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가을과 겨울의 경계가 모호한 날이었다.
분명 먼 산을 물들인 단풍을 어제 본 것 같은데, 하루아침에 쌀쌀해진 날씨에 알록달록 어여뻤던 경관이 퍼석하게 색을 잃었다.
포근했던 봄날 시작됐던 드라마 촬영은 이토록 시린 늦가을에 닿아서야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잠깐 다녀올 시간 되겠죠?”
오전 촬영을 마치고 밴으로 돌아온 지안이 우진에게 물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우진은 호쾌하게 답했다.
“예. 충분합니다. 회사로 모실까요?”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싱긋 웃는 얼굴이 휴식도 없이 내달린 강행군에도 지친 기색 없이 들떠 있었다. 오랜만에 ‘깨어있는’ 그와 만날 생각을 하니 피로를 느낄 겨를도 없는 것이었다.
벌써 나흘이었다. 촬영으로 일정하지 않은 귀가 시간 탓에 지난 나흘간 지안은 새벽녘 그의 잠든 모습만 봐야 했었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면 그는 늘 출근한 후였으니, 도무지 눈을 마주할 시간이 없었던 거다.
함께 사는 것은 분명한데 어째 자는 모습만 봐야 하는 건지, 요 며칠은 진심으로 배우라는 직업에 회의감이 밀려올 정도였다.
오늘 오전 촬영이 진행됐던 호텔은 W 기획 사옥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다음 일정까지 두어 시간 여유도 생겼으니, 잠깐이나마 그를 보고 올 생각이었다.
영감님도 점심은 드셨을 시간이니 디저트나 좀 사 갈까? 마침 가는 길에 디저트 숍이 있으니 들렀다 가기에도 딱 좋을 듯싶다. 또 살찌우겠다고 나만 먹이려 들겠지만 오늘은 꼭 내가 먹여줘야지.
그래, 단지 그뿐.
디저트처럼 달콤한 그림만 상상하며 그의 회사를 찾았을 때는 정말이지, 단지 그뿐이었다.
**
“아…!”
진짜, 진심으로, 맹세코.
“잠깐, 만, 읏!”
이러려고 온 것은 아니었는데.
“하아, 영감니임….”
디저트 상자는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지고, 가을 햇살이 들이치는 유리창을 짚고 서서, 아득히 펼쳐진 한강을 바라보며 신음을 쏟으리라곤….
“밖에, 수아 님이… 읍.”
붙들린 턱이 어깨너머로 홱 돌아갔다. 잇새를 거칠게 파고든 그의 혀가 사정없이 입 안을 헤집었다.
셔츠 단추는 이미 단전까지 풀어졌고, 브래지어를 밀어 올린 커다란 손은 말랑한 살덩이를 욕심껏 주무르고 있었다.
돌돌 말린 치마는 어느샌가 허리 위까지 댕강 올라간 상태다. 질기디질긴 탄성을 자랑하던 스타킹은 흠뻑 젖은 중심부만 야릿하게 찢겨나가고 말았다.
‘ 쨘! 놀랐죠? ’
놀라게 해주려 연락도 않고 그를 찾아온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벌어진 상황이었다. 물론 근래엔 서로 바빠 관계를 하지 못한 지도 꽤 되긴 했지만, 이토록 급하게 몰아치는 건 어쩐지 그답지 않다.
아릿할 만큼 입술을 빨아당기며 젖은 속옷 위를 문지르던 그는 귓불을 핥으며 속삭였다.
“그래서… 촬영은 잘했어?”
은근슬쩍 팬티를 젖히고 갈라진 틈을 깔짝이며 묻기에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게다가 묘하게 휘어지는 어투가 어쩐지 얄궂다.
그는 대답도 하기 전에 성마르게 물었다.
“몇 번이나 했는데?”
“뭘… 아아….”
앞뒤가 잘려나간 질문을 이해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늘 아침 통화에서 그가 사뭇 삐딱하게 물어왔던 말이 번뜩 떠올랐다.
- 오늘이야? 키스씬 나부랭이.
곧 키스씬 촬영이 있다는 소리에 며칠 전부터 그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래도 잘하고 오라며 응원까지 해주기에 조용히 넘어가려나 했건만….
그럼 그렇지. 갈수록 말도 안 되게 질투쟁이가 돼가는 우리 영감님이 아무렴 곱게 넘어갈 리가….
“두 번?”
대답이 없자 은근히 떠보며 눈썹을 까딱 치켜드는 모습이 이 와중에 쓸데없이 매력적이기도 하다.
참 속도 없지. 키스씬 한 번 찍고 왔다고 심술부리는 애인이 뭐가 예쁘다고 멋져 보이는 건지, 나도 참.
헛웃음을 삼킨 지안은 다리 사이에 묻힌 그의 손을 겹쳐 쥐며 삐죽삐죽 허벅지를 오므렸다.
