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그를 적시지 못한 빗물이 보이지 않는 기운에 밀려 화들짝 방향을 틀었다.
작은 손으로 머리를 가린 채 비를 맞고 선 그녀가 4차선 도로 건너편에 있었다. 고작 비 맞는 모습에 주저 없이 내려오고도 차마 곁에 다가서지 못했다. 무의식이 이미 이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어!”
그를 발견한 지안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환히 벌어지는 입술이 빗줄기 사이로 선명히 보인다.
얼마쯤 그 모습을 복잡한 눈으로 건너다보던 승원은 지안을 적시는 빗줄기를 밀어냈다. 저를 둘러싼 투명한 결계를 신기한 듯 휘둘러보던 지안은 장난스런 얼굴로 엄지를 척 세웠다.
피싯 입꼬리를 올린 승원은 휴대폰을 귓바퀴에 올리며 검지로 휴대폰을 두드렸다. 수신이 닿았을 휴대폰을 꺼내 든 지안이 상기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일 잘 끝난 거예요?
종일 연락이 없는 저를 기다리며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지 단번에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뭐… 대충.”
뭐라 할 말이 없어 얼버무린 말에도 지안은 솟았던 어깨를 늘어뜨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 아. 다행이다. 진짜 걱정했는데.
온종일 휴대폰만 쥔 채 걱정했을 지안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졌다. 단 몇 시간의 부재에도 그렇게 웃음을 잃었을 여자다. 가슴팍이 철근에 눌린 듯 무지근해졌다.
“비도 오는데 왜 반대편에서 내려. 우산도 없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 유턴하려면 한참 더 가야 하잖아요. 건너가면 금방인데. 오늘따라 비가 좀 맞고 싶기도 했고.
어깨를 으쓱이며 머쓱하게 웃는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어여쁘다. 해서 바보같이 미소 짓고 말았다.
“그럼 비 맞게 그거 치워줘?”
지안은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제게 닿지 않는 빗물을 톡 건드려보고는 능청스런 얼굴이 됐다.
- 아니, 생각해보니까 안 맞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영감님 옷 젖으면 안 되잖아요. 나 지금 건너가면 바로 안길 건데.
“…….”
스스럼없이 간지러운 말을 내뱉는 걸 보니 약주 한 잔 걸치신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종일 회사 일로 고단했을 것이라 여겨 일부러 애교를 떠는 건지도 모른다. 어느 것이든 그에겐 그저 애달픈 것이었다.
다물린 입술은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충혈된 눈은 그러지 못했다. 가늘게 균열이 생긴 미간은 주책없게 뜨거워지는 눈두덩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
당장 이 관계를 어찌해야 하나, 치열했던 고민은 부질없었다. 해맑은 웃음을 마주한 순간부터 심장은 이미 미련을 품었다.
단 며칠만. 하다못해 오늘 하룻밤만이라도….
빨간 횡단 신호가 못내 길었다. 이따금 쌩하니 스쳐 가는 차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문득 조바심이 들어 그는 진득이 눈을 감았다 떴다.
빗금처럼 땅에 내리꽂히던 빗줄기가 방울진 채 허공에 둥둥 떴다. 젖은 아스팔트를 내달리던 차들이 흠칫 제자리에 발이 묶였다.
승원은 멈춰버린 세상 속에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환한 웃음을 띤 그녀가 아스팔트 위로 성큼 발을 디뎠다. 또각또각, 빠르게 구르는 구둣발 끝에 방울방울 빗물이 튄다.
한달음에 달려온 온기가 목을 감싸고 가슴에 닿았다. 품에 꽉 끌어안은 몸이 오늘따라 더 가늘었다. 승원은 따스한 목덜미에 깊숙이 입술을 묻었다.
차라리 이렇게 수십, 수백 년 시간을 멈춰 버릴까. 아니 그렇다 해도, 우리의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겠지.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잠시 그렇게 멈춰있었다. 품에 안긴 여체가 너무도 부드러워서, 입술을 묻은 목덜미가 몹시도 향기로워서.
그러니까 단 며칠만 이렇게….
이기적인 욕심임을 알고 있다. 하나, 질척이는 미련을 도저히 놓지 못하겠다.
**
벌써 새벽이었다.
밤새 잠 한숨 자지 않고 지안의 얼굴을 바라만 보았다.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았던 시간은 푸른 새벽에 닿아 외려 짧게만 느껴졌다.
몸을 일으킨 승원은 엎드려 누운 지안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심히 이불을 걷었다. 오른쪽 등허리에 또렷이 새겨진 호인의 표식이 한눈에 들어왔다.
‘ 호인의 표식 말이다. 정기를 빼앗긴 계집의 부패는 그 표식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
오랜 밤을 안고도 세세히 살피지 못했다. 아니, 이것이 부패하리라곤 애초에 생각지도 못했기에 매일의 변화를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이었다.
처음 그녀를 안았던 날, 이 표식을 집요하게 깨물고 빨아들였었다. 이 표식이 네게 있어 다행이다 읊조리며.
그래, 그때 보았던 표식은 이토록 진하지 않았었다. 알고 나서야 보니 그러했다. 결국엔 이제야 현실임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이것이….
‘ 문제는 진행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빠른 게지. ’
‘ 네 마음이 깊어진 탓일 게다. ’
너를 품은 내 마음 탓에 이리 검게 썩어들어간 것임을.
절로 미간이 우그러들었다. 차마 손대지 못하고 등허리 근방을 배회하는 손이 그답지 않게 조금 떨렸다.
그간 아팠을 텐데 어찌 견뎠을까. 미처 보지 못한 순간 홀로 통증에 끙끙댔을 지안의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팍이 뻐근해진다.
