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100화 (외전) (100/106)

외전 1

한여름의 열대야로 후덥지근한 밤이었다. 금요일 밤의 열기가 더해진 번화가에는 청춘들이 복작대며 불금을 보낼 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런데, 이 황금 같은 시간에 블루문 바 문에는 ‘closed’ 표지판이 걸려있었으니….

“뭘 문까지 닫아요. 괜히 미안하게.”

지안은 겸연쩍은 얼굴로 동한이 건넨 맥주병을 받아들었다. 자신의 방문에 고민할 것도 없이 표지판을 뒤집어버리니 머쓱하고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동한은 쿨하게 손을 휘저으며 제 몫의 병뚜껑을 열었다.

“미안할 거 없어. 장사 하루 접는다고 굶을 것도 아니고. 이 역사적인 날에 손님을 받을 수는 없지. 안 그래?”

동한은 연방 싱글벙글 웃으며 동의를 구하듯 건호를 돌아봤다. 벌써 저 홀로 맥주 반병을 비운 건호는 상기된 얼굴로 맞장구쳤다.

“당연하죠, 이 역사적인 날에! 그리고 인마, 행여나 우리 톱스타 스캔들 터지면 곤란하잖냐. 안 그래요?”

사이좋게 건너간 물음에 동한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주고받는 눈짓이 장난스럽고도 능글맞다.

지안은 못 말린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못 산다, 진짜.”

하긴. 무려 13년 만에 처음으로 서지안의 애인을 소개받는 자리이니 동한과 건호에겐 특별하다면 특별한 날일 테다. 하물며 3년 전 한차례 불발됐던 기회이니 오죽할까.

물론 덤덤한 척했지만 못내 긴장되고 설레는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제 사람들에게 소개한다. 이번엔 정말, 진짜.

이 공간에 그가 함께 있는 모습을 수없이 상상했었다. 영영 상상 속에서만 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장면이 이제는 정말 현실이 된다 생각하니, 새삼 꿈만 같아 가슴 안쪽이 내내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얼굴 좀 보겠네. 다시 만난다는 소리 들은 게 1월이었는데.”

“그러니까요. 난 하도 안 보여주길래 너 상상연애 하는 줄 알았다니까?”

“안 보여준 게 아니라 못 보여준 거야. 너무 바빴어, 진짜.”

“알아, 알아. 그러게 상상연애는 아니라서 진짜 다행이다. 하하.”

그러고 보니 그가 인간이 되어 돌아온 지도 벌써 반년이 훌쩍 넘었다. 3년 전 헤어졌던 남자와 다시 만나게 됐다는 이야기는 일찌감치 전했지만, 지난 반년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시간을 통 내지 못했었다.

“어떤 사람이야? 이제 얘기 좀 해줘 봐. 만나기 전에 그래도 좀 알고는 있어야지.”

건호가 테이블에 상체를 바짝 붙이며 재촉했다.

그냥 지나치게 잘생기고 섹시하고 멋있는 연상남. 그를 소개한 말은 여태 그것이 전부였다.

딱히 비밀에 부치고자 작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엔 그저 어떤 말로 그를 설명해야 할지 몰라 본의 아니게 숨기는 꼴이 되었다. 이후엔 바쁘다는 핑계로 타이밍을 잡지 못했고 결국 오늘까지 왔다.

제게 스폰서 제안을 했던 W 기획 지승원 이사가 바로 그임을 알게 된다면 건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벌써 조금은 짐작이 되니 자꾸만 비실비실 웃음이 나려 한다.

“그냥 봐. 얼굴 보면 다 설명이 돼.”

그것이 무엇보다 확실한 정답임을 알 길 없는 건호는 답답한 얼굴로 투정했다.

“아아. 궁금한데, 진짜.”

“그래, 곧 볼 거니까 기다려보자. 예전에 만났을 때 나이가 서른넷이랬지? 그럼 올해 일곱인가?”

준비하지 못한 타이밍이었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동한의 질문에 지안의 얼굴이 대번에 멍해졌다.

“아… 나이….”

맙소사. 미처 생각지 못했다. 3년 전 그의 나이를 물었던 동한에게 대강 얼버무렸던 숫자가 하필이면 서른넷이었다.

