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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는 밤-103화 (103/106)
  • 외전 4

    쌈박질은 무슨, 애새끼도 아니고.

    승원은 싱겁게 웃어넘기며 빼앗긴 술 대신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하나 희미했던 웃음도 잠시. 잇새로 뿜어져 나온 연기 속엔 깊은 고뇌가 담겨 있었다.

    찰나로 스쳐 간 근심을 기민하게 눈치챈 범화는 확신에 찬 얼굴로 혀를 찼다.

    “혔네, 혔어. 딱 봉께 머리끄댕이 오지게 흔들어 재낀 꼬라지여, 이것이.”

    승원은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를 터트렸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 댔응게 숨소리도 내지마야! 앰병. 나는 뭐, 또… 살날이 줄기라도 했나 혔네.”

    범화가 품은 속내는 사실 불안감이었다. 제 눈앞에서 소멸의 직전까지 흐무러지던 월호의 모습을 목도한 것은 천하의 범화에게도 적잖은 충격으로 남아 있었다.

    50년의 생이나마 더 살게 되었다 하니 그것만도 감사하며 하루하루 녀석과의 시간을 즐기고 있건만, 갈수록 낯빛이 어두워지는 것이 괜히 3년 전 그때가 떠올라 내심 불안했던 거다.

    한데 가만 보니 다행히도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것 같지는 않아 안심은 된다만…. 고작 사랑싸움 때문에 생지럴을 떠나 싶으니 염병, 아니꼬와 죽겠다.

    제 짐작을 확신하며 입술을 뒤집어대는 범화를 보며 승원은 헛숨을 삼켰다.

    “감이 많이 떨어졌네. 네놈이 헛다리를 다 짚고.”

    그의 잇새로 흐른 담배 연기가 범화의 주름진 얼굴 위로 스멀스멀 건너갔다. 시야를 가리는 연기를 까칠하게 훅 불어낸 범화는 미심쩍은 얼굴로 한쪽 눈썹을 까딱 치켜들었다.

    “참말로 아니여? 그기 아이믄 시방 늬놈 낯짝이 설명이 안 되는디?”

    초점이 분명치 않은 승원의 시선이 테이블 귀퉁이에 머물렀다.

    “그냥….”

    잠시간 말을 아끼던 승원은 뿌연 연기를 한숨처럼 뱉으며 운을 뗐다.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내어놓은 서두에 범화는 굽은 등을 의자 등받이에 천천히 기대놓았다. 그 한 마디로 대강 속에 든 근심을 알 것 같으니, 이제야 집 나간 감이 돌아오는 듯싶다.

    승원은 빈 잔만 빙글 돌리며 무겁게 덧붙였다.

    “1분 1초가 아까운데, 다시 돌아온 후로 함께 보낸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아.”

    인간이 되어 돌아온 지 꼬박 10개월. 벌써 1년이 다 돼가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지안의 현생은 너무도 바빴다. 광고, 화보, 드라마, 자잘한 행사들까지.

    수백 년을 농땡이 부리다 이제야 착실하게 회사에 출근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온종일 지안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자니, 못내 초조한 마음이 행여 집착으로 번질까 봐.

    해서 저 역시 애써 바쁜 나날을 보내곤 있지만 조바심은 좀체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에게 앞으로 남은 50년은 자신이 살아온 천 년에 비해 너무도 짧았다. 하룻밤 자고 나면 금세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데, 이 아까운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있는 것 같아 하루하루가 공허하고 초조한 것이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지안의 직업이 배우이다 보니 불특정 다수의 사내와 닿을 수밖에 없음이 개중 가장 큰 문제라면 문제였다.

    퍽 괜찮은 척했지만 괜찮을 리 없다. 저 하나 물고 빨기에도 아까운 그 어여쁜 입술에 애먼 놈들이 입을 댄다니, 우라질….

    제게 신수의 능력이 남아 있었더라면 작가 선생 손모가지라도 몰래 분질러 놓았으련만, 결국엔 괜히 지안만 못살게 굴며 심술을 부리지 않았던가.

    답지 않다. 참으로 유치하기 짝이 없다. 알고는 있으나 제 마음이 그리 뜻대로 되지 않으니 어찌할 텐가. 지금도 카메라 앞에 서서 다른 놈과 눈을 맞추며 웃고 있을 지안을 떠올리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 미칠 지경이었다.

    이대로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이 아깝다. 지안이 일을 하는 한 앞으로 남은 시간 역시 다르지 않을 테지.

    진정 나는 이러한데.

    “그 아인 괜찮은 건가, 서운하기도 하고.”

    가만히 입 다물고 들어주던 범화는 마뜩잖게 눈가를 구기며 언성을 높였다.

    “싸고 자빠졌네. 내 앞서 그라고 지끼면 나가 서운체! 덕분에 여서 내랑 노닥끄리면 된 거 아이냐? 고 딸랑구가 죽마고우보다 중허다 이거여?”

    “…….”

    말없이 건너간 승원의 눈빛이 심히 심드렁하다. 당연한 걸 뭘 그리 열을 내며 물어보냐는 뜻이었다.

