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79화 (79/106)

79.

이른 아침 지안이 집을 나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월호는 기절하듯 침대에 쓰러졌다. 아무리 그라 한들, 연이틀 몰아친 혼돈과 부족한 수면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해가 지고 깊은 어둠이 내릴 때까지 그는 깨지 못했다. 점심과 저녁상을 챙겨 들고 그의 침실을 찾았던 수아는 한숨만 남겨두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하물며 긴 하루의 시간 동안 꼼짝 않고 월호의 곁을 지키고 있는 병천도 수저를 들지 않았으니, 수아의 한숨은 깊을 수밖에 없었다.

두 어르신이 못내 걱정되어 펜트하우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서성거리던 수아는 결국 침실로 돌아왔다.

병천은 여전히 침대 곁에 앉아 미동이 없었다. 오전엔 내내 목석처럼 선 채 벌을 자처했던 그였다. 수아가 의자를 가져다주어 그나마 나아진 광경이었다.

곁에 다가선 수아가 조심히 운을 뗐다.

“묘흔 님…. 어찌 그리 꼼짝을 않으셔요. 아니, 그리 계시더라도 끼니는….”

“수아야.”

종일 닫혀있던 입술이 겨우 떨어지니 음성이 까끌까끌하게 잠겼다.

“예, 묘흔 님….”

“너는 무엇이 최선인 듯싶으냐.”

“…….”

무지근하게 건너오는 질문에 수아는 금세 울음을 터트릴 듯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어제까지도 몰랐던 일이었다. 제가 찾고도 제대로 살필 겨를도 없이 병천에게 건네었던 서적이었다. 해서 그 안에 무슨 내용이 실려 있었던지, 수아는 오늘 아침에서야 병천에게 전해 들었다.

이미 한바탕 눈물을 쏟고도 댕그란 눈동자가 금세 촉촉이 젖어들었다.

“제 뜻이야 묘흔 님과 무엇이 다르겠어요. 허나… 월호 님의 복심도 충분히 이해가 되니… 그저 속상하여….”

흐려진 말끝에 울음이 섞였다. 비록 제 생에 비해 턱없이 짧았으나, 지안과의 추억이라면 수아에게도 선명한 것이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진실로 동무를 사귀어 본 적이 없으니 더욱이 그러했다. 하여 지안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수아에게도 적잖은 충격이자 아픔이었다.

저도 이러한데, 월호 님은 오죽하실까.

하나 결국 당신을 포기하려 하는 월호 님의 결정이 못내 속상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지안 님을 조금도 생각지 못하는 내가 모진 것 같으냐.”

바싹 마른 병천의 목소리가 서글펐다. 수아의 입술이 삐쭉삐죽 울음을 삼켰다.

“아닙니다. 아니어요, 묘흔 님….”

병천의 어깨가 조금 솟구치다 떨어졌다. 동시에 길게 내뿜는 숨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렇다 해도 어찌할 수가 없다. 내 생은 모두 이분에게 있음이야. 월호 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내 생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되면 나는… 나는 없는 것이야.

간신히 내뱉는 목소리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허벅지 위에 곤히 포개어놓은 두툼한 손이 꾹 말려 들어갔다. 안경테 너머의 눈두덩이 금세 벌게졌다.

“어디 연모의 정만 사무치는 것이라더냐.”

왈칵 원망이 차올라 저도 모르게 음성이 조금 격앙되었다.

“월호 님을 향한 내 충심도 그리 사무치는 것이다.”

해서 나는, 이분을 도무지 놓을 수가 없구나.

“묘흔 님….”

소매를 당겨 잡은 수아는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꺽꺽 울음을 삼켰다. 더불어 통곡이 터질 것 같아 병천은 입술을 꾸욱 사리 물었다.

미동 없던 월호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하… 시끄럽게….”

“…엇!”

수아는 얼른 콧물을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소리 죽여 울던 병천은 냉큼 소매로 눈물을 꾹꾹 찍어냈다.

뻑뻑한 눈꺼풀을 반쯤 들어 올린 그가 청승맞게 울고 있는 고양이와 토끼를 마뜩잖게 돌아보았다.

