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99화 (99/106)
  • 99.

    하늘이 심상치 않더라니, 택시에 올라 펜트하우스로 향하던 와중에 차창에 눈송이가 부딪혔다. 올겨울 서울의 첫눈이었다.

    “와… 예쁘다….”

    창에 바짝 붙어 고개를 꺾어 든 지안은 흩날리는 눈송이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여유롭지 않은 삶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사느라 눈이 와도 구경할 겨를이 없었다. 재작년 모란을 떠나보냈던 날 함박눈이 쏟아졌을 때는, 우리 할머니 추우시면 어쩌나 하늘이 야속하기만 했었다.

    눈이 이렇게 예쁜 거였구나.

    새삼스레 아이처럼 말간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새 택시가 속력을 늦추었다.

    “어디쯤 세우면 될까요?”

    “아! 저기 횡단보도 앞이요.”

    천천히 구르던 택시가 이내 완전히 멈춰 섰다. 택시비를 지불하고 내렸을 때는 눈송이가 조금 더 많이 흩날리고 있었다.

    지안은 횡단보도 앞에 서서 고개를 꺾어 들었다.

    “진짜 예쁘네….”

    잔잔한 바람에 두둥실 떠다니는 눈송이는 마치 민들레 홀씨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게 뭐라고 눈을 뗄 수 없었다. 최면에라도 걸린 듯 묘한 기분이었다. 주머니에서 울리던 진동음도 한참 늦게야 인지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후 통화버튼을 누른 지안은 다시 자석에 끌리듯 하늘을 올려다봤다.

    - 지안 님, 도착하셨어요?

    “네, 좀 전에 내렸어요. 눈 오는 거 보셨어요? 너무 예뻐요.”

    - 그쵸, 그쵸! 눈님도 오시고 경사도 이런 경사가…. 암튼 어서 오셔요!

    “네. 금방 들어갈게요.”

    통화를 갈무리하고도 얼마쯤 눈 구경에 빠져 있었다. 차곡차곡 쌓이는 생각들이 못내 서글퍼져 눈시울을 조금 붉히기도 했다.

    “영감님도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고 보니 그와는 겨울을 함께 하지 못했다. 그를 떠나보낸 계절은 바람이 차갑게 휘몰아치던 가을의 끝자락이었다. 이토록 예쁜 눈을 가만 바라보고 있자니 아쉬움은 그리움만큼이나 사무치게 밀려왔다.

    우리 영감님 계시는 그곳에도 눈이 올까….

    목이 뻐근하게 당겨올 때쯤 고개를 내렸다. 눈 구경에 빠져 있는 동안 신호는 아마도 한 차례 파란불을 흘려보냈을 것이었다.

    손바닥 위에 눈송이 하나를 담아보다가 무심코 맞은편 인도를 건너다본 순간이었다.

    “…….”

    깜빡깜빡. 다소 멍청하게 눈이 끔뻑거렸다. 맞은편 신호등 아래에 홀로 서 있는 남자를 잠시간 멍하니 바라보다 순간 헛웃음이 툭 터졌다.

    눈두덩 위까지 흘러내린 채 살랑살랑 휘날리는 검은 머리칼 하며, 190cm는 족히 됨직한 키와 너른 어깨, 멀리서 봐도 또렷한 이목구비와 하얀 피부.

    참 신기할 만큼 닮았다. 아니, 어쩌면 제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간밤에 그의 꿈을 꿔서인가. 꿈속에서 보았던 승원의 모습에서 검은 코트 하나만 턱 걸쳐놓으면 영락없이 맞은편 남자와 똑같다.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의 간격도 딱 이쯤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미쳤나 봐….”

    지안은 고개를 떨군 채 피식 자조했다. 지난 2년간 아무리 힘들어도 누군가를 그라 착각한 적은 없었는데. 댓글 하나에 어이없이 흔들리더니, 이젠 헛것까지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 2년으로도 부족한 건가. 얼마나 더 시간이 흘러야….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무심히 휴대폰을 꺼내 들어 발신자를 확인한 순간, 삼키던 숨이 목 안에 콱 틀어박혔다.

    “!”

    튀어나올 듯 커다래진 눈이 번쩍번쩍 불을 밝히는 액정을 꿈을 꾸듯 바라봤다.

