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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는 밤-89화 (89/106)
  • 89.

    알람을 끄고 일어난 지안은 부지런히 출근 준비를 했다. 오늘은 제작발표회가 있는 날이었다. 그간은 세트장에 틀어박혀 촬영만 하느라 새 작품에 들어간 사실이 크게 실감 나지 않았었다.

    드디어 많은 기자 앞에서 작품을 소개하는 날이 되니, 기분 좋은 긴장감에 어쩐지 배 속이 근질거리는 기분이었다.

    “할머니, 나 다녀올게요!”

    샷시문 안으로 활기차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자 우진이 웃는 낯으로 묵례했다. 지안은 엷게 미소를 띠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우진 님.”

    그가 떠나고도 우진은 여전히 제 곁에 있었다. 우진을 보면 자꾸만 그가 떠올라 이제 그만 오시라 부탁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 월호 님과는 상관없이, 그냥 제가 지안 님을 모시고 싶어서요. 안 되겠습니까…? ’

    처음엔 곤란하고 힘들었지만 예민하게 생각하지 말자 마음을 다잡았다. 한편으론 그와의 연결고리가 하나쯤은 남아 있어 다행인 듯싶기도 했다. 우진마저 떠났더라면, 그와의 지난 시간이 아마도 꿈처럼 느껴졌을 테다.

    화도 나고 아팠지만 잊고 싶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한심하다 할지 몰라도 제겐 첫사랑이니까. 꿈이라 치부하고 쉽게 잊기에는 생각보다 깊은 마음이었나 보다.

    “오늘은 숍으로 가신다고 했죠?”

    “네. 제작발표회니까 예쁘게 꾸며야죠.”

    “으아. 제가 다 긴장되네요.”

    저는 베테랑인 척 껄껄 웃어 보였지만 금세 숨이 찼다. 긴장감에 단전이 자꾸만 수축하니 시도 때도 없이 심호흡을 하게 된다.

    후우…. 숨을 깊이 내쉬며 공연히 손가락을 꼬물대던 지안은 슬쩍슬쩍 룸미러에 비친 우진을 살폈다.

    기분 좋은 긴장감 탓일까. 오늘은 어쩐지, 묘하게 용기가 생긴다.

    “저, 우진 님.”

    우진이 눈을 들어 룸미러를 들여다봤다. 잠시간 뜸을 들이던 지안은 애써 미소를 띠며 물었다.

    “영감님은… 잘 지내시죠?”

    지난 보름, 그에 관한 이야기는 마치 금기어처럼 둘 중 누구도 꺼낸 적이 없었다. 충동적으로 불쑥 묻고 나니 괜히 심장이 콩콩 뛰었다. 우진은 곧장 답하지 않고 얼마간 복잡한 눈으로 전방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안부 한번 물은 것이 뭐라고, 어째 제작발표회보다 더 긴장이 된다.

    짧은 정적이 흐른 후, 우진의 대답이 조용히 건너왔다.

    “…예. 잘, 지내십니다.”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인 지안은 흐리게 경소를 머금었다.

    “네… 다행이네요.”

    별 뜻 없이 대꾸를 하고 보니 괜히 속이 조금 쓰렸다. 당연히 잘 지내고 있을 텐데, 못 지낸다는 소리라도 듣고 싶었나. 애초에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엔진 소리만 잔잔히 울리는 차 안으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역시, 아직은 아무렇지 않게 물어볼 때가 아니었나 보다.

    **

    “크흡.”

    “억쿠, 이런!”

    가습기 물을 갈아 넣던 병천이 화들짝 놀라 양 손바닥을 뻗었다. 입을 가린 월호의 손으로도 채 막지 못한 검은 혈이 병천의 손바닥 위로 후두두 떨어졌다.

    “어이고, 어이고! 이, 이를 어째!”

    어찌할 바를 모르고 종종거리던 병천은 급한 대로 제 셔츠를 훌렁 벗어 객혈을 받아냈다. 하얀 셔츠가 금세 검은 피로 물들었다. 병천은 속상한 얼굴로 다그쳤다.

    “새벽에 또 사신동에 다녀오신 게지요? 그리 자꾸 도술을 쓰시면 안 된다 하지 않았습니까!”

    지안이 펜트하우스를 떠난 후 꼬박 보름이었다. 이제는 방과 방을 넘나드는 것조차 힘겨울 만큼 기력이 쇠하고도 그는 깊은 밤이 되면 옥탑에 들러 잠든 그녀를 눈에 담고 돌아오곤 했다.

