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77화 (77/106)
  • 77.

    오후 6시. 예정보다 이르게 촬영이 끝났다.

    스탭과 배우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차에 오른 지안은 시트에 엉덩이가 닿기도 전에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기대에 차 있던 얼굴은 금세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종일 그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정말 큰일인가 보네….”

    혹시 몰라 병천에게도 문자를 남겨두었지만 역시나 감감무소식이었다. 하물며 점심 도시락을 챙기러 온 수아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의 비서 일을 맡고 있는 수아가 회사 일에 대해 모른다는 것이 이상했지만, 요 며칠 출근을 하지 못했다는 수아의 말에 그러려니 수긍한 참이었다.

    “댁으로 가실 거죠?”

    우진이 룸미러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찰나의 상념을 떨친 지안은 휴대폰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아, 오늘은 들를 데가 있어서요. 그쪽으로 부탁드릴게요.”

    목적지를 알려준 지안은 곧장 동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쉽게도 그와 함께 가진 못하게 됐지만, 또 언제 시간이 날지 모르니 혼자라도 블루문에 들를 생각이었다.

    “지금 출발해요. 한 30분? 그쯤 걸릴 것 같아요. 네, 이따 봐요, 선배.”

    빠르게 스쳐 가는 차창 밖은 이른 어둠이 내려 있었다. 종일 바람이 심상치 않더라니, 노을을 가린 먹구름이 금세 하늘을 메웠다.

    시트에 무겁게 머리를 기댄 지안은 사뭇 울적한 얼굴로 검은 하늘을 건너다봤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촬영에 임하느라 눌러뒀던 근심이 이제야 둥둥 떠올랐다. 전혀 딴판으로 가라앉은 마음이 못내 무겁다.

    종일 어쩌고 있는지 알 수만 있어도 좋을 텐데….

    하릴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던 지안은 얼마쯤 고민하다 메시지 창을 열었다.

    [ 나 지금 촬영 끝났어요. 블루문 들렀다 가려구요. 혹시 9시 전까지 일 끝나면 연락 줘요. 바에 있을게요. ]

    전송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차창에 하나둘 빗금이 생겼다. 그르렁거리던 하늘이 기어코 가을비를 쏟아부었다.

    **

    한쪽으로 치솟은 입꼬리, 미간이 쪼그라든 채 물결치는 눈썹, 8할은 헛웃음이 섞인 목소리.

    “네가?”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반응이었다.

    “서지안이, 연애를 한다고?”

    10년을 알고 지내면서 제 입에서 연애한단 소리가 나온 것이 처음이니, 이러한 동한의 반응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안은 히죽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까지도 장난인 줄로만 알았던 동한은 뜨악한 얼굴이 됐다.

    “허얼, 진짜라고? 아니, 촬영하느라 바쁠 텐데 남자 만날 시간이 어디 있어서?”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을 껌뻑거리던 것도 잠시, 금세 머리 위로 전구를 번쩍 켠 동한은 손가락을 퉁기며 물었다.

    “아! 설마 상대 배우?”

    딴에는 그럴듯한 추리였으나, 지안은 얼른 손사래 쳤다.

    “이쪽 일 하는 사람 아니에요.”

    “아니야? 그럼 더더욱 이상한데…. 상상 연애는 아니지?”

    “선배….”

    헛웃음 치며 장난스레 눈을 흘기자 동한은 사뭇 의아한 얼굴로 취조하듯 물었다.

    “도저히 각이 안 나오잖냐. 내가 네 동선을 뻔히 아는데. 누구야, 대체? 아니, 어디서 뭘 어떻게 만난 거야?”

    그러게. 그 뻔한 일상 속에서 어쩌다 이런 일이 생겼을까. 돌이켜봐도 그와의 만남은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저도 이런데 동한은 오죽할까. 사실을 말한다 한들 드라마 각본 얘기냐며 코웃음을 칠 것이 뻔하다.

    방대하고도 놀라운 스토리를 풀어내고픈 충동을 꾹꾹 눌러 삼킨 지안은 배시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다음에 소개해 줄게요. 실은 오늘 같이 오기로 했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못 왔어.”

    반짝거리는 눈동자 하며 한껏 찢어진 입꼬리가 온통 분홍빛이었다. 서지안에게 이런 얼굴도 있었나, 동한은 진정 놀라워 탄식을 뱉었다.

    “와… 진짠가 보네. 내가 너 10년을 봤는데 그런 얼굴은 또 처음 본다.”

    “그런 얼굴?”

    머쓱하게 얼굴을 매만지자 동한은 놀리듯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아주 좋아 죽겠나 본데? 쥐어짜면 꿀 떨어지겠다.”

