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84화 (84/106)
  • 84.

    “…….”

    넋 나간 얼굴로 그를 바라만 보던 지안은 저도 모르게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손바닥 아래에서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늘 있는 듯 없는 듯 소리 죽여 박혀 있던 구슬이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이따금 간헐적으로 따끔거리며 제 존재를 알려오던 그것이, 그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인가. 그럼 그 꿈이, 꿈이 아니었던 건가.

    혼란한 와중에 순간 날짜를 가늠해보던 지안은 사뭇 의아한 얼굴로 입을 뗐다.

    “왜 그걸…. 아직 백일이 되려면 한 달도 더 남았는데.”

    “이만하면 충분해.”

    나른하게 내리뜬 눈동자가 낯설었다.

    “네가 협조를 잘해준 덕분에 정기는 차고 넘치게 쌓였어. 굳이 백 일을 채울 필요도 없을 만큼.”

    지난 시간을 아무렇지 않게 ‘협조’라 말하는 얼굴은 지나치게 건조했다.

    이미 벌게진 지안의 얼굴에 한층 더 열이 쌓였다. 더불어 울긋불긋해진 목 안으로 마른침이 힘겹게 넘어갔다.

    아무리 들어도 모르겠다. 지금의 상황이 모조리 납득이 되지 않았다.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것은 아니겠지.

    지안은 다소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하….”

    별안간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쉰 그는 성가신 얼굴로 이마를 문질렀다.

    “무슨 뜻인지 이미 다 아는 얼굴로 굳이 확인하는 건 무슨 심리야, 대체. 극한까지 비참해질 상황을 즐기는 건가?”

    오늘따라 내내 낯설던 그가 비로소 완전히 다른 얼굴이 됐다. 무더웠던 초여름, W 기획 이사실에서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아니 그때보다도 차고 냉소적인 얼굴이었다.

    이게 대체 뭐야. 머릿속에 떠오르는 글자라곤 그것이 전부였다.

    어느새 짤막해진 담배를 비벼 끈 그는 친절하고도 냉정하게 지금의 상황을 정리했다.

    “네 할 일은 끝났어. 나는 덕분에 저주를 풀 수 있게 됐고. 더는 네가 필요 없다는 뜻이야.”

    “…….”

    “네가 이렇게까지 내게 진심이 될 줄은 몰랐어. 그 점은 매우 미안하게 생각해.”

    귀가 먹먹했다. 남자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첩첩이 쌓이는 막 너머로 아득히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집과 차 외에도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해. 내 목숨을 살려줬으니 그 정도는….”

    “잠, 잠깐만요.”

    잠깐만, 잠깐만….

    정리를 해야 했다. 머릿속이 마구 뒤엉켜 엉망이었다. 어지럽게 휘청이던 시선이 여전히 손에 들려있는 매매계약서에 닿았다.

    협조, 보상, 더는 필요 없는 존재.

    그가 흩뿌려놓은 말들을 하나씩 주워 담던 지안은 일순 헛숨을 터트렸다. 그를 마주한 얼굴이 삽시간에 파리해졌다.

    “그러니까 이게, 섹스에 대한 보답이라는 소리예요?”

    노골적으로 묻고도 황당해 말끝에 헛웃음이 감겼다. 하지만 그는 삐딱하게 입매를 기울이며 실소하듯 말했다.

    “거봐. 이해했잖아, 이미.”

    묵직하게 가슴팍을 누르던 그것이 발등까지 철렁 떨어졌다. 동시에 꽉 움켜쥔 주먹 속으로 ‘보상’이라는 종이 나부랭이가 와그작 구겨졌다.

    “…갑자기 이렇게, 느닷없이….”

    지안은 더듬더듬 숨을 끊어 뱉으며 승원의 얼굴을 똑바르게 건너다봤다. 그 속에 들어있는 진실을 확인해보려는 듯 집요한 시선이었다. 하나 피하지도 않고 곧게 뻗어오는 그의 시선은 몹시도 건조했다.

    말문이 막혀 입술만 달싹이던 지안은 황망한 얼굴로 물었다.

    “왜 이래요,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어제까지도 아무런….”

    “인간들은 이런 말을 예고하고 하나?”

    그는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묻고 있었다.

    다시 목구멍이 턱 막혔다. ‘아, 그러네요. 인간 세상에서도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오기는 하죠.’ 하고 멍청하게 대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

    말로 할 수 없는 허망함에 피싯 실소하다 입꼬리가 뚝 떨어졌다. 무어라 달싹거리던 입술이 꾹 말려 들어갔다. 찢길 듯 구겨진 종이는 떨리는 주먹 속에서 부들부들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날 좋아한다는 것도, 지금까지, 이게 다….”