    하룻밤 그리 힘을 쓰고 나면 여지없이 살이 짓무르고 피를 토하면서도 어찌 걸음을 멈추지 않는지.

    하물며 오늘은 흑혈을 토하지 않았는가. 피의 색마저 검게 썩어갈 만큼 자꾸만 무리를 하시니, 이 지독한 연심에 병천은 애간장이 녹아 죽을 지경이었다.

    이런 병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겨우 안정을 찾은 월호는 병천의 손을 물리며 갈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호들갑 좀 떨지 마.”

    “지금 호들갑을 안 떨게 생겼습니까? 아효, 참으로 야속하십니다. 기어코 이놈의 심장이 거덜 나는 꼴을 보시려는 게지요!”

    운명의 천 년까지 남은 날이 이제 고작 닷새였다. 양손은 이미 완전히 검은 힘줄에 뒤덮였고, 도포에 가려진 몸 곳곳의 사정도 다를 바가 없을 것이었다.

    그 아름답던 사내가 이리 빠르게 변모해가는 연유 또한 무리한 움직임 탓일 터. 그저 남은 날이라도 편히 누워 계실 수는 없는 것인지. 병천은 눈시울을 붉히며 그의 손에 흥건히 묻은 피를 닦아냈다.

    “제발 좀, 가만히 계십시오.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아무 데도 가지 마시고, 제발 좀 몸을 아끼시란 말입니다.”

    피싯 늘어진 그의 입술이 힘없이 실소를 머금었다.

    “곧 죽을 몸 아껴서 뭐하게.”

    “허어, 말씀도 참….”

    “약이나 가져와.”

    그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며 병천에게 붙들린 손을 뿌리쳤다. 병천은 난색 어린 얼굴로 한숨을 삼켰다.

    ‘ 이것이 징허게 독한 것이여. 못혀도 8시간은 간격을 둬야 할 거잉게 늬놈이 잘 좀 챙겨라잉? 알었냐? ’

    범화 님이 당부하신 8시간이 되려면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건만, 진통제를 찾는 간격도 무섭도록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견디기가 많이 힘겨우십니까?”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그는 말없이 병천을 건너다봤다. 다소 가쁘게 숨을 툭 뱉으며 식은땀이 맺힌 이마를 찌푸리는 얼굴이 ‘말이라고 하느냐.’ 하며 짜증스레 답하고 있었다. 입을 열기도 힘겹다는 뜻일 테다.

    그래도 세 시간만 더 견뎌보시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휴우….

    “…잠시만 계십시오.”

    병천은 피를 닦은 셔츠를 갈무리하며 마지 못해 침실을 나섰다. 오래지 않아 돌아온 병천의 손에는 새 옷과 약통이 들려있었다.

    그가 성마르게 약을 털어 넣기 무섭게 병천은 월호의 옷고름을 당기며 말했다.

    “이리 좀 보십시오. 피가 묻어 엉망이라, 옷을 갈아입으셔야 합니다.”

    월호는 벌어지는 앞섶을 냉큼 붙들며 병천의 어깨를 밀쳐냈다.

    “내가 해. 나가 있어.”

    다소 거칠게 밀쳐지고도 병천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금 월호의 옷깃을 쥐었다.

    “안 어울리게 내외하지 마십시오. 이놈에게 보이기도 부끄러우십니까.”

    피부가 변해버린 후로 버릇처럼 소매 속에 손을 감추는 그를 알고 있었다. 하물며 전신의 변화는 오죽 보이기 싫으실까. 해서 이리 기력이 쇠하고도 몸을 씻는 일조차 돕지 못하게 했던 그였다.

    하나 이제 더는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아까부터 내내, 그는 오른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존심은 여전히 강강한 모양인지, 월호는 꿋꿋이 병천의 손을 뿌리쳤다.

    “예쁜 것만 봐. 눈에 해롭다.”

    “…….”

    다시 내쳐진 손이 아프게 주먹을 꽉 쥐었다. 꾸욱 감쳐문 병천의 입술이 금세라도 울음소리를 낼 듯 꾸물꾸물 물결쳤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시종일관 담담한 주인의 모습이 더욱 아프게 가슴을 짓누른다.

    한 손으로 어설프게 도포를 벗은 월호는 속적삼 고름을 쥔 채 눈을 들었다.

    “안 나가?”

    애써 울음을 삼킨 병천은 제법 거칠게 월호의 손을 쳐내고 그의 속적삼 고름을 냉큼 풀었다.

    “하. 이놈이….”

    월호는 기가 차 헛숨을 터트렸다. 하나 더는 씨름하기도 지쳐 들었던 왼손을 툭 놓고 제 옷을 벗기는 병천의 손만 초연히 내려다보았다.

