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81화 (81/106)

81.

꼿꼿하게 버티고 있던 다리에 결국 힘이 풀렸다. 풀썩 주저앉을 때마다 남자는 겨드랑이 아래를 받쳐 들고 꾸역꾸역 지안을 일으켜 세웠다. 점점 흥분이 고조된 남자는 혀를 날름거리며 산만하게 지안의 몸을 더듬어댔다.

하나 시간이 갈수록 손놀림은 되레 조심스러워졌다. 상의를 뜯어버린 괴팍함과 다르게 브래지어도 바지도 아직 벗기지 못하고 그저 옷감 위로 손바닥만 찍을 뿐이었다.

암구미호에게 홀려 여기까지 오기는 했으나, 지안이 보통의 인간이 아님을 놈도 분명히 느낀 것이었다.

이렇게나 달콤한 음기를 줄줄 흘리는 인간이 여태 귀수鬼手를 탄 흔적이 없다니. 이는 분명 누군가가 곁을 지켰다는 뜻일 터. 또한 그 누군가를 이겨 계집을 쟁취한 자가 없다는 것은, 그 주인의 힘이 보통이 아닐 것이란 결론에 도달한다.

이거 진짜 건드려도 되는 거야, 마는 거야?

행여나 건드렸다 좆되는 상황이 그려지자, 바지 버클로 향하는 손이 자꾸만 딴 길로 새는 것이었다.

귓구멍을 후비며 지루하게 감상하던 시현이 얼굴을 구기며 면박했다.

“하아. 답답하네, 진짜. 뭘 자꾸 미적거려? 아끼다 찜 쪄 먹을 거야?”

“하씨, 졸라 먹고 싶은데 미치겠네.”

입가로 흐른 침을 또 한 번 훔쳐낸 남자는 사뭇 불안한 얼굴로 시현을 돌아봤다.

“누님, 이거 진짜 주인 없는 거 확실해?”

한숨을 삼킨 시현은 짜증스런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있어도 어쩔 거야. 안 박으면 상관없다니까?”

다시금 지안을 돌아본 남자의 얼굴이 마지막 고민에 빠진 듯 복잡하게 구겨졌다. 완전히 힘이 빠져버린 지안은 제 어깨를 붙든 남자의 손목을 겨우 움켜쥐고 힘겹게 애원했다.

“하… 그… 그만… 사… 살려….”

“아, 빨리 벗기라고, 병신아!”

새되게 솟구친 시현의 고함에 지안의 머리칼이 쭈뼛 섰다. 순간 결심한 듯 남자의 흑적안이 사납게 번뜩였다. 덜컥 두려움이 몰려온 지안은 숨을 흡 참고 남자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에라, 씹팔. 나도 모르겠다.”

“!”

없는 힘을 쥐어 짜내어 붙들었던 손목은 너무도 손쉽게 떨어져 나갔다. 먼지를 털어내듯 지안의 손을 떨쳐낸 남자는 곧장 바지 버클에 손을 댔다.

“아-악!”

누구에게라도 닿기를 바라며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지만, 버클과 지퍼는 종잇장처럼 무기력하게 뜯겨나갔다.

음흉하게 이를 드러낸 남자가 시꺼먼 혀를 길게 빼내며 바지를 끌어 내리려던, 그 순간이었다.

콰앙-!

갑작스런 굉음이었다. 귀가 얼얼할 만큼 굉연한 소리에 컨테이너가 덜컹 흔들렸다.

“허업!”

별안간 입을 틀어막은 시현이 헛숨을 삼켰다.

“하아, 하….”

순간 눈을 질끈 감았던 지안은 가쁜 숨을 몰아 뱉으며 어리둥절하게 눈을 떴다. 그저 한 줄기 빛이었다. 찰나로 눈이 멀 듯한 빛이 눈앞을 스쳐 절로 눈이 감겼었다.

굉음은 바로 직후에 울려 퍼졌다. 화들짝 숨을 삼키고 눈을 떠보니 제 앞에 있던 남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지안은 왼쪽 곁눈에 어른거리는 빛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곧장 눈에 들어온 것은 온통 하얀 빛 덩어리였다. 눈이 부실 만큼 새하얀 도포와 그 위로 비단처럼 흘러내린 긴 백발, 그의 뒷모습이다.

“…하.”