    < 영감님♥ >

    차마 삭제하지 못했던 그의 번호가 너무도 또렷이 떠 있다.

    어, 어떻게 이게….

    쿵쿵쿵, 북 치듯 울리는 심장 소리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말도 안 돼.

    대번에 번쩍 들린 시선이 맞은편에 선 남자에게 닿았다. 아주 오래전, 언젠가 저 자리에 서서 빗물을 밀어내고 있던 그의 모습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남자의 실루엣과 겹쳐졌다.

    설마, 그럴 리가 없는데….

    그림처럼 멈춰 있던 남자가 손을 들었다. 그때의 그와 똑같은 모습으로 검지를 들어 올려 휴대폰을 톡톡 두드린다. 전화 받아, 라고 하듯이.

    휴대폰을 붙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엉망으로 삐져나오는 숨이 거세진 눈발 속에 하얗게 흩날렸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꼿꼿이 세우고 통화버튼을 누른 지안은 휴대폰을 귓바퀴에 천천히 가져다 대었다.

    “…여, 여….”

    입술이 미친 듯이 달싹거렸다. 완성되지 못한 말이 바보처럼 뚝뚝 끊어진다. 맞은편의 남자를 담은 눈에 찰랑찰랑 물기가 어려 있었다.

    이내 귀에 닿은 휴대폰 너머로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들어온 순간.

    - 눈도 오는데 왜 반대편에서 내려. 우산도 없으면서.

    “하…!”

    지안은 입을 틀어막고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말도 안 돼. 말도….

    한층 거세어진 눈발이 시야를 가렸다. 쌩하니 스쳐 가는 차들이 자꾸만 남자의 모습을 가로막는다. 보이지 않으니 역시 착각이었나 순간 혼란이 몰아쳤다.

    하지만, 휴대폰 너머로 다시 한 번 들려오는 목소리는 정말 말도 안 되게 그의 것이었다.

    - 이제 눈도 비도 막아줄 수가 없는데.

    쪼그려 앉아 쿵쾅거리는 가슴팍만 움켜쥐던 지안은 순간 벌떡 일어나 스쳐 가는 차들 위로 정신없이 고개를 길게 뺐다.

    안 보여. 안 보여….

    “아아… 아….”

    소리를 잃은 인어처럼 입술이 뻐끔댔다. 울음도 탄식도 아닌 것이, 요상한 소리만 겨우 삐져 나왔다.

    도로 위를 내달리는 바퀴 소리가 잠잠해진 것은 그때였다. 그제야 다시금 그가 오롯이 눈에 비쳤다.

    아아, 맙소사. 헛것이 아니다. 착각이 아니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

    - 돌아왔어. 보고 싶어서.

    왈칵 울음을 터트린 지안은 다시금 입을 틀어막았다. 갈쌍거리다 넘쳐흐른 눈물이 입을 막은 손 위로 후두두 미끄러졌다.

    ‘ 그럼 비 맞게 그거 치워줘? ’

    ‘ 아니, 생각해보니까 안 맞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영감님 옷 젖으면 안 되잖아요. 나 지금 건너가면 바로 안길 건데 ’

    2년 전 그날. 빗방울이 방울져 허공에 둥둥 뜨고, 내달리던 차들이 아스팔트 위에 우뚝 멈추었던 순간, 그때의 그는 손을 내밀며 말했었다.

    ‘ 이리 와. ’

    시야 끝에 담긴 신호등이 파랗게 빛을 바꾸었다. 눈앞에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그가, 그때와 같은 모습으로 손을 내민다.

    - 이리 와. 안아보자.

    “하.”

    탄식처럼 숨을 뱉어낸 지안은 지체 없이 발을 뗐다. 간밤의 꿈속처럼 다가서면 멀어질까, 초조하게 붙박였던 발이 그제야 현실 속을 성큼성큼 내달렸다.

    4차선 도로를 한달음에 달려간 지안은 그의 몸이 주춤 밀려날 만큼 승원의 품에 와락 몸을 던졌다. 발꿈치가 댕강 들렸다. 그의 목덜미에 파묻힌 입술 새로 울음소리가 크게 번졌다.

