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86화 (86/106)

86.

“…….”

울컥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장 핼쑥해진 얼굴을 붙들고 입을 맞추고파 손이 움찔 떨렸다. 하나 이 이상 여지를 줘선 안 된다는 생각이 그를 아프게 붙들었다.

“…안 돼.”

겨우 단호한 대답을 뱉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엔 애달픈 갈망이 가득했다. 눈물에 흐트러진 지안의 시야에는 미처 닿지 않았을 일이었다.

“치사하게….”

지안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서럽게 훌쩍였다. 가슴팍이 점점 가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뭔가 폭발이라도 할 것 같은 기세다. 아니나 다를까. 억울하게 곡선을 그린 입술이 참았던 울분을 터트렸다.

“원하는 거 다… 다 말하라고 했으면서….”

나는 진짜, 차랑 집 같은 거… 다 필요 없는데…. 이럴 거면 호랑이 님은 왜 소개해 줘…. 이럴 거면 댓글은 왜 달아줬냐구…. 연기도 적당히 하지…. 뭘 그렇게까지 진짜처럼… 아니, 무슨 구미호가 연기를 그렇게 잘해….

취기와 울음에 섞여 받침이 반은 날아간 주정이 줄줄이 쏟아졌다. 순간 당황한 월호는 헛바람을 삼켰다.

이 상황에 지금, 갑자기 이렇게 또 귀여우면 내가.

“아… 환장하겠네.”

입술은 피싯피싯 늘어지는데, 눈두덩은 자꾸만 뜨거워지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키스 한 번, 해주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워, 씨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지안은 급기야 꺼이꺼이 통곡을 했다. 월호는 웃었다 찡그렸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술을 짓씹었다.

범화 이 새끼는 대체 뭘 얼마나 먹인 건지. 분명 고량주 한두 잔으로 이 지경이 된 것은 아닐 것이었다. 하여튼 이 또라이 새끼. 가는 길 심심하지나 않게 이 새끼 목도 끊어버릴까….

“어엉. 나빠요, 진짜아….”

“서지안.”

“흐흡. 흑.”

“진정하고 나 봐.”

얼굴을 가린 손을 억지로 끌어내리자, 퉁퉁하게 부은 눈이 느릿하게 끔벅였다. 흠뻑 젖은 속눈썹이 애교살에 척척하게 붙었다 떨어진다.

“해주면, 이제 내 집에서 나갈 거야?”

선심 쓰듯 말하곤 있지만 결국 자신을 위한 치사한 제안이었다. 고민이라도 하는 양 훌쩍이며 눈을 깜박이던 지안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지켜.”

재차 못 박는 그가 얄밉다는 듯, 가뜩이나 게슴츠레한 눈이 더 가늘어진다.

“취해서 기억 안 난다는 소리는….”

쓸데없이 늘어지던 당부는 거기까지였다. 불시에 그의 목을 끌어당긴 지안은 냉큼 입술을 틀어막았다.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그의 입술을 빨아당기고는, 손톱만큼 벌어진 잇새로 요령 없이 혀끝을 밀어 넣는다. 그의 혀를 찾아 입안을 휘젓는 움직임은 가히 필사적이었다.

“하… 음.”

취기에 가빠진 호흡이 질서 없이 쏟아졌다. 귓바퀴를 붙들었다가, 머리칼을 파고들다가, 다시 목을 끌어안다가, 정신없이 그를 더듬는 손은 치열하고 간절했다.

하… 미친 거지, 내가.

월호는 회한의 한숨을 삼키며 눈을 꾹 감았다. 단 2초 만에 밀려온 후회가 꽉 쥔 주먹 속에 부질없이 갇혔다. 이미 미치기 직전이었던 주제에, 뭘 어쩌자고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여서는….

애꿎은 시트만 꾹 짓눌렀다. 최대한 호흡을 얽지 않으려 입술도 혀도 꼼짝 않고 목석처럼 가만히 두었다.

“…입… 좀….”

더 벌려달라 애원하며 제 입술을 할짝거리는 모습이 미치게 야릇하다. 깔짝깔짝, 맛나게도 핥아 올리는 혀를 흠씬 빨아먹고 싶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시트를 지탱한 팔에 온 힘이 쏠렸다. 팔 근육은 쩍쩍 갈라지고 푸른 핏줄은 불끈불끈 솟아올랐다. 꼿꼿하게 힘을 준 혀를 꾹꾹 쑤실 때마다 입천장이 근질댄다.

“아음… 빨리… 나 힘, 힘이….”

제 목을 끌어안은 채 댕강 들린 상체가 아슬아슬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꾸만 팔에 힘이 빠지는 모양인지 고쳐 잡기도 여러 번을 했다.