안도와 같은 숨이 툭 터져 나왔다. 이어져 나오는 호흡이 흐느끼듯 미친 듯이 떨렸다. 삽시간에 차오른 눈물이 금세 볼 위로 넘쳐흐른다.

완전히 힘이 풀려버린 지안은 풀썩 주저앉아 꿈만 같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여… 영….”

한파 속에 내던져진 듯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온몸에 긴장이 풀려 그를 부르지도 못했다. 시야가 기우뚱 기울고 있었다. 이윽고 차가운 바닥에 기어이 관자놀이가 닿았다.

가물거리던 시야에 검은 장막이 드리우기 직전. …쾅! 또다시 컨테이너를 뒤흔들며 남자의 머리통이 벽면에 처박혔다.

놈의 머리를 한 손으로 움켜쥔 채 몸을 일으키는 그의 뒷모습이 장막 너머로 아득히 사라졌다.

이미 남자의 의식은 끊어진 후였다. 단말마의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벽면에 머리를 처박힌 순간 의식을 잃은 것이었다.

단단한 철벽이 남자의 머리 모양을 따라 움푹 패어있었다. 월호는 이미 의식을 잃은 인간의 머리를 또 한 번 가차 없이 처박았다. 굽혔던 무릎을 세우며 쥐고 있던 머리통을 툭 던지자, 그 안에 숨어있던 악귀가 신음을 뱉으며 빠져나왔다.

“으으… 윽….”

찢기고 해져 남루하기 짝이 없는 누더기 하며 지저분하게 삐져나온 상투 머리가 거지꼴이 따로 없다.

월호는 놈의 목을 꾸욱 지르밟았다.

“꺽! 끄억!”

시뻘건 안구가 튀어나올 듯 돌출됐다. 그의 발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손은 애처로이 바닥만 텅텅 내리쳤다.

놈을 향해 내리뜬 월호의 적안이 나른하게 기울었다.

“어디서 굴러먹던 잡귀더냐.”

“끅! 꺼걱!”

쩍 벌어진 놈의 입안에서 검은 혈이 쿨럭쿨럭 튀어나왔다. 하얀 도포를 검게 물들이는 더러운 피를 힐끗 내려다본 월호는 그악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지…. 어차피 소멸될 것을 물어 뭐할까.”

하얀 손바닥 안에서 불쑥 튀어나온 금빛 단도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놈의 눈알에 내리꽂혔다.

“끄아아아-악!”

쭉 뽑아든 단도는 반대편 안구를 연달아 파고들었다.

“크헉!”

놈은 더 이상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분수처럼 흑혈을 토해냈다. 월호의 매끈한 얼굴을 더럽힌 피가 날렵한 턱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놈의 눈을 찌를 때도, 검은 피가 얼굴을 적신 이 순간에도 그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단 한 번 깜빡이지도 않은 적안은 움켜쥔 반죽처럼 쪼그라드는 악귀의 얼굴을 그저 덤덤하게 바라만 볼 뿐이었다.

단도를 갈무리한 월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스산하게 뒤를 향한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어느새 명주실에 칭칭 감긴 채 꼼짝도 못 하고 있던 시현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 오, 오라버니….”

내딛는 그의 걸음은 빠르지 않았다. 서서히 목줄을 조여오는 느긋한 걸음에 시현은 연방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등 뒤로 소멸된 악귀의 흔적이 까만 재로 흩날리고 있었다. 불안하게 떨리는 눈이 흩날리는 검은 재를 망연히 바라보다 그의 얼굴을 건너다봤다.

그는 지나치게 침착했다. 아름다웠던 회색 눈동자는 완전히 적빛으로 물들고 말았다. 살생에 주저함이 없던 그 옛날의 월호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시현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죽는다. 나 역시 저 검은 재처럼 부서질 것이다.

“아, 아, 안 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시현을 묶은 명주실이 그가 걸음을 디딜 때마다 싹둑싹둑 끊어지고 있었다. 목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배로.

이 실이 발목까지 끊어지는 순간 저는 소멸될 것이다. 행여 끊어지지 않는다 한들 수백 수천 년 이 자리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저는 끝장나는 것이었다.

시현은 풀려난 어깨를 마구 비틀며 눈물을 갈쌍거렸다.

“사, 살려줘. 살려줘, 오라버니!”

어느 틈에 눈앞까지 다가온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목석처럼 뻣뻣하게 묶인 시현이 벌러덩 나자빠진 후에도 그는 저벅저벅 걸음을 디뎠다.