    더듬더듬 바보같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처량했다. 그럼에도 지안은 멍청하게 주절거리다 허탈하게 웃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가 제게 보인 모습들이 단지 계략이고 연기였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한데 하필이면 이 순간, 지난날 흘려들었던 시현의 목소리가 난잡해진 머릿속을 쿡쿡 쑤시고 들어왔다.

    ‘ 넌 오라버니가 널 진심으로 생각하는 듯싶지? 하여튼 인간들은 이렇게 순진하다니까. ’

    ‘ 어리석은 인간들은 연심이라 착각하지. 몸도 마음도 홀랑 빼앗기고 결국엔 목숨마저 바치게 되리란 건 꿈에도 모르고 멍청하게들 말이야. ’

    불안정하게 펄떡거리는 박동 소리가 혼란한 정신을 더욱 교란시켰다.

    불과 몇 시간 전의 밤에도 저는 그에게 안겼었다. 원망스러우리만큼 빨리 안아주지 않아 애는 탔지만, 품은 여느 때처럼 따뜻했고 손길은 부드러웠다.

    그게 다 거짓이라면, 모든 게 내 착각이라면, 이건 너무 잔인한 거잖아.

    “이렇게 갑자기…. 갑자기 이러면….”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양 꼴사납게 중얼거렸다. 급기야 그렁그렁 물기가 차오른 눈으로 원망스레 그를 바라봤다. 여전히 냉소적인 얼굴은 시현의 말이 옳았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확인사살을 당한 심장이 누군가 꽉 움켜쥐기라도 한 듯 아프게 수축했다.

    “어떻게, 이렇게….”

    상황 파악을 끝내고도 장난이라 말해주길 바라는 마음만 간절했다.

    얼마간 읽히지 않는 표정으로 말끄러미 저를 바라보던 그는 일순간 문을 향해 시선을 거두었다.

    “묘흔.”

    이윽고 등 뒤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무언가가 무겁게 바닥을 긁는 소리도 함께였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를 따라 지안의 턱이 멍하니 들렸다. 곧 넘칠 듯 갈쌍거리는 물기 탓에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청승맞게 훌쩍이는 것까지 봐줄 시간이 없어. 회사에 나가봐야 해서.”

    “…….”

    “촬영 끝날 때까지 여기 있어도 상관은 없지만 네 자존심에 그럴 것 같지는 않고.”

    재킷 단추를 여미며 매무새를 다듬은 그는 병천이 끌고 온 캐리어를 턱짓했다.

    “짐은 대충 챙겼어. 가구는 오후에나 들일 테지만 우선 짐은 옮겨두는 게 좋을 거야.”

    네 집까지는 묘흔이 안내…. 촬영하는 동안에는 우진이가 계속….

    느닷없이 이명이 울려 그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수고했어, 그동안.”

    한데, 몸을 대주느라 수고했다는 말은 그 와중에 너무도 또렷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단정한 구둣발 소리가 멀어졌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제대로 따져보지도 못하고 얕은 호흡만 겨우 내뱉던 지안은 힘겹게 고개를 비틀어 병천을 올려다봤다.

    동아줄이라도 붙잡듯 울먹이며 바라봤지만, 병천은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떨군 채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그제야 이 거지 같은 상황이 현실임을 오롯이 깨닫고 말았다.

    ‘ 넌 그저 오라버니를 살릴 도구에 불과할 뿐이야. 빈 껍데기로 비참하게 버려지기 전에 도망쳐. 그게 현명한 선택일 테니까. ’

    “…하. 정말이구나. …진짜.”

    낯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초라하게 떨어진 시선이 제 캐리어에 머물렀다. 어이가 없어 한동안 말끄러미 캐리어만 바라봤다. 비싯비싯 헛웃음은 터지는데 눈앞은 갈수록 흐릿해졌다.

    결국 추접스레 넘쳐버린 눈물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등 위로 후두두 떨어졌다.

    **

    온종일 회사에 틀어박혀 있었다.

    지안은 어쩌고 있을까, 몇 번이고 돌아가고픈 충동을 억누르느라 무진 애를 썼다.

    혹여 잔뜩 골이 난 채로 회사로 쳐들어오지는 않을까, 저도 모르게 이따금 문을 돌아보다 자조도 여러 번을 했다.

    서재를 나서는 저를 순순히 보내준 지안은 회사로 찾아오지도, 전화를 걸어 불같이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 드센 자존심에 울고불고 매달리지는 않으리라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이런 모진 방법이 최선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월호 님이 나가신 후로 서너 시간 동안 서재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겨우 나와서는 촬영이 있다며 곧장 나가셨고요. 짐은 본인이 알아서 옮기겠다고….”

    병천은 맹맹하게 잠긴 목소리로 보고를 올렸다. 기어코 구슬을 빼버리고 만 그의 결정에 몇 시간을 내리 통곡하느라 얼굴이 퉁퉁하게 부은 채였다.

