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오랜만에 맑은 날이었다.
이곳 강원도에는 11월 초부터 함박눈이 쏟아졌다. 그 후로도 내내 칼바람이 몰아치고 지겹도록 눈이 내렸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하늘이 맑게 개어 마당에 햇살이 내려앉았다.
해서 오랜만에 산책이나 가볼까 싶어 집을 나섰건만, 언덕에 올라 산 아래를 구경하다 보니 느닷없이 눈구름이 몰려왔다. 흩날리던 눈발이 함박눈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게. 어쩐 일로 날이 맑나 했지.
승원은 한숨을 삼키며 올라온 길을 돌아보았다. 흙바닥에 남겨두었던 바퀴 자국이 금세 눈에 덮이고 말았다.
아… 휠체어를 두고 올 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하며 눈 덮인 길을 망연히 바라보던 때였다.
“월호 님!”
저 언덕 아래에서 묘흔이 소리를 쩌렁쩌렁하게 내질렀다. 먹을거리를 사러 읍내에 다녀온다더니 벌써 돌아온 모양이다. 아니, 제가 이곳에 머무른 시간이 꽤 오래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묘흔이 숨을 헐떡거리며 언덕을 올라왔다.
“아이고, 참! 말씀도 없이 사라지셔서 놀랐잖습니까!”
“갈 데야 뻔한데 뭘 새삼스럽게.”
이젠 순간이동도 할 수 없으니 이 깊은 산골에서 가봐야 어디를 갈 수 있으랴.
그가 헛웃음을 치자 묘흔은 머쓱해진 얼굴로 괜히 호통을 쳤다.
“그래도 이런 적이 없으니 놀랄 수밖에요!”
묘흔은 그의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주며 쫑알쫑알 잔소리를 덧붙였다.
“눈도 오는데 이 언덕을 혼자 용케 오르시고, 힘도 좋으십니다. 바퀴가 미끄러워 잘 구르기는 하더랍니까?”
“혼자 용케 오를 땐 눈이 안 왔지.”
“그렇지요? 어쩐지…. 여하튼 제가 오지 않았더라면 내려가실 길이 막막할 뻔했습니다.”
“굴러가면 재밌을 법했는데 아쉽네.”
“원하시면 휠체어 손잡이를 놔드리지요. 데굴데굴 잘 구르실 수 있게.”
“그래. 어찌 될런가 해보기나 해라.”
오늘따라 지지 않고 받아치는 그의 말장난에 허허거리던 묘흔은 승원의 허벅지 위에 놓인 태블릿PC를 힐끗 들여다봤다.
“또 그 사진을 보고 계셨습니까.”
며칠 전 올라온 따끈따끈한 화보라고 했던가. 원래부터 어여쁜 여인이었지만 2년의 세월 동안 참으로 고혹하고 아름답게 무르익었다.
“지안 님은 참, 날이 갈수록 고와지십니다.”
묘흔은 괜히 제가 더 뿌듯하여 푸근히 미소를 지었으나 승원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곱지. 예뻐죽지. 그래, 그건 당연한 얘긴데.
“하… 아무리 봐도 마음에 안 들어.”
마뜩잖게 미간을 찌푸린 승원은 대뜸 짜증스레 말했다.
“우진이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이딴 걸 입는데 말리지도 않고.”
묘흔은 헛숨을 삼키며 절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봐도 제 눈에는 그저 예술로만 보이건만, 이토록 세련되고 진취적인 현대 맞춤형 초미남자의 얼굴로 조선 시대 사상을 품고 계시니, 원.
“아주 유명한 디자이너의 작품이라 들었습니다. 작품을 작품으로 보셔야지요.”
“작품은 개뿔….”
대번에 코웃음을 친 승원은 거친 손놀림으로 스크롤을 휙휙 올렸다.
홀랑 벗겨놓고 얼어 죽을 놈의 작품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그나마 입혀 놓은 것도 가슴이며 엉덩이선이 이렇게나 선명히 드러나는데, 사내들이 드레스의 디자인 따위를 제대로 보기나 하겠는가 말이다.
이걸 어떻게, 다 없애버릴 순 없나. 하긴 없앤다 한들 이미 본 놈들을 싹 찾아다 눈알을 뽑아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소용도 없겠지. 젠장.
“부질없이 열 내지 마시고 그만 내려가시지요. 날이 너무 찹니다.”
냉큼 태블릿PC를 거둬간 묘흔은 휠체어 손잡이를 붙들었다. 그사이 또 소복이 쌓인 눈이 묘흔이 남긴 발자국마저 덮어놓았다. 하늘이 시커먼 것을 보니 밤새 쏟아질 모양이었다.
