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76화 (76/106)

76.

“아….”

달싹거리던 입술 새로 옅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동시에 연하게 금이 갔던 미간에 깊은 그늘이 팼다.

단잠을 자다 날벼락이었다. 갑작스런 통증에 잠이 깬 지안은 눈을 뜨지도 못한 채 옆자리로 손을 뻗었다.

“여… 영감니임….”

끙끙거리며 애타게 그를 불러보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다. 그에겐 미처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 허리… 아읍….”

애처롭게 뻗어 가던 손이 다급히 등허리를 붙들었다. 절로 굽은 상체가 이불 속으로 꾸깃꾸깃 말려 들어갔다.

“아으….”

낯선 통각에 연방 신음이 터졌다. 마치 날카로운 칼날로 살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아니, 불에 달군 쇳덩이로 등허리를 꾸욱 누르는 것 같기도 했다.

“흡.”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발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을 만큼 극심한 통증이었다. 어느 순간엔 신음조차 나오지 않아 애꿎은 입술만 꾹꾹 깨물었다.

태아처럼 몸을 만 채로 끙끙거린 지 2분 남짓. 허리가 끊어질 듯한 통각에 바들바들 떨리던 몸이 간신히 생기를 되찾고 축 늘어졌다.

“하….”

곧 죽을 것처럼 솟구치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단 2분 사이, 낯선 고통에 쪼그라들었던 심장이 비로소 안도하며 펄떡펄떡 뛰었다.

“아… 놀래라….”

뭐야, 갑자기….

죽는 건 한순간이라더니, 진심으로 이렇게 가는구나 싶었다. 그 짧은 순간 머리로는 이미 응급실까지 날아가 산소호흡기를 매달았을 정도다. 그런데 이렇듯 또 금세 말짱해지니 곧 죽을까 염려했던 호들갑이 무안할 지경이었다.

등허리를 어루만지며 숨을 고르던 지안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답답한 이불을 걷고 빠끔 얼굴을 내밀자, 침대맡까지 검푸른 새벽이 밀려와 있었다.

어쩐지 허전하더라니, 옆자리가 비어있다.

“어디 가셨지….”

잠시간 멀뚱히 앉아 고요한 침실을 휘둘러보던 지안은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6시 1분 전. 6시에 맞춰놓은 알람이 마침맞게 울렸다.

알람을 끄고 침대에서 내려선 지안은 거실과 서재를 차례로 훑었다. 세 개의 욕실도 모두 살폈지만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네….”

너른 거실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서 고개를 기울이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꽤 오래 이어졌다.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기 직전에야 그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 어.

“어디예요?”

- 회사에 잠시.

“이렇게 일찍? 뭐 안 좋은 일 생긴 거예요?”

- …….

대답에 공백이 생겼다. 몇 걸음을 걸어 욕실에 다다른 시간만큼의 정적이었다. 수화기 너머의 침묵이 왠지 모르게 괴괴하게 느껴졌다.

찰나의 공백을 삼킨 그는 의아했던 침묵이 무색할 만큼 여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 별일 아니야. 지금 일어났어?

평소처럼 다정한 목소리임이 분명한데 묘하게 짙고 무겁다. 아무래도 뭔가 큰일이 생기긴 한 모양이었다.

“네…. 이제 씻으려구요.”

공연히 가라앉은 기분을 티 내지 않으려 입꼬리를 올린 지안은 짐짓 아쉬운 목소리로 물었다.

“많이 늦어요? 오늘은 그럼 촬영장에 같이 못 가려나?”

- 아마… 그럴 것 같은데.

“아아…. 그럼 일 보고 문자 남겨줘요. 시간 나면 연락할게요.”

- 그래. 다녀와.

미소를 머금었던 입꼬리가 전화를 끊자마자 심란하게 떨어졌다. 출근도 잘 하지 않는 그가 새벽부터 회사에 나갈 정도라면 분명 예삿일은 아닐 터였다.

“무슨 일이지….”

