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95화 (95/106)

95.

다시 봄이 왔나 싶게 오늘따라 햇볕이 따스했다. 창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키고 휴대폰을 집어 든 지안은 막내 PD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이제 괜찮아요. 저 때문에 일정도 꼬였을 텐데… 죄송해요, PD님. …네, 오늘부터 바로 나갈 수 있어요.”

통화를 마치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시쯤 세트장으로 나오라 했으니 아침 겸 점심을 먹을 시간은 충분할 것이었다.

입맛이 통 없다던 그를 위해 이것저것 만들어 보느라 냉장고가 가득 차 있었다. 이대로 두자면 아깝게 썩고 말 텐데….

쌀을 양껏 씻어 안쳐놓고 채소를 몽땅 꺼내어 다듬었다. 볶음밥이라도 만들어 냉동고에 보관하면 한동안은 간편히 끼니를 때울 수 있을 테다.

밥이 되는 동안엔 청소를 했다. 집이 어찌나 넓은지, 반도 채 마무리 짓지 못했는데 밥솥이 용솟음치듯 증기를 내뿜고 있었다.

“아, 진 빠져.”

배가 고팠다. 뱃가죽이 등가죽에 찰싹 붙을 지경이었다. 결국 못다 한 청소는 뒤로 미루고 주걱을 들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밥을 낑낑대며 볶고 먹을 만큼 덜어 식탁에 앉았을 때였다. 멀찍이 현관에서 기척이 들렸다.

저도 모르게 숟가락을 쥔 손이 흠칫 멎었다.

설마. 아니, 혹시….

가까워지는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발소리가 들렸을 때부터 이미 아닌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방 가벽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가벽 너머로 빠끔 내민 얼굴은 그일 리 없다.

“엇, 지안 님….”

수아의 얼굴엔 갖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슬픔, 걱정, 의아함. 그녀도 주인을 잃어 슬플 것이었고, 지안의 상태가 못내 걱정되었을 테다. 한데 걱정과 달리 멀쩡히 앉아 야무지게 볶음밥까지 만들어 먹고 있으니 의아할 수밖에.

지안은 방긋 웃으며 물었다.

“식사하셨어요?”

어리둥절하게 눈만 깜빡이던 수아는 멍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 아직….”

“잘됐다. 밥 엄청 많이 했거든요. 같이 먹어요.”

그러며 자리에서 일어선 지안은 그릇에 볶음밥을 가득 담아 수저와 함께 맞은편 자리에 놓았다. 주춤주춤 다가온 수아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오늘은 시현 선배 촬영 없어요?”

“이따 오후에요. 1시라던가….”

“아, 그럼 같이 가면 되겠다. 저도 오늘부터 나가기로 했거든요.”

“…벌써요? 며칠만 더 쉬시지 않구….”

적당히 물을 채운 잔이 수아의 앞에 놓였다. 곧장 숟가락을 든 지안은 넘치게 퍼 담은 밥을 입안 가득 밀어 넣었다.

“뭐라도,”

다소 늦은 대답이 그마저도 쉼표가 생겼다. 우물우물 몇 차례 밥알을 씹은 후에야, 지안은 고개를 떨구며 끊어진 말을 이었다.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아서….”

“…….”

입안에 짠맛이 감돌았다. 흘린 줄도 몰랐던 눈물이 입술 사이에 스며있었다. 그가 없는 식탁에 침묵이 감돈다. 답답하게 숨이 조였다. 아니, 너무 무식하게 밥을 밀어 넣은 탓일 테다.

제대로 씹지도 않은 밥알을 물과 함께 꿀꺽 삼킨 지안은 흘러내린 눈물을 모른 척 히죽 웃었다.

“드세요. 솜씨는 좀 없지만 먹을 만은 해요.”

활짝 열어둔 창밖으로 느닷없이 비가 쏟아졌다.

“엇. 갑자기 웬 비야. 쨍쨍하더니.”

화들짝 놀란 지안은 얼른 달려가 창문을 닫았다.

애초에 봄날처럼 화창한 적이 없었던 하늘은 무슨 소리냐 고개를 갸웃거릴 일이었다.

**

눈을 뜨니 천옥문 앞이었다. 애타게 저를 부르는 묘흔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얀 눈알을 깜박이며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천옥문 문지기의 괴이한 얼굴도 또렷이 보였다.

어찌 이 모든 것을 인지할 수 있을까. 아직 괴수가 된 것이 아니었던가.

한동안은 멍했다. 저를 붙들고 천옥문을 넘는 묘흔의 손에 끌려가면서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 걷고는 있으나 다리의 감각은 무뎠고, 정신은 흐리멍덩했다.

얼마쯤을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 정신이 조금씩 되돌아왔다. 하나 몸은 여전히 힘겨웠다. 그도 그럴 것이, 사방이 불구덩이였으니 몸이 온전할 리 없었다.

