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87화 (87/106)
  • 87.

    뭔가 이상해.

    취기에 비틀거리며 집으로 오는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그냥 직감이 그랬다. 모두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매몰차게 외면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울적해 보이는 눈빛들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불쌍해서 그런 걸까. 그냥 내가 가여워서?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닐 거라 믿고 싶었다. 제 처지가 너무 비참해 멋대로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딱 한 번만 더 물어봐야지. 술기운을 핑계 삼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확인해 봐야지. 이 남자가 정말 내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건지. 내가 정말, 멍청하게 구미호의 미색에 홀려 당하기만 한 건지.

    그런데, 술이 너무 과했다. 진지하게 마주 앉아 대화다운 대화를 하기엔 컨트롤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조각난 기억 속 자신의 모습은 그저 만취한 진상일 뿐이었다.

    ‘ 키스 한 번만 하면 안 돼요? ’

    꼴사납게 매달리기나 하고.

    ‘ 해주면, 이제 내 집에서 나갈 거야? ’

    쫓겨날 빌미나 제공하고.

    ‘ 왜, 키스로는 부족해? 좆까지 대줘야 하나? ’

    한 겹 더 쌓인 수치심만 또렷이 남았다. 이게 아닌데. 쿨한 척 무심한 척, 지금까지 잘 견뎌왔는데 한순간에 망쳐버렸다. 바보, 등신.

    “…….”

    지안은 물컵을 꽉 쥔 채 그의 눈치를 살폈다. 숙취로 몰골이 엉망진창일 텐데, 하필이면 이 꼴로 주방에서 맞닥뜨릴 줄이야.

    요 며칠 아침 일찍 꼬박꼬박 출근을 했던 그가 이 시간에 집에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던지, 먼저 주방에 있던 저를 보곤 조금 의아한 눈치였다.

    해가 중천에 뜬 시각이었으나, 그도 이제야 막 잠에서 깬 듯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혹 나 때문에 잠을 못 잔 건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조각 중에 그보다 더한 진상 짓이 있었던 건 아닐까.

    마음이 불편했다. 사과를 해야 하나, 입술이 달싹거렸다. 물론 그 핑계로 말을 붙이면 자연스레 대화를 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더 앞서기도 했다.

    선뜻 입을 떼지 못하고 생수를 꺼내어 마시는 그의 뒷모습만 살피던 때였다.

    “밤 촬영인가?”

    그가 먼저 침묵을 깨트렸다. 갑갑했던 숨이 일시에 툭 터지는 기분이었다. 지안은 여전히 등을 보이고 선 그를 향해 어색하게 답했다.

    “…오늘은 촬영 없어요.”

    조금 남은 생수를 꼴깍 비운 그는 와그작 우그러뜨린 생수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잘됐네. 짐 싸, 그럼.”

    “…….”

    휙 던져넣은 생수병만큼이나 가볍게 건너온 소리였다. 갑자기 무슨 말이냐 뻔뻔하게 되묻고 싶지만 쓸데없는 양심에 타이밍을 놓쳤다.

    ‘ 약속 지켜. 취해서 기억 안 난다는 소리는…. ’

    하필 기억의 조각 속엔 그 목소리 또한 또렷이 남아 있었다.

    대답이 없자 그제야 그가 어깨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집요한 시선에 떠밀리듯 삐져나온 목소리가 제가 생각해도 비굴했다.

    “촬영 끝날 때까지 있어도 된다고….”

    그의 걸음을 따라 사각거리는 옷감소리에 괜히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의 도포 자락이 뚝 떨어진 시야 속에 걸린다.

    지안은 두어 걸음 앞에서 멈춰선 그의 발치만 내려다보았다.

    “생각이 바뀌었어. 귀찮고 성가시고 불편해. 이젠 굳이 불편을 감수할 필요가 없으니까 나가줘야겠어. 그리고.”