    모르진 않았지만 대놓고 긍정할 것까지야.

    “호로 쉐끼, 오독오독 씹어블라….”

    괜히 윗입술을 들썩대던 범화는 허공에 올린 손을 성의 없이 까딱였다. 저만치 밀어놓은 막걸리 주전자가 주인의 손짓에 냉큼 테이블 위로 되돌아왔다.

    범화는 승원의 잔을 채워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람 뭐 워쩔 것이여. 기양 집구석에 들어앉혀 불든가.”

    졸졸 채워지는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원이 힐끗 눈을 치떴다.

    “뭘 어떻게 들어앉혀?”

    “뭣이 애렵냐? 씨를 확 뿌려블믄 대제.”

    “…회임을 시키란 소리야?”

    “그려. 배때기에 얼라 끼고 워째 일을 할 것이여. 안 그냐?”

    아이… 지안과 나의 아이라….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다. 신수였을 적에도 제 핏줄을 세상에 남긴다는 것은 염두에 둘 가치도 없다 여겼었다. 그에게 핏덩이란 그저 시끄럽고 성가신 존재였으므로.

    인간이 된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한데 순간, 갑작스레 심장이 조금 이상하게 울렁였다.

    아이. 지안을 닮은.

    승원은 작은 돌멩이를 쥐듯 손가락을 가만히 오므렸다. 어쩐지 아주아주 보드랍고 말랑한 살덩이가 손안에 잡히는 것만 같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간지럽다. 몹시 묘한 기분이었다.

    “인생 뭐 있간? 인간 된 김에 기양 새끼도 하나 낳아브러!”

    낯선 감정과 고민이 뒤엉키다 문득 궁금해졌다.

    너는 어떨까. 너는 내 아이를 갖고 싶은 생각이 있을까.

    “오호, 그려. 말하고 봉께 그람 딱 쓰것구만? 긍께 늬가 씨를 뿌리놓고 뒈지믄 아인냐? 대대로 내 죽마고우 자리를 세습으로다 냄기는 것이여. 그라믄 나가 주도酒道 하나는 기가 맥히게 가르치 놓을랑게. 으떠냐? 늬놈 후손들꺼정 살뜰히 챙기고자 허는 나으 이 깊은 아량이?”

    하나 아이를 가진다면 지안의 삶엔 많은 변화가 올 것이었다. 당장 일을 하지 못할 것이고, 아이를 낳은 후에도 지금과 같은 왕성한 활동은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배우로서의 성공은 지안의 오랜 꿈이었음을 알고 있다. 이제야 자리를 잡아가는데, 제 욕심이 지안의 앞날에 걸림돌이 된다면….

    몇 번 입도 대지 않은 담배가 어느새 필터까지 타들어 갔다. 뜨거운 줄도 모르고 상념에 잠겨 있는 지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범화는 승원의 손에서 담배를 빼내어 재떨이에 던져놓았다.

    “먼 생각을 허고 앉었냐. 대글빡 굴려 봐야 얼라보다 좋은 수가 읎당께.”

    그제야 상념을 떨친 승원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놈이 괜한 소리를 떠들어 심중만 더 어지러워졌다.

    “그만 가야겠다. 쉬어라.”

    “음메? 이라고 갑자기?”

    한창 재밌어지려는데 돌아서 가는 그의 등짝이 얄짤없다. 긴 다리로 몇 걸음 만에 훌쩍 떠나버린 승원을 보며 범화는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새끼. 술이나 한 잔 더 허고 가제는.”

    허물어졌던 한쪽 벽은 손님이 떠나기 무섭게 제 모습을 찾아갔다. 타닥타닥 떨어지던 빗소리가 금세 단단한 벽 너머로 사라졌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구들장 위로 몸을 옮긴 범화는 돌연 싱글벙글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아하따, 꼬물꼬물허니 징허게 이뿌긴 할 거인디.”

    **

    해외 촬영을 앞두고 드물게 밤 촬영이 없는 날이었다.

    양손 가득 장을 봐온 지안은 콧노래를 부르며 식사를 준비했다. 시간 맞춰 일찍이 퇴근한 승원이 곁에서 손을 거들었다.

    하지만, 양반 구미호 출신 아니랄까 봐 채소 씻는 것마저 어색하기 그지없다. 분명 개수대 안에서 깻잎을 씻고 있건만, 어째서 바닥에 물이 흥건한지 모를 일이었다.

    웃음을 참으며 승원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지안은 결국 그의 손에 들린 채소 바구니를 쏙 빼냈다.

    “그냥 앉아 있어요. 혼자 해도 금방 해.”

    승원은 머쓱한 얼굴로 주춤 물러섰다. 돕는답시고 손을 대는 족족 일을 보태고 있으니, 그 역시 손을 떼는 편이 낫겠다 싶은 것이었다.

    “역시 그래야겠지.”

    “아무렴요. 씻고 옷 갈아입고 와요.”

    “응.”

