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85화 (85/106)

85.

온기가 사라진 서재 안은 적막이 감돌았다. 창을 뚫고 내려앉은 달빛은 오늘따라 시리도록 파란빛이었다.

승원은 그 속에 우두커니 서서 소파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렇게나 놓인 카드키와 스마트키, 구겨진 채 바닥에 떨어져 있는 두 종류의 매매계약서.

냉큼 받아 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역시나 제 마지막 배려는 이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다만 지안의 캐리어는 사라진 채였다. 병천이 이르길, 촬영을 나갈 땐 분명 캐리어를 두고 갔다고 했었다. 한데 벌써 돌아와 짐만 홀랑 가져나간 모양이었다.

실은 30분 전 촬영이 끝났다는 우진의 연락을 받고 고민을 거듭하다 황급히 집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혹여 잠시라도 마주치진 않을까, 싶은 생각에.

한데 잠시도 머물지 않고 이리 후딱 사라졌을 줄이야.

“…깔끔하네.”

그래도 그 성질에 욕은 한마디 할 줄 알았건만, 주저하지도 않고 냉큼 떠나버리니 괜히 가슴 한구석이 뻐근하다. 모질게 내친 것이 누구인데, 순순히 돌아섰다고 서운하기라도 한 것인지, 원….

조소를 삼킨 승원은 바닥에 떨어진 계약서를 집어 들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 이렇게 갑자기…. 갑자기 이러면…. ’

구겨진 종이 위로 눈물을 글썽거리던 지안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곧 쓰러질 듯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하얗게 질려가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가뜩이나 험한 일을 겪은 그녀에게 꼭 그랬어야 했느냐, 병천은 모질기도 하다며 그리 꾸중했지만 시간을 돌린다 해도 그의 선택은 같을 것이었다. 그래야 나라는 존재를 실컷 원망하며 깨끗이 잊을 수 있을 테니까.

이미 흠씬 구겨진 종이가 그의 손안에서 조금 더 우그러들었다. 그 안에 박혀있는 그녀의 이름이 흐려지는 시야 속을 또렷이 파고들었다.

서지안. 서지안….

새삼 낯설게 느껴지는 이름을 읊조리다 입안의 여린 살을 꾹 깨물었다. 고작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그 맑은 웃음과 따스한 온기가 벌써 그립다.

만질 수는 없을지언정, 볼 수는 있지 않을까. 구슬을 뺐으니 모습을 지운다면 이제 그녀는 저를 보지 못할 것이었다. 허니 잠시만, 옥탑에 잘 들어갔는지 확인만이라도….

“…….”

흐르던 생각이 멈춘 것은 그때였다. 별안간 치뜬 시선이 문 쪽을 향했다. 승원은 사뭇 의아한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현관의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또렷이 들려오고 있었다. 제 집 문을 저리 ‘사람’처럼 열고 들어올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설마.

덜컥 명치가 따끔거렸다. 순간 삐걱거린 심장이 조금 엇박자로 뛰었다.

이내 구겨진 종이가 카펫 위로 떨어졌다. 사라진 그의 몸은 일순간 현관 앞에서 번쩍 나타났다. 동시에 달칵, 현관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역시나 지안이었다.

찬바람을 맞은 건지, 한바탕 울기라도 한 건지, 눈두덩도 코도 볼도 죄다 벌게진 여자가 눈을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아….”

흠칫 놀란 것도 잠시, 지안은 금세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여상하게 말했다.

“들어오셨네요.”

그러고는 현관 안으로 캐리어를 들여놓고 등 뒤로 야무지게 문을 닫는다. 승원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무심히 물었다.

“뭐야, 너.”

잠시 뚝 떨어졌던 시선이 다시 그를 향해 대차게 들렸다.

“옥탑으로 가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내일 촬영이 새벽 일찍 시작해서요. 아무래도 옥탑은 너무 머니까.”

“…….”

말없이 바라만 보자 덩달아 빤한 시선이 건너왔다. 일정 시간 움직임을 캐치하지 못한 센서등이 꺼질 때까지 미묘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먼저 입을 뗀 이는 지안이었다.

“좀 들어갈게요.”

드르륵. 캐리어를 끌고 성큼 집안에 들어선 지안은 당당하게 그의 곁을 스쳐 갔다. 승원은 제 곁을 지나치는 지안의 손목을 낚아채듯 붙들었다.

“뭐 하자는 거야, 지금.”

얕게 솟구친 지안의 가슴이 차분히 떨어졌다. 이내 담담한 척 포장한 얼굴이 다부지게 그를 올려다봤다.

“촬영 끝날 때까지 여기서 지내도 된다면서요.”

“…….”

말문이 막혔다. 맹랑한 말보다 먼저 말문을 막은 것은 지안의 몰골이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 주위로 시커멓게 화장이 번진 꼴 하며 온통 빨갛게 충혈된 눈 따위가, 가까이 두고 보니 더욱 말도 못 할 수준이었다. 하물며 문밖에서 고민은 또 얼마나 길었던지, 온몸에서 풍기는 가을밤의 서늘한 기온마저 애잔스럽다.

