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보슬비가 다녀간 정오였다.
탁. 차 문을 닫는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가만히 누워 생각을 비우고 있던 모란은 나른히 눈을 내리떴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창문 너머로 어렴풋이 들리는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이윽고 드르륵 바닥을 긁는 바퀴 소리 뒤로 뻑뻑한 샷시문이 열렸다.
“할머니, 나 왔어!”
쩌렁쩌렁한 손녀의 인사에 모란은 누운 채로 미닫이문을 건너다봤다.
“왔나.”
마루 위로 올라선 지안이 활기차게 문을 열어젖혔다.
“뭐야. 대낮부터 주무셔?”
맑게 웃으며 방안으로 들어선 지안은 꼼짝 않고 누워 있는 모란의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자기는. 심심해가 누버 있었다.”
“라디오라도 들으시지 않고.”
“댔다, 마. 지끼는 것도 속 시끄럽고.”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의욕 없이 대꾸하자, 지안은 사뭇 걱정 어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팔八자가 된 손녀의 눈썹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어디 편찮으세요?”
느리게 끔벅이는 눈동자에 핼쑥해진 손녀의 얼굴이 가득 찼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하게 부어서는, 그 곱던 얼굴이 며칠 새 영 못나졌다. 딴에는 붉은 기를 숨기고자 열심히 분칠을 한 모양이지만, 충혈된 눈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쓴웃음을 삼킨 모란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이다.”
그러고는 행여 걱정이 길어질세라 얼른 말을 돌린다.
“니는 우예 왔노. 일 없드나.”
지안은 모란의 팔을 부축하며 말했다.
“응. 오늘은 촬영 없어요.”
“가방은 뭐고. 끄집고 오드만.”
모란의 시선이 문 쪽을 향하자, 지안의 고개가 덩달아 뒤를 향했다. 마루 밑에 내려놓은 캐리어를 건너다보는 지안의 눈빛이 찰나로 씁쓸해졌다.
“아, 나 이제 집에서 출퇴근하려구요. 짐 챙겨왔어.”
금세 미소를 띠었지만 그 속에 숨긴 기색을 모를 리 없다. 모란은 짐짓 모른 척 물었다.
“와.”
“그냥, 뭐…. 일정도 이제 좀 여유롭고 숙소는 아무래도 불편해서…. 식사는 하셨어?”
어색하게 말을 돌리는 건 이제 손녀의 몫이 됐다. 모란은 그녀 모르게 한숨을 삼켰다.
“무야지. 니는.”
“잘 됐다. 나도 아직인데. 수제비 끓일까? 김치 수제비 어때요?”
내내 빈속이었다. 물만 겨우 삼킨 것이 며칠째인지 세어보지도 않았다. 독산, 아니 율령 그자가 갑작스레 곁을 떠난 후 급격히 죽어가는 몸은 이제 음식을 넘기기도 버거울 지경이 됐다.
“그래. 함 끓이바라.”
그럼에도 내어오라 한 것은, 손녀와 마주 앉아 함께 수저를 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간만에 실력 발휘 좀 해야겠네.”
쫌만 기다려, 할머니. 하며 의욕 있게 일어선 지안은 낡은 주방으로 건너갔다.
“우와. 나물 맛있겠다. 용이 할머니 다녀가셨어? 비빔밥을 먹을까? 아니다. 오늘은 수제비가 땡겨. 그지, 할머니?”
앞집 할멈이 든든히 채워놓은 냉장고를 열어보고는 쫑알쫑알, 크게 떠드는 소리가 부산스럽다.
모란은 구태여 대꾸하지 않고 담배만 꺼내 물었다. 이미 홀로 결정을 내린 지안은 부러 콧노래를 크게 흥얼거리며 수제비 반죽을 만들고 있었다.
낡고 자그마한 주방 문을 가만히 건너다보던 모란은 착잡한 얼굴로 혀를 찼다.
“쯧쯧… 우짜자고 거다 정을 줘가….”
이따금 율령을 찾아왔던 묘흔이라는 자를 통해 그간의 사정은 꼬박꼬박 전해 들은 참이었다.
독산이 실은 율령이었음을 알고 헐레벌떡 찾아왔던 날이었던가.
‘ 두 분의 연심이 이미 깊습니다. 우리 월호 님, 무려 첫정이시란 말입니다. 헌데 어찌, 어찌 이런…. 이는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닙니까! ’
하필이면 그리되고 말았구나. 지안에게도 첫정일 터인데… 하필 그이를 마음에 두고 말았구나.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 결국 구슬을 빼버리셨습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이놈의 남은 생을 드릴 수는 없는 것입니까? 우리 월호 님, 괴수로 변모하는 꼴을 진정 봐야 하는 것입니까! ’
며칠 전 찾아와 그리 대성통곡을 했던 날엔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우리 지안이는 살라는가베. 아이고, 다행이데이. 다행이데이….
