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자! 우리 서 배우, 우수상 수상을 축하하며, 건배!”
“건배애-!”
500cc 맥주잔 세 개가 유쾌하게 맞부딪혔다. 동한의 우렁찬 건배사에 블루문 바를 찾은 손님들도 일제히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축하에 화답하듯 시원하게 잔을 비운 지안은 환호하는 손님들을 향해 꾸벅꾸벅 감사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2년 전 오대민 감독의 드라마로 데뷔 8년 만에 신인상을 수상한 지안은 오 감독과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춘 드라마로 올해 당당히 우수상을 거머쥐었다.
연기 대상 시상식은 이미 어제의 일이 되었지만, 어제는 드라마 팀과 회식을 하느라 블루문에서의 파티는 부득이하게 오늘로 미루어졌다. 덕분에 우수상 수상의 기쁨을 연이틀 만끽하게 된 셈이었다.
지안이 합류하기 전부터 이미 거나하게 취해있던 건호는 뿌듯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지안의 어깨를 턱 붙들었다.
“크흐! 우리 서지안이, 드디어 빛을 보네. 너 인마, 오빠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알지? 너 2년 전에 연기 때려치운다고 했을 때, 어? 내가 바짓가랑이 붙들고 설득 안 했으면….”
“아이고, 이 자식 이거 또 시작이네.”
대번에 건호의 말꼬리를 잘라버린 동한은 귀를 틀어막으며 지안을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너도 어서 귀를 막으라는 뜻이었다.
2년 전 신인상을 수상했을 때부터 시작된 건호의 주사였다. 작년엔 아쉽게 무관에 그쳐 한동안은 이 지겨운 주사도 볼 일이 없었거늘, 그녀의 우수상 수상은 잠들어 있던 건호의 주사도 깨워놓고 말았다.
귀를 막는 대신 웃음을 터트린 지안은 마른안주 하나를 집어 두 손으로 공손히 건호의 입속에 넣어주었다.
“그럼요, 그럼요. 다 이건호 님 덕분이죠.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오냐, 그래. 알고는 있으니 다행이다. 핫하하!”
“에헤이! 걸 받아주면 어쩌냐!”
동한이 뜨악한 얼굴로 테이블을 텅 내리친 순간이었다. 빨갛게 술이 오른 건호의 광대가 탱탱하게 올라붙었다. 이건호 주사 레퍼토리 2탄의 전조증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건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며 크게 목청을 울렸다.
“에잇, 기분이다! 오늘 블루문 테이블….”
“어어! 쟤 입 막아, 입!”
“술값 싹… 압!”
이쯤은 이미 예상했던 지안은 대기 중이던 손바닥으로 건호의 주둥이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건호의 목이 뒤로 꺾일 만큼 강력한 스매싱이었다.
“워우. 나이스샷.”
동한이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며 손뼉을 쩍쩍 마주쳤다. 싱긋 미소 띤 얼굴로 화답한 지안은 주둥이를 붙들고 신음하는 건호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우리 건호, 누나 덕분에 카드값 지켰다?”
“으씨… 너어 나 무시하냐. 내가 이 정도도 못 쏠까 봐!”
아랫입술을 콱 깨물고 눈을 흘기는 모양새가 나훈아 선생님 저리 가세요 수준이다. 쯧쯧 혀를 찬 지안은 꾸벅거리는 건호의 머리를 테이블에 곱게 눕혀주었다.
“알지, 알지. 대기업 차장님 능력 쩌시는 거. 한 번만 더 카드 뿌리고 다니면 결혼이고 뭐고 끝이라고 네 여자친구가 못 박아 놓은 것도 아주 잘 알고 있고.”
“…….”
취한 와중에 여자친구의 불호령은 또렷이 기억난 모양인지 건호의 입술이 얌전히 다물렸다. 그러고는 배시시 웃으며 휴대폰을 들고는 대뜸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애교를 떤다.
“으응, 현지야. 오빠야아. 뭐하구 있어떠?”
비틀거리며 문을 나서는 건호를 보며 동한과 지안은 혀를 내둘렀다.
“저 녀석은 어째 술만 마셨다 하면 혀가 1mm씩 줄어드냐, 소름 끼치게.”
“그러게나 말이에요. 어우. 징그러, 정말.”
통유리 창밖에서 몸을 배배 꼬며 통화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팔뚝에 소름이 솟구쳤다. 이건호도 연애를 하면 저렇게 되고 마는구나, 놀라울 따름이다.
뭐, 보기 좋기는 하다만.
