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으슬으슬 한기가 들었다. 눈을 감은 채로도 머릿속이 빙글 돌았다. 몸을 바짝 웅크리자 삭신이 쑤셔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이불 밖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받아야 하는데, 생각은 하면서도 몸이 도통 움직이지 않았다.
끊어진 벨소리 뒤로 메시지 알림음이 따라붙었다. 겨우 5초나 지났을까, 이번에는 알람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댔다. 머리가 덩달아 웅웅 흔들렸다.
“아으….”
끙끙대며 겨우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민 지안은 협탁 위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간신히 쥐었다. 알람을 끄고 다시 끙끙대기를 얼마쯤. 별안간 눈이 번쩍 뜨였다.
완전히 잠을 깨고 나니 어젯밤 B 세트장에서의 일이 뇌리를 스친 것이었다. 꿈은 아니었을까, 잠시간 멀뚱히 눈을 깜박이다 전신의 통증도 잊고 새파래진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아니, 분명 꿈이 아니다. 그의 뒷모습을 눈에 담은 직후 의식을 잃었었다. 의식이 돌아온 후론 욕정에 시달리느라 그들이 어떻게 됐는지 물어볼 정신도 없었다.
컨테이너가 통째로 흔들릴 만큼 굉연했던 소리. 그의 손에 머리가 붙들린 채 늘어져 있던 조감독님의 모습.
그러니까 그가 조감독님을….
순간 다급해진 마음에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막내 PD에게서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한 통씩 들어와 있었다.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제게 따로 연락할 일이 없을 텐데.
확인도 하기 전에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어제의 일은 조감독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 역시 분명 시현에게 조종당한 것일 테다. 행여 승원이 조감독님을 해치진 않았겠지….
까득까득 손톱을 물며 불안한 마음으로 메시지를 열었다.
[ 지안 씨, 통화 연결이 안 되네요. 오늘 오전 일정에 변동 사항이 생겨 연락드렸습니다. 조감독님께서 교통사고로 급히 수술 중이시라 현장이 조금 어수선할 것 같아서요. 심각한 상황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오후 3시로 일정 변경됐으니 참고 바랍니다. ]
“하아….”
휴대폰을 내린 지안은 안도하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혹여라도 조감독이 잘못되진 않았을까, 심장박동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던 참이었다.
“다행이다….”
안도감이 들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교통사고쯤으로 수습은 한 모양이지만, 수술이 필요할 정도라면 수아의 치유 능력으로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상처가 깊다는 뜻일 테다. 그래도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 하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럼 그 여자는…. 시현은 어떻게 된 거지?
문득 고개를 든 지안은 다시금 막내 PD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재차 보아도 시현에 관한 언급은 없는 것을 보니 뭔가 사달이 난 것 같지는 않다.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하나….
솟았던 어깨를 늘어뜨리면서도 내심 기분이 찝찝했다. 죄 없는 조감독님만 애먼 일을 당한 것 같아 괜히 속이 쓰리다면, 나 너무 나쁜 걸까.
자조적인 한숨을 삼킨 지안은 가볍게 고개를 털었다.
“아… 머리야.”
흔들리는 고개를 따라 욱신욱신 편두통이 일었다. 눈을 질끈 감고 잠시 멈춰 있던 지안은 통증이 잠잠해진 후에야 조용한 침실을 휘둘러봤다. 옆자리가 허전했다. 온기조차 없는 걸 보니 그가 침대를 벗어난 건 한참이 된 모양이었다.
어제의 일로 그도 분명 놀랐을 텐데….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침실을 나선 지안은 그를 찾아 집안을 살폈다. 서재 문이 주먹만큼 열려 있었다. 문틈 사이로 부스럭부스럭, 어렴풋이 기척이 들렸다.
조심히 문을 열자, 책상에 기대서서 서류 따위를 들여다보고 있는 승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멀끔한 슈트 차림이었다.
서재로 들어선 지안은 사뭇 안타까운 얼굴로 물었다.
“오늘도 출근해야 해요?”
양손에 든 서류를 살펴보던 승원이 힐끗 눈을 치떴다. 잠시 말없이 바라보던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곤 대뜸 소파를 턱짓했다.