손잡이를 꽉 움켜쥔 묘흔은 미끄러지지 않으려 발끝에 바짝 힘을 실었다. 경사에 접어들어 중심이 아래로 쏠리니 이 커다란 사내를 태운 휠체어를 붙들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어쿠. 이거 까딱하다간 같이 구를 판입니다.”
“그냥 놔. 혼자 데굴데굴 굴러갈 테니.”
“어이고, 큰일 날 소리 마십시오.”
속 편하게 웃음을 짓던 그가 느닷없이 브레이크를 당긴 것은 그때였다.
“엇!”
어찌 그러십니까, 묻기도 전이었다. 그의 뒤통수만 어리둥절하게 내려다보던 묘흔의 시선이 별안간 위로 한껏 쳐들렸다.
“……!”
눈앞에 장신의 사내가 우뚝 서 있다. 뒤를 돌아다보며 싱긋 미소 짓는 얼굴이 이 와중에 사내의 가슴팍도 뒤흔들 만큼 못내 아름답기도 하다.
댕그래진 눈을 연방 깜빡이던 묘흔은 뒤늦게야 참았던 숨을 툭 내뱉었다.
“허. …서, 설 수 있으신 겁니까?”
꼬박 1년이었다. 신수의 영생을 박탈당하고 오롯이 인간이 된 육체가 부러지고 문드러진 상처를 회복하는 데만도 꼬박 그만큼이 걸린 것이다. 한데 이상하리만큼 다리만은 쓸 수가 없어 다시 1년을 더 흘려보내야 했다.
우리 월호 님, 혹여 이대로 영영 하반신을 쓸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덜컥 걱정이 밀려든 것이 다름 아닌 오늘 아침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리 갑자기.
“어찌, 어, 어찌….”
승원은 멀쩡히 바닥을 딛고선 제 다리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러게. 참 희한한 일이지.”
홀로 휠체어에 오를 때부터 갑자기 다리에 힘이 들어가기에 그도 의아했던 참이었다. 그래도 혹여 몰라 예까지는 휠체어를 끌고 왔건만, 언덕에 다다라 슬쩍 땅을 디뎌보니 웬걸. 걷기도 수월한 것이 놀랍다 못해 황당할 지경이 아닌가.
이거 뭐, 하루아침에 멀쩡해지니 여태 꾀병이라도 부린 기분이랄까.
혹, 이마저도 염라의 계획이었나. 죽음을 대신해 내린 벌은 이만하면 되었다 판단한 것인가.
“아, 아이고….”
울먹이며 그의 앞으로 자리를 옮겨온 묘흔은 감격하여 덜덜 떨리는 손으로 승원의 다리를 매만졌다.
“아이고, 천황신님, 염라님, 율령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급기야 눈밭에 무릎을 꿇은 묘흔은 온갖 신을 부르짖으며 수차례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그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던 승원은 몸을 낮추어 묘흔의 어깨를 일으켰다.
안경알 위로 쏟아진 눈물 탓에 가뜩이나 콩알만 한 눈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 피식 웃음을 터트린 승원은 안경을 빼내어 눈물에 젖은 볼을 손등으로 닦아주었다.
“산골에 처박혀 있느라 고생했다.”
“흐흡….”
“그동안 고맙고, 미안했어.”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월호 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당치도 않다며 그의 손을 붙들어 내린 묘흔은 감히 그의 손등을 적신 제 눈물을 소매로 얼른 닦아냈다.
승원은 쓰게 웃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는 묘흔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신수로서 모든 능력을 잃은 것이 벌써 2년이었다. 이젠 한낱 서른 중반의 나약한 인간이 돼버린 저를 아직도 이리 신처럼 받드니, 이 어리석을 만큼 맹목적인 녀석의 충심을 어찌하면 좋을까.
이미 닦은 자리를 또 닦고, 또 닦고…. 살갗이 벌게지도록 그의 손등을 닦아내던 묘흔은 우는 얼굴로 환히 미소 지었다.
“되었습니다. 이제 참으로 다 되었습니다. 이놈은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
묘흔을 향한 승원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더 깊은 진심을 전하고 싶어 목 안이 갈근거렸으나, 그는 그저 따스한 눈빛으로 진득이 마음을 건넸다.
네 덕분에 내가 살았다.
네 덕분에, 지안이가 살았다.
고맙다. 참으로 고맙다, 묘흔.
붉어진 눈빛만으로도 그의 진심을 용케 읽어낸 묘흔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또 같은 말만 반복한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살아주셨으니 되었습니다. 진정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느닷없이 언덕에 멈춰선 그들의 어깨 위로 눈송이가 쌓여갔다. 칼바람이 거세지고 있었다. 통통한 볼에 길게 난 눈물길이 얼어붙을 기세다.