“고얀 것들.”

들으란 듯이 떠들지, 아주.

쯧, 혀를 차며 몸을 일으킨 월호는 협탁 위로 손을 뻗었다. 기민하게 물병을 집어 든 수아가 유리잔을 채워 건넸다. 가득 채운 물 한 컵을 단번에 비운 월호는 입가를 훔치며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하라는 건 다 하고 이리 죽치고 있는 거냐.”

병천의 입술이 대번에 꾹 다물렸다. 동시에 고개를 푹 떨구는 것을 보아하니 답은 뻔했다. 병천을 향한 회색 눈동자가 권태롭게 깜박였다.

“귀찮으면 내가 해?”

“월호 님….”

병천의 얼굴이 호소하듯 일그러졌다.

지안이 집을 나서자마자 서재로 병천을 불러올린 그였다. 그러고선 내린 명이라는 것이, 당신의 집과 차 따위를 병천의 명의로 돌려놓으라는 것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지안의 명의로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해주고, 사는 동안 걱정 없이 하고픈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갖가지 지원을 아끼지 말라 하며 금고 열쇠까지 넘기시니, 이것이 유언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하여 병천은 그의 곁에서 꼼짝 않고 벌을 섰다. 결코 명을 받들 수 없으니 자진해서 그리 한 것이었다.

“그래, 그럼.”

얼마쯤 병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월호는 침대에서 내려서며 도포 고름을 고쳐 맸다.

“내가 하지.”

“월호 님!”

벌떡 일어난 병천은 사뭇 매섭게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는 짐짓 모른 척 다부진 얼굴로 말했다.

“지안 님의 거처는 50일이 지나면 알아보겠습니다. 이 펜트하우스 역시 이놈에겐 과분한 곳입니다. 이곳은 500년 전부터 이 자리에 터를 두고 지켜오신 월호 님의 보금자리가 아닙니까. 앞으로도 영원히 월호 님이 지키실 테니….”

“묘흔.”

“더는 무리한 명을 내리지 마십시오. 이번만큼은 절대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하겠다는 거다.”

“어찌 자꾸 고집을 부리십니까!”

버럭 내지른 언성이 고요한 침실을 쩌렁쩌렁 흔들었다. 화들짝 가슴팍을 움켜쥔 수아는 그저 눈물을 훌쩍이며 어깨를 옹송그렸다.

답답한 듯 셔츠 앞섶을 펄럭인 병천은 자못 독한 눈을 뜨고 서운함을 여과 없이 분출했다.

“막말로 지안 님을 마음에 품으신 것이 고작 얼마나 되었습니까? 저희와의 연에 비견할 바가 아니지 않습니까? 어찌 이놈들과의 연을 그리 단칼에 끊으려 하시는 겁니까!”

그의 두 발이 우뚝 멈추었다. 방금 침대를 벗어나고도 흐트러짐이 없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병천은 이를 악물었다.

“월호 님이 포기하신다 한들, 지안 님은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하십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

“가뜩이나 백 해도 살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물며 본래 호인의 후손은 명이 짧다 들었습니다. 월호 님도 율령 님께 들어 아시지 않습니까.”

살려 봐야 고작 2년이라 했다. 하나 50여 일만 견디면 천 년을 산 그는 당당히 호조사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비로소 그가 온전한 신이 되는 것이란 말이다.

“고작 몇 년을 더 살리고자 월호 님의 귀중한 목숨을….”

“그 옛날에 너는.”

말허리를 가르며 고개를 돌린 그는 야속하게 물었다.

“어린 인간 아이들을 왜 먹이고 살렸더냐.”

“…….”

“그리 몇 끼 채워줘 봐야 어차피 죽을 아이들이었다. 헌데 네 배를 곯아가며 왜 먹였느냐 묻는 것이다.”

달싹거리던 병천의 입술이 꾹 닫혔다. 하나 미천한 저와 당신을 비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병천은 다시금 강강하게 눈을 고쳐 떴다.

“그것은 이와 다른 문제입니다.”

“단 몇 해라도 더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때의 너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

또다시 주춤 밀려난 반박은 결국 힘을 잃었다.