“하아….”

발밑으로 시뻘건 용광로가 강물처럼 유유히 흘렀다. 그 위에서 덜컹거리는 구름다리는 곧 끊어질 듯 아슬아슬했다. 이 묵직하고 긴 다리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라곤 듬성듬성 걸려있는 얄팍한 철삿줄이 전부였다.

“윽….”

발을 디딜 때마다 긴 구름다리가 울렁울렁 물결쳤다. 연신 이명이 울리고 눈앞이 느리게 빙글 돌았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수차례 무릎이 푹푹 꺾였다. 그리 주저앉아 구름다리를 이룬 오동나무를 짚으면 용광로의 뜨거운 열기에 손바닥이 타들어 갔다.

이런 씹, 빌어먹을….

된소리가 절로 씹혔다. 차라리 용광로에 몸을 던지는 것이 수백 배는 안락하리라.

“그러니까, 네가….”

월호는 빠져 죽지도 못하게 제 팔을 꽉 붙든 묘흔을 흐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숨을 잡아먹는 열기에 내뱉는 음성이 힘겹게 끊어졌다.

“이 좆같은 곳을, 수차례 드나들었다… 이 말이냐.”

묘흔은 이마에 비 오듯 흐르는 땀을 훔치며 버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턱턱 막힐 만큼 힘에 겨운 것은 묘흔도 마찬가지였다.

“예에. 그리하였지요. 이곳의 날로… 150일은 족히, 드나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월호는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대체 왜, 그 짓거리를…. 아… 씹, 젠장.”

또다시 무릎이 풀썩 꺾였다. 이 짓도 수십 번을 반복하니 이젠 욕지거리만 튀어나왔다. 무너지는 그를 따라 주저앉은 묘흔은 곧장 일어서지 못하고 숨을 골랐다.

“이놈의 미천한 무릎이나마, 헤엑… 보탬이 될까 하여, 함께… 아유, 말 좀 시키지 마십시오.”

아니, 말을 할 기운은 있으십니까.

면박을 주는 눈초리가 제법 뾰족하다. 저도 힘이 들어 죽겠다는 것이었다.

“하… 대체….”

그러니까 대체 무슨 영문인지를 모르겠다. 몸은 줄줄 녹아나는데 걸음을 하는 목적도 명확히 말을 해주지 않으니 저야말로 짜증이 치솟아 죽겠다.

“내가 왜… 이 짓을 해야 하는지, 알기라도 해야 덜 억울할 거 아냐.”

“가 보면 다아… 아시게 될 터이니, 조금만 더 힘을 내십시오. 이제 다… 다 왔습니다.”

“…다 왔다는 소리만, 골백번을 했다.”

못 들은 척 몸을 일으킨 묘흔은 필사적으로 월호의 팔을 끌어당겼다.

“자자, 다시 걸음을, 하시지요.”

“아… 미치겠네.”

월호는 묘흔의 손에 팔만 길게 당겨진 채 눈을 가늘게 떴다. 가야 할 길과 걸어온 길을 차례로 돌아보자니 막막함을 금할 길이 없다.

가만 보니 염라에게 가는 길인 듯싶은데 염라성의 성벽은 아직도 손바닥만큼 작아 보이고, 예까지 온 길을 멀찍이 보자면 코딱지만 한 점 하나만 달랑 찍혀 있다.

“월호 니임, 어서요, 어서.”

하아… 그래. 코딱지보다야 손바닥이 가까운 것이겠지. 젠장할. 이젠 나도 모르겠다. 예까지 왔으니 억울해서라도 어디 한 번 가보기나 하자. 대체 이놈이 저를 염라 앞에 데려가 무엇을 어찌할 작정인지.

한숨을 폭 내쉰 월호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고통은 수차례 의지를 좀먹었으나 버티고 또 버텼다. 느닷없이 구름다리가 끊어지고 용광로 속에 듬성듬성 박힌 징검다리를 맞닥뜨린 순간엔 진정 묘흔의 목을 조르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이곳의 시간으로 다리를 건너온 지 꼬박 열흘. 음산하게 위용을 떨치며 구름을 뚫고 치솟은 염라성의 성문이 드디어 눈앞에 펼쳐졌다.

“이제 진정 다 왔습니다. 아휴, 나 죽네…. 자, 어서. 어서 드시지요.”

무릎을 짚은 채 숨을 고르고 있자니 묘흔이 팔을 당긴다. 고개가 먼저 들렸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어느새 성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하아….”

지친 숨이 툭 터져 나왔다. 아니, 어쩌면 조금 황망한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득하게 펼쳐진 길의 끝, 높다란 단상 위에 삐딱하게 기대앉은 염라가 보인다.