    창밖을 마주한 채 묵묵히 서 있던 승원은 무겁게 입을 뗐다.

    “그 몸으로 촬영이 힘들었을 텐데.”

    정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몸도 매우 좋지 않아 보였다. 간밤에 그런 일을 당했으니,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멀쩡할 리 만무했다.

    “우진이 말로는 무리 없이 잘 끝내셨다 합니다. 다만 휴식 시간에는 내내 기운이 없으셨던 모양이고요.”

    종일 그늘져 있던 그의 얼굴에 웃음 아닌 웃음이 스쳐 갔다. 그 몸으로 촬영은 또 무리 없이 해냈다니, 모르진 않았지만 참으로 독한 아이다.

    “서지안답네.”

    무거웠던 마음의 짐이 그제야 조금 덜어졌다. 아니, 그 반대인가. 생각보다 퍽 괜찮은 것 같아 내심 허망한 것 같기도 하다. 참 꼴사나운 감정이 아닐 수 없었다.

    자조하며 돌아선 승원은 의자 팔걸이에 걸어뒀던 재킷을 집어 들며 물었다.

    “수아는 어떻게 됐어.”

    “그 아이야 뭐…. 별 탈 없이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워낙 흡수력이 빠른 아이가 아닙니까. 지안 님은 물론이고, 오늘 현장에서 이상한 낌새를 차린 이도 전혀 없었다 하고요.”

    수아는 오늘부터 본의 아니게 전시현의 모습으로 몇 달을 살아가게 되었다. 조감독과 마찬가지로 불의의 사고로 정리해버릴 수 있었지만, 그리되면 드라마 진행에 차질이 생길 것이었다. 겨우 재기하게 된 지안에게 절망이 겹치게 할 순 없는 일이었다.

    하나 드라마가 무사히 끝나고 나면, 전시현은 어느 날 갑자기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는 기사가 뜰 것이다.

    “그래. 당분간 수고 좀 하라고 전해.”

    “예에. 그리하겠습니다.”

    재킷에 팔을 끼워 넣던 승원은 얌전히 고개를 수그리는 병천을 건너다봤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통통하게 눈두덩이 부어서는, 어쩐 일로 화도 내지 않는지 되레 섭섭할 지경이었다.

    “넌 왜 이렇게 고분고분해? 한 대 칠 줄 알았더니.”

    병천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못 원망스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쳐도 되는 것이었습니까.”

    “…하.”

    이 와중에 실없이 웃음이 나게 하니,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도 참 미워할 수가 없다. 승원은 헛웃음을 치며 장난스레 말했다.

    “내 손에 죽는 게 낫겠다며.”

    “허면 월호 님 가시기 하루 전날 석 대만 치겠습니다. 그때 죽이시지요.”

    “…….”

    하여튼 끝까지 한 마디를 안 지지. 고얀 놈.

    얇게 저민 눈으로 쓸데없이 충직한 고양이를 빤히 바라보던 승원은 단정히 단추를 여미며 시선을 거두었다.

    “퇴근이나 해.”

    빛이 번쩍이나 싶더니 그의 자리는 금세 비어버렸다. 자정이 다돼가는 이 시간까지 버티고 계실 때는 언제고, 가실 적엔 참으로 빛보다 빠르시다.

    병천은 혼자 남겨진 후에야 착잡한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휴….”

    그리 모질게 지안 님을 버리시고는 어찌 울지도 못하시나…. 아니, 홀로 계실 적엔 조금 울기는 하셨을까.

    글썽글썽 되레 눈물이 차오른 병천은 책상 위에 놓인 재떨이를 바라보았다. 수북이 쌓인 꽁초가 그저 그의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하나, 느닷없이 주인을 잃게 된 제 마음 또한 이미 땅끝까지 무너지고 말았음이다. 하물며 5백 년을 버텨온 아비의 마음은 오죽할까.

    ‘ 그놈이… 그놈이 기어이…. ’

    이른 새벽 전한 절망적인 소식에 율령은 충격을 금치 못했더랬다. 하나 눈에 뵈는 것이 없어 그 앞에 대고 통곡을 하며 간곡히 부탁하였다.

    ‘ 이놈의 남은 생을 드릴 수는 없는 것입니까? 우리 월호 님, 괴수로 변모하는 꼴을 진정 봐야 하는 것입니까! ’

    그저 이마를 짚고 고민에 잠겨 있던 율령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떠한 말도 듣지 못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그리도 무거울 수 없었다.

    정녕 이대로 끝인가. 나의 생이 이렇게 무너지는 것인가. 온종일 마음이 허하여 눈물이 마르지 않으니….

    병천은 금세 넘쳐버린 눈물을 손안에 묻으며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못 박혀 선 채 어깨를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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