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97화 (97/106)

97.

쾅쾅!

“수아 님!”

날이 밝자마자 수아의 집으로 달려온 지안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문을 두드렸다. 중요한 일이 있어 집에 들르겠다는 메시지도 남겨둔 참인데, 왜 이리 나오지 않는지 조급증에 입이 바짝 말랐다.

“수아 님!”

손이 욱신대도록 문을 두드리고 초인종도 수차례 눌렀지만 통 기척이 없었다.

부산스레 동동거리다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려던 때였다. 문 너머에서 다다다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달칵 문이 열리자, 지안은 다급한 마음에 문고리를 벌컥 잡아당겼다.

“엇! 지안 님!”

흡사 코뿔소 같은 기세에 놀란 수아가 화들짝 뒷걸음쳤다. 씻다 말고 달려 나온 모양인지 머리칼은 젖어있고 맨몸은 커다란 샤워타올로 겨우 가린 채였다.

“아, 죄송해요. 씻으시는 줄 모르고….”

“아니어요. 막 나오려던 참이었어요. 한데 무슨 일이셔요? 어찌 이리 급하게….”

“이거요. 이, 이거 좀 봐주세요.”

성큼 현관으로 들어선 지안은 신을 벗을 겨를도 없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어요?”

“여기 댓글에, jsw로 시작하는 아이디요.”

지안은 혹시 몰라 캡처해둔 사진을 손가락으로 당겨 크게 확대했다.

“이거, 영감님 아이디 같은데….”

덧붙이는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빠르게 깜박이는 눈은 붉게 충혈된 채 촉촉이 젖어있었다.

미간을 바짝 좁히고 댓글을 확인한 수아는 대번에 어리둥절한 얼굴이 됐다.

“에에? 무슨 그런…. 그럴 리가요….”

“그러니까요. 그럴 리가 없긴 한데….”

그래,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밤새 잠도 한숨 못 자고 내내 중얼거린 소리도 ‘말도 안 돼.’ 였으니, 결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을 저도 알고 있었다. 5천만 국민 중에 같은 이니셜을 아이디로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이니셜 뒤로 블라인드 처리된 세 개의 별은 경우의 수가 무궁무진할 것이었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저 착각이라는 수아의 확답이라도 들어야 이 발광하는 심장이 안정을 찾을 것 같았다.

“뒤에 가려진 아이디까지 같다면 모를까. 이것은 어찌 확인을 할 수도 없으니….”

하지만, 막상 수아의 반응을 확인하고 나니 온몸에 들끓던 피가 쑥 빠져버리는 기분이다. 아닐 거라 확신하면서도 내심 그 말도 안 되는 기적을 기대라도 했던 걸까.

수아는 한숨을 폭 내쉬며 싱겁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분명 가려진 아이디를 확인해봐도 아닐 것이어요.”

지안 님도 아시잖아요, 하는 얼굴로 재차 못 박는 말에 가쁘게 펄떡거리던 가슴팍이 푹 가라앉았다.

아니겠지. 그래, 당연히….

“그… 렇겠죠…?”

지안은 휴대폰을 받아들고 캡처해둔 사진만 하염없이 들여다봤다. 기대가 은근히 컸던 모양인지 발갛게 상기됐던 얼굴이 금세 실망감에 물들었다. 마음은 또 얼마나 급했던지, 이 추운 겨울날 점퍼도 걸치지 않고 맨발에 슬리퍼 차림이다.

안타까운 얼굴로 지안을 살피던 수아는 아직도 현관에 우뚝 서 있는 그녀를 집안으로 이끌었다.

“일단 소파에 잠시 앉아계셔요. 따순 차 한 잔 내올게요.”

두툼한 담요를 꺼내어 지안의 어깨에 걸쳐준 수아는 주방으로 건너가 차를 우렸다. 머쓱한 마음에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던 지안은 깊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하….”

허탈하고 허무했다. 한편으론 못내 황당하기도 했다. 장장 2년을 의연하게 버텼는데, 비슷한 아이디로 남겨진 댓글 한 줄에 순간 이성을 잃고 말다니. 여태 공들여 단단하게 다잡아둔 감정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젠 정말 초연해졌다 생각했는데, 역시 아니었던 걸까.

금세 다가온 수아가 구수하게 우린 대추차를 내밀었다. 지안은 미안한 얼굴로 잔을 받아들었다.

“아침부터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7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제겐 밤새 날벼락 같은 일이었으나 결과적으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이 시간에 들이닥친 꼴이 됐다. 면목이 없어 고개가 절로 수그러들었다.

“아니어요. 저도 찰나였지만 심장이 철렁했던 걸요. 어서 드시고 몸을 좀 녹이셔요. 저는 출근 준비 좀 후딱 하고 올 터이니.”

2년 전 묘흔마저 그와 함께 사라진 후, 수아는 도병천 대표의 모습으로 회사에 꼬박꼬박 출근하고 있었다.

전시현의 삶을 자살로 마무리하고 제 본모습을 찾을 겨를도 없이 병천의 모습으로 살아야 하니, 수아의 고충도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었다.

창밖 너머로 하늘을 꽉 메운 눈구름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지안은 방을 나서는 기척에 수아를 돌아보았다.

생글생글 귀여웠던 얼굴은 50대의 푸근한 인상으로 변했고, 자그마한 몸은 족히 두 배는 됨직하게 두툼히 부풀었다. 같은 여자인 시현의 모습으로 변했을 때보다 희한하게 더 신기한 기분이었다.