이 여자는 지금 제 꼴이 얼마나 처량한지 알기나 할까. 애써 괜찮은 척 빳빳이 서 있는 모습이 외려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승원은 바지 주머니 속에 숨겨둔 한 손을 꽉 그러쥐었다. 쓰린 속을 가까스로 내리누르고 실소하듯 물었다.

“그래서. 기어이 여기 있겠다고?”

“보상으로 주신 아파트도 여기보단 멀어서요. 며칠만 더 신세 질게요.”

힘껏 그의 손을 뿌리친 지안은 곧장 방으로 향했다. 활짝 문을 열어두고 보란 듯이 캐리어를 푸는 모습은 주저함도 없다. 승원은 망연히 헛숨을 터트렸다.

“…하.”

저 꼴통이…. 피를 말리려는 작정인가.

참으로 곤란한데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저리 맹랑하게 나오면 이젠 또 어찌해야 하나, 막막함은 밀려오는데 허허롭던 가슴에 소양감이 차오른다.

이래서야 도무지, 저 가여운 계집을 어떻게 떼어내야 할지 모르겠다.

**

동거 아닌 동거였다.

그날 갑자기 되돌아와 그의 침실 옆방에 짐을 풀어버린 지안은 마치 하숙인처럼 생활하고 있었다.

‘ 일어나셨어요? 식사하세요. ’

‘ 안녕히 주무세요. ’

며칠간 건네온 말이라곤 그것이 전부였고, 식사 때를 제외하곤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처음엔 제 마음을 돌리려 돌아온 줄 알았거늘, 가만 보니 그것이 아닌 듯싶더란 말이다.

진정 ‘촬영장에서 가까운 집’이 필요했던 것뿐이었나.

하루하루 집주인과 하숙인의 관계로 굳어가는 상황을 견디다 보니, 기분이 참… 뭐라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묘하더랬다.

눈에는 보이는데 안을 수가 없으니 애는 타고, 하루아침에 저를 깔끔히 잊었나 싶으니 괜히 서운하기도 하고, 어느 날엔 늦은 밤까지 장신재라는 배우 놈과 더러 웃으며 통화까지 해대니 화가 치밀어 돌아버리겠고.

이것이 지난 보름간 지속된 상황이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점점 기력도 약해져 가는데, 이러다 천 년을 채우기도 전에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제는 그만 미련을 버리고 독하게 내보내야 할 듯싶다. 해서 오늘은 단단히 마음을 먹은 참이었다.

한데 하필이면 오늘, 저리 술이 떡이 되어 돌아올 줄이야.

“하….”

월호는 비틀거리다 욕실 문에 이마를 처박는 지안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새벽 3시였다. 자정쯤 촬영이 끝나곤 친구를 만나러 갔다는 이야기는 우진을 통해 들은 참이었다. 또 그 재즈바에 갔겠지, 하며 기다리다 보니 귀가가 영 늦어지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슬슬 걱정이 되어 나가보려던 순간, 지안은 양손에 굽이 부러진 구두를 들고 돌아왔다. 고주망태가 된 꼴을 보니 집을 제대로 찾아온 것만도 용했다.

문고리를 찾지 못해 한참 만에야 욕실에 들어간 지안은 칫솔을 물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러다 세면대에 고꾸라질 판이었다.

“미치겠네….”

소파에 앉아 의미 없이 책장을 넘기던 월호는 결국 테이블 위로 서적을 던지듯 놓았다. 자빠지기 직전 가까스로 어깨를 붙들어 안은 그는 지안의 손에 들린 칫솔을 빼 들었다.

“어….”

눈꺼풀이 가물가물 무겁게 끔뻑였다. 저를 붙든 단단한 손을 내려다본 지안은 그의 가슴에 맥없이 뒤통수를 툭 놓았다.

실로 오랜만에 품어보는 몸이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유난히 도드라진 쇄골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목 안이 따끔거린다. 죽어가는 것은 난데, 왜 저가 이리 말라 가는 건지…. 속이 상해 절로 미간이 일그러졌다.

월호는 가늘게 다물린 입술을 칫솔로 톡톡 두드리며 짐짓 까칠하게 말했다.

“입 벌려.”

“…아아.”

이 와중에 입은 또 얌전히 쩌억 벌리니 속도 없이 또 금세 입꼬리가 실룩댔다. 하여튼 요망한 계집애. 술 취한 서지안은 역시 심장에 해롭다.

“내일은 촬영 없어? 이렇게 들이부어도 되는 거야?”

“어어, 어거.”

“됐어. 나중에 얘기해.”

꼼꼼하게 양치질을 해주고 나니 번들거리는 얼굴이 영 신경 쓰였다. 티슈로 닦아만 줄까, 고민하다 결국 클렌징 폼을 묻혀가며 깨끗이 화장을 지워주었다. 욕조에 담가두고 꼼꼼히 씻겨주고픈 충동은 겨우 눌러 참았다.