단지 20년의 생을 더 얻고자 버려진 갓난쟁이를 거두어 살렸다. 하나 아이를 향한 정이 깊어질수록 죄책감의 무게가 무겁더란 말이다. 저것을 먹이고 키워 결국 구미호에게 제물로 바쳐야 할 터인데, 싶은 마음에.
평생을 짊어지고 살았던 그 무거운 짐을 이리 내려놓고 가게 됐으니, 저는 그저 다행이다 싶었다.
한데 저리 억지로 웃고 있는 것을 보니 한편으론 못내 안쓰럽기도 했다. 아마도 첫정을 준 그 사내에게 영문도 모른 채 쫓겨났을 테지. 제 목숨마저 포기하고 모질게 내쳤을 그이의 마음은 또 어떻겠는가. 지안도 그이도 그저 안쓰러울 따름이다.
모란은 깊이 빨아들인 연기를 한숨처럼 뱉어냈다. 속삭이듯 흐르는 혼잣말이 씁쓸하면서도 후련하다.
“그래도 마… 니는 살았으니 됐다.”
어차피 이리되고 만 것을. 이대로 지안이 진실을 모른 채 남은 생을 잘 살기만 하면 좋으련만…. 이제 바라는 것은 그뿐이었다.
**
“어우, 추워.”
옥탑이 냉골이었다. 비워둔 사이 깊어진 가을의 기온이 작은 옥탑 안을 서늘하게 휘돌고 있었다. 지안은 곧장 보일러를 틀려다 말고 소매를 야무지게 걷었다.
“청소부터 하자.”
환기를 시키려 창을 활짝 열자 스쳐 간 보슬비 내음이 흠씬 밀려들어 왔다. 날이 맑았다면 좋았겠지만 젖은 공기가 나름 운치가 있어 나쁘지 않았다.
쌓여있던 먼지를 털고 바닥을 닦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며칠 궁궐 같은 집에서 지냈더니 옥탑은 그야말로 손바닥처럼 작게 느껴졌다.
식기 건조대에 잘 엎어놓았던 그릇도 한 번씩 헹궈둔 후에야 창을 닫고 보일러를 켰다. 따끈하게 바닥이 데워지는 동안 캐리어를 풀어 짐을 정리하고 샤워까지 마치고 나니 해가 기울고 있었다.
모란은 밥 생각이 없다며 이른 잠이 든 후였다. 저 역시 입맛이 없었지만 양푼에 나물을 양껏 넣고 밥을 비볐다. 꽤 많은 양이었으나 개그 프로를 보며 낄낄대다 보니 어느새 바닥이 비어있었다.
“으어. 배 터지겠다.”
상을 치우지도 못하고 벌러덩 누워버렸다. 유쾌하지 않은 포만감이 목 끝까지 가득 찼다. 숨을 쉬기도 버거웠다.
“후우….”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할 일 없이 TV를 보고 있자니 휴대폰 진동음이 짧게 울렸다. 건호의 메시지였다.
[ D-30. 오빠 이제 한 달 후면 간다. 보고 싶냐? ]
“미친….”
피식 웃으며 답장을 두드리던 때였다. 성질 급한 이건호는 지안의 말풍선이 뜨기도 전에 메시지를 줄줄이 보냈다.
“…….”
웃음기를 머금고 휘어져 있던 입꼬리가 별안간 뚝 떨어졌다.
[ 너 애인 생겼다며? ]
[ 야, 이 중요한 사실을 내가 동한 형한테 들어야겠냐? ]
[ 실망이다, 서지안! ]
이게 또 어쩌다 싱가폴까지 소문이 났나.
“하….”
뭐라 할 말이 없어 키패드를 두드리던 엄지가 허공에 붕 떠버렸다. 지안의 사정을 알 길 없는 건호는 끊임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 겁나 잘 생겼다며? 나보다 잘 생겼어? ]
[ 어떻게 만난 거냐? 아니, 대체 어쩌다가 서지안이 남자를? ]
[ 1은 계속 사라지고 있습니다만, 왜 말이 없으시죠? ]
서너 번 한숨을 몰아쉬었다. 홀로 떠들고 있던 TV 속 개그 프로는 어느새 광고로 넘어갔다. 검푸르게 짙어지던 하늘엔 완전히 어둠이 내려 있었다.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지안은 입술을 감쳐 물고 키패드를 꾹꾹 눌렀다.