하나 월호의 시선을 황망하게 붙든 것은, 염라 앞에 무릎을 꿇은 아비의 등이었다.

**

똑같은 일상이었다.

우진을 만나 출근을 하고, 현장에선 무탈하게 촬영에 임했다. 주로 그의 펜트하우스에서 수아와 함께 지내다가 주말엔 옥탑으로 건너가 부쩍 야위어가는 모란을 살폈다.

그가 없는 세상이 생각보단 힘들지 않았다. 웃기도 곧잘 웃었고 밥도 꼬박꼬박 잘 먹었다. 다만 혼자 남겨진 시간엔 여지없이 숨이 막혀 가슴팍을 툭툭 두드려야 했다. 혼자일 때와 여럿일 때의 감정이 너무 극명했던 탓인지, 어느 순간 정신이 조금 피폐해졌다.

아… 나 괜찮은 게 아니었구나.

그에게 미안할 만큼 퍽 괜찮구나 싶었던 생각이 그저 바람이자 억지였음을, 드라마 촬영이 모두 끝난 후에나 깨달았다.

마지못해 촬영장에 나가서라도 하루를 버틸 수 있게 해주었던 일상이 갑자기 공허해진 탓이었다.

결국 숨겨뒀던 우울감이 겉으로 드러났다. 입맛은 떨어졌고 불면증이 심해졌다. 잠 못 드는 날이면 그의 옷가지에 코를 박고 눈물을 흘리다 새벽녘에나 겨우 지쳐 잠들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던 그해 12월의 마지막 날, 숨이 끊어져 가던 모란은 묘한 말로 유언을 남겼다.

‘ 지안아. 정신 단디 챙기라. 어립게 살리준 목숨 아이가… 우야든동 살아야 된데이. 알았나. ’

순간 피폐하게 죽어있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할머니는 다 알고 계셨구나. 언제부터, 어떻게 아셨을까. 놀랍고 의아하다 결국 남은 것은 죄송함뿐이었다.

그간 잘 견뎌왔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던가 보다. 당신의 숨이 끊어져 가는 와중에도 내 걱정만 하다 그리 가셨을 만큼, 모란의 앞에서도 힘든 모습을 보이고 말았나보다.

덜컥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그의 희생으로 얻은 생을 저는 너무도 한심하게 소비해버리고 있었다.

그제야 곁을 돌아보았다. 그와 함께 묘흔마저 홀연히 사라져버렸으니, 수아의 상실감은 저보다 더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챙기느라 슬퍼할 겨를도 없는 수아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워졌다.

뒤늦게야 깨달음을 얻은 후론 방법을 바꾸었다. 그를 아프게 그리워하는 대신, 즐겁게 추억하기를 택했다.

호랑이 님을 찾아가 그의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기도 하고.

‘ 그 새끼가 참, 그 옛날서부터 오지게 먹어주는 낯짝이었제. 기방에 함 떴다 허면 고놈 낯짝 귀경 한번 허것다고 종년들까지 우르르 겨 나와서는, 쌩지랄 염병을 떨었당게. ’

‘ 와… 정말요? ’

‘ 암만! 물론 나야 참말로 이해는 안 되는디… 암튼지간에 그 낯짝으로 좆질꺼정 허벌나게… 근디 아가. 갸가 참말로 좆질을 그만치 기똥차게 허드냐? 아니, 내사 박혀본 일이 읎응게 궁금혀서 그라제. 참말 그리 잘혀? ’

‘ 어우, 장난 아니에요. ’

‘ 아아, 그려…? 허허, 썅…. 상대적 박탈감 오져브네. ’

제 기사에 그가 남겨놓은 무수한 흔적을 뒤적이다 실없이 웃기도 하며.

jsw*** 악성 댓글을 달 시간에 어떻게 하면 남은 생을 더욱 보람차게 살 수 있을지 고민을 좀 하거라.

jsw*** 실물을 아주 가까이서 보았는데, 진정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다.

물론 저를 차갑게 밀어냈던 날, 댓글에 몰래 남겨두었던 그의 진심에 잠깐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jsw*** 보고 싶다. 서지안.

무너지지 않으려 악착같이 견뎠다. 그의 목숨과 바꾼 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 매일매일 다짐했다.

열심히 살아야지. 그와 모란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이왕이면 아주 잘.

우선 밥을 먹었다. 더불어 운동을 시작했다. 오디션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뛰었다. 오 감독의 드라마로 좋은 성과를 얻어 그런대로 이름도 알렸다.

바쁘게 살아가는 와중에도 그는 늘 가슴 속에 함께였다. 아프고 힘들었던 그란 존재는 시간이 흐를수록 외려 열심히 살아갈 버팀목이 되었다.

그렇게 2년.

[ 서지안, MBS 연기 대상 우수상 수상 ]

앞만 보고 달려온 시간이 벌써 그렇게나 흘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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