“앉아. 깰 때까지 기다렸어.”
“…아.”
금세 거둬버리는 시선이 어쩐지 서늘했다. 아무래도 어제의 일로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지안은 겸연쩍게 팔을 문지르며 소파로 향했다.
긴 다리로 성큼 다가온 그가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몸은 좀 어때.”
지안은 어깨를 움츠리며 짐짓 괜찮은 척 미소를 띠었다.
“몸살 온 것처럼 삭신이 쑤시기는 하는데, 견딜 만해요.”
그러고는 금세 미안한 얼굴이 됐다.
“어제 일은… 죄송해요, 경계 했어야 하는데 의심도 못 하고 따라나서서….”
“네 잘못 아니야. 시호가 작정하고 함정을 팠겠지. 무슨 수로 그걸 피해.”
“…….”
지안은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승원을 건너다봤다. 내용과는 다르게 어쩐지 위화감이 드는 말투 탓만은 아니었다.
그가 담배를 꺼내어 물고 있었다. 감정이 싹튼 이후로, 그가 제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일은 알아서 수습했으니 잊어.”
착, 착. 하얀 담배 끝에 불씨가 붙었다. 어제의 일을 잊으라는 말은 잇새로 흐르는 연기처럼 가볍게 흘러나왔다. 자칫 겁탈을 당할 뻔했던 사건이 어쩐지 종잇장처럼 가벼운 일이 된 기분이었다.
말로는 내 잘못이 아니라 했지만 역시 화가 난 걸까.
괜히 가슴께가 저릿했다. 조금 억울하기도 하고 내심 서운하기도 했다. 미묘한 분위기에 괜히 눈치가 보여 뭐라 말도 못 하겠고….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조감독님… 수술 중이시란 얘기는 들었어요. 조금 전에 연락받아서….”
담배 연기가 코앞까지 밀려왔다. 흡연자인 모란과 함께 산 세월이 20년이 넘었다. 이제는 면역이 됐다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그가 내뿜는 담배 연기는 더 독하게 느껴졌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 탓일까….
지안은 숨을 꾹 참고 말을 이었다.
“혹시나 잘못되셨을까 봐 걱정했는데 그래도 다행이에요. 모르긴 해도 조감독님은 잘못….”
“알아. 시호가 악령을 불러들인 거겠지.”
그래서 그의 목숨은 살려두었다 말하며 승원은 상체를 기울였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재떨이에 검은 재가 톡톡 떨어졌다. 혼자일 땐 종종 이렇게 담배를 피웠던 걸까. 재떨이 속에 이미 서너 개의 꽁초가 있었다.
“시호한테도 알아듣게 설명했으니까 앞으론 괴롭히는 일 없을 거야. 그 계집이 나잇값 못하고 철딱서니가 좀 없어. 어제 일은 내가 대신 사과하지.”
“…….”
떨어지는 재만 뜻 없이 바라보던 지안은 다소 벙찐 얼굴로 그를 마주 봤다.
기분이…. 그러니까 지금 이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가슴이 쿡쿡 쑤셨다. 뭔가가 울컥 치받쳐 올라 순간 목구멍이 묵직해졌다.
그는 마치, 잘못을 저지른 자식을 등 뒤에 숨기고 형식적으로 사과만 하는 부모처럼 말하고 있었다.
“…하.”
조금 당황스러워 헛숨이 샜다. 시종일관 간밤의 일을 가볍게 얘기하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인간이 아닌 그들에겐 어제와 같은 일은 아무 일도 아닌 걸까. 이런 것도 인간과 신수의 생각 차이라 볼 수 있는 건가.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따져야 하는 건지 순간 헷갈렸다. 애초에 사람이 아닌 그에게 ‘인간적으로’ 지금 이 행동이 맞는 것이냐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난 정말 무서워 죽을 뻔했는데. 어떻게 위로도 한 번 안 해주고….
서운함을 숨기지 못하고 불퉁 입술을 내민 지안은 자못 퉁명하게 말했다.
“사과는 시현 선배한테 따로 받을게요. 영감님 잘못도 아닌데요, 뭐.”
하지만 그는 지안의 반응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심플하게 어제의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래, 그럼. 이제 본론.”