하염없이 닦아낸 정성이 무색하게 다시 손등으로 묘흔의 눈물을 훔쳐낸 승원은 전에 없이 따스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다 되었다.”
천 년을 살아온 것이 무색하게도, 지난 2년은 참으로 고되고 더디었다. 괜찮아지는 날이 오기는 할까, 내심 절망한 밤도 여러 날이었다.
막상 이날이 오니 심장이 너무 뛰어 죽진 않을까 걱정이다. 하나 1초라도 더 빨리 달려가고파 두 다리가 근질거린다.
승원은 깨끗하게 눈물길을 닦은 병천의 얼굴에 안경을 씌워주며 말했다.
“이제 그만 가자.”
네 덕분에 무사히 서른한 살이 되었을 그녀에게.
나의 여인에게.
**
부산에 머물렀던 사흘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 사찰 특유의 정숙하고 고아한 분위기에 숙연해지는 마음과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속에 바람이 찬 듯 허하기도 하고, 느닷없이 울적하기도 하고, 뭔가에 들뜬 사람처럼 배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그가 쓴 것일 리 없는 댓글 한 줄에 생각보다 깊이 동요하고 만 것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휴대폰을 꺼내어 캡처해둔 댓글을 보고 또 봤다. 아닌 줄 알면서도 그가 쓴 것이라 생각하며 들여다보면 정말 그인 듯 가슴이 뛰었다. 그러다 불가능한 현실을 깨달으면 두근대던 심장은 여지없이 쓸쓸히 가라앉았다.
마지막 날 밤엔 오랜만에 그의 꿈을 꿨다. 여전히 멋지고 아름다운 남자가 먼발치에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부시게 하얀 도포와 비단결 같은 백발, 그리고 환한 미소.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면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를 입고 카디건을 걸친 짧은 흑발의 그로 바뀌어있기도 했다.
초췌하고 아팠던 마지막 모습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예쁘고 건강한 모습으로 찾아와주어 너무도 고마웠다.
하지만 꿈속에서도 그를 만지지는 못했다. 걸음을 좁혀가면 그만큼 멀어졌고, 오기가 생겨 냅다 달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망연자실하게 자리에 주저앉아 훌쩍이고 있으면 또다시 저 멀리서부터 그의 향이 밀려왔다.
몇 번을 다가가려 시도하다 결국엔 제자리에 멈추어 멀찍이 바라만 보았다. 허락된 간격이 여기까지구나,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며 바람에 실려 오는 그의 향기만 양껏 들이켰다.
저를 흔들어 깨우던 무연 스님의 손길이 못내 야속했던 아침이었다.
또 찾아뵙겠노라 인사를 건네고 사찰을 나선 지안은 해운대에 들러 겨울 바다를 바라봤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니 부산에 올 때마다 한 시간쯤 들러가곤 했다.
탁 트인 바다를 보고 있자면 단전까지 뻥 뚫린 듯 시원한 기분이 들곤 했는데, 오늘은 어쩐지 그마저도 되질 않는다.
지안은 쓰게 자조했다.
“진짜 이해를 못 하겠네.”
jsw*** 아… 이건 너무 야한데….
도대체 왜 이렇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건지 이젠 정말 이해가 안 될 지경이었다. 아이피를 찾아다가 댓글 주인을 확인이라도 해야 미련을 떨칠까.
“하아….”
코끝까지 가린 머플러도 뚫고 길게 뻗어 나갈 만큼 한숨을 내쉬던 때였다. 점퍼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수아의 전화였다.
“네, 수아 님.”
- 지안 님! 어디셔요?
“해운대에 잠시 들렀어요.”
- 이잉? 아직 부산이셔요?
“네, 아직….”
휴대폰 상단에 떠 있는 시간을 확인한 지안은 발길을 돌리며 물었다.
“이제 슬슬 움직이려구요.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 아… 아니, 뭐어… 그런 건 아니구우….
전화를 받을 때부터 어딘가 다급했던 목소리가 별안간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왠지 입술 사이에 검지를 걸치고 우물쭈물하고 있을 수아의 모습이 훤히 그려졌다.
얼마간 뜸을 들이던 수아는 싱겁게 말했다.
- 으음. 그냥, 새해도 됐으니 떡국이나 같이 먹을까 하여…. 그럼 서울 도착하시면 연락주셔요!
도롯가로 나선 지안은 마침맞게 신호 앞에 정차한 택시를 향해 재게 걸었다.
“네, 그럴게요. 아, 어묵도 좀 사갈까요? 부산 어묵 엄청 맛있….”
- 아녀요, 아녀요! 저 어묵 엄청 미워해요! 그냥 어서 오시기만 하셔요!
“아… 네, 알았어요.”
통화를 마친 지안은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며 택시에 올랐다.
“부산역으로 부탁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