결국 그를 끌어안은 팔에 완전히 힘이 풀렸다. 월호는 시트 위로 풀썩 떨어지던 유약한 몸을 와락 붙들어 당겼다. 시트에 가시가 박힌 것도 아니건만, 지극히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하아, 하아….”

귓가에 바짝 들러붙은 입술이 야릇하게 숨을 헐떡였다. 온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맞닿은 심장이 발광하듯 서로를 향해 거세게 뛰어댔다.

“하… 이러니 내가….”

이러니 하루하루 피가 마르지.

덩달아 호흡이 가빠진 그는 뜨거운 목덜미에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꾸역꾸역 견뎌보려 했으나, 지난 보름간 내심 이 순간을 기다려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결국 턱 선을 타고 올라간 그의 입술이 헐떡이는 지안의 숨을 한입에 집어삼켰다.

“하아-읍.”

그리도 원하던 혀를 입안으로 밀어 넣어 주자,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찾은 양 헐떡헐떡 물고 빠느라 정신이 없다. 더불어 없던 힘도 되살아난 모양인지 성마르게 도포 깃 속으로 파고드는 손은 변함없이 요망하기도 하다.

원 없이 빨아먹게 내버려 두었다. 입가로 줄줄 흐르는 타액은 그녀나 저나 관심 밖이다. 미친 듯이 그의 몸을 더듬던 손은 어느 틈에 도포 고름도 풀어버리고 잔뜩 힘이 실린 등을 간지럽게 쓸어내리고 있었다.

한가득 열기를 품은 지안의 손이 뚝 떨어진 건 그때였다.

…!

얕은 신음성을 삼킨 월호는 화들짝 입술을 떼어냈다. 아래로 떨어진 눈동자가 당혹감에 물들었다. 불룩하게 부푼 바지 앞섶이 맹랑한 손에 덥석 붙들려 있었다.

아아… 지안아, 제발.

흥분에 꼴깍 넘어갈 것 같은 숨을 애써 다독인 그는 짐짓 무겁게 목청을 내리눌렀다.

“이거까진 허락한 기억이 없는데.”

그럼에도 요망한 손은 크게 부푼 그의 남경을 야살스레 문질렀다.

읏- 입안의 살을 꾹 깨무는 그의 얼굴이 촉촉이 젖은 다갈색 눈동자에 또렷이 비쳤다.

“왜, 거짓말을 해요.”

미간이 흠칫 떨렸다. 찔리는 것이 있어 무슨 소리냐 되묻지도 못했다.

“…연기라면서. 나 안 좋아한다면서….”

“…….”

“근데, 이건 왜… 이렇게 커졌어요?”

아… 돌아버리겠네, 진짜.

월호는 헛웃음을 치며 짐짓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사내놈은 원래 이래. 감정 없이도 좆은 서.”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크게….”

그러니까 내 말이. 뭘 또 이렇게까지 섰냐고, 이건.

식은땀이 삐질 흐를 판이었으나, 월호는 애써 거오스레 낯을 포장했다.

“왜, 키스로는 부족해? 좆까지 대줘야 하나?”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갈쌍거리는 눈동자가 원망스레 그를 바라봤다. 알면서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는 마음은 부실한 탑처럼 무너진다.

아… 그냥 이대로 안아버릴까, 끔찍한 괴물로 변모하기 전까지 그냥 매일 이렇게 뻔뻔하게 품어버릴까. 갈대 같은 마음이 또 흐물흐물 녹기 직전이었다.

갑작스런 순간이었다. 그의 시선이 시트만 움켜쥐고 있던 제 손등 위로 무심코 떨어졌다.

이건 또 뭐야.

언제부터 이랬던가. 손등에 검푸른 무언가가 불거졌다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힘줄도 아닌 것이, 메마른 가지가 엉켜있는 형상과도 같은 그것은 심히 우악스럽고 징그러웠다.

…설마.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하얗게 질렸다. 덜컥 조여든 심장이 불쾌하게 요동쳤다. 천 년까지는 스무날 남짓. 한데 벌써….

월호는 순간 당황해 지안을 살폈다. 그저 울먹거리는 얼굴이 뭔가를 눈치챈 것 같지는 않다. 물기 가득한 눈을 피해버린 월호는 여전히 제 중심에 붙어 있는 지안의 손을 거칠게 털어냈다.

“다 했으면 놔, 그만.”

황급히 일어나 옷고름을 매는 손이 제멋대로 떨렸다. 그러고 보니 바닥을 딛고 선 다리도 제 것이 아닌 양 낯설다.

젠장. 이게 왜 벌써….

“…씨이, 나쁜 놈… 진짜 나쁜….”

베개에 푹 고꾸라진 그녀는 습관처럼 훌쩍이며 힘겹게 호흡을 뱉고 있었다. 나쁜 새끼…. 욕설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점점 수면 속에 빠져든다.