그러며 테이블 위로 툭 올려둔 것은 조금 전까지 그가 들여다보고 있던 서류들이었다. 지안은 두 종류의 매매계약서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훑었다.
“…이게 뭐예요?”
승원은 소파 옆 서랍장에서 카드키와 스마트키를 꺼내며 덤덤히 말했다.
“네 차랑 아파트야. 네가 직접 돌아다니면서 볼 시간은 없을 것 같아서 알아서 골랐어. 마음에 안 들면 얘기해.”
계약서에 또렷이 박혀 있는 제 이름을 확인한 지안은 더더욱 얼빠진 얼굴이 됐다.
“그러니까 갑자기 이걸 왜….”
뜬금없이 집과 차라니. 너무 갑작스러워 말은 완성도 되지 못하고 꼬리가 잘려나갔다. 지안은 서류를 집어 들며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나 이런 거 필요 없는데…. 촬영할 동안엔 여기서 지낼 거고, 차도 매일 우진 님이….”
“뭔가 착각한 모양인데.”
다소 까칠해진 음성이 차게 말허리를 갈랐다. 그는 돌연 비소가 걸린 얼굴로 덧붙였다.
“선물이 아니고 보상이야. 그러니까 그냥 받아둬.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고.”
“…….”
지안은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멀뚱멀뚱 눈만 깜박였다. 비웃음이 걸린 입꼬리도, 권태로운 눈동자도, 차가운 말투도, 이제 보니 뭔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했다.
뭐지….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야…?
멍한 얼굴로 상황 파악에 골몰하는 사이, 그는 느긋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곤 더더욱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성교야 너도 충분히 즐겼겠지만 그게 보상이라면 억울할 거 아냐. 나도 양심은 있는 놈이라.”
여전히 상황 파악은 안 되는데, 느닷없이 쇄골 아래가 묵직해졌다. 크고 무거운 무언가가 예고도 없이 가슴 위로 쿵 떨어진 기분이었다.
“지금 무슨.”
툭 튀어 나간 목소리는 채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주춤주춤 허공을 떠돌았다. 당혹스러워 헛웃음을 치다가, 의미 없이 손에 든 종이도 내려다보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뿐이라 다소 황당한 듯 물었다.
“어제 일 때문에 화나서 이러시는 거예요?”
아니, 그렇다 해도 무슨 화풀이를 이런 식으로.
왈칵 얼굴이 뜨거워졌다. 이해 못 할 그의 태도에 저도 순간 화가 나 여과 없이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건, 경계 못 하고 따라나선 건 맞지만 그때는 상황이….”
“어제 일은 말했듯이 네 잘못 아니야. 굳이 따지자면 구슬을 빨리 빼주지 않은 내 잘못이지. 애초에 네가 시호 눈 밖에 난 것도 나 때문이고.”
귀찮은 듯 말허리를 끊고 본인의 탓이라 말하는 얼굴은 지나치게 건조했다. 연이어 성의 없이 움직이는 입술 사이로 담배 연기가 나슨하게 흘러나왔다.
“그 일은 아무 상관없어. 말 그대로 내 목숨을 살려준 대가고 보상일 뿐이야.”
시야를 흩트리는 탁한 연기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무지 머릿속까지 닿지 않았다.
지안은 이유도 모르고 울컥 치솟는 화를 애써 삭이며 물었다.
“알아듣게 말해줘요. 이해를 못 하겠어요.”
그는 되레 헛웃음을 치며 물었다.
“기억 안 나?”
“뭐가요?”
“어젯밤에 빼줬잖아.”
“뭘, 빼줘요?”
“구슬.”
“…….”
눈꺼풀이 빠르게 깜박였다. 숨이 조금 답답해져 가슴팍이 얕게 오르내렸다. 그 순간 간밤에 꿨던 꿈이 흐릿하게 스쳐 갔다.
목이 짓눌리고, 무언가가 역류하다 빛이 눈을 가리며 까마득히 사그라들던 의식. 그러니까 그게, 그 이상한 꿈이….
혼란하게 기억을 더듬자, 그는 되레 후련한 얼굴로 말했다.
“너 자유라고,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