    호흡 속에 가득 밀려드는 향이, 등허리를 꽉 끌어안은 단단한 팔의 온기가, 귓가에 내려앉는 감미로운 목소리도 모두 의심할 여지 없이 온통 그다.

    “왜 이렇게 말랐어. 물론 그래도 예쁘긴 한데.”

    가쁜 숨을 토해내며 필사적으로 그의 목에 매달리던 지안이 별안간 팔을 풀고 그를 올려다봤다. 눈물에 젖어 초점이 마구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의 얼굴 곳곳을 바쁘게 살폈다. 덜덜 떨리는 손은 어느 틈에 그의 양 볼을 더듬고 있었다.

    따뜻해. 진짜 살아 있어. 진짜.

    “여, 영감님… 영감님….”

    믿을 수 없어 몇 번이고 그를 부르자, 엷게 미소 띤 그의 입술이 엄지 끝에 닿았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제 손등을 가득 포개었다.

    “호칭은 좀 바꿔야 할 것 같은데.”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 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이제 고작 서른다섯이라.”

    궁합도 안 본다는 네 살 차이로 정했어, 하며 덧붙이는 소리가 어렴풋이 귓가를 스쳤다.

    승원은 싱긋 미소 지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오빠는 좀 그런가?”

    휘몰아치던 바람이 잦아들었다. 시야를 가리던 하얀 눈발 탓에 낮아졌던 채도가 그제야 선명해졌다.

    눈앞에 더욱 또렷이 드러난 그의 얼굴을 보고 또 보고, 만지고 또 더듬고. 현실임을 재차 확인한 다음에야 지안은 다시금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가슴에 맞닿은 그의 심장이 뜨겁게 박동하고 있었다.

    epilogue

    「 …그리하여 율령은 천황을 찾았으나, 목숨을 관장하는 것은 염라이니 그를 먼저 설득해 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율령은 또다시 벽을 맞닥뜨렸다. 자신을 향한 염라의 시기와 질투는 독산 못지않은 것이었으니, 그자를 어찌 설득해야 하나 막막했던 것이었다.

    하나 물러설 수도 없었다. 장장 5백 년을 독산과 싸워 끝끝내 이겨낸 부정父情이 아니었던가. 소멸시키는 것보다야 아무렴 설득이 수월할 테지.

    하여 서둘러 천옥문을 넘은 율령은 무작정 염라를 찾아갔다. 그러고는 단상 위의 그를 향해 무턱대고 말하였다.

    “내 자네에게 청이 있어 왔네. 내 아들의 일은 자네도 들어 알 테지. 월호, 그 아이를 좀 살려주게.”

    이미 율령이 걸음한 목적을 훤히 내다보고 있던 염라는 대번에 코웃음을 쳤다.

    “아들의 목숨을 구걸하러 온 자가 그리 빳빳이 고개를 쳐들어 될 일인가?”

    염라의 반응쯤이야 예상한 일이었다. 율령은 무엇이든 내어놓을 각오로 물었다.

    “내가 어찌하면 되겠는가. 원하는 걸 말해보게.”

    “내 이미 세상의 목숨을 손에 쥔 몸이네. 원하는 것이 딱히 무엇이 있겠는가?”

    “화신의 자리를 내려놓겠네. 그리해도 아니 되겠는가?”

    그는 필사적이었다. 간절한 그의 모습에 염라는 사뭇 흥미가 돋았다.

    저자가 신의 자격을 내려놓는다면 내 밑에 두고 굴릴 수 있으니 참으로 솔깃하긴 한데…. 아니, 저 잘난 얼굴을 내 것과 바꾸는 것도 괜찮으려나…. 아니지, 아니지…. 저자를 가장 괴롭게 만들자면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화신의 자리를 내려놓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행여 자네가 소멸한다 한들 내겐 득이 될 일이 조금도 없네. …뭐, 천하의 화신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라도 처박는다면야, 마음이 썩 동할지도 모르지.”

    그저 저를 놀리고자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을 터였다. 하나 율령에겐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염라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여 따르는 수밖에 없었음이다.

    그가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양손을 짚고 이마도 내려놓았다. 내심 놀란 염라는 잠시 말을 잃었다. 호오, 천하의 화신이 진정으로 고개를 처박았다라?

    “하하하.”

