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숍에 들러 치장을 마치고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였다.
“누님, 저기 맨 안쪽에 문 하나 보이시죠? 거기가 누님 대기실이라니까 먼저 가 계세요. 저는 항문 좀 열고 가겠습니다.”
“응, 그래. 천천히 싸구 와.”
며칠 전시현의 행세를 했다고 제법 능숙해진 수아는 우아하게 손을 흔든 후 황급히 잰걸음을 걸었다. 조금 전부터 가방 속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전시현이 아닌 자신의 휴대폰이 울린다는 것은 필시 묘흔의 전화라는 뜻이었다.
매니저가 알려준 맨 안쪽 문을 서둘러 열고 들어선 수아는 아무도 없는 내부를 휘둘러보곤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묘흔 님. …오늘 제작발표회가 있어 나와 있습니다.”
묘흔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코가 맹맹하게 잠긴 것을 보니 또 한바탕 눈물을 훔친 모양이었다. 수아는 걱정스레 물었다.
“어찌 그러셔요? 혹, 월호 님 통증이 더 심해지신 것이어요?”
촬영이 비는 틈틈이 펜트하우스를 찾아가 그의 상태를 봐왔었다.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는 그의 모습에 눈가가 마를 날이 없었던 것은 수아도 마찬가지였다.
- …약효가 너무 빨리 떨어지는 것 같아 걱정이구나. 내가 곁을 잠시 비워야 할 듯싶은데….
근래 묘흔이 율령을 찾아 헤매느라 이따금 그의 곁을 비우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닷새밖에 남지 않았으니 묘흔도 속이 바짝 탈 것이었다.
수아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20분 후면 제작발표회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1시간쯤 진행되려나. 아… 어쩌지.
“아프다 하고 쏙 내빼버릴까요?”
꾀병이라도 부릴까 고심하던 와중에 묘흔이 말했다.
- 우선 우진이 편에 수면초라도 좀 보내거라. 가능한 한 많이, 효과가 가장 센 걸로.
“아! 예, 그리하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수아는 서둘러 대기실 문을 잠갔다. 화장실에 다녀온다던 매니저가 문을 열어젖히면 낭패를 볼 테다. 가능한 한 많이, 효과가 가장 센 초를 만들자면 기를 모으는 데만도 5분은 걸릴 것이었다.
“어휴, 우리 월호 님 가실 날이 이제 닷새밖에 안 남았는데 여기서 이러구 있으니…. 아구 속상해, 증말.”
그의 명이 있었다곤 하나, 시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사실 몹시도 힘들었다. 한시라도 더 그를 눈에 담아두고 싶어 애는 타고, 매일매일 핼쑥해져 가는 지안을 곁에 두고도 부둥켜안고 울 수조차 없으니 이 또한 수아에겐 지옥이었다.
코끝이 찡해졌다. 수전을 튼 것처럼 대번에 눈물이 쏟아졌다. 혹시 몰라 매니저에게 문자를 찍으면서도 두어 번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야 했다.
[ 나 너무 피곤해서 딱 10분만 좀 쉴게. 방해하지 말⎥]
그 순간이었다.
“……!”
별안간 움직임이 멎은 손가락이 키패드 위에서 흠칫 굳었다. 갑작스레 시야의 상단에 아른거리는 무언가에 절로 호흡이 멈추었다. 아니, 이미 그전. 정적을 뚫고 또각 내딛던 구둣발 소리에 등줄기가 먼저 뻣뻣해졌다.
수아는 동그래진 눈을 조심스레 치떴다.
“…허어!”
맙소사.
툭 놓쳐버린 휴대폰이 발등을 내리찍었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수아는 뒤에 있던 소파 테이블에 우스꽝스럽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허, 어, 업….”
아아. 어떡하지. 으아, 어떡하면 좋아!
머릿속이 하얘졌다. 펄떡거리는 심장 소리에 온몸이 둥둥 울렸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헛숨만 삼키던 수아는 파티션 너머에서 새파래진 얼굴로 걸어 나온 그녀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지, 지안 님….”
지안의 손에 들려있던 옷가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
“포즈 한 번 취해주세요!”
카메라 플래시가 사방에서 펑펑 터졌다.
“이쪽이요! 손 한 번 들어주세요.”
“시현 씨, 여기도 좀 봐주세요!”
웃고 있으나 웃는 것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없는 정신에 이쪽저쪽에서 한꺼번에 주문이 쏟아지니 눈앞이 핑 도는 기분이었다.