    그래요? 하며 숨김없이 찢어지는 입꼬리가 귀에 걸릴 판이었다. 제 얼굴이 그랬었나, 여태 그녀 자신도 몰랐던 변화였다.

    “잘생겼냐?”

    능글거리며 대뜸 묻는 말에 지안은 대번에 엄지를 척 세웠다.

    “와안전, 거업나게.”

    “어쭈?”

    이날 이때껏 남자라곤 관심도 없던 녀석이 외모 찬양까지. 도통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인지, 동한은 입을 쩍 벌리며 연방 헛웃음을 쳤다. 그래도 보기는 좋다며 금세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동한이었다.

    “어쨌거나 축하한다.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서지안이 연애하는 걸 다 보고. 건호는 알아?”

    “아직이요. 한국 오면 얘기하지, 뭐.”

    “에이, 들어오려면 한 달도 더 걸릴 텐데 그냥 얘기해주지? 저만 몰랐다고 삐질 거 생각하니까 벌써 피곤하다.”

    “아… 그런가.”

    그래, 그 녀석 성격에….

    몇 날 며칠 닭똥집처럼 입술을 내밀고 있을 건호의 얼굴이 몹시 생생히 떠오르는 건, 단지 상상 속에만 남을 일은 아닐 테다.

    “내일 연락하죠, 뭐. 오늘은 선배 놀라게 했으니까 천천히.”

    “하하. 그래, 하루 한 명씩만 하자. 보통 놀랄 일이어야지, 이게. …가만있어 봐. 이럴 게 아니라 축하주 한잔해야 하는 거 아냐? 내일 촬영 땜에 힘들려나?”

    “한 잔이야 물이지, 뭐. 근데 소주는 안 되고, 막걸리 어때요? 비도 오는데.”

    “좋지, 막걸리! 에잇, 기분이다. 오픈 좀 미루고 파전이나 찢으러 가자. 서지안 애인 자랑도 좀 들을 겸.”

    글라스를 닦던 타올이 팽하니 던져졌다. 곧장 외투를 집어 든 동한은 두 번 고민도 않고 문고리에 Closed 표지판을 내걸었다.

    빗방울은 여전했으나 우산이 필요할 정도는 아니었다. 곧장 바를 나선 둘은 멀지 않은 단골 파전집까지 외투를 뒤집어쓰고 냅다 뛰었다.

    오랜만에 좋은 친구와 마주 앉아 주고받는 술이 다디달았다.

    “스물여덟에 첫 연애 축하한다.”

    “감사합니다아.”

    시원히 첫 잔을 비운 후로는 수다를 떠느라 막걸리는 뒷전이었다. 물론 대화의 절반 이상은 그에 관한 이야기였다.

    잘생기고 멋있고 능력 있고 귀엽고, 등등. 쑥스러운 줄도 모르고 온갖 칭찬과 자랑을 늘어놓는 입술은 주저함도 없었다.

    서지안 인생에 남자 때문에 주책을 떠는 날이 올 줄이야. 동한은 몇 번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28년을 모르고 살았던 제 안의 주접력을 깨달은 지안도 마찬가지였다.

    “얘기만 들어서는 이거 뭐, 그냥 유니콘인데? 살아는 있는 거냐?”

    “에이, 진짜라니까 그러네. 빨리 데려와야지. 안 되겠네, 증말.”

    “알았어, 일단 믿어줄게. 나이는 어떻게 돼? 나보다 많아?”

    “아… 나이가….”

    “뭐야, 이 반응은? 설마 막, 띠동갑 그런 건 아니지?”

    “에이, 띠동갑은 무슨…. 가만… 띠가 몇 번을 돈 거지….”

    “뭐라고?”

    “응? 아니에요. 6살 차이예요, 6살. 서른넷.”

    W 기획 지승원 이사의 공식 나이는 서른넷이 맞으니 뭐… 양심에 찔려 죽을 만한 거짓말은 아닐 터였다.

    후로 꼬박 두어 시간 동안 오로지 그의 이야기로 수다를 떨었다. 테이블 위로 쏟아지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따금 버릇처럼 휴대폰 열어 메시지를 확인하는 손은 말릴 수 없었다. 실은 연락이 없는 그가 마음에 걸려 웃어도 웃는 게 아닌 시간이었다.

    유리창을 때리는 빗방울이 굵어지고 있었다.

    “다음엔 꼭 같이 와. 얼마나 잘생겼길래 입에 침이 마르나 궁금하다.”

    “응. 그럴게요.”

    미소는 잃지 않았으나, 웃음 뒤에 감추어둔 걱정과 근심은 빗물이 고여가는 물웅덩이처럼 깊어져만 갔다.

