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80화 (80/106)

80.

오후 10시 30분.

촬영이 끝난 시각이었다. 예정된 일정에서 30분이 오버되긴 했지만 변수가 많은 현장에서 이 정도면 몹시 양호한 편이었다. 10시가 되기 20분 전부터 초조했던 마음에 겨우 안도감이 차올랐다.

지안은 감독의 OK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황급히 조명 아래를 벗어났다. 마음이 바쁜 와중에도 스탭, 배우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대기실로 쓰고 있는 컨테이너까지 한달음에 달려간 지안은 서둘러 소지품을 챙겼다. 벌써부터 이상하게 몸이 후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오늘 밤 불같이 치솟을 성욕에 그를 놓지 못할 것을 생각하자 괜히 단전 아래가 울렁울렁 요동치기도 했다.

나 설마, 기대하는 건가.

엉큼한 생각에 얼른 고개를 털면서도 입꼬리는 이미 볼살을 한껏 밀어 올렸다. 그와의 관계가 예전과 같았더라면 이 시간은 그저 두렵기만 했을 것이다.

후우…. 첫 경험도 아닌데 왜 이렇게 떨려.

두근대는 가슴팍을 두드리며 주차장을 향해 잰걸음을 걸었다. 동시에 상기된 손놀림은 빠르게 승원에게 보낼 문자를 찍고 있었다.

[ …금방 갈게요! ^//^ ]

쑥스럽게 발그레한 이모티콘을 띄우고 막 전송 버튼을 누르던 순간이었다.

“지안 씨!”

지안은 발목을 붙드는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장비를 챙기는 스탭들을 뒤로 하고 조감독이 달려오고 있었다.

몇 걸음 만에 성큼 달려온 조감독은 숨을 고르며 미안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뒤에 스케줄 더 있어요?”

“아뇨. 스케줄은 없는데….”

지안은 내심 불안한 기색을 감추며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왜요? 씬 다시 따야 해요?”

“아뇨, 그건 아니고요. 내일 촬영 때문에 잠깐 B 세트장에서 작가님하고 상의를 좀 해야 할 거 같아서요.”

“작가님이요? 현장에 오셨어요?”

“예. 방금 막 도착하셨다는데. 집필 중에 어렵게 시간 빼신 거라….”

첫 리딩 때 이후로 작가를 본 적은 없었다. 현장을 굳이 찾지 않는 작가가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왔다면 아마도 급한 일이라는 뜻일 테다.

사정하듯 눈썹 머리를 모은 조감독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덧붙였다.

“시간 많이 안 잡아먹을 거예요. 한, 30분?”

30분 후면 11시…. 펜트하우스까지 가려면 20분 정도. 자정이 되기 전엔 도착할 테니 괜찮으려나….

“시현 씨랑 신재 씨는 이미 가 있고요.”

“아, 그래요?”

주연 배우들이 모두 가 있다 하니 애초에 고민을 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네…. 뭐, 그럼.”

지안은 하는 수 없이 가방을 고쳐 메며 발길을 돌렸다. 조감독은 연방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작가님이 원래 길게 말씀하시는 스타일은 아니시라, 30분도 안 걸릴 수도 있어요.”

“네. 근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세요? 이 시간에 여기까지 오신 거면 보통 일은 아닐 텐데….”

“글쎄요. 저도 전달만 받은 상황이라. 이쪽으로 갈게요.”

조감독의 손짓을 따라 자연스레 방향을 틀었다. 한시가 급한 모양인지, 조감독은 좁고 어둑한 사잇길을 따라 앞서 걸으며 금세 B 세트장에 당도했다.

“이쪽입니다.”

당연하게 세트장 입구만 바라보던 지안은 의아한 얼굴이 됐다. 조감독은 세트장 외벽의 철제 계단을 가리키고 있었다.

“2층이요?”

“예. 위쪽에 테이블을 마련해 둔지라.”

“아아….”

커다란 창고형 컨테이너로 지어진 B 세트장은 1층만을 이용해 촬영이 진행됐다. 그 위로 비교적 작은 컨테이너를 올려놓은 공간은 주로 소품이나 잡동사니를 넣어두는 곳이었다. 올라가 본 적은 없지만, 이따금 문이 열려있을 때 언뜻 보아도 각종 장비로 입구까지 어수선해 보이곤 했었다.

왜 굳이 그렇게 복잡한 곳에서….

“지안 씨?”

“아, 네!”

지금껏 앞서 걷던 조감독이 자연스레 지안을 앞세웠다. 텅텅, 철 계단을 오르며 지안은 수차례 뒤따라 올라오는 조감독을 힐끔거렸다. 몸의 굴곡이 드러나는 스키니진이 괜히 불편했던 탓이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이따금 스치듯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입구까지 꽉 채워진 잡동사니 사이로 어둑한 빛이 겨우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좁은 틈새를 미로처럼 들어가야 내부로 진입할 수 있을 터였다.