[ 빨리 말 못 해서 미안. ]
[ 근데, 나 차였어. ]
우스꽝스럽게 바닥을 치며 엉엉 우는 이모티콘 하나를 찍어 보내고 일어나 상을 치웠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 또 몇 번이고 진동음이 울렸지만 확인하지 않았다.
인스턴트커피 한 잔을 타서 다시 TV 앞에 앉아서는 예능 프로를 찾아 채널을 돌렸다. 눈물이 찔끔 날만큼 배를 붙잡고 웃어 젖히다가, 어느 순간 미간이 못나게 일그러졌다.
“…….”
광고로 넘어간 TV 화면 속에서 영광스런 4초 컷의 이너뷰티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영상 봤어. 너 얼마 전에 찍은 광고. ’
…젠장. 빌어먹을.
이건호의 문자 공격도 무사히 넘겼는데. 내 광고를 보고 왜 느닷없이.
“…하.”
갑작스레 숨이 갑갑해졌다. 목이 콱 메어 다 식은 커피만 벌컥 들이켰다. 빈 컵을 들고 싱크대 앞에 서서는 손끝이 아리도록 뽀득뽀득 잔을 씻었다.
잘 참고 있었는데. 이제 소주 한잔하고 푹 잠만 자면 성공적인 마무리였는데.
‘ 왜 괜찮아지질 않지…. 구슬이 여기 있는데. ’
툭, 놓쳐버린 잔이 개수대 안을 요란하게 뒹굴었다.
‘ 이것까지 해야 하나…. ’
결국 그에게 무너졌던 그날 밤, 하필이면 이 자리였다. 왜 또 하필이면….
‘ 어떡할까. 울어도 소용없을 거 같은데… 지금은. ’
“흡….”
꽉 깨문 입술 사이로 기어코 울음이 새어 나왔다. 애써 잔잔하게 달려가던 바퀴가 커다란 돌부리에 덜커덩 걸린 기분이었다.
‘ 너 죽을까 봐. ’
‘ 5백 년 만에 처음이야. 내가 얼마나 미친놈처럼 박아댈지 나도 모른다고. ’
‘ 간 빼먹을 놈한테 마음을 줬을 리가 없잖아. ’
어쩜 그렇게 뻔뻔하게. 어쩜 그렇게 진짜 같은 얼굴로…. 역시 한 대만 때리고 올걸. 실컷 욕이나 퍼부어버릴걸.
멍청하게 그냥 돌아선 자신이 한심하다가도, 멋대로 경로를 이탈하는 마음은 자꾸만 바보처럼 그를 그리워한다. 잊고자 돌아온 제집마저도 이젠 온통 그로 가득해서, 기어이 그를 당겨오는 상념을 모른 척할 수가 없다.
‘ 그냥… 좋아서요. ’
‘ 영감님이, 좋아서요. ’
결국엔 입을 틀어막았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막을 방법이 그뿐이었다. 무너지는 무릎을 붙잡을 수 없어 그냥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소리 내어 엉엉 울어버렸다.
목 끝까지 차올랐던 포만감이 가실 때까지, 그러고도 목이 쉬어 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울다 지쳐 기운이 다 빠져버리도록 지안은 그 자리에 무너진 채 한참 동안 웅크려있었다.
**
울다 지쳐 빠져든 꿈속은 달콤한 핑크빛이었다. 커다란 품은 현실처럼 따듯했고, 이마에 닿은 입술은 부드러웠다.
지안아, 지안아….
가만히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 감미로워 배시시 웃음이 났다.
너를 연모한다. 너를 좋아한다.
은밀하게 속삭이는 고백에 바보처럼 찔끔 눈물을 흘리며 하얀 품을 파고들었다. 관자놀이를 적신 눈물을 닦아주는 손을 붙들고 비비적비비적, 여러 번 문지르기도 했다.
따뜻하고 포근했다. 가슴이 아리도록 달콤한 꿈이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신기하리만큼 그렇게 똑같은 꿈을 꾸었다.
달콤한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그는 여지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매일매일 웃는 척하며 시린 낮을 보내고, 매일매일 울며 따스한 밤을 보냈다. 행복하다 서글퍼졌다. 따사롭다 쓸쓸해졌다.
그래도 꿈에서나마 그는 진심으로 보였기에 상처 난 마음에 은근한 위로는 되었다. 그냥 하루 종일 이렇게 꿈만 꿀 수는 없을까, 오늘도 엉뚱하게 그런 생각을 하다 아쉽게 눈을 떴다.
커피잔을 씻다 무너졌던 순간엔 당장 죽을 것만 같더니, 어떻게든 버티며 살아온 시간이 어느덧 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