    **

    고요한 서재 안에 짧은 진동음이 울렸다.

    비 내리는 창밖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승원은 무겁게 시선을 내렸다. 바지 포켓 속에 넣어둔 휴대폰이 잠시 불을 밝히다 이내 캄캄해졌다.

    [ 나 이제 택시 타고 가고 있어요. 아직 회사에 있으려나? 먼저 들어가 있을게요. ]

    방금 들어온 메시지를 시작으로 종일 밀려있던 지안의 메시지를 이제야 확인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됐나. 이따금 울렸을 진동음은커녕 캄캄한 하늘을 눈에 담고도 흐르는 시간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실은 무턱대고 율령을 찾았을 때도, 제 눈과 귀로 이 혼란한 상황을 똑똑히 확인한 후에도 현실감이 없었다. 뿌연 안갯속에 호젓이 서 있는 것처럼 시야도 머리도 모든 것이 혼탁했다.

    집으로 돌아와 이 자리에 선 순간엔 생각이 멎고 귀가 닫혔다. 그저 멍하니 멈춰 있었다. 급작스레 들이닥친 작금의 상황이 마치 꿈인 듯하여.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견디다 보면 혹 꿈에서 깨어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하나 혼란한 정신은 좀체 깨지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심장은 외려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이, 결국 현실이란 말인가.

    “하.”

    몇 시간 만에야 겨우 내뱉은 소리가 그저 헛숨뿐이었다. 휴대폰을 꽉 말아쥔 손이 허벅지 옆으로 허망하게 툭 떨어졌다.

    멎었던 생각이 다시 흐르고, 닫혔던 귀가 열리고 나니 둑이 무너진 것처럼 해일이 밀려왔다.

    내가 살고자 하면 지안이 죽는다. 지안을 살리고자 하면 내가 죽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좆같은 현실이.

    순간 몸이 휘청였다. 몇 시간을 꼿꼿하게 선 채 작금의 현실을 부정했던 몸이 이제야 흔들렸다. 금이 간 유리창을 붙들고 남은 한 손으론 이마를 짚었다. 갑작스레 눈앞이 핑 돌아 눈을 질끈 감았다.

    흔들리는 몸을 간신히 붙든 채 얼마나 견뎠을까. 지안의 기운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는 정기가 짙게 배어 더욱 진해진 향이었다.

    가까스로 눈을 뜬 승원은 창 너머의 아득한 땅 위를 내려다보았다. 바늘처럼 내리꽂히는 빗줄기 사이로 듬성듬성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 불빛이 보인다.

    오가는 몇 대의 차들 속에서 서서히 속력을 늦추는 한 대의 택시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저기 앞에 횡단보도에 세워주시면 돼요.”

    빗소리를 뚫고 지직지직, 어렴풋이 들려오는 음성은 역시나 지안의 것이었다.

    대번에 수축한 심장이 낯설게 파동했다. 아리고도 초조했다. 어떤 얼굴로 지안을 봐야 할지 아직 생각지 못했다. 당장 목을 누르고 구슬을 빼내야 할까. 그러고 나서는, 내가 사라지기 전까지 이 시한부 연애를 계속해 달라 사정이라도 해야 할까.

    하나 그렇게 관계를 연명한들, 끝이 정해진 만남이 과연 얼마만큼 행복할 수 있을까. 혹여 곧 끝이 날 나의 생을 숨긴다 한들, 좋은 추억만 품은 채 느닷없이 남겨질 너는 아프지 않을까.

    복잡하다. 무엇이 최선일지 도무지 모르겠다. 인간의 마음을 모르기에 더더욱 알 수가 없다. 다만 아픈 이별에 초연하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던 나약한 인간들은 무수히 보아왔다. 너는 그들과 같지 않기를 바라는 건 욕심인 걸까.

    아무런 걱정 없이 길을 걷다 낭떠러지를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필시 건너가야 함에도 길이 없다. 하물며 되돌아가기에도 먼 길을 왔다.

    허면 나는 대체,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가.

    횡단보도 앞에서 택시가 멈추었다. 이내 비 내리는 땅 위로 익숙한 실루엣이 내려섰다.

    “감사합니다!”

    명랑하게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에 또 한 번 목이 무겁게 짓눌린다.

    하나 그도 잠시. 찰나로 휘몰아친 갈등과 초조함이 무색하게 피식 입꼬리가 휘고 말았다.

    “저 바보가….”

    일순간 그의 형체가 연기 속에 으스러졌다. 검은 실내용 슬리퍼가 금세 비에 젖은 땅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