어수선해진 마음에 세면대 앞에 서서 휴대폰만 바라보던 지안은 문득 등허리를 매만졌다.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 통증이 인 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어째 강도가 점점 세지는 거 같은데….

여느 때처럼 통증은 금세 가셨지만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니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일도 아닌 듯싶다.

지안은 거울을 등지고 서서 어깨너머로 고개를 비틀었다. 거울을 통해 들여다본 호인의 표식이 어쩐지 낯설었다. 어렸을 적부터 제겐 그저 콤플렉스였기에 구태여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게….

“원래 이렇게 까맸었나….”

옅은 몽고반점 같았던 그것이 어째 조금 검붉어진 것 같다. 그가 빨아당긴 상처가 아직 남은 것이라기엔 주변에 남아 있던 잇자국은 외려 흐릿해졌다. 여우 꼬리가 달린 나비의 형상만 마치 문신처럼 지나치게 선명해진 것이었다.

“이게 왜 이러지….”

이것도 혹, 구슬과 연관이 있는 건가. 수아 님도 모르는 눈치던데….

입바람을 당기며 아리송하게 고개를 기울이던 지안은 그만 생각을 거두고 수전을 틀었다. 아무래도 그에게 물어봐야겠다, 생각하며.

그런데, 그보다 지금은….

칫솔을 입에 물고 치아를 닦던 움직임이 점점 느릿해졌다. 착잡한 시선은 세면대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에 물끄러미 닿은 채였다.

“아… 걱정되네.”

죽을 만큼의 통증도 말끔히 가시고 나니 제 걱정은 뒷전이었다. 지금 당장은 숨기려야 숨길 수 없었던 그의 무거운 목소리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세상사 어려울 것이라곤 하나 없을 것 같은 그이기에 더욱이 그랬다.

“흠….”

일이 잘 풀려야 할 텐데….

심란한 마음에 잇몸이 뻐근할 만큼 칫솔질을 하던 지안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입을 헹궜다.

연거푸 얼굴에 물을 끼얹으며 꼼꼼히 세수를 하는 동안, 등허리의 새겨진 여우 꼬리가 조금 더 검게 타들어 간 사실은 미처 몰랐을 일이었다.

**

열 개의 촛불이 가로로 뉜 채 펄럭펄럭 나부꼈다. 천장에 매달린 수 개의 연등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속수무책으로 흩날렸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끄무레한 냉기가 빛 한 줄기 새어나갈 틈도 없는 좁은 공간을 빙빙 맴돌고 있었다.

- 많이 늦어요? 오늘은 그럼 촬영장에 같이 못 가려나?

“아마… 그럴 것 같은데.”

휘도는 냉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음성이었다. 흐린 미소가 걸린 입술엔 온기마저 스며있었다.

하나 그도 잠시.

- 그럼 일 보고 문자 남겨줘요. 시간 나면 연락할게요.

“그래. 다녀와.”

휴대폰을 쥔 손이 허벅지 곁으로 툭 떨어진 순간, 입가에 머문 미소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잠시나마 약해졌던 냉기에 살랑거리던 촛불은 다시금 몰아치는 폭풍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 불씨를 잃었다.

결국 불씨를 잃지 않은 초는 그가 선 자리에서 가장 먼 곳에 피워놓은 단 두 개뿐. 가뜩이나 어둑했던 공간이 더 깊은 어둠에 잠겼다.

원목 좌탁에 걸터앉아 턱을 괴고 있던 율령은 금세 미소를 떨친 월호를 올려다보며 마뜩잖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찌 인간 계집 때문에 저리 말도 안 되는 표정을 짓는 것인가.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인데….”

수백 년 만에 대면한 아들을 이런 얼굴로 마주하게 되리란 것도 그의 계획엔 없던 일이었다. 남북으로 갈라진 인간들의 극적인 상봉만큼 애절하진 않더라도 언뜻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는 감격스럽지 않을까, 막연히 그리 생각하며 아들과의 만남에 내심 설렘도 품었더랬다.

