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101화 (101/106)

외전 2

샤워를 마치고 시원한 아이스티 한 잔을 꺼내온 지안은 서재 문 안으로 빠끔 얼굴을 내밀었다.

똑똑,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자 소파에 앉아 서류를 넘기고 있던 승원이 고개를 들었다. 눈만 마주쳐도 싱긋 휘어지는 둘의 입술이 어느새 꽤 닮아 있었다.

지안은 승원의 곁에 몸을 놓으며 걱정스레 물었다.

“많이 바쁜가 봐요? 술 마시고 와서 피곤할 텐데.”

어색한 분위기가 풀리자마자 쉼 없이 술을 권하던 동한과 건호의 성화에 승원은 기꺼이 건배를 나눴다. 어림잡아 대여섯 병은 족히 마신 것 같은데, 그는 피곤하지도 않은지 씻자마자 일거리를 꺼내 들고 있었다.

승원은 지안이 내민 아이스티를 받아들며 짐짓 성가신 투로 말했다.

“망할 고양이가 쓸데없이 자꾸 일을 벌여, 귀찮게.”

힐끗 들여다본 서류 속에는 보기만 해도 눈이 빙빙 도는 영어들이 빼곡히 차 있었다. 얼마 전부터 중국의 데이터 분석 전문 기업을 인수 합병하는 일로 늦은 시각까지 온갖 자료들과 씨름하던 그를 알고 있었다.

그간 회사 일을 게을리했으니 응당 이 정도는 하셔야지 않냐며 정성스레 일거리를 물어오는 병천 덕분에, 승원의 하루는 그녀 못지않게 바쁘게 흐르고 있다.

지안은 술기운에 발갛게 충혈된 승원의 눈을 들여다보며 미안한 얼굴이 됐다.

“피곤해서 어떡해요…. 그런 줄도 모르고 술을 너무 먹였네.”

승원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서류철을 테이블 위로 툭 던져두었다.

“괜찮아. 그깟 맥주 몇 병에 굴복할 간은 아니라서.”

그러며 이리 누우라는 듯 제 허벅지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지만, 지안은 선뜻 몸을 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왜? 라고 묻듯 그의 눈썹이 삐쭉 들렸다.

“바쁜데 방해될까 봐….”

“일이 너랑 노는 시간을 방해하는 거지. 누워, 놀 시간 충분해.”

그의 탄탄한 허벅지를 내려다보는 지안의 눈에 막간의 고민이 스쳤다.

실로 오랜만에 함께 눈 뜨고 있는 밤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드라마 촬영은 내일부터 다시 강행군이 될 테다. 흘러가는 이 시간이 아쉬운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음… 그럼 5분만 놀까?”

“5분 만에 끝날 정력이 아닌데….”

“아니이, 그걸 하자는 게 아니구요….”

“알아. 농담이야.”

말끝에 나직이 감긴 그의 웃음소리가 못내 간지러웠다. 제 목적은 결코 ‘그것’이 아니라며 내숭은 떨었지만, 웃음소리 한 번에 단전이 요동치는 걸 보니 저도 참 엉큼하다 싶다.

못 이긴 척 그의 다리를 베고 누운 지안은 아래에서 봐도 굴욕이 없는 미모를 양껏 감상했다.

“오늘 어땠어요? 자리 불편하진 않았어요?”

“글쎄…. 네 친구들이 더 불편해 보이던데.”

하긴. ‘형님, 형님’ 해가며 살갑게 술을 권하면서도 둘은 마지막까지 손을 덜덜 떨며 그와 건배를 나누었더랬다. 아마도 내일 아침이면 애써 웃느라 고생했던 볼이 돌덩이처럼 굳어있을지도 모르겠다.

“재밌었어. 누구 덕분에 정신은 좀 없었지만.”

다시 생각해도 정신없다는 듯 그는 탄식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대번에 쉴 새 없이 쫑알대던 건호의 얼굴을 떠올린 지안은 웃음을 터트렸다.

“건호가 말은 좀 많아도 나쁜 애는 아니에요.”

“좀이 아니라 심하게.”

“하하. 맞아. 좀 심하게 많긴 해. …아 참. 건호 싱가폴 출장 말이에요. 정말 영감님이 보냈었던 거예요?”

어쩌다 튀어나온 건호에 관한 이야기는 거기까지 닿았다. 블루문 바에서 그가 스치듯 흘렸던 말이 문득 떠오른 것이었다.

‘ 건호 다음 달에 결혼해요. 3년 전에 싱가폴 출장 갔을 때 만난 사람이랑. ’

‘ 그래? 애써서 보낸 보람이 있네. ’

승원은 머쓱한 듯 아이스티를 들이켜며 즉답을 피했다.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대답이 된 터라, 지안은 삐져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은근한 투로 물었다.

“왜 그랬어요?”

그러게, 내가 왜 그랬을까.

회상하듯 창 너머로 건너간 그의 시선이 사뭇 가늘어졌다. 눈에 담은 까만 밤처럼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는 그때의 감정은 사실 그도 명확히 알지 못했다.

‘ 왜 갑자기 그자를 외국으로 보내라 하십니까? ’

그리 묻던 병천에게 그는 말했었다.

‘ 그냥 거슬려. ’

‘ 눈알에 붙은 먼지를 입으로 불어주는 건 무슨 경우라고 생각해? ’

‘ 양손이 멀쩡한데 굳이 제 입에 쑤셨던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먹여주는 건? ’

‘ 굉장히 거슬리지 않아? ’

이제 와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한낱 디자인팀의 대리를 해외 기업 M&A프로젝트에 투입해야만 하는 이유로는 더더욱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 혹여, 지안 님을 여인으로 마음에 들이신 겁니까? ’

당시엔 왜 얘기가 그리로 튀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 아마도. 이미 그때부터였겠지.