“하….”

안도하며 숨을 고르던 것도 잠시, 월호는 푸르죽죽하게 변해가는 손을 내려다보며 산란하게 바스러지는 정신을 다잡아야 했다.

**

술이 고팠던 날이었다. 해서 우진에게 동한의 바 근처에 내려달라 부탁했었다. 한데, 바 문을 코앞에 두고 문득 아차 했다.

‘ 다음엔 꼭 같이 와. 얼마나 잘생겼길래 입에 침이 마르나 궁금하다. ’

‘ 응. 그럴게요. ’

차마 사기 연애였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없는 척 웃을 용기도 나지 않았다. 결국 발길을 돌려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다 불현듯 호랑이 님이 떠올랐다.

병천도 저를 피하고, 우진도 말을 아끼고, 수아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며칠째 보이지도 않고…. 혹시나 그에게선 다른 얘기를 들을 수 있진 않을까.

그가 있는 곳이 동한의 바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골목이었음을 기억했다. 좁고 어두운 골목을 한참을 들어가다, 입구도 없이 온통 시멘트벽으로 둘러싸인 그곳을 겨우 찾았다.

‘ 호랑이 님. …호랑이 님! ’

서너 번 벽을 향해 그를 부르다 보니 마법처럼 벽 한 면이 홀랑 사라졌다.

‘ 어쩔씨구? 늬 혼자 왔냐? ’

그를 보자마자 인사도 하기 전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보름간 감정을 잃은 사람처럼 메말랐던 얼굴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는 제 눈물의 이유를 이미 알고 있는 듯 한숨을 먼저 내쉬었다. 그러고는 되레 화가 치민 얼굴로 대뜸 욕설을 쏟아냈다.

‘ 그 호로 새끼. 잡놈의 새끼. 나가 뒈져브러도 꼬숩을 새끼. 그 새끼가 원래 그런 새끼여, 느자구 없는 새끼. ’

저는 차마 하지 못했던 욕을 대신 해주니 그렇게도 속이 시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기대했던 ‘다른 얘기’는 아닌 셈이었다.

호랑이 님마저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라면… 정말이었구나. 그 남자, 진짜 나 이용한 거구나…. 절망스러웠다. 술이 물처럼 꼴깍꼴깍 넘어갔다.

‘ 인간도 아닌 새끼헌테 늬는 뭐슬 바랬냐? 우덜 같은 것들은 애시당초에 감정이란 것이 없으야. 그 잡놈의 새끼가 모가지 따븐 인간들만 여서부터 줄세아도 청나라를 넘어간당께. 살려준 것만도 용한 거인께 아가 늬는 다행인중 알어. ’

언젠가 시현에게 들었던 말과 비슷한 이야기였다. 그래, 그는 구미호였다. 그 손에 간이 뽑혀 죽은 이들이 몇이나 될는지 저는 가늠할 수도 없다.

그런데, 아무리 들어도 와닿지 않았다. 제가 본 그는 그저 지승원이라,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 그 새끼가 뭣이 그리 좋드냐. 승질도 지럴같은디 낯짝 말고 볼 것이 뭐시가… 아아, 그리여. 그 새끼 좆이 말자지였제? 좆질은 또 기똥차게 치대긴 할 것이여. 고것이 여엉 아숩든가? ’

볼 때마다 설레는 외모도, 함께 나눈 뜨거운 밤도, 무심히 건너오던 다정함도, 뜻밖의 귀여움도, 그냥 다 좋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 하루가 다르게 속절없이 커져 버린 마음이었다.

‘ 정신 챙기고 인간을 만내, 인간을. 차고 늠치는 게 인간인디, 찾아보믄야 말자지가 또 없겄냐? ’

다른 사람을 어떻게 만나. 온통 지승원밖에 없는데, 어떻게 이 마음을 잊고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어….

연애가 처음이라 이별도 처음이었다. 잊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저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 잊어브러. 그래야 늬가 산다. 잉? ’

그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그것이 나를 위한 일이라며 하루빨리 잊으라고만 했다.

혹시라도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는 뭔가를 알고 있지 않을까, 간절히 기대했던 마음이 차게 식었다. 대꾸도 한 마디 못 하고 실컷 술만 들이붓다 비틀대며 일어섰다.

‘ 아가. ’

그가 불러 세웠다.

‘ 그 새끼가 염병헐 놈이긴 한디 말여. ’

내내 조금은 흥분한 채 떠들던 목소리가 한순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왠지 모르게 착잡했던 눈빛이 취중에도 또렷이 기억난다.

‘ …너무 미워허지는 말어야. ’

호랑이 님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이유도 모른 채 심장 깊은 곳 어딘가가 찌르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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