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괜찮은 거죠…?”

    - 괜찮다니까. 오늘 촬영은 끝났어?

    “아직. 한 씬 남았어요.”

    “지안 씨!”

    멀찍이 조감독의 기척이 들렸다. 촬영 준비가 벌써 끝난 모양이었다.

    - 부르는 것 같은데. 가 봐, 어서.

    “응. 끝나고 전화할게요. 피곤하면 문자 남겨줘요.”

    - 그래. 촬영 잘해.

    통화를 끝내고도 서둘러 걸음을 떼지 못했다. 한국도 벌써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으니, 촬영이 끝난 후에는 아마도 통화가 힘들 것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걸음이 느려지자, 조감독이 손을 펄럭이며 재촉했다.

    “지안 씨! 허리 업, 허리 업!”

    “네, 가요!”

    아니나 다를까, 그날 촬영은 새벽 5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내일 통화하자며 그가 메시지를 남긴 시각은 새벽 4시. 한국 시각으론 3시경이었을 테니 결코 이른 시각은 아니었다. 그 늦은 시각까지 그가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일반인의 SNS 사진 한 장으로 무책임하게 최초의 기사를 터트렸던 모 기자는 우진을 통해 과하다 싶을 만큼 읍소하며 사죄를 해왔다. 과연 그것은 기자 본인의 의지였을까.

    우진은 확신하듯 말했다.

    ‘ 정정 기사 제대로 내겠다고 죄송하단 소리를 몇 번을 하던지. 목소리 들어보니 뭐에 아주 단단히 질린 것 같던데…. 흠… 아무래도 우리 누이가 간만에 실력 발휘를 한 듯싶습니다. ’

    승원이 신수의 능력을 잃었기에 잠시 잊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아주아주 순하고 귀여우나, 주인의 명이라면 몹시 무시무시하게 돌변하는 토끼가 있었다는 사실을.

    문득 뒷골이 아찔해졌다. 그 기자는 과연 무사할까. 어쩌면 아무렇게나 키보드를 두드린 대가로 손목이 댕강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너그럽게 웃으며 괜찮다 했지만, 역시 괜찮을 리 없었던 거다.

    **

    괌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반년이 넘도록 쉼 없이 달려온 드라마 촬영이 드디어 마지막 슬레이트를 쳤다. 하나의 작품이 막을 내릴 땐 으레 그러하듯, 많은 스태프와 배우들은 섭섭한 마음에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해 질 무렵부터 숙소 정원의 바비큐 존에서는 종방연을 겸해 파티가 열렸다.

    너나없이 거나하게 취해 하하 호호 떠들던 시간, 무리에서 조용히 빠져나온 지안은 밤이 내린 백사장을 걸으며 달콤한 비밀 연애를 즐겼다.

    “조금밖에 안 마셨어요. 와인 두 잔이랑 맥주 세 병 정도?”

    - 그게 조금이야?

    “기분 좋게 마셔서 그런지 취하지도 않았어.”

    - 그래. 술 냄새가 여기까지 나지만 믿어는 줄게.

    “하하. 진짜예요. 하나도 안 취했어.”

    한 손에 모아쥔 샌들 한 쌍이 달랑달랑 흔들렸다. 내딛는 걸음마다 발등 위로 미끄러지는 모래의 감촉이 그의 음성만큼이나 부드러웠다.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선선한 바람, 적당히 알딸딸한 기분, 그리고 드디어 내일이면 돌아갈 그의 품. 여러모로 설레는 밤이었다.

    “이제 누웠어요?”

    - 어떻게 알았어. 귀신이네.

    바스락바스락, 통화 감이 먼 와중에도 침구가 흐트러지는 소리를 용케 들은 참이었다. 커다란 침대에 홀로 누워 허전한 옆자리를 돌아보고 있을 그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졌다.

    “우리 영감님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죠, 내가.”

    - 그래? 그럼 내가 지금 뭘 하고 싶을까.

    지금은 아마도, 제 베개를 손으로 쓸며 짓궂은 미소를 띠고 있겠지.

    지안은 능청스레 눈동자를 굴리며 에둘러 말했다.

    “음… 말로 하기 부끄러운 그거?”

    - 잘 아네. 빨리 와서 옷 벗고 누워.

    웃음을 터트린 지안은 하늘을 향해 목을 꺾어 들었다. 검지에 걸려있는 샌들이 발랄하게 앞뒤로 흔들렸다.

    “아아. 진짜 그러고 싶다아-!”

    - 각오해. 일주일 치 쌓여서 난리 났어,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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