“들어가시죠.”

어느새 뒤로 바짝 붙어선 조감독이 상냥하게 웃으며 안쪽을 손짓했다.

“…네.”

이미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한 것은.

막연히 온갖 잡동사니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컨테이너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꺼내기 용이하도록 온갖 물건을 입구에만 쌓아놓은 듯, 비좁은 통로를 조금만 들어가면 텅 빈 공간이었던 것이다.

잡동사니를 헤치고 들어오는 내내 답답했던 숨이 너른 공간에 발을 디디자 겨우 트였다.

하나 그도 잠시.

작가와 배우들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공간을 휘둘러보며 입을 뗐을 때였다.

“다른 분들은….”

“워허. 진짜네.”

어쩐지 낯설게 들려오는 음성에 지안은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직전까지 저를 뒤따르던 조감독이 일순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지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감독님…?”

쾅-!

그 순간이었다. 잡동사니 너머로 컨테이너 문이 굳게 닫혔다. 바람인지 뭔지, 누가 문을 닫은 건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뭐야… 이게 대체 뭐….

어딘지 싸하게 돌변한 조감독이 껄렁껄렁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안은 마른침을 삼키며 저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쳤다. 다가올수록 선명히 보이는 얼굴은 분명 그였으나, 날카로운 눈매는 낯선 이의 것이었다.

“진짜였어….”

“조, 조감독님.”

무어라 중얼거리며 다가온 조감독은 지안의 귓불 아래로 불쑥 코를 처박았다.

“!”

“이렇게나 맛있는 냄새를 흘리는 인간이라니….”

살갗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소리가 바로 귓전에서 울렸다. 온몸에 소름이 솟구쳤다. 펄떡거리는 심장 소리에 머리가 흔들렸다. 주춤주춤 밀려나는 구둣발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짓… 읍!”

간신히 말을 뱉던 입이 거친 손바닥에 틀어막혔다. 하관을 꽉 움켜쥐는 악력에 볼이 패고 턱이 으스러질 듯 붙들렸다.

흑적색으로 돌변한 눈동자가 바로 코앞에서 음흉하게 번뜩였다. 길고 뾰족한 혀가 맛있는 음식이라도 눈앞에 둔 양 추접스레 입술을 적셨다.

“하아. 이년 진짜, 냄새 죽이는데…?”

“읍, 으읍!”

꼼짝없이 하관이 붙들린 채 목으로 소리쳤다. 남자의 손목을 붙들고 손을 떼어 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감독이 아니다. 이 눈은 분명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이게,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혼란이 밀려와 시야가 마구 흔들렸다. 차오르는 공포심에 가슴팍이 둥둥 울렸다.

눈앞에서 기이하게 고개를 까딱거리며 연방 코를 킁킁대던 남자가 돌연 허공에 대고 물었다.

“이년 주인 없는 거 맞아? 괜히 건드렸다가 좆되면 누님이 책임지시나?”

왼편에서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닥치고 옷이나 벗겨.”

“……!”

턱이 붙들려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한쪽으로 한껏 치우친 채 커다랗게 뜬 눈이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려 무진 애를 썼다. 시야에 걸리지는 않았으나, 낯설지 않은 목소리임에는 분명했다.

“씹팔. 이런 년을 두고 빨기만 하라니. 미친 거냐고… 쓰읍.”

남자가 된소리를 구시렁대며 침이 흐른 입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가 컨테이너 안을 음산하게 울리고 있었다. 이윽고, 남자의 어깨너머로 드러난 얼굴은 역시나 시현이었다.

지안의 미간이 깊이 팼다. 금세 충혈된 눈동자가 매섭게 시현을 쏘아봤다. 시현은 표독스레 입꼬리를 올리며 재미난 듯 쿡쿡 웃음을 삼켰다.

“그년도 몸이 바짝 달았을 테니 외려 고마워할 거야. 아마 조금만 빨아줘도 넣어달라고 징징댈걸?”

“하아. 그럼 안 되는데? 이렇게 단내를 질질 싸면서 박아달라고 사정까지 하면 내가 못 견디잖아… 응?”

남자의 거칫한 손이 등허리를 쓸어내리다 둔부를 꽉 움켜쥐었다.

“으으음!”

떨쳐내려 바르작거려보지만, 남자의 엄청난 악력에는 새 발의 피만큼도 못 미치는 발악이었다.

한 걸음 다가온 시현이 별안간 남자의 머리칼을 움켜쥐며 으르렁댔다.

“이년 밑구멍에 손가락 하나 집어넣었단 봐. 네놈은 이 자리에서 당장 소멸될 테니까.”

남자는 머리칼이 붙들린 채로도 사악하게 웃으며 혀를 날름거렸다.

“크크큭. 알았슴다, 알았어요. 일단 씹물 좀 빨아보자고, 엉?”