그가 인간의 삶을 얻으며 정한 나이는 서른다섯. 두 살이 도리어 어려진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 난감한데, 이거….

내심 당황해 빙그르르 눈을 굴리던 지안은 말간 얼굴로 시치미를 뚝 뗐다.

“내가 그때, 서른둘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을 텐데?”

“에? 아닌데…. 넷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에이, 아니야. 궁합도 안 보는 ‘네 살’ 차이라고 말한 걸 헷갈렸나 보다, 선배.”

내가 설마 내 남자친구 나이도 잘못 말했을까 봐? 하며 덧붙이는 얼굴이 연기파 배우답게 뻔뻔하기도 하다.

동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아… 그런가…?”

아무렴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제 기억이 정확하다 확신한들 우길 수 있을까. 다행히 속아 넘어간 동한은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내가 착각했나 보다. 어쨌든 그럼 올해 서른다섯이란 거지?”

“네. 맞아요, 서른다섯.”

정확히는 햇수로 천 년하고도 3년을 더 살았지만, 이 영화에나 나올 법한 진실은 무덤까지 품고 가야 할 테다.

한고비를 넘기고 안도의 한숨을 훅 뱉어내던 때였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건호의 휴대폰에 느닷없이 줄줄이 진동이 울렸다. 메시지를 확인한 건호는 쯧쯧 혀를 내둘렀다.

“아이고, 또 난리네, 난리.”

“뭐가?”

“우리 팀 단톡방. 퇴근길에 또 엘프님 영접했다고 난리들… 아, 내가 얘기 안 했던가? 우리 회사 제작본부 이사 말이야. 예전에 너한테 스폰서 해주겠다고 헛소리했던. 기억나냐?”

“어?”

한고비를 넘겼더니 또 돌부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이 타이밍에 스폰서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던 터라, 괜스레 심장이 철렁했다.

지안은 순간 귀 끝을 붉히며 되물었다.

“그 사람이 왜…?”

“그동안 얼굴은 안 보이고 소문만 무성해서 별명이 유니콘이었잖아, 왜. 근데 올봄부터 갑자기 대외 활동을 시작해서 요즘 회사 분위기가 장난 아니거든. 아침에 꼬박꼬박 정문으로 출근까지 하는데,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여직원들이 로비에 아주 바글바글… 와아, 진짜 그 길 뚫고 들어가려면 아침마다 전쟁이라니까?”

신수였을 적에도 간혹 출근은 했었지만 인간이 된 후로 이전보다 더 ‘인간’처럼 회사 생활을 하게 된 그였다. 지안이 촬영을 나가면 무료한 시간을 달랠 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리된 것이었다.

꼬박꼬박 정문으로 출근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제 순간이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지만, 본의 아니게 그 같은 이유로 출퇴근길에 이슈가 되어버린 모양이다.

아… 하여튼 너무 멋있어도 문제라니까….

내심 뿌듯한 마음에 제멋대로 입꼬리가 실룩댔다. 지안은 물결치는 입술을 감추려 괜히 맥주만 들이켰다.

가만. 회사가 근처이니 그럼 이제 곧 올 것 같은데….

애써 가라앉혔던 입꼬리가 대번에 솟구쳤다. 곧 친구들에게 그를 보일 생각을 하니 기분 좋은 긴장감에 가슴팍이 울렁댔다.

지안이 문 너머를 살피며 히죽거리는 사이, 동한은 썩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감흥 없이 물었다.

“뭐 얼마나 잘생겼기에 그렇게까지 난리래?”

“솔직히 남자가 봐도 잘생기긴 했어요. 일단 분위기도 좀 묘하거든요.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정신이 멍해진다고 해야 하나?”

회상하듯 아련해진 건호의 시선이 저 멀리 창밖까지 뻗어갔다.

키도 크고, 다리도 길고, 몸도 좋고, 피부도 깨끗하고, 눈동자까지 섹시하고 어쩌고저쩌고….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는 찬사에 지안은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제 칭찬도 아니건만 뭐가 이렇게 좋은지, 자꾸만 찢어지는 입꼬리를 컨트롤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아무튼 얼굴만 멀쩡해, 얼굴만. 그 얼굴로 힘없는 여배우나 건드리고 다닐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돌연 빈정대듯 뒤바뀐 말투에 지안은 난색 어린 얼굴이 됐다. 양 손바닥이 변호하듯 절로 번쩍 들렸다.