미소를 머금으며 그만 시선을 거두려던 때였다. 문에 달린 풍경이 딸랑거렸다. 들어선 네다섯의 무리는 지안도 아는 얼굴들이었다.
주여경과 그 추종자들.
“엇… 쟤는 또 왜….”
동한의 표정이 대번에 난감해졌다. 그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지안과 여경을 번갈아 살피는 눈동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쁘게 오갔다.
하지만, 동한의 걱정이 무색하게 주여경은 별안간 주춤거리다 돌아섰다. 지안과 눈이 마주친 직후였다. 영문도 모르고 여경에게 등 떠밀린 무리가 다시 우르르 문을 나섰다.
“뭐야….”
주여경 답지 않은 싱거운 후퇴에 동한은 멀뚱히 눈을 깜박였다.
“왜 저러냐?”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창밖의 여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안은 헛숨을 뱉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요. 쟤 좀 이상해졌어. 언제부턴가 나만 보면 도망가기 바빠요. 내가 무슨, 사채업자라도 된 기분이라니까?”
그러니까 그게 한 2년은 됐나…. 언젠가 돈 많은 영감 하나 물었냐며 시비를 걸었던 날 이후로 이상하게 저를 피하던 여경이었다.
처음엔 말을 섞기 싫어 저러나 싶었지만, 저만 보만 겁에 질린 얼굴로 꽁지를 내빼는 게 아무래도 이상하더란 말이다. 이유를 물어보려 해도 쏜살같이 도망가버리니 그만 포기한 지도 1년이 넘었다. 어쨌거나 덕분에 말씨름할 일은 없으니 저야 손해 볼 것도 없었다.
“흐음…. 뭐지?”
더불어 궁금해진 동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를 가만 바라보던 지안은 넌지시 물었다.
“선배는 어때요?”
“응? 나 뭐?”
“아니… 아직 주여경 맘에 두고 있나 하고.”
“야아. 언제 적 얘기를 아직 하고 있냐?”
지안의 눈초리가 동한의 속내를 캐내 보려는 듯 가늘어졌다. 작년 이맘때쯤 이혼한 여경을 혹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혹여 두 사람이 잘된다면 여경과의 케케묵은 감정도 이제 그만 풀어야 할 텐데….
한참 앞선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였다.
“그리고 나, 실은 만나는 사람 있어.”
“…헐.”
생각지도 못했던 고백에 지안의 턱이 떡 벌어졌다. 몇 초간 동그랗게 커진 눈만 깜빡이던 지안은 허망한 얼굴로 물었다.
“진짜? 아니, 진짜로? 아, 왜 그걸 이제 말해요!”
“이제 막 시작한 거야. 안 그래도 오늘 말하려고 했고.”
동한이 머쓱하게 웃으며 뒤늦게 자신의 연애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만남과 썸,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스토리를 풀어놓는 동안 그의 얼굴엔 꽃이 만개했다.
“와… 이래놓고 건호한테 뭐라 그런 거예요?”
“에이, 난 그래도 혀는 안 짧아진다. 엇, 잠시만.”
마침맞게 동한의 휴대폰이 울렸다. 순식간에 분홍빛으로 돌변하는 얼굴색만 봐도 상대가 누군지 알만도 하다.
“응. 집에 들어갔어? 에구… 피곤하지?”
“맙소사….”
의미 없이 들고 있던 마른안주를 툭 떨군 지안은 얼빠진 얼굴로 헛숨을 뱉었다.
2년 전 싱가폴로 출장을 떠났던 이건호는 덜컥 예비신부를 데려오고, 동한마저 결혼을 전제로 진지한 만남을 시작한 애인이 생겼단다.
“와아, 다들 나만 빼고 이러기야, 진짜?”
하… 외롭다. 이미 충분히 외로웠지만 격렬하게 더 외로워졌다.
**
“사신동 사신마트 사거리요.”
이젠 제법 이름도 알렸고 통장도 두둑해졌지만 지안은 여전히 옥탑과 그의 펜트하우스를 오가며 지냈다. 수아는 모란이 세상을 떠난 후 펜트하우스로 완전히 거취를 옮기기를 권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느닷없이 구슬을 삼키고 동물농장 완전체와 맞닥뜨린 날부터 그와 첫날밤을 보냈던 날까지, 그와의 추억이 곳곳에 남은 곳이었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그를 놓을 수 있을 날이 오면 그때쯤에나 떠날 수 있을까….
물론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를 향한 지안의 마음은 여전히 제자리였다.