더는 귀천을 내세워 우길 수가 없다. 하물며 지나는 아이들을 가엾게 여긴 제 마음과 연모하는 이를 살리고자 하는 그의 마음은 더더욱 비교할 수 없을 것이었다.

병천은 원망스레 눈을 홉떴다.

“참으로 할 말을 없게 만드십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이 와중에 피싯 웃으며 돌아서는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벌컥 불손한 마음이 차오른다.

“딱 석 대만 후려치고 싶은 마음입니다.”

월호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병천을 돌아보았다.

“죽고 싶구나, 네가.”

“차라리 월호 님 손에 죽어서라도 제가 먼저 가는 것이 낫겠다 싶습니다.”

사뭇 결연한 병천의 얼굴을 얼마쯤 건너다보던 월호는 나른하게 고개를 꺾어 들었다.

“하… 방금 깼는데 왜 이리 피곤할까….”

지이잉. 협탁 위에서 긴 진동음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두 어르신의 기 싸움에 그저 숨만 죽이고 있던 수아가 얼른 휴대폰을 챙겨 월호에게 건네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월호의 눈썹이 의아하게 물결쳤다. 우진의 전화였다.

이 녀석이 묘흔을 거치지 않고 내게 직접 전화를 건 적은 없었는데.

통화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우진의 목소리가 성마르게 건너왔다.

- 월호 님! 저 우진입니다.

“그래. 무슨 일이야.”

- 아, 그것이. 촬영이 끝난 지는 한참인데 어찌 지안 님이 나오질 않으셔서요. 방금 마지막 남은 스탭이 철수를 했는데, 그자의 말이 지안 님은 이미 가셨다 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된 영문인지 전화도 받지 않으시고… 혹, 지안 님께 따로 연락을 받으셨는지요?

숨도 쉬지 않고 줄줄이 이어지는 목소리에 조바심이 가득했다. 대번에 안색이 어두워진 월호는 홈 버튼을 눌러 자는 동안 밀려있었을 지안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 촬영 끝났어요. 늦게 끝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정말. 오늘 그믐인 줄도 몰랐던 거 있죠? 벌써 몸이 이상한 거 같아ㅠㅠ 금방 갈게요! ^//^ ]

마지막 메시지가 들어온 시각이 벌써 1시간 전이었다.

그믐. 오늘이 그믐이었다. 불과 이틀 전까지도 분명히 알고 있었으나 패닉에 빠져 잊고 말았다.

하나 날짜를 인지했던 이틀 전까지도 괜찮으리라 여겼다. 그땐 자신이 온종일 곁을 지키리라 생각했으니까. 설령 그게 아니라 한들 어차피 촬영이 끝나면 내내 곁을 지켰을 우진과 곧장 돌아올 테니까.

그간 수없이 현장을 찾았지만 시취를 풍기는 자를 본 적은 없다. 그믐에 치솟을 지안의 음기에 끌려 허튼짓을 할 만한 악귀는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 분명. 그 현장에서 지안에게 손을 댈 자는 없을 터인데….

- 월호 님. 월호 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우진의 목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가늘게 좁아진 그의 시야가 점점 흐트러지고 있었다.

이윽고, 서서히 미간이 좁아들었다. 휴대폰을 쥔 손에 하얗게 힘이 실려 갔다.

“안색이 어찌, 무슨 일이랍니까?”

“월호 님, 어찌 그러셔요?”

오래지 않아 팔을 떨군 그는 혼잣말처럼 허망한 한 마디를 흘려냈다.

“…시호.”

별안간 사위를 휘도는 기온이 뚝 떨어졌다. 그를 감싸며 일렁이던 연기가 일순 회오리치며 솟구쳤다. 회색 눈동자는 이미 적빛으로 물들어버린 후다.

“워, 월호 님!”

병천은 휘몰아치는 바람에 뒷걸음치며 시린 눈앞을 팔로 가렸다.

“흐익!”

깃털처럼 가벼운 수아는 이미 주저앉은 채 침대까지 밀려나 버린 참이었다.

순식간에 잔잔해진 바람에 겨우 눈을 떴을 땐, 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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