한데, 그토록 기다렸던 아들은 생각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눈앞에 있었다.

‘ 그만 나오시죠. 알고 왔습니다. ’

마치 어제도 만난 이처럼 아무렇지 않게 나타나 모란의 몸속에서 저를 끄집어내더니.

‘ 지안이 그 아이,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소하를 꼭 빼닮은 눈을 마주하며 눈시울을 붉힐 여유도 주지 않고 대뜸 그리 묻더란 말이다.

하긴, 제 어미를 모질게 버리고 결국엔 말라 죽게 한 못난 과거를 서적에 고스란히 남겨두었으니, 저를 위해 5백 년을 싸워온 부정父情이라 한들 떠도는 먼지 한 톨만큼이나 심중을 울릴 수 있었겠는가.

그래도 그렇지. 심심한 인사 한마디조차 없이 저리 결연한 얼굴로 인간 계집을 살릴 방도나 내놓으라 하니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다.

“어쩌다 인간에게 연정을 품었더냐.”

“제 질문에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똑바르게 얽어오는 시선이 제법 매서웠다. 아무리 핏줄이라곤 하나, 신의 눈을 저리 겁도 없이 빤히 노려보다니 고놈 기백 한번 장대하지 않은가. 이 와중에 고것이 또 뿌듯한 걸 보니 저도 어지간히 팔불출이구나 싶다.

몰래 한숨을 삼킨 율령은 곰방대를 꺼내어 물며 심심한 어조로 말했다.

“계집을 살릴 방도라면 이미 알고 있지 않으냐.”

100일을 채워 정기를 완전히 빼앗기기 전에 구슬을 빼내어 주는 것, 방법은 그뿐임을 모르진 않을 터였다. 그리되면 저는 저주를 풀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테다.

둘 모두가 살 수 있을 방도를 묻는 것이라면 원하는 답을 줄 수 없었다. 진정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허나 늦었다.”

율령은 제 등 뒤에서 죽은 듯이 잠든 모란을 눈짓하며 말했다.

“이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아이의 몸이 이미 부패하고 있다지.”

다시 마주한 월호의 얼굴에 그제야 표정이 생겼다. 눈썹 머리가 좁아 들고 회색 동공이 크게 부푼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 묻는 것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너는 몰랐던 모양이구나. 통증이 이미 시작되었을 터인데?”

“어디가, 무엇이 부패하고 있단 말입니까.”

성마르게 물어오는 음성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생전 처음 아비를 마주하고도 차기만 했던 목소리가 그깟 인간 계집 하나 때문에 저리 위태로워지니 저야말로 당혹스럽다.

생각보다 계집을 향한 아들의 연심이 깊다. 응당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호인의 표식 말이다.”

“…….”

그것이 어찌 부패했단 말인가, 떠올려보기라도 하듯 월호의 초점이 흐트러졌다. 곰방대를 빨아당긴 율령의 잇새로 희뿌연 연기가 새어 나왔다.

“정기를 빼앗긴 계집의 부패는 그 표식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문제는 진행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빠른 게지.”

그토록 빠르게 운이 다해 가리란 것은 율령도 몰랐던 일이었다.

‘ 와 벌시로 아가 썩어가는 겁니꺼. 구슬을 다부 넘기줘도 서른 해는 살 수 있다 하지 않았십니꺼. ’

모란이 속상한 얼굴로 물어오던 순간에도 의아했었다. 그러게, 그것이 왜 벌써 썩어갈까.

한데, 생각보다 마음 깊이 계집을 품은 월호를 마주하고 보니 분명히 알 것도 같다.

“네 마음이 깊어진 탓일 게다. 독산의 저주는 어느 것 하나 네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두지 않았을 테니.”

순순히 행복감을 느끼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었다. 월호의 연심이 깊어질수록 상대의 수명을 앗아가는 것, 그 또한 독산의 지독한 저주이리라.

“…하.”