30년 제 인생에서 고작 백일 남짓. 생각해보면 그와 함께했던 시간은 몹시 짧았다. 하지만 그를 품은 마음의 깊이는 시간에 비례하지 않았다. 가끔은 저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질기기도 한 그리움이었다.
아무래도 천하 미색의 구미호에게 제대로 홀려버린 탓이겠지. 하여튼 쓸데없이 섹시하고 요망한 구미호 같으니.
취기는 꽤 올라왔지만 어쩐지 눈은 감기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밤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혹시, 서지안 씨 아니세요?”
택시에 오를 때부터 고개를 갸웃거리던 기사님이 정차한 틈을 타 결국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지안은 어여쁘게 미소 지었다.
“네, 맞아요.”
“오, 역시 맞구나! 이야, 택시 10년 했지만 연예인 태우는 건 처음이네요. 우리 아들이 엄청 팬이에요.”
“와, 정말요?”
50대 중반 즈음으로 보이는 푸근한 인상의 기사님은 아들을 위한 사진 촬영을 정중히 부탁하셨다. 지안은 고민도 않고 흔쾌히 기사님의 휴대폰에 헤벌쭉 웃는 얼굴을 남겨주었다.
물론 시뻘겋게 술이 올라 다소 바보처럼 찍힌 사진 한 장이 소중한 팬심을 등 돌리게 만들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디를 가나 저를 알아봐 주고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은 너무도 감사한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택시에서 내려 비틀비틀 계단을 오른 지안은 옥탑 평상에 드러누워 반짝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 오늘 하루도 잘 살았다.”
신나게 씩씩하게 웃으며 잘 견뎠다. 물론 저만 빼고 모두가 핑크빛이라 고것 하나쯤은 서글프긴 했지만, 좋은 사람들과 함께였기에 몹시 즐겁기도 했다.
아직은 캄캄한 하늘을 홀로 바라볼 때면 은근슬쩍 우울감이 차오르곤 하지만 웃으려 노력했다. 저 무수한 별 중 하나가 그라 생각하며.
이젠 괜찮다고, 난 아주아주 잘 살고 있다고. 그러니 부디 내 걱정은 말라고.
반짝이는 별 하나를 콕 집어 한참을 바라보던 지안은 문득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참.”
블루문에서 한창 파티를 벌이던 와중에 우진에게 메시지가 왔었다. 얼마 전 찍은 화보가 나왔다는 연락이었다.
“아… 긴장되네.”
국내 유명 디자이너의 드레스 화보집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영광이었으나, 막상 결과물이 나왔다 하니 사람들의 반응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몸매가 오롯이 드러나는 타이트한 머메이드 스타일과 미묘하게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는 야릇한 시스루, 한껏 모은 가슴골이 훤히 드러나는 오프숄더 스타일 등등.
고품격 섹시라는 컨셉에 걸맞게 우아하나 노골적인 의상들은 그녀로선 여태 시도해본 적 없던 도전이었다.
동한과 건호는 눈 둘 곳을 찾지 못하면서도 엄지를 척 세워주긴 했지만, 다분히 팔이 안으로 굽은 지인들의 주관적인 견해들일 뿐이었으니….
지안은 긴장감에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포털 사이트를 열었다. 검색창에 ‘서지안 화보’를 찍어 넣자 화보의 메인 컷으로 업데이트된 기사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하나둘 기사를 열어 댓글을 확인할수록 입꼬리가 실룩댔다. 수백 개가 넘어가는 댓글수에 먼저 놀라웠고, 대부분이 호의적인 반응이라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오… 섹시하대. 웬일이야.”
만족스레 쿡쿡거리며 무수한 댓글 페이지를 계속해서 넘기던 때였다.
“어…?”
쑥스럽게 웃음이 걸려있던 눈이 별안간 가늘어졌다. 더불어 바짝 좁아진 미간이 사뭇 놀란 듯 미세하게 경련했다.
휴대폰 액정 속으로 들어갈 듯 뚫어지게 뭔가를 들여다보던 지안은 어느 순간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이… 이게….”
맺지 못한 혼잣말이 하얀 입김 속에 바스러졌다. 가뜩이나 술기운에 크게 박동하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설마. 그럴 리가.
지안은 세차게 고개를 털어낸 후 다시금 휴대폰 액정을 똑바르게 들여다봤다. 하지만,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잘못 본 것이 아니다.
“허.”
외마디를 토해낸 지안은 입술을 덥석 틀어막았다.
jsw*** 아… 이건 너무 야한데….
쿵. 요동치던 심장 박동이 발등까지 철렁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