“그냥 거슬렸어. 네 옆에 사내놈이 있는 게.”

행여 그자와 마음이 닿을까 봐. 해서 애먼 놈에게 너를 빼앗길까 봐.

내리뜬 그의 눈동자 속에 오래된 질투심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가닥가닥 머리칼을 간종그리며 진득이 맞춰오는 눈빛이 퍽 멋쩍으면서도 따스하기 이를 데 없다.

행복감을 감추지 못한 지안의 광대가 동그랗게 올라붙었다. 생각보다 더 앞서 있었던 그의 마음을 알게 되니 괜스레 입꼬리가 신나게 늘어진다.

“그런 이유라면 차마 잔소리는 못 하겠네.”

그럼 난 언제부터였을까.

문득 시간을 거슬러 가보지만 선명하지 않다. 어느 날 꿈처럼 나타나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언제부턴가 그는 제 삶에 스며있었다.

보이지 않으면 신경 쓰이고, 보고 있어도 신경 쓰이고, 때로는 저 없이 그가 괜찮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어쩌면, 그 미묘했던 감정이 이미 시작은 아니었을까.

같은 색을 띤 눈빛이 한참을 말없이 오갔다. 딱히 말로 전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서로의 진심은 맞닿은 시선과 간지럽게 닿는 살결에 담뿍 묻어있었다.

인간이 되고도 여전히 신비로운 그의 검푸른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던 지안은 꿈을 꾸듯 멍한 목소리로 문득 운을 뗐다.

“진짜 신기하다.”

“뭐가.”

가만가만 지안의 볼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등에 작은 손이 포개어졌다. 지안은 그의 손에 제 볼을 비비며 말갛게 눈을 깜박였다.

“어떻게 매일 봐도 이렇게 떨리고, 설레고, 좋을까 싶어서…. 영감님도 나 보면 그래요?”

소파 옆 작은 선반에 유리잔을 내려놓은 승원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뭘 당연한 걸 입 아프게 묻고 있냐는 얼굴이다.

“그게 다야? 매일 흥분도 되는데, 난.”

사뭇 음흉하게 돌변한 시선이 얄망스레 지안의 가슴 위로 떨어졌다. 슬립 위로 드러난 제 가슴골을 히끗 내려다본 지안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아… 얄궂은 게 하나 더 붙네?”

“넌 아니라고?”

늘 눈만 마주쳐도 왕성한 혈액순환을 자랑하는 야해 빠진 몸뚱이로 시치미를 떼는 건 역시 양심 없는 짓이겠지.

“아니, 뭐… 난….”

백번 인정하면서도 슬그머니 말끝을 흐리자, 참을성 없는 그의 손이 거침없이 아래로 뻗쳤다.

“봐, 어디.”

“뭘 봐요, 어딜… 업!”

나름 재빠르게 손목을 붙들었지만 슬립의 밑단은 배 위까지 훌렁 들쳐진 후였다. 어디 그뿐이랴. 곧장 팬티 속으로 불쑥 들어간 그의 손은 질척이는 애액 속에 푹 담기고 말았다.

승원은 입꼬리를 올리며 장난스레 탄식을 뱉었다.

“와… 물이 뭐…. 내 얼굴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기에 벌써 난리가 났어, 엉큼하게.”

그러며 갈라진 틈에 파묻힌 검지를 짓궂게 까닥이자, 찌걱거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린다.

지안은 민망함에 골반을 바르작거리며 설핏 얼굴을 붉혔다.

“그러게 좀 적당히 섹시해야지….”

“섹시하게 생겨 먹은 걸 어떻게 해, 그럼. 이게 내 의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언제나 당당한 그의 어법은 응당 근거가 있기에 반박할 수가 없다. 쿡쿡 웃음 짓던 지안은 손을 뻗어 그의 볼을 어루만졌다.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돌아온 후 습관이 돼버린 행동이었다. 아직도 이따금 그가 살아있음이 꿈만 같을 때, 지안은 잠을 자다가도 화들짝 일어나 곁에 누운 그의 얼굴을 보듬어보곤 했다.

손안에 감기는 온기가 따스했다. 빨갛고 예쁜 입술 사이로 일정하게 흐르는 숨이 생생하게 살결을 간질인다. 손에 닿은 안도감은 여느 때처럼 심장까지 흘러와 못내 불안했던 마음을 나른하게 풀어 놓았다.

오늘도 새삼, 그가 정말 살아있음을 느낀다.

“이러니까 내가 미치지, 우리 지승원 씨한테.”

제 볼을 어루만지는 작은 손을 포개어 쥔 승원은 지안의 손바닥에 입 맞추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난 늘 미쳐 있어. 서지안한테.”

5분만 놀자던 약속 아닌 약속은 이미 저 먼 강을 건너갔다. 어느 틈에 몸에서 떨어져 나간 속옷은 소파 곁을 나뒹굴었고,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은 그녀의 몸은 들이치는 달빛 아래 농염하게 달막였다.

“하아….”

달아오른 신음이 구름처럼 몽글하게 공간을 떠돈다. 소파 뒤로 광활하게 펼쳐진 서울의 야경은 창에 비친 그들의 정사를 야릇하게 빛내고 있었다.

한 몸인 듯 꽉 맞붙은 아래로 흘러내린 흔적이 검은 소파 위로 끈적하게 쌓여갔다. 역시나 5분으론 턱도 없었을 그의 열기는 50분이 훌쩍 넘어가도록 식을 줄을 몰랐다.

그와 그녀를 휘도는 열기만큼 뜨거웠던, 8월의 깊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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