제아무리 다재다능한 토끼라지만 이런 큰 무대에 서서 주목받는 일은 처음이라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온 신경이 곁에 서 있는 지안에게 쏠려 있어 도통 집중이 되지 않았다.
“자, 포토 타임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기자님들 착석해 주시고요. 진행 요원분들 무대에 의자 세팅 부탁드립니다.”
마침맞게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었다. 2초만 늦었더라도 수아는 어지러운 정신을 붙잡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진행 요원 두어 명이 빠르게 무대에 올라와 나란히 의자를 놓았다. 함께 무대에 오른 이들을 따라 제 자리에 착석할 때였다.
“지안 씨, 괜찮아요?”
소란한 와중에 지안의 곁에 서 있던 장신재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힐끗 옆쪽을 살피자 신재가 지안에게 생수병을 건네고 있었다. 애써 미소를 띠는 지안의 입꼬리가 낚싯바늘에 걸린 양 어색하게 경련했다.
“많이 긴장했나 봐요. 얼굴이 창백하네.”
신재는 긴장 풀라며 살갑게 다독였지만, 지안의 얼굴이 창백해진 이유는 이 수많은 카메라 탓이 아닐 것이었다.
아흐… 이를 어찌하누….
수아는 초조하게 한숨을 삼키며 입안의 여린 살을 꾹 깨물었다.
‘ 지, 지안 님…. ’
‘ 이… 이, 이게, 어떻게…. ’
어서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해서 대기실 문에 함께 붙어있던 전시현과 서지안의 이름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었다. 파티션 너머에서 지안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으리라곤 더욱이 생각지도 못했다.
‘ 수아, 님… 이셨어요? ’
지안의 눈 주위가 이미 벌겋게 변해있었다. 제 정체는 둘째치고, 묘흔과의 통화 내용도 모두 들었을 것이었다.
‘ 아… 아아… 그… 그게…. ’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거렸다. 묘생 백 년 동안 그토록 당황한 것은 진정 처음이었다.
‘ 흐읍…. ’
말도 못 하고 눈물만 주룩주룩 쏟아내다가 저도 모르게 지안의 목을 끌어안고 엉엉 울고 말았다.
‘ …하. 이게 대체… 대체, 언제부터…. ’
목이 붙들린 채 우두커니 서서 같은 질문만 반복하던 지안은 어느 순간 고개를 털어내곤 제 몸을 떼어냈다.
‘ 아, 아니. 자, 잠시만요. 수아 님 사정은, 조금만 이따 가요. ’
지안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지안은 이미 뭔가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눈물을 갈쌍이고 있었다.
‘ 통화는, 그건 무슨 얘기예요? 영감님이 왜… 어디, 아프신 거예요? ’
조심스레 묻는 목소리에 불안감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제 양팔을 꽉 붙든 지안의 손은 안쓰러울 만큼 떨리고 있었다.
‘ 흡… 으윽…. ’
손등을 꾹 깨물고 울음을 삼키자, 그녀는 울먹이며 재촉했다.
‘ 수아 님, 제발…. 제발 말해줘요.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대체! ’
더는 도리가 없었다. 머리가 새하얘져 도무지 둘러댈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 흐으읍… 지안 님, 어쩜 좋아요…. 우리 월호 님… 월호 님이…. ’
결국엔 하나부터 열까지, 제가 아는 모든 것을 토해냈다. 두서없이 쏟아내다가 감정이 격해져서는, 지안 님 때문에 월호 님을 잃게 되었노라 원망까지 하고 말았다.
그러다 끝내는, 지안의 다리를 붙들고 엉엉 애원을 했다.
‘ 우리 가엾은 월호 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손이라도 한 번만 잡아주시어요. 너무 아프시지 않게… 한 번만… 흐어엉! ’
통곡에 가까운 고백을 묵묵히 듣고 있던 지안은 끝끝내 말이 없었다. 소리 없이 또르륵 눈물을 흘리며, 아슬아슬하게 숨만 겨우 뱉어내며, 전시현의 매니저가 잠긴 문고리를 달각달각 돌릴 때까지 그렇게 목석처럼 굳어 있었다.
지안이 비틀거리며 대기실을 나서던 순간에야 정신이 번뜩 들었다.
혹여 이대로 펜트하우스에 찾아가시면 어쩌지, 월호 님이 어떤 마음으로 지안 님을 모질게 밀어냈는데… 내가 다 망쳐버렸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지.
심장이 쫄려 혼쭐이 났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안은 펜트하우스로 향하지 않고 이 무대 위에 있었다. 물론 산송장 같은 얼굴을 하고서.