    냉정한 말로 숨통을 바짝 조이던 그가 별안간 말을 멈추었다. 지안은 눈을 거들떠 그를 마주 봤다. 월호는 기어이 눈을 들게 한 후에야 멈추었던 말을 이었다.

    “왜 모르는 척이야?”

    덜컥 목구멍이 조여들었다. 역시 모른 척 넘어가 줄 생각 따위는 없는 모양이었다.

    지안은 애써 당황을 감추며 시치미를 뗐다.

    “뭘요?”

    그는 미간을 구기며 별안간 지안의 다리 사이를 눈짓했다.

    “거기 빨아주면 나가겠다고 약속했잖아.”

    “무…!”

    저도 모르게 허벅지를 바짝 모은 지안은 대번에 얼굴을 붉혔다.

    “그게 아니라 키스…!”

    바보같이 구태여 정정을 하다 말이 뚝 멈췄다. 그의 입꼬리가 비긋이 기울어져 있었다. 뒤늦게 그의 말에 말려들었음을 깨달았다.

    “정확히 기억하네.”

    “…….”

    할 말이 없어 입술만 꾹 감쳐 물었다. 어디로 빠져나가야 하나, 사방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그는 식탁 의자에 삐딱하게 골반을 기대어 섰다.

    “내키지도 않는 거 억지로 해줬으면 약속은 지켜야 할 거 아냐.”

    내키지도 않는 거, 억지로….

    방심하다 후려 맞은 명치가 욱신댔다. 지안은 여태 쥐고 있던 물컵을 더 꽉 그러쥐었다. 울컥 치받치는 모멸감에 눈두덩이 뜨끈해졌다.

    “자존심이 센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꾸역꾸역 버티는 이유를 모르겠네.”

    한숨 쉬듯 말하며 잠시간 커다란 창 너머를 건너다보던 그는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이 집이 탐나는 건가? 그런 거라면 내가 나가주고.”

    삽시간에 붉어진 눈이 매몰찬 남자의 얼굴을 원망스레 직시했다. 권태롭게 그늘진 그의 얼굴엔 일말의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미안함도 죄책감도, 혹시 숨겨뒀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애틋함 따위도 일절.

    그럼에도 난 아직도 이 상황이 의심스러운가. 저 얼굴을 마주하고도, 여전히 다른 이유를 찾고 싶은 건가.

    다시 한 번 자문해 보지만 이젠 잘 모르겠다. 저를 향한 무심한 눈빛과 아픈 말들에 이제는 좀 지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실은 꽤 많이 아프다.

    “어떡할까.”

    그는 짜증스레 이맛살을 구기며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내가 나가?”

    당장에라도 짐을 쌀 것 같은 얼굴로 재촉하니 공연히 조바심이 찼다. 졸지에 집주인을 내쫓고 들어앉은 양아치라도 된 것 같아 불쾌감이 솟구쳤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술만 달싹거리던 지안은 문득 거울을 마주한 듯 초라하게 선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왜 이런 꼴로 이 자리에 죽치고 있는 건지, 제 모습이 이제야 못내 한심스럽다.

    땀이 찰 만큼 물잔을 쥐고 있던 손이 뚝 떨어졌다. 둘 곳이 없어 어색해진 손이 괜히 옷자락만 꾸깃꾸깃 모아쥐었다. 술에 취해 아무렇게나 꺼내 입었던 건지, 갈아입은 줄도 몰랐던 커다란 회색 티셔츠가 오늘따라 몹시 누추해 보인다.

    꼴이 이게 뭐야…. 농락당한 건 난데, 왜 내가 이렇게 비굴하고 누추해져야 해.

    어떻게 말을 붙여볼까, 그의 눈치를 살피던 것이 얼마나 됐다고 금세 화가 치미는 감정은 제멋대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다.

    하… 뭐 하는 거냐고, 진짜.