망연히 벌어진 월호의 잇새로 헛숨이 터졌다. 삽시간에 무너진 얼굴엔 숨김없이 절망이 차올라 있었다.

율령은 꽉 그러쥔 월호의 손을 바라보았다. 저를 찾기 전 이미 한껏 폭발했을 심정이 상처로 얼룩진 손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채 아물지 못한 상처가 벌어진 모양인지, 파르르 흔들리는 주먹 속에서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곰방대를 거두고 일어나 월호에게 다가선 율령은 피에 젖은 아들의 손을 쥐어 잡고 퍽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구슬을 거둔다면 당장 죽지는 않을 테지. 허나 그 계집의 운은 고작해야 서른 해일 것이다. 호인의 후손은 모두 그리 단명하였다.”

짓무른 주먹 위에 포개어 올린 율령의 손안에서 좁쌀만큼 방울진 푸른빛이 몽글몽글 뿜어져 나왔다. 벌어진 살갗으로 속속 빨려 들어간 그것은 피를 씻어내고 터진 살을 어루만지며 감쪽같이 상처를 치유했다.

“인간의 목숨은 그토록 하잘것없는 것이다. 허니 금세 꺼질 불씨를 살리고자 어리석은 짓은….”

“서른 해까지는.”

정성스레 아들의 상처를 보듬던 율령의 손이 흠칫 멎었다.

“살 수 있는 겁니까.”

힐끗 치뜬 검은 눈동자가 붉게 충혈된 월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질문의 의도가 무엇이냐.”

“당장 구슬을 거두면 그 아이, 제 운은 다 채울 수 있는 겁니까.”

쯧, 짧게 혀를 찬 율령은 상처가 아문 손을 놓고 단호한 얼굴로 돌아섰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라.”

“여쭈었습니다. 서른 해는 분명히 살 수 있는 것입니까.”

“…….”

바닥을 스치던 붉은 도포가 제자리에 멈추었다. 꾹 감았다 뜬 눈이 어리석은 아들을 답답한 듯 돌아보았다.

저 하나 살리고자 5백 년을 싸웠다. 수백 수천 번 팔다리가 잘려나가며 버텨온 세월이었다. 한데 이놈은 어찌 이리 쉽게 저를 포기하려 한단 말인가. 당최 그깟 인간 계집이 무엇이기에.

서운함을 감출 수 없어 화가 치밀었으나, 천 년이 다 돼가도록 다정히 안아준 적도 없는 아비였다. 이제 와 너도 모르게 아비 노릇을 했으니 당당하다 할 수도 없음이다.

차마 서운함을 드러내지 못하는 입술이 그저 꽉 다물린 채 비틀렸다.

“네가 살리고자 하면 내가 죽일 것이다. 허튼 생각 하지 말거라.”

다만 표독한 말로 차라리 겁을 주기를 택했으나, 이 맹랑한 녀석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묻는다.

“제가 죽기를 원하십니까.”

그 아이를 건드리면 제 목숨 또한 온전치 않으리라, 아무렇지 않게 협박을 뱉는 입술이 매정스럽다.

“하.”

율령은 기가 차 헛숨을 터트렸다. 아무리 부자의 정을 쌓을 기회가 없었다 한들, 어찌 이리 제 노력은 안중에도 없는지 원통함을 금할 길이 없다.

낮게 내리깔린 월호의 음성이 차게 공기를 갈랐다.

“행여 그 아이, 건드리지 마십시오.”

“너는 대체…!”

결국 버럭 내지른 언성이 허허로운 공간을 허무하게 가로질렀다. 연기만 남기고 사라진 녀석은 그 자체로 협박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었다.

듣지 않겠다, 입 다물라, 그리하란 말인가.

“하아….”

어찌 저놈은 어리석은 것마저 소하를 빼닮았는가.

율령은 지끈대는 이마를 붙들고 고개를 절절 흔들었다. 이제 다 되었다 안심했거늘, 생각지도 못했던 복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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