“아니이… 풀샷도 여러 번 따야 하고… 바스트도 따려면 두 번으론… 읏!”
그의 손등을 붙들었던 미약한 힘은 여지없이 싱겁게 떨어져 나갔다. 승원은 바짝 오므린 허벅지 사이를 더 깊이 파고들며 집요하게 물었다.
“그래서, 몇 번.”
뜨거운 숨이 귓속으로 마구 밀려들어 왔다. 삽시간에 발끝까지 번진 전율에 솜털이 바짝 섰다.
불판에 구워지는 오징어처럼 몸을 배배 꼬며 신음을 흘리던 지안은 마지못해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그게 몇 번이더라…. 영 그림이 안 나와 수차례 각도를 바꿔가며 다시 찍고 또 찍고, 어림잡아도 열댓 번은 훌쩍 넘겼던 것 같은데….
“세 번… 쯤?”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했다. 한 번이든 두 번이든 다른 남자와 입을 맞춘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으나, 이 심술의 강도를 결정하는 척도가 아무래도 그 횟수이지 싶어 눈치껏 줄인 것이 그만큼이었다.
그의 짙고 긴 눈매가 한층 가늘어졌다.
“확실해?”
“아아…!”
음순 사이를 깔짝대던 손가락이 불시에 질구를 파고들었다. 짓궂은 손놀림이 바른대로 불라는 듯 질퍽한 습지 속을 푹푹 찍어 올린다.
지안은 그의 손목을 화들짝 움켜쥔 채 발꿈치를 바짝 들어 올렸다.
“아… 아니… 아흣, 네 번… 아!”
그 와중에도 차마 사실대로 불 수는 없어 고작 한 번을 더했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손가락만 넣어도 벌써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열댓 번은 넘었노라 이실직고했다간 홍콩행 티켓을 몇 장을 끊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저 역시 좋기야 하지만 문밖에는 청력이 지나치게 뛰어난 수아가 있다. 3년 전, 사신동 옥탑에서 처음으로 합방을 치렀던 날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 월호 님, 저 왔…. ’
‘ ……! ’
‘ 에그머니나! ’
그와 발가벗고 엉켜있던 모습을 수아에게 들켰던 순간 휘몰아쳤던 민망함은 정말이지….
아아, 안 돼. 역시 홍콩은 무리야.
“네 번이라….”
맹렬히 아래를 헤집으면서도 평온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읊조리던 그는 지안의 목덜미에 깊게 입 맞추며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다섯 번만 해.”
“무슨… 압, 자, 잠깐만요!”
부질없는 애원이 창에 부딪혀 나풀나풀 흩날렸다. 골반을 붙들어 당기는 힘이 어찌나 강한지, 힘도 한 번 못 써보고 그의 손에 딸려간 엉덩이가 단숨에 뒤로 빠지고 말았다. 절로 수그러든 상체를 따라 유리창에 닿아 있던 손바닥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아…!”
어느 틈에 몸을 낮춘 그는 눈앞에 훤히 드러난 그녀의 음부에 입술을 파묻었다.
“하읏.”
음순 사이를 길게 핥아 올리고 질구를 쿡쿡 찌르는 혀가 델 듯이 뜨겁고 짜릿하다. 스커트 속으로 커다란 손이 침범하던 순간부터 이미 젖어버린 질구는 이제 속수무책으로 애액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아, 망할 배란일 같으니. 저도 이토록 원하노라 넘치게 티를 내니 계속해서 뻔뻔하게 내숭을 떨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읍, 흐읍!”
지안은 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고 필사적으로 신음을 억눌렀다. 이미 한껏 달아오른 제 몸의 사인을 모른 척할 수 없다면 방법은 최대한 소리를 삼키는 것, 그뿐이었다.
하지만, 장대하게 일어선 그의 중심이 몸을 가르던 순간엔 그마저도 실패하고 말았으니….
“하아, 아!”
에라, 모르겠다. 수아라면 그저 흐뭇하게 웃으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을 테니, 그녀에게 부끄러울 것이 더 뭐가 있을까.
“똑바로 서. 다리에 힘주고.”
“아흐, 좀만, 살살, 아! 아아!”
더는 막기를 포기한 신음이 천장을 뚫을 기세로 솟구쳤다. 그답지 않게 거칠고도 집요한 삽입이었다. 빠르고 강하게 한참을 몰아치고도 그는 지치지도 않았다. 육신은 분명 인간이 되었다는데, 어째 정력은 신수의 능력치를 조금도 잃지 않았는지.
창가에서 소파로, 소파에서 책상으로, 마주 보고 또 한 번, 다시 뒤로 격렬하게.
다른 남자와 네 번 입 맞췄다고 다섯 번 섹스해야 한다는 건 무슨 논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열댓 번’의 ‘열’ 자도 꺼내지 않은 것은 참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같은 시각.