시현의 다리 위로 한 발.

“아아악!”

허벅지 위로 또 한 발.

“끅. 끄아악!”

디디는 걸음마다 살이 타고 뼈가 으스러졌다. 뱃가죽 위에 두 발이 올라선 후에는 되레 잠시나마 통증이 사라졌다. 분명 마지막 기회를 주려는 것이리라. 시현은 안도의 숨을 뱉으며 불쌍한 얼굴로 흐느꼈다.

“으으, 흐으읍.”

시현의 뱃가죽 위에 서서야 걸음을 멈춘 월호는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추었다. 더러운 잡귀의 피가 흥건히 묻은 단도날이 시현의 턱에 바짝 닿았다. 가늘게 벌어지는 붉은 입술 사이로 고저 없는 음성이 나른히 흘러나왔다.

“개수작 부리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오, 오라버니. 지,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 봐. 나, 나도 협박받은 거야! 저 미친 마귀 새끼가 내 정체를 다 까발리겠다고 혀, 협박을 해서!”

책임을 전가하면 정상참작이라도 되리라 여겼다. 그래도 동족이 아닌가. 손톱만큼이라도 불쌍하게 봐줄 거라 생각했다.

하나, 그의 칼날은 뾰족하게 선 채 가차 없이 입매 끝에 걸쳐졌다.

“으윽!”

“그래서.”

“그, 그래서… 나도, 어쩔 수, 혀, 협박… 으으아악!”

가증스레 거짓을 이어가던 입술이 날카로운 칼날에 서서히 찢어졌다.

“할 말은, 그게 단가?”

거짓 변명 따위 그는 애초에 듣지 않은 것이었다. 그저 숨이 끊어지기 전 마지막 한 마디. 그가 베푼 아량은 그것까지였다.

하나 이대로 포기할 수 없는 시현은 찢어진 입술을 필사적으로 다달거렸다.

“자, 잘못했어. 사, 사, 살려줘! 살려줘, 오라버니! 나, 나 이렇게 소멸되면 안 돼. …드, 드라마! 나 소멸되면 드라마도 끝이야! 서지안이 어떻게 잡은 드라만데! 쟤도 끝이라고!”

“입.”

“제발!”

“다물어.”

“살려-억! 커억…!”

귀까지 찢어진 살갗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곧장 고쳐잡은 금빛 단도는 소멸의 절차를 정직히 따르며 시현의 양쪽 안구에 연달아 쑤셔박혔다. 하반신에 둘둘 말려있던 명주실은 그 순간 빠르게 타들어 갔다.

“꺼, 끅!”

애처로운 숨이 뚝뚝 끊어졌다. 비릿한 피 냄새가 순식간에 진동했다. 쩍 벌어진 입 밖으로 솟구치는 붉은 피가 이미 흑혈로 물든 그의 도포를 뒤덮었다.

타들어 가는 시체 위에서 내려선 후 뒤로 두 발짝.

눈앞에서 검은 재로 흩어지는 시현을 무심히 바라보던 월호는 바닥에 단도를 던지며 돌아섰다.

“하….”

탄식을 뱉는 입술이 그제야 감정을 품고 일그러졌다. 금세 회색빛으로 되돌아온 눈은 붉게 충혈된 채 물기를 머금었다.

찢겨나간 셔츠와 바지 지퍼, 헝클어진 머리칼과 붉게 부은 볼, 터진 입술까지. 의식을 잃고 쓰러진 지안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겉도포를 벗어 지안의 몸을 감싼 월호는 가녀린 몸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 사지가 떨렸다. 무심한 가면 뒤에서 내내 불안정했던 호흡이 이제야 선명히 드러나고 있었다.

지안아. 서지안….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소리가 아프게 목을 짓눌렀다. 다만 달싹거리는 입술은 그저 소리 없이 흐느낄 뿐이었다.

“월호 님, 월…! 허…!”

“으아아… 맙소사….”

우진과 연락이 닿아 한달음에 달려온 병천과 수아가 머리만 남아있던 시현의 모습에 경악하며 주저앉았다. 이내 머리마저 까만 재로 사라지던 순간, 둘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떨구었다.

중천에 그믐달이 떠올랐다. 품에 안은 지안의 호흡이 흐린 의식 속에서도 점점 가빠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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