    불쑥 치미는 짜증은 그가 아닌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화를 내고 한 대 후려쳐도 모자랄 판에 이제 그만하자며 자신만 다독이는 스스로가 못내 답답하다. 하지만 이제 와 따귀를 올려붙이자니 쪽이 팔려 그마저도 못 하겠다.

    그래. 직감은 무슨…. 그냥 못난 자존심에 버려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진짜, 찌질하게….

    힘없이 자조한 지안은 초연히 고개를 들었다.

    “…나갈게요.”

    듣고 팠던 대답이었는지 그는 썩 후련한 얼굴로 나른하게 눈만 깜빡인다. 초연히 마음을 다잡고도 뭘 바랐던지, 목 아래가 욱신거려 잠시 호흡을 골랐다.

    “아파트랑 차도 필요 없어요. 전에 말씀하신 대로… 저도 밤마다 충분히 즐겼으니까.”

    “…….”

    “보상은 그걸로 됐어요.”

    지금껏 비굴하게 굴어놓고, 마지막 자존심은 챙겨보겠다고 호기롭게 말했다. 그의 곁을 당당히 스쳐 가면서도 내심 붙잡아 주길 바랐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곧장 방으로 들어와 캐리어를 꺼낸 지안은 집히는 대로 짐을 챙겼다. 넘실거리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아무렇게나 던져 넣다 삐져나온 옷자락을 다시 꾹꾹 밀어 넣으며, 닥치는 대로 마구 짐을 싸다 결국 무릎을 끌어 안고 소리 죽여 눈물을 쏟아냈다.

    여전히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그가 밤사이 더 징그럽게 변해버린 손을 긴 소매 속에 숨겨둔 채 파르르 떨고 있으리란 사실은, 그녀로선 결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긍께 이것이….”

    월호의 손을 들여다보던 범화는 제 몸에 통증이 들기라도 한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씨브럴… 이게 뭐, 워째, 벌써 이 지랄이 났다냐?”

    답지 않게 더듬대는 꼴을 보니, 놈도 어지간히 당황한 모양이었다. 월호는 범화에게 붙들린 손을 거두어 도포 소매 속에 숨겼다.

    “어쨌든 약이나 좀 만들어.”

    오늘 새벽 갑자기 피부가 변해버린 후로 미미했던 통증이 하루아침에 선명해졌다. 사지의 감각은 이따금 무뎌졌고, 산발적인 동통의 간격도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아직 견뎌야 할 날이 스무 날이었다. 이 속도라면 당장 내일 몰아칠 통증도 견디기 힘들 것이었다.

    범화는 근심이 그득한 얼굴로 소매 속에 숨긴 월호의 손을 건너다봤다.

    “늬가 웬만한 진통제는 인자 내성이 생겨브러서 열 배는 독허게 맹글어야 될똥말똥인디.”

    “열한 배로 하든가, 그럼.”

    “니미럴. 진통 없애자고 약 먹고 뒤질 일 있냐?”

    끔찍한 괴수로 변모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약물 과다복용으로 죽는 게 낫지 않을까. 물론 몇 배로 독한 약을 먹는다 한들 죽지도 않을 몸이지만.

    월호는 쓰게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착잡하게 그를 바라만 보던 범화는 사뭇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참말로 방법이 없는 것이여? 화신火神이 늬 아부지람서. 그려도 명색이 신인디 늬 하나 못 살린다냐? 염라 앞에 무릎이라도 꿇으면 뭐시 좀 안 될란가?”

    신월당에서 처음 대면했던 그날 이후 율령을 보지 못했다. 구태여 다시 찾을 이유도 없었고, 그 역시 저를 찾아오지 않았다. 묘흔을 통해 소식을 들었을 것임에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이 조금은 의아했지만, 제 알 바는 아니었다.

    월호는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담담히 말했다.

    “방법이 있을 리도 없고. 이제 와서 구차하게 목숨 구걸할 생각 없어.”