비서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수아는 두 분의 편안한 사랑놀음을 위하여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싱글벙글 노래를 흥얼거렸다.
**
홀랑 사라진 한쪽 벽면 밖으로 가을비가 쏟아졌다. 바람은 건물 안으로 사납게 들이닥쳤으나, 억수 같은 빗물은 천 년 묵은 호랑이의 공간을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줄줄이 가로막혔다. 마치 유리창에 물방울이 부딪혀 떨어지듯 기이한 광경이었다.
낡은 벽에 등을 기대어 앉은 승원은 검은 바닥에 내리꽂히는 빗방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손에 삐딱하게 지탱한 얼굴 하며, 길게 꼬아놓은 다리 라인이 조각상처럼 수려하기도 하다.
“염병헐….”
구수한 막걸리와 김치 한 접시를 꺼내온 범화는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이기죽거렸다.
“똥폼은 지럴허고 잡고 앉았네.”
어째 이 새끼는 대강 퍼지고 앉아 있어도 그림이 따로 없는지 참으로 꼴같잖다.
구미호의 영생은 박탈해놓고 미색은 왜 그대로 둔 것인가, 범화는 그것이 영 탐탁지 않았더랬다.
올해 초 인간이 되어 다시 돌아온 그를 보고 화들짝 놀란 것도 잠시, 대뜸 꺼낸 말도 그것이었다.
‘ 근디 워째 낯짝이 고대로냐? 자고로 인간이 됐으믄 면상이 좀 썩어줘야 허는 거 아니여? ’
물론 속으로야 반가움에 눈물, 콧물을 흘리며 어깨춤을 들썩였지만, 하잘것없는 인간이 돼서도 미모는 여전히 번쩍번쩍 빛이 나니 괜히 배알이 꼴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승원은 제 몫의 막걸릿잔에 술을 따르며 심드렁히 입꼬리를 올렸다.
“왜 또 시비야. 달거리 터졌어?”
“오냐, 그래. 아주 징허게 예민한 상태잉께 똥폼 좀 고만 잡고 씨부리기나 혀봐라. 이 호랭이 님이 기깝게 들어줄랑게.”
승원의 손에서 주전자를 낚아챈 범화는 제 잔을 가득 채워두고 곰방대를 꼬나물었다. 그 나름대로 매우 진중하게 이야기를 들어줄 자세를 갖춘 것이었다. 하나 실소를 터트린 승원은 가벼운 투로 말했다.
“씨부리긴 뭘 씨부려. 술 마시러 온 거라니까.”
그러곤 홀로 잔을 기울이는 그를 보며 범화는 대번 코웃음을 쳤다.
“촤함-내. 요 찌깐한 인간 쉐끼가 천 년 묵은 호랭이 님을 뭐로 보고 같잖게 시치미여?”
깔아보듯 한껏 쳐들린 턱에 어쭙잖은 우월감이 그득하다. 승원은 절절 고개를 저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놈의 인간 타령은 지겹지도 않은지. 인간이 되어 돌아온 후로 범화는 심심찮게 그의 나이를 들먹이며 장난을 치곤 했다.
‘ 마흔도 안 된 놈이 으으-디 하늘 그튼 호랭이님 앞에서 버르장머리 없이…. 늬 인자 으르신이라고 불러라잉, 알었냐? ’
승원은 어물쩍 웃어넘기며 잔을 들었다.
“술이나 마셔.”
“어허이?”
하나 오늘만큼은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이 없는 범화는 테이블을 텅 내리치며 답답한 듯 쏘아붙였다.
“아, 죽었다 살은 놈이 워째 갈수록 낯짝이 껌껌해지냔 말여! 인자 그만치 죽고 몬사는 딸랑구도 옆구리에 끼고 살것다, 근심 있을 일이 뭣이 있당가?”
언제부터였던가. 이 잘난 얼굴에 어두침침한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하더니 날이 갈수록 명도가 짙어지고 있었다. 이제 인간이 되어 하루하루 줄어가는 지안과의 시간이 아까울 법도 하건만, 이 금 같은 시간에 저를 찾는 횟수도 잦아졌다.
물론 저야 심심한 시간을 달래주니 반가운 일이라지만, 한편으론 지기의 근심이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범화는 다시금 잔을 채우려는 승원에게서 주전자를 쏙 빼앗았다.
“주댕이 닫을 거믄 처묵지 마러, 새꺄.”
그러며 발로 툭 차버린 주전자가 저 멀리 주방까지 깔끔하게 미끄러졌다. 승원은 헛숨을 뱉으며 미간을 좁혔다.
“먹는 거로 치사하게 이러지 말지?”
“나가 이래 봬도 천하제일로다 치사한 놈이여.”
“…그걸 알고 있었어?”
“씨벌늠이…. 아, 싸게 지껄여보랑께! 뭐 땀시 그려? 딸랑구랑 쌈박질이라도 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