옷만 대충 갈아입혀 침대에 뉘고 이불을 덮어주던 순간이었다.

“…느자구 없는 새끼….”

이불을 쥔 손이 우뚝 멈추었다. 어쩐지 익숙한 욕설에 월호는 눈썹을 휘며 지안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느새 게슴츠레 뜬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월호는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범화한테 갔었어?”

지안은 그저 가볍게 입꼬리만 휘었다. 그렇다는 대답이었다. 재즈바에나 간줄 알았더니, 그 깊숙한 골목을 용케도 찾아간 모양이다.

월호의 입가로 바람 같은 헛숨이 스쳐 갔다.

“거긴 왜.”

끔뻑끔뻑 얼마쯤 눈꺼풀만 여닫던 지안은 사뭇 울적해진 얼굴로 말했다.

“…알고 싶어서요.”

“뭘.”

“영감님이…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러는지….”

“…….”

취기에 충혈된 눈이 금세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지난 보름간 서운하리만큼 독하게 외면하던 시선이 이제야 그를 향한 채 서글프게 흔들렸다.

잊었을 리 없다. 잊고자 노력한 것도 아니었다. 지안은 보름이 지나도록 여전히 그날 아침의 서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현실을 인정하고 포기하려 해도, 도무지 그러지 못해 내내 홀로 아팠다.

또로록, 관자놀이를 타고 줄줄 흐른 눈물이 베개를 짙게 물들였다.

월호는 미처 무심히 다듬지 못한 얼굴을 아프게 찡그렸다. 코끝이 싸해져 미간만 더욱 좁혔다. 이불을 쥔 손이 꽉 말려들어 갔다.

“그래서, 알아냈어?”

그의 사정은 범화도 이미 알고 있었다.

‘ 그람 늬 인자 한 달 후면 뒤지는 거이냐? …아따, 잘 돼븟네. 새끼 면상만 봐도 구역질이 났는디…. 잘 됐다, 새끼야. 씨브럴…. ’

주둥이는 더러워도 누구보다 저를 깊이 아끼는 놈이었다. 아마도 지안에게 사실대로 나불거리지는 않았을 테다.

지안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취기에 어눌해진 목소리로 범화의 말을 전했다.

“…그 새끼가 원래애… 그런 새끼래요. 나아쁜 노무 새끼… 느자구 없는 새끼….”

“하.”

실컷 쌍욕을 퍼부었을 범화의 면상이야 안 봐도 훤했다.

“그런 놈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그냥 다른 놈 만나라구…. 인간 중에도 그 새끼보다, 좆질 잘하는 놈이 분명히 있을 거라구….”

염병할 새끼. 말을 해도 꼭….

부드득 이를 간 월호는 한숨을 내쉬며 쥐고 있던 이불을 끌어 올렸다.

“맞는 말 했네. 그만 떠들고 자.”

턱밑까지 꼼꼼히 이불을 덮어준 그는 냉큼 발길을 돌렸다. 소리도 못 내고 눈물만 줄줄 흘리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외려 코끝이 시려 못 견디겠다.

하나, 도망치듯 돌아서던 몸은 다시금 뜨거운 온기에 붙들렸다. 월호는 제 손가락을 꽉 움켜쥔 작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도 내가… 이렇게 남자한테 찌질하게 질척일 줄은 몰랐는데….”

천천히 들린 회색 눈동자가 눈물로 얼룩진 여자의 얼굴을 담았다.

“아무리 생각해두… 거짓말 같아서… 믿기지가 않아서…. 그래서 도저히, 떠날 수가 없어….”

“…….”

꿈을 꾸듯 웅얼거리던 그녀는 급기야 소리 내어 울음을 터트렸다. 엉엉 아이처럼 우는 소리마저 술에 취해 잠에 취해 흐리멍덩하다. 어쩌면, 그녀의 눈에 비친 지금의 상황은 진정 꿈속일지도 모른다.

가슴은 미어지는데, 저를 떠나지 못하겠다는 이 애달픈 취중 진담이 못내 반갑다면 그녀에겐 너무 잔인한 일일까.

붙들린 손가락이 미약하게 당겨졌다. 그를 당기기엔 턱없이 같잖은 힘이었으나, 월호는 못 이긴 척 침대에 걸터앉아 손을 내주었다. 달빛이 너무 시려서, 물기 어린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너무 아파서, 백기를 들고 그냥 그렇게 손가락을 얽은 채 가만히 바라봐 주었다.

아니 실은, 내내 이리 하고 팠던 마음을 그녀 탓이라 핑계를 댄다.

“영감니임….”

이사님, 지승원 씨, 월호 씨….

온갖 호칭을 다 끄집어내도 그가 대답이 없자, 톱니바퀴처럼 꽉 얽은 손을 힘껏 품으로 당긴다. 기어이 제 눈앞까지 월호의 얼굴을 당겨온 지안은 더듬더듬 그의 얼굴을 매만지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키스 한 번만 하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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