아아. 조마조마해 죽겠다. 저 상태로 인터뷰를 제대로 할 수나 있을까, 행여 쓰러지면 어쩌나, 불안하고 신경이 쓰여 숨도 제대로 못 쉬겠다.
“자,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드라마 ‘너나들이’의 제작발표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상념을 뚫고 장내에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시는 방향에서 왼쪽부터 오대민 감독님, 유연 작가님, 그리고 너나들이의 주역분들이 쭉 앉아 계시는데요. 자, 그럼 감독님부터 마이크 들어주시고요.”
감독과 작가의 인사가 끝난 후 극중 시현의 파트너인 남자 배우가 마이크를 쥐었다. 그가 캐릭터 소개를 이어가는 동안, 수아는 애써 웃는 낯을 유지하며 수차례 곁자리를 힐끔거렸다. 허벅지 위에 다소곳이 놓인 지안의 손이 하얗게 질린 채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다음은 전시현 배우님. 캐릭터 소개 부탁드립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전시현입니다.”
화들짝 정신을 끌어온 수아는 외워온 대사를 기계처럼 줄줄 읊었다. 제법 여유가 넘쳐 보였으나, 실상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만큼 혼이 쏙 빠져버린 상태임은 그 누구도 몰랐을 일이었다.
하나 그 와중에도 기자들의 질문에는 최대한 천천히, 쓸데없는 말까지 지껄여가며 시간을 끌었다. 제가 마이크를 놓으면 지안이 배턴을 이어받을 터였다. 저렇게나 손이 덜덜 떨려서는, 마이크를 제대로 쥐지도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수아의 노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버릇처럼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던 사회자에게 그녀의 속사정까지 파악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과 배려심은 없었다.
“자, 전시현 배우님 질문은 여기까지 받겠습니다. 다음으로 서지안 배우님 마이크 받아주실까요?”
마지못해 지안에게 마이크를 넘기는 순간 괜히 심장이 벌렁벌렁 요동쳤다. 그녀가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정적이 깔리면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찰나의 고민이 거기까지 뻗쳐있었다.
한데, 걱정이 무색하게도 지안은 부드럽게 웃으며 마이크를 들었다. 조곤조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유연하고도 차분했다.
“안녕하세요. ‘단미’ 역을 맡은 서지안입니다. 음… 우선 단미, 라는 인물은 이화그룹의 고명딸로 오빠들의 집착 같은 사랑을 받는….”
아휴우우….
안도의 한숨이 절로 터졌다. 쫄깃쫄깃하게 수축했던 심장이 일시에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직전까지 곧 쓰러질 듯 위태롭던 심신을 순식간에 컨트롤하는 그녀가 경이롭기까지 했다.
“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안의 도움 없이 일찍 독립을 해서….”
수아는 그제야 안심하고 바닥에 두었던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입안이 바싹 말라 쩍쩍 갈라질 지경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밝고, 명랑해 보이지만….”
서너 모금을 쉬지 않고 삼키던 때였다.
갑작스레 장내가 웅성거렸다. 일순간 어리둥절하게 서로서로 눈치를 살피던 기자들이 느닷없이 카메라를 높이 들고 플래시를 펑펑 터트려댔다.
입안에 머금었던 물을 꿀꺽 삼킨 수아는 기자들의 시선이 우르르 쏠린 지안에게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허.”
외마디 탄식이 따끔하게 목을 긁고 툭 터져 나왔다. 지안의 볼 위로 소리도 없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작 그녀는 자각하지도 못했던 듯, 뒤늦게야 눈을 고쳐 뜨고 얼른 볼을 닦아냈다.
“아. 죄, 죄송합니다.”
그때까지도 의아하게 앞만 바라보던 무대 위의 시선들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엇, 지안 씨.”
당황한 신재가 재킷 주머니에서 행커치프를 뽑아 지안에게 건넸다. 그것을 건네받은 지안의 손은 다시 제멋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 왜 이러지.”
삽시간에 맹맹해진 목소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실없이 웃어보려 하지만, 순간 평정심을 잃어버린 그녀는 본인조차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지, 지안….”
안타까이 내뱉던 수아의 목소리는 지안에게 닿지 못하고 공중에서 흩어졌다. 그녀가 결국 완전히 무너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버린 탓이었다.
“하…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웅성대던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자비 없는 플래시가 사방에서 번쩍댔다. 그 소란 속에서 지안은 위태롭게 비틀대며 황급히 무대를 벗어났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아… 어뜩해….”
당혹감에 굳어버린 수아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멀어지는 지안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