    염라의 큰 웃음소리가 성안을 쩌렁쩌렁 흔들었다. 한참 고개를 박고 있던 율령은 짐짓 담담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되었는가.”

    아니, 되었을 리 없다. 염라의 얼굴엔 전에 없이 화색이 돌고 있었다. 제 앞에 무릎을 꿇은 율령의 모습이 생각보다 썩 마음에 들었던 것이었다.

    그는 신이나 떠들었다.

    “무려 아들의 목숨을 살리는 일인데 고작 한 번이라? 못해도 천 일의 정성은 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 또한 생각 없이 해본 말이었을 터였다. 설마 그것까지 하랴, 싶은 마음이었을 테다.

    하나 율령은 그리하였다. 하라면 못 할 줄 아느냐, 하루도 빠짐없이 천옥문을 넘었다. 마치 코웃음이라도 치듯 그리 해내고 마니, 희한하게 기분이 언짢아진 것은 염라의 몫이었다.

    그래. 어디 한번 그렇게 천 일을 채워보아라. 내가 꿈쩍이나 할성싶으냐! 염라가 악하게 마음을 먹던 와중이었다.

    성문이 열렸다. 또 율령이 찾아온 것이었다. 한데 그날은 어째, 곁에 통통한 고양이 한 마리가 딸려온 것이 아닌가.

    “네놈은 또 무엇이냐?”

    통통한 고양이는 대뜸 고개를 처박고 통곡을 하였다.

    “아이고오, 염라 니임! 우리 월호 님을 좀 살려주십시오!”

    “허어.”

    놈은 그날로 율령과 함께 꼬박꼬박 천옥문을 넘었다. 몇 시간이고 가만히 무릎만 꿇고 돌아가던 율령과 달리, 놈은 몹시 시끄럽게 통곡을 하며 바닥을 뚫을 기세로 쿵쿵 고개를 처박았다.

    “간청하나이다! 우리 월호 님 좀 살려주십시오오!”

    율령은 천계의 시간으로 천 일을 기어이 채우고 말았다. 마지막 150여 일은 시끄러운 고양이까지 끌고 와 염라의 귀를 흠씬 괴롭히며 아주 야무지게 해내고 만 것이었다.

    “가아안청하나이다아…! 우리 월호 님을…!”

    “아, 시끄럽다. 이놈아! 그만하면 됐으니 월호를 데려오거라. 내 원리 원칙을 꼼꼼히 따져 심판을 할 것이다.”

    매일매일 진이 빠져 못 살겠다. 아주 시끄러워 귀가 떨어져나갈 판이다. 결국 지쳐 나가떨어진 것은 염라였다.

    그는 월호를 앞에 두고 심판하였다.

    “애초에 독산의 꾐에 빠져든 것이니 네게도 억울함이 있을 것이다. 하나 인간을 홀려 살생을 저지르고 동족의 목숨 하나를 끊은 것은 명백히 네 잘못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하여 내 너의 영생을 박탈하고자 한다. 호조사의 자격은 물론, 신수의 생을 더는 영위할 수 없을 것이니라. 하나, 너의 억울함은 인간의 육체와 50년의 삶을 내림으로써 풀어줄 것이다. 이 또한 너는 벌이라 여기며 살아가야 할 것이니라. 어찌하겠느냐. 나약한 인간이 되어 고작 50년의 생이나마 더 살기를 바라느냐.”

    그가 천옥의 원리 원칙을 내세워 내어놓은 최선의 심판이었다. 율령도 고양이도, 그것에는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라도 괴수로 변모할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다행이리라 여겼다.

    한데 이를 어찌하면 좋은가.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은 월호는 그마저도 포기하고자 하였다.

    “다시 산다 한들 죽음과 다름없는 생일 것입니다. 인간계의 시간으로 고작 2년…. 그 아이의 남은 생이 그뿐이니 차라리 예서 그 아이가 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율령은 경악하였다. 염라 또한 황당하여 헛숨을 뱉어내었다. ‘그 아이’라 함은 호인의 후손을 일컫는 것임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아, 아니됩니다!”

    그때였다. 망연해진 두 신들 사이에서 화들짝 놀란 고양이가 대뜸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리 심판하여 주십시오! 월호 님께 인간의 육체를 내리시어 단 50년이라도 이놈이 뫼실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시오!”