    “제 눈엔 여전히 예쁘십니다. 시꺼먼 털로 뒤덮여도, 송곳니가 이만큼씩 솟아나도, 제 눈에 월호 님은 그저 수려한 사내….”

    “입 닫아라. 간지럽다.”

    “크흠.”

    제가 말하고도 머쓱한 모양인지 귀 끝까지 울긋불긋 열이 올랐다. 하지만 그도 잠시, 속적삼을 벗기고 그의 속살을 담은 눈은 금세 충격으로 물들었다.

    허어, 맙소사….

    점도 하나 없이 깨끗하던 몸에 검고 앙상한 가지로 문신을 새긴 듯한 형상이 가득 차 있다.

    아아. 손등의 변화는 조족지혈이었구나.

    움찔한 기색을 미처 숨기지 못했다. 깊은 정적 속에서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만 크게 울렸다. 월호는 흐리게 입꼬리를 올리며 충격에 굳은 병천의 얼굴을 돌아봤다.

    “이래도 예쁘더냐.”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던 눈동자를 들켰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뻔뻔하게 안색을 바꾼 병천은 새 옷을 집어 들며 능청스레 말했다.

    “아무렴요. 아주 어여쁘십니다.”

    “입에 침이나 발라라.”

    “양껏 발랐습니다. 것도 못 보셨습니까.”

    “참 내….”

    심심하게 말장난을 주고받아도 이젠 재미가 없다. 이놈 저놈 하며 버럭 호통도 치지 않으시고 그저 웃어넘기시니, 쌍도끼를 꺼내 들고 눈에 불을 켜시던 때가 외려 그리울 지경이다.

    조심조심 소매에 팔을 꿰고, 고름도 단정히 묶어놓은 병천은 가습기의 분무량을 적당히 조절해 두고 발을 물렸다.

    “푹 쉬십시오. 곧 약 기운이 돌 것입니다.”

    베개에 편히 머리를 묻는 그를 확인한 후 방을 나선 병천은 눈물을 거두고 곧장 휴대폰을 들었다. 지루하게 이어지던 통화 연결음 뒤로 수아의 목소리가 속닥이듯 건너왔다.

    - 예, 묘흔 님.

    “어, 그래. 지금 어디에 있느냐.”

    - 오늘 제작발표회가 있어 나와 있습니다.

    “아아. 그렇지, 참. 이런, 이런…. 생각지 못했구나.”

    - 어찌 그러셔요? 혹, 월호 님 통증이 더 심해지신 것이어요?

    “지금 막 진통제를 드셔서 얼마 간은 괜찮으실 게다. 헌데 약효가 너무 빨리 떨어지는 것 같아 걱정이구나. 내가 곁을 잠시 비워야 할 듯싶은데….”

    - 아… 어쩌지요. 하필 전시현이 주인공이라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프다 하고 쏙 내빼버릴까요?

    병천은 입바람을 당기며 같은 자리를 부산스레 서성였다. 어찌한다, 어찌한다…. 시간이 촉박하니 수아가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행사의 주인공을 냅다 불러들일 수도 없으니.

    “아니다, 아니야. 그리 또 행사를 망치고 왔다 하면 역정을 내실 게다. 우선 우진이 편에 수면초라도 좀 보내거라. 가능한 한 많이, 효과가 가장 센 걸로.”

    - 아! 예, 그리하겠습니다.

    끊어진 전화를 품에 갈무리한 병천은 서둘러 그의 서재로 건너가 금고 속에 보관해둔 천문패天門牌를 꺼내었다.

    엊저녁 우연히 길에서 만난 사신이 이르길, 근래에 천옥문天獄門을 드나드는 율령 님을 분명히 보았다 하였다.

    이제 고작 닷새밖에 남지 않았건만, 어찌 기별도 않으시고 한가로이 천옥문만 넘나들고 계시는지. 진정 이대로 월호 님을 포기하시려는 겐지.

    율령을 찾아야 했다. 아무래도 저는 이렇게 허무하게 제 주인을 보낼 수가 없다. 어떻게든 방법을 좀 찾아주시라, 제 목이라도 다시 한 번 걸어볼 작정이었다.

    산목숨으로 함부로 천문패를 사용하여 하늘의 문을 연다면 제 명이 얼마나 줄어들지 감히 알지 못했다. 더군다나 제 물건도 아니니 더 큰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나 그쯤은 상관없었다.

    다부지게 입술을 깨문 병천은 안주머니 깊이 천문패를 챙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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