흡족하게 웃으며 남자의 머리칼을 던지듯 놓아준 시현은 얄밉게 고개를 기울이며 지안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아가, 걱정하지 마. 나 역시 구슬이 잘못돼서 오라버니에게 해를 끼치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적개심과 두려움이 혼재된 다갈색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리며 시현의 얼굴을 노려봤다. 시현은 거만하게 턱을 쳐들었다.

“그냥 네 몸을 달래만 주려는 거야. 이놈이 혀 놀림이 아주 좋은 놈이거든. 기분 좋게 해줄 테니 너는 그저 느끼기만 하면 돼. 어때, 고맙지?”

시현의 손끝이 어깨를 스치고 쇄골을 지나 가슴의 굴곡을 따라 떨어졌다. 지안은 발작처럼 몸을 비틀었다. 시현은 얄밉게 눈썹을 들썩이며 덧붙였다.

“오라버니에게 일러바치고 싶겠지만 소용없을 거야. 안타깝게도 여길 나가는 순간 넌 여기서 나를 봤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그저 조감독의 손에 추접스럽게 절정을 맞은 기억만 끔찍하게 남겠지.”

“으흡! 읍!”

손바닥에 가로막힌 발악이 뭉툭하게 울렸다. 조감독의 손목을 잡아 뜯던 양손은 어느새 남자의 남은 한 손에 포박된 채였다. 분하고 화나고 무섭고 두려웠다. 복합적인 감정이 붉어진 눈시울을 뜨겁게 적시고 있었다.

남자는 벌겋게 흥분한 얼굴로 그르렁댔다.

“아씹, 그만 좀 떠들고 비켜보쇼. 하필이면 조루 새끼 몸뚱이를 끌고 와서는 씹팔, 벌써 싸겠네.”

“어머, 정말? 우리 조감독님 그렇게 안 봤는데 조루셨구나? 흐응, 다른 놈을 홀릴 것을 그랬나….”

불룩하게 솟은 조감독의 베이지색 바지 앞섶은 이미 양껏 흘린 쿠퍼액으로 짙게 젖은 채였다. 악귀에게 몸뚱이를 먹히고도 정직하게 좆이 서는 인간의 신체란 참으로 신비하지 않은가.

비소를 흘리며 조감독의 아랫도리를 힐끔 내려다본 시현은 남자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렸다.

“뭐, 조루면 어때.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신나게 싸면 그만이지. 어디 한 번 맛있게 빨아보렴.”

“우움! 읍! 흐으-읍!”

내뱉지 못한 소리가 목을 꽉꽉 내리눌렀다. 얼마나 소리를 삼켰던지 목이 땅땅하게 부은 기분이었다. 움직일 수 있는 거라곤 하반신뿐이라, 골반을 마구 비틀며 발장구를 쳤다.

“거 되게 사부작거리네. 가만히 좀 있어. 기분 좋게 빨아주겠다니까?”

발악하다 밀리고 밀린 몸이 컨테이너 벽까지 내몰렸다. 굽이 부러진 구두는 벗겨진 채 이미 저만치 널브러진 채였다.

“하아, 하악!”

겨우 입이 풀려나나 싶었지만 찰나였다. 막힌 숨을 서둘러 내뿜던 순간, 길게 빼낸 남자의 혀가 불쑥 다가왔다. 화들짝 고개를 비튼 지안은 입술을 꾹 물어 감추었다.

“이얼… 피했어?”

다시금 턱이 붙들렸다. 짜악-! 고개가 돌아갈 만큼 억세게 뺨을 후려치는 힘은 과연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엄청난 힘에 몸이 휘청하며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시야가 핑글 돌아 초점을 찾기가 어렵다. 구토가 치솟을 듯 속이 울렁댔다.

“아, 아으….”

간신히 신음만 내뱉은 입속으로 짭짜름한 손가락이 쑥 밀려들어 왔다. 혀를 내리누르며 강제로 입을 벌려놓은 남자는 간악하게 웃으며 지안의 셔츠 앞섶을 움켜쥐었다.

“정성스럽게 윗구멍부터 핥아주려 했더니, 안 되겠네…?”

찌지직, 셔츠 단추가 뜯기고 슬립이 찢겨나간 것은 한순간이었다. 시린 공기가 브래지어 위로 드러난 살갗을 와락 덮쳤다.

“아아으! 으음-!”

지안은 혀가 눌린 채 하염없이 비명만 내질렀다. 침을 줄줄 흘리며 입맛을 다시는 악마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꺌꺌거리는 시현의 웃음소리가 어지럽게 머리를 흔들었다.

무서워. 나 무서워요, 영감님….

눈물이 쉴 새 없이 줄줄 흘러내렸다. 속수무책으로 열이 오르는 몸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초점이 무너진 채 흐릿해진 시야로 승원의 얼굴만 간절히 스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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