“진짜, 봐도 봐도 똑같네요.”

“헤헤. 저도 요즘엔 제가 저인지 묘흔 님인지 정체성에 혼란이 올 지경이지 모예요? 에휴, 대체 어디에서 뭘 하고 계시는 건지…. 이대로 다른 이에게 회사를 넘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요.”

그래도 묘흔은 어딘가에 분명 살아있을 것이었다. 그는 돌아올 거란 희망이라도 있어 다행이라 해야 할까.

무거운 숨을 길게 뱉어낸 지안은 문득 생각에 잠겼다.

언젠가, 그가 너무 그립고 보고 싶어 수아에게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딱 한 번만 그의 모습으로 변신해 줄 순 없겠느냐고.

술에 취해 울며불며 부탁했지만 수아는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 월호 님은 우리 신수들의 신이십니다. 비록 곁을 떠나셨으나… 제 마음속에 신은 오로지 월호 님뿐이셔요. 이 미천한 몸으로 신의 모습을 함부로 복제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저도 월호 님이 너무 그리우나… 불가합니다. 죄송해요, 지안 님…. ’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때 수아가 제 부탁을 들어줬다면 저는 더 오래도록 마음고생을 했을 테다. 수차례 수아에게 부탁을 했을 테고, 결코 그를 즐겁게 추억하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아침 같이 드셔요. 간단하게 토스트 어떠셔요?”

“네, 괜찮아요. 저도 도울게요.”

휴대폰을 소파에 내려둔 지안은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차마 미련을 놓지 못한 시선은 두어 걸음을 디딜 때까지 질기게 휴대폰에 닿아 있었다.

“오늘 부산으로 가시는 거지요?”

“네. 그래야죠.”

12월 31일. 모란의 기일이었다. 그녀의 남동생인 무연 스님이 계신 부산의 사찰에 모란의 위패를 모셔두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의 기일도 지안은 부산에서 보낼 참이었다.

“이번엔 얼마나 있다 오셔요?”

“새해 보내고 3일쯤에 올까 해요.”

“이번엔 우진 오라버니께 태워달라 하셔요. 이제 얼굴도 많이 알려져서 기차 타구 왔다 갔다 힘드실 텐데.”

“아니에요. 부탁드리기엔 거리도 너무 멀고…. 모자 눌러쓰고 머플러로 꽁꽁 싸매고 나가면 아무도 못 알아봐요.”

“우움… 그래두….”

노릇하게 구워진 식빵이 토스트기 위로 폴짝 튀어 올랐다. 후후 불어가며 접시 위에 꺼내놓은 수아는 버터칼을 집으며 사뭇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모쪼록 조심히 다녀오셔요.”

“네, 그럴게요.”

싱긋 웃어 보인 지안은 식빵에 잼을 바르다 말고 버릇처럼 소파에 둔 휴대폰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기대감을 놓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지안을 힐끗 살핀 수아는 내심 두근대는 기색을 감추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묘흔에게서 메일 한 통을 받은 것이 1년 전이었다.

[ …해서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잘 지내고 있으니 염려 말거라.

월호 님의 몸이 회복되려면 아무래도 시일이 꽤 걸릴 듯싶구나.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지 확답은 할 수 없으니 지안 님께는 비밀로 해야 한다. 일적으로 한창 중요할 시기에 간호를 하겠답시고 또 사방팔방 찾아 나서실 분이 아니냐. 월호 님이 그리 당부하신 일이니 꼭 함구하거라.

그리고, 지안 님은 아주 오래 사실 것이다. 허니 행여라도 호인의 후손에게 단명의 저주가 내려졌던 사실은 입 밖에 내지 말거라. 혹여 쓸데없이 걱정하여 마음을 졸이실까 월호 님의 근심이 크시다.

힘들겠지만 회사는 부디 잘 부탁하마. ]

자세한 이야기를 풀자면 메일로 쓰는 데만도 하루가 꼬박 넘어갈 것이라 했다. 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기란 어려울 만큼 간략한 내용이었으나, 확실한 것은 월호 님이 죽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끔찍한 괴수로 변모하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어찌 그리되었을까, 궁금증 따위는 가질 겨를이 없었다. 그저 감사하고 감사해 하늘을 향해 수십 번 절을 하며 눈물만 쏟아냈었다.

하나 그 후로 1년이 넘도록 묘흔에게선 소식이 없었다. 정말 돌아오기는 하시려는지, 월호 님의 회복은 왜 이토록 더딘 건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하고 불안하여 피가 바짝 마르더란 말이다.

한데 지안이 내민 휴대폰 속 댓글을 보는 순간 진정 심장이 철렁였다. 물론 그가 아닐 수도 있겠으나 제 직감이 그리 말했다.

그일 것이다. 우리 월호 님이 분명할 것이다.

연방 휴대폰을 돌아보는 지안에게 뭐라도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댔지만 참아야 했다. 혹여라도 제 직감이 틀린 것이라면 낭패를 볼 테다.

“수아 님, 전화 오는 것 같은데요?”

“응? 앗! 그러네요. 먼저 드셔요.”

화들짝 상념을 깨트리고 안방으로 달려간 수아는 침대 위에서 우렁차게 울리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회사의 일로 대표 비서실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그래요. 무슨 일입니까?”

병천의 얼굴을 하고도 소름 끼치게 귀여웠던 말투가 전혀 딴판으로 근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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