“아, 그땐! 내가 오해했던 거야. 그런 거 아니었어.”

“아니라고?”

“어어. 스폰 그런 게 아니고….”

그러니까 그게, 그럴 만한 사정이….

구슬, 저주, 구미호. 머릿속을 마구 휘도는 단어들을 헤치고 서둘러 그럴듯한 시나리오를 작성해 보려던 때였다.

“어…?”

별안간 동그래진 건호의 눈이 지안의 어깨너머로 건너갔다. 덩달아 뒤를 돌아다본 지안의 얼굴에 대번에 미소가 만개했다.

갈색 통유리 너머로 거리를 활보하는 청춘들이 가득이었다. 그 복잡한 공간 속에서 유독 한 사람만 또렷이 보이는 현상은 비단 그녀에게만 국한된 일은 아닐 테다.

“지금, 내 눈에만 보이는 거 아니지?”

건호가 다소 혼몽한 얼굴로 물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더니, 진짠가? 하며.

뒤늦게 목을 빼고 같은 곳을 건너다본 동한의 시선도 정확히 한 사람에게 꽂혔다.

“뭐야. 누군데? 저 사람이 그 유니콘이야?”

진회색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어느새 블루문 바 문 앞까지 당도했다.

“어… 어… 왜 이리로 오지?”

지안은 당황해 주춤거리는 건호를 뒤로하고 맑게 웃으며 일어섰다. 한달음에 달려가 문을 여는 뒷모습이 따스한 봄날 나풀거리는 나비처럼 상큼하기도 하다.

“어서 와요.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마주친 그의 눈이 유려하게 휘었다.

“차가 안 밀렸어.”

가볍게 미소 지을 때 보일 듯 말 듯 패는 보조개가 오늘따라 유난히 돋보인다.

아, 미쳐. 어쩜 매일 보는데도 이렇게 설렐까.

“다행이다. 들어와요, 어서.”

지안은 들뜬 얼굴로 그의 팔을 이끌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동한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그의 외모에 놀라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어정쩡하게 엉덩이만 떼고 선 채 사태 파악에 돌입한 건호는 흡사 영혼이 이탈한 얼굴이다.

“인사들 해. 이쪽은 내 남자친구 지승원 씨.”

장장 13년간 들어보지 못했던 발랄한 음성이 어색한 공기를 갈랐다.

“…억.”

할 말을 잃은 건호는 외마디만 뱉은 채 굳어버렸고,

“아… 아, 안녕하세요. 박동한이라고 합니다.”

천상계 외모에 홀려 넋을 빼고 있던 동한은 화들짝 정신을 다잡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삽시간에 어색한 기류가 밀려온 공간 속에서 저 홀로 여유가 넘치는 승원은 부드럽게 미소 띤 얼굴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동한과 가볍게 악수를 나눈 그는 자연스레 건호에게 손을 옮겼다. 승원의 눈매가 조금 더 유연하게 휘어졌다.

“오랜만이네요, 이건호 씨.”

웃고 있으나 묘하게 무게감이 느껴지는 음성에 건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쩐지, 3년 전 지안의 옥탑에서 마주쳤을 때보다 분위기가 더욱 정갈하고 무거워진 기분이랄까.

저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너른 어깨를 자랑하던 녀석이었으나, 건호의 어깨는 어느 틈에 불판 위에서 오므라든 돼지껍데기처럼 다소곳이 모여들고 있었다. 갑작스런 상황은 둘째치고, 제 직장의 고위급 상사를 맞닥뜨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 아, 그, 아… 안….”

벌게진 얼굴로 바보처럼 다달거리던 건호는 마치 뻑뻑했던 문을 억지로 밀어 연 것처럼 일순간 우렁차게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쿵! 잔뜩 힘이 들어간 허리가 사정없이 접혔다.

“악!”

그 바람에 테이블에 곱게 이마를 처박은 건호는 제 이마를 감싸 쥐고 고통에 신음했다.

“저런… 괜찮습니까?”

“아, 나 쟤 땜에 미쳐, 진짜….”

결국 웃음이 터져버린 지안은 승원의 팔뚝에 이마를 묻고 꺽꺽 넘어가는 숨을 달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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