    월호는 힘에 부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하거라, 고개를 흔드는 모습은 이미 생을 놓은 이의 것이었다. 하나 고양이는 대성통곡을 하며 간청하였다.

    “제게 남은 생이 백 년입니다. 그중 절반을 지안 님께 떼어주십시오! 제가 더 일찍 이리 오겠습니다! 그리하여 지안 님이 사후에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을 제가 대신하여 더욱더 잘해낼 것입니다! 허니 부디, 부디 이놈의 생을 지안 님께 떼어주십시오!”

    간곡하고도 간곡한 청이었다. 두 명의 신과 월호의 낯빛이 마치 하나인 듯 같은 색을 띠었다. 지독한 충심에 그만 할 말을 잃은 것이었다.

    염라는 헛숨을 뱉으며 되물었다.

    “그 인간 계집에게 네놈의 생을 절반씩이나 떼어주어라?”

    “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두 분이 같은 날을 사실 수 있게 딱 50년이면 됩니다. 그리하여 제게 남을 시간 동안 이놈은 월호 님을 뫼시다 함께 눈 감을 것입니다. 부디 아량을 베풀어 주옵소서!”

    울부짖듯 토해낸 고양이의 음성이 광활한 염라성 안을 메아리쳤다. 소리의 여운이 흩어진 자리에는 깊은 정적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고양이를 바라보는 율령의 눈빛이 애잔하였다. 별놈을 다 보겠구나, 두 손 두 발을 들어버린 염라는 연방 헛웃음을 터트렸다.

    월호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

    “뭐 보고 있어요?”

    서재 문 안으로 빠끔 고개를 내민 지안이 물었다. 서적의 마지막 장을 넘기던 승원은 책을 들어 보이며 엷게 미소 지었다.

    “고양이 취미.”

    들고 온 다과를 책상 위에 내려둔 지안은 그가 손에 든 책을 들여다보았다. ‘月狐의 生’이라 쓰여 있는 제목을 보고는 반색하며 눈이 동그래진다.

    “아! 전에 영감님 얘기로 쓰신다던 그 책이요?”

    이제 다 쓰신 거예요? 하며 다가온 지안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저두 읽어 봐도 돼요?”

    제 운명이 묘흔으로 인해 바뀌었음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묘흔이 쑥스럽다며 극구 알리기를 거부한 탓이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 덕에 이 행복을 얻게 되었는지, 지안도 이젠 알아야 할 때가 온 듯싶다. 그래야 묘흔에게 지극정성으로 값비싼 생선을 매일매일 갖다 바치는 제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한데 잠시만. 우선은 급한 불을 끄는 게 먼저니까.

    “나중에.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어.”

    “응? 그게 뭐… 엇!”

    길게 뻗은 승원의 팔이 냉큼 지안의 허리춤을 감아당겼다. 가녀린 몸뚱이가 그의 허벅지에 풀썩 주저앉기 무섭게 셔츠가 벗겨지고 입술이 맞닿았다.

    창안으로 햇살이 들이치고 있었다. 맨살이 닿기에는 참으로 이른 시간이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몸을 정성스레 탐했다.

    덜컹덜컹 사정없이 책상이 흔들렸다. 야릇한 신음이 마구 뒤엉켜 흩날린다. 조금 열린 창 안으로 한껏 밀려든 봄바람이 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치고 화들짝 달아났다.

    더불어 휘릭 넘겨놓은 서적의 마지막 장이 흔들리는 책상 위에 펼쳐져 있었다.

    「 율령은 아쉬운 얼굴로 말하였다.

    “천 년의 생을 누리며 살아온 네게는 이 또한 벌이 될 것이다. 괜찮으냐.”

    하나 월호는 후련히 미소를 띠며 답하였다.

    “그 아이와 같은 날을 살며, 같이 늙어갈 수 있음이 어찌 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제겐 그저 행운입니다.” 」

    fin.

    ※ 지금까지 ‘달뜨는 밤’ 본편을 함께 달려주신 독자님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인간이 된 ‘승원’과 ‘지안’의 남은 이야기는 꿀 떨어지는 외전에 꽉꽉 담아 연재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내 퍼뜩 써올랑게 쪼매~만 기둘려주쇼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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