    군말 않고 주방을 나선 승원은 곧장 욕실로 향했다. 의아한 듯 길게 늘어진 지안의 시선이 그의 뒤를 따랐다.

    오늘따라 우리 영감님이 왜 이리 고분고분하실까. 안 하던 주방 일까지 돕겠다고 나서니 더더욱 이상하다.

    하나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것도 잠시. 지안은 느닷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응’이래. 아… 귀여워, 진짜.”

    여전히 천 살 넘은 구미호 같다가도, 저리 한 번씩 귀엽게 굴면 그가 고작 ‘네 살 차이 나는 오빠’가 됐음이 실감 나곤 한다.

    물론 도통 ‘오빠’ 소리가 입에 붙지 않아 그리 불러본 적은 없지만.

    금세 샤워를 마치고 돌아온 승원은 채소를 손질하던 지안의 허리를 둘러 안았다. 달콤한 샴푸향이 어깨너머로 솔솔 풍겨온다. 지안의 입술이 절로 휘어졌다.

    “이 시간에 같이 밥 먹는 거 진짜 오랜만이다. 그죠?”

    승원은 지안의 어깨에 한쪽 볼을 폭 파묻으며 짐짓 투정부리듯 말했다.

    “서 배우가 워낙 바쁘셔서.”

    그를 돌아보는 지안의 눈빛이 금세 애잔해졌다. 그러잖아도 근래 틈 없이 일하느라 그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게 못내 신경 쓰였던 참이었다. 하물며 내일 괌으로 마지막 촬영을 떠나면 일주일간 볼 수조차 없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안은 달래듯 승원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괌 다녀오면 이제 쉴 거니까 먹고 싶은 거 리스트 쫙 뽑아놔요. 매일매일 해줄게.”

    “매일매일 너만 먹어도 배부를 텐데.”

    포커스가 어째 또 야살스레 옆길로 샌다. 동시에 배를 스쳐 올라온 손은 슬그머니 젖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설핏 볼을 붉힌 지안은 태연한 척 능청스레 받아쳤다.

    “밥 먹는 배는 따로 둬야죠. 영양 골고루 챙기려면.”

    “충분해. 네 몸만 해도 먹을 게 많아서.”

    여기도 먹고, 저기도 먹고, 또 여기도 먹고.

    귓불을 할짝거리며 지안의 몸 곳곳을 더듬던 손은 어느 틈에 스커트를 들치고 팬티 속까지 파고들었다. 까슬한 음모를 헤치고 미끄러진 손끝이 간이라도 보듯 슬쩍슬쩍 음핵을 문지른다.

    “아아….”

    다리에 힘이 풀린 지안은 싱크대를 바짝 붙든 채 너른 가슴에 뒷머리를 기댔다. 그의 손길을 내내 바랐던 몸은 오늘도 여지없이 단숨에 흐무러지고 만다.

    “찌개 끓는데….”

    “아직 안 넘쳐.”

    “양파도 넣어야 하고….”

    “물이 이렇게 흐르는데 지금 양파가 중요해?”

    아닌 게 아니라, 굵직한 손가락에 찰박찰박 감기는 애액이 벌써 홍수 직전이었다.

    하여튼, 어쩜 이렇게 손만 닿아도 또 난리가 나는지. 지승원 맞춤형의 몸은 오늘도 여전히 발칙하다.

    “아니이… 그건 아닌데….”

    시작하면 도통 끝이 안 나니까….

    말로는 슬쩍 내빼지만 엉덩이는 이미 그의 몸에 바짝 밀착돼 있었다. 그녀 못지않게 단단히 흥분한 페니스가 허리춤을 꾹 내리눌렀다.

    “하….”

    핥고, 물고, 깨물고. 뽀얀 목덜미 곳곳에 금세 붉은 울혈이 쌓여갔다. 목선을 길게 핥으며 올라온 그의 입술이 귓바퀴를 꾹 깨물었다. 귓가를 간질이는 숨결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지안아.”

    “응?”

    달뜬 기분에 취해 아양 섞인 대꾸가 건너갔지만, 그는 어쩐지 말이 없었다. 음부와 가슴을 지분대는 손짓도 조금씩 느릿해졌다. 되레 애가 탄 지안이 은근슬쩍 골반을 고무락거리며 그를 자극해봐도 승원의 움직임은 외려 둔해졌다.

    지안은 게슴츠레 감았던 눈을 뜨고 의아함에 그를 돌아보았다. 어깨 위에서 저를 내려다보던 그와 시선이 얽혔다.

    애틋하나 어딘지 복잡하고, 조심스러우나 묘하게 강강함이 느껴지는 눈빛.

    내내 평소와 달랐던 그의 분위기가 다시금 피부로 와닿던, 그 순간이었다.

    “우리 아이 가질까?”

    “…….”

    동그란 눈이 다소 멍하니 끔벅였다. 엇박자로 튀어 나간 호흡이 잠시 잠깐 뚝 멈추었다.

    한순간 고요해진 주방에서 보글보글 찌개 끓는 소리만이 흐르는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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