    “그려도 혹시 모른께 안 그냐. 아, 왜 포기부터 허고 지랄이여?”

    “미련이 없을 뿐이야. 천 년을 살았으면 지겨울 때도 됐지.”

    “미련이 없기는. 육갑떠네, 쌧바닥을 조사블라.”

    “…….”

    오늘따라 어쩐 일로 곱게 달래나 했더니, 여지없이 까칠한 욕설이 날아들었다. 딴에도 멋쩍었던 모양인지 범화는 금세 언성을 낮추며 구구절절 떠들었다.

    “아니, 미련이 없을 수가 없제. 늬 그 딸랑구 진정으로다 좋아허는 거 아니었냐? 갸도 봉께 늬 뒤진다 허면 천당길도 따라나설 판이두만. 천 년을 살믄서 무려 첫정인디 고것이 고래 맴 먹는다고 단칼에 썰어지는 것이여? 늬 사랑은 워째 고것밖에 안 되는… 워허따 씨, 사랑이라네 염병. 내 주댕이로 연정을 논할랑께 근지러버 몬하겄네.”

    부르르 몸을 떤 범화는 제 팔뚝을 벅벅 문지르며 진저리를 쳤다. 가만히 구경하던 월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혼자 뭐 하냐.”

    “아, 몰러, 씨부럴! 그려 뒈져브러라, 새끼야! 늬 죽마고우는 여서 외로와 뒤지든가 말든가 신경 꺼블고 기양…! 에라, 시펄. 오살할 놈.”

    버럭 고함을 내지른 범화는 뒷말을 삼키고 벌컥벌컥 막걸리를 들이켰다. 미련이니 연정이니 어울리지도 않는 잡소리를 늘어놨지만 결국 하고 팠던 말은 그것이었던 거다.

    네놈 새끼 떠나블면 나가 외로와서 어찌냐.

    숨도 한 번 쉬지 않고 잔을 비운 놈은 곧장 잔을 채우려다 주전자 주둥이를 입에 물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목울대가 꿀꺽꿀꺽 한도 끝도 없이 꿀렁거린다.

    텅-! 내려놓은 주전자는 금세 비어버렸다. 범화는 손등으로 입가에 흐른 술을 사납게 훔쳤다. 놈을 가만히 건너다보던 월호는 별안간 눈썹 머리를 좁혔다.

    이 미친놈이….

    “…울어?”

    눈가에 반짝이는 그것을 화들짝 닦아낸 범화는 괜히 빈 주전자를 들고 냉큼 일어섰다.

    “미친. 나가 대가리에 칼 맞었냐? 울기는, 씨벌.”

    굽은 등에 손 하나를 얹고 쩔뚝쩔뚝 주방으로 향하는 뒷모습이 쓸데없이 애잔했다. 염병할 놈이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지랄인지.

    입안이 까끌까끌했다. 살고 싶은 이유 중 하나가 또 이렇게 선명하게 드러나 버리니 예까지 온 걸음이 후회된다.

    쓰게 눈가를 찌푸린 월호는 짐짓 태연한 척 일어섰다.

    “약이나 만들어 놔.”

    “맽기놨냐? 아, 꼴도 보기 싫은께 싸게 꺼져, 새꺄!”

    얼굴은 내보이지도 않고 주방 너머에서 새된 욕설이 뻗쳐왔다. 달그락달그락, 공연히 거칠게 그릇을 뒤집어대는 소리만 요란하다.

    얼마쯤 주방 입구만 바라보고 서 있던 월호는 깊이 눈을 감았다 뜨며 돌아섰다. 이제는 그가 떠난 자리에 피어오르는 연기마저도 힘없이 금세 가라앉고 만다.

    월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빠끔 고개를 내민 범화는 주름진 입술을 꾸욱 깨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백 년을 건조하게 말라있던 희끄무레한 노안이 촉촉이 젖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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