당장 구슬을 빼내지 않는다면, 하여 이대로 내 깊은 마음이 그녀 안에 속절없이 새겨진다면 아마도 통증은 빠르게 심화할 것이었다.
“하….”
손바닥 속에 한숨을 담은 그는 거칠어진 얼굴을 진득이 쓸어내렸다. 미련을 놓지 못해 하룻밤을 더 품은 것이 얼마나 되었던가. 지안의 고통 앞에서 질긴 미련은 또 이토록 힘을 잃어간다.
세상모르고 잠에 빠진 지안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수 개의 빛으로 일렁였다. 잘게 깨트린 갖가지 보석을 박아놓은 듯 오묘하고도 신비로운 빛이었다. 하나 근저에 깔린 빛은 블랙홀처럼 몹시도 어두웠다.
암막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밝아지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침대를 벗어났다.
여전히 미세하게 금이 간 서재의 유리창을 되돌려놓고, 무심히 서재를 휘둘러보았다. 수백 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책장 앞에 서서는 꽤 오랜 시간 생각을 비웠다.
밤사이 비구름이 걷힌 창밖을 아득히 돌아본 순간, 그의 검푸른 눈동자는 초연히 침잠한 채였다.
**
오랜만에 세트장을 벗어났다. 서울 시내 모 백화점에서의 촬영이었다.
스탭들은 주변 통제를 하느라 분주했고, 배우들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호흡을 다듬으며 각자 촬영 준비에 한창이었다.
“지안 씨.”
매장 스툴에 앉아 대본을 훑어보던 때였다. 지안은 제 앞에 멈춰선 은색 글리터 힐을 힐끗 바라봤다. 이내 고개를 들자 시현이 싱긋 입꼬리를 기울이며 눈을 접었다.
“우리 대사 좀 맞춰볼까요?”
그것은 곧, ‘시비 좀 걸어도 되니?’ 와 같은 뜻임을 이젠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무시하고 싶었지만 주변엔 보는 눈이 많았다. 펜스 너머에서 구경 중인 시민들도, 메이킹 필름 기사 님도 이미 이 장면을 캐치한 참이다. ‘싫은데요.’ 소리가 나올 리 만무했다.
지안은 시현을 향해 상냥하게 웃으며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네, 앉으세요. 선배님.”
시현의 눈에만 보일 가식적인 웃음이었다. 시현은 콧방귀를 뀌며 지안의 곁에 앉아 대본을 펼쳤다. 이쪽저쪽 눈치를 살피며 복화술로 속삭이는 음성은 역시나 시비조였다.
“어째 어제부터 오라버니가 안 보인다? 소꿉장난 끝났니?”
시현의 말마따나 오늘도 그는 촬영장에 함께 오지 못했다. 아무래도 안색이 영 좋지 않아 오늘은 제가 먼저 집에서 쉬기를 권했다.
‘ 그럴까, 그럼. ’
긴 고민 없이 그러마 한 것을 보면 그도 어제 하루 회사 일이 어지간히 고되었던 모양이었다.
알게 모르게 한숨을 삼킨 지안은 대답 대신 대사를 읊었다.
“이게 더 어울리겠는데? 도영 씨 피부톤이 밝잖아.”
무시로 일관하는 지안을 못마땅하게 흘기던 시현은 괜스레 대본을 넘기며 지안의 왼쪽 가슴을 힐끔거렸다.
“향이 짙은 걸 보니 구슬은 아직 거기 있는 것 같은데…. 유치하게 사랑싸움이라도 하셨나?”
진득이 눈을 감았다 뜬 지안은 혀끝으로 치열을 훑었다. 어젠 어쩐 일로 잠잠하기에 시비 걸기도 포기했나 싶었더니,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닌 모양이다.
“죄송하게도 전혀 문제없습니다만.”
“흐응. 그래…?”
무슨 일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을 속내가 콧소리에 고스란히 녹아났다. 지안은 애써 웃는 얼굴로 시현을 돌아봤다.
“대사 안 맞추실 거예요?”
새침하게 눈을 내리뜬 시현은 공연히 대본을 휙 집어 넘겼다.
“오늘 그믐인데, 너 혼자 둬도 된다니?”
또다시 이어진 딴소리에 한숨을 쉬던 지안은 문득 미간을 좁혔다. 벌써 그믐이 돌아왔던가. 쏜살같이 흘러간 시간이 새삼스러웠다.
그믐이면 그러니까….
불현듯 시야를 흩트린 지안은 지난 그믐날을 떠올렸다. 미치게 치솟는 욕정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르작거렸던 그날. 빨리 은밀하고 깊은 곳을 긁어주지 않으면 곧 죽을 것 같던 그 기분.
아. 끔찍했어, 진짜.
절로 부르르 몸이 떨렸다. 물론 이번엔 그의 앞에서 부끄러워할 일도 없겠지만, 문제는 귀가 시간이었다. 예정된 일정대로라면 오후 10시쯤에는 끝날 테지만, 현장의 상황은 늘 그렇듯 변수가 존재한다.
자정 전까지는 그의 곁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근심 어린 얼굴로 아랫입술을 꾹 깨물던 때였다.
“지안 씨, 잠시만요!”
조감독이 손을 펄럭이며 지안을 찾았다. 그러잖아도 시현과의 대화가 피곤했던 차에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네, 가요!”
지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얼른 일어나 조감독에게 달려갔다.
내내 지안을 주시하고 있던 시현은 대본으로 입술을 가리고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어쩜, 하늘도 이렇게 날 도우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