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75화 (75/106)

75.

짙은 어둠이었다. 느닷없이 두툼한 먹구름이 밀려와 별과 달을 가리고 하늘을 뒤덮었다.

듬성듬성 천장에 박힌 매립등은 탄 냄새를 풍기며 아스라한 연기만 내뿜고 있었다. 호롱이 그의 발치에서 산산이 조각난 것은 이미 한참 전이었다.

“…워, 월호 님.”

이리 마음을 졸이며 그를 불러본 적이 없다. 그의 뒷모습이 이토록 위태로워 보인 적도 없었다. 언뜻 보기엔 강직하게 서 있는 듯싶으나, 제 눈에 비친 그는 몸통이 터지고 아스라이 스러진 천장의 전등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의 손에 쥐어있는 고서가 점점 우그러들었다. 뜨거운 악력을 버티지 못하고 흠씬 쪼그라들던 그것은, 결국 시커먼 재가 되어 조각난 호롱 위로 후두두 떨어졌다.

그토록 강한 힘을 싣고도 그의 몸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하물며 책을 움켜쥔 주먹조차 흔들림이 없다. 단지 하얀 손등에 푸른 힘줄만 터질 듯 불거졌을 뿐이다.

아아… 어찌해야 하나, 이제 내가 어찌해야….

바짝 마른 병천의 입술이 연방 이 사이로 말려 들어갔다. 단단히 결심하고 서적을 챙겨왔으나 심장이 불안하게 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 이제 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미 의심을 하셨으니 어떻게든 알아내실 분이다. 그저 진심을 담은 호소로 그의 마음을 붙잡을 수밖에 없으리라 판단했다.

한데 이 얼음장 같은 공기에 숨이 턱 막혀버리니, 쉽사리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안경테 너머로 히끗 들어 올린 병천의 시선이 승원의 까만 머리칼에 닿았다. 검은 카디건에 둘러싸인 커다란 등과 꼿꼿하게 바닥을 딛고 선 발꿈치까지 온통 검은 침묵에 휩싸여있다.

침묵이기에 더욱 불안하다. 이미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로 위험한 일이었다.

“무, 무려….”

문득 조바심이 들어 대뜸 서두를 던지고는 또 입술이 꾸욱 말렸다. 질끈 눈을 감았다 뜬 병천은 단전에 포갠 손을 꽉 움켜쥐고 심호흡을 크게 내쉬었다. 이어 흔들리는 목소리가 간신히 삐져나왔다.

“무려, 5백 년입니다.”

힘겹게 마침표 하나를 찍고 나니 그래도 제법 숨은 트였다. 병천은 성마르게 덧붙였다.

“율령 어르신께서, 독산을 상대로 무려 5백 년의 시간을 싸워오신 겁니다. 오로지 월호 님을 살리기 위하여… 그 오랜 시간을 견디시어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에게서 아비에 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 하여 그들 부자의 관계가 어떠할는지 병천은 알 수 없었다.

하나 율령의 부성애는 결국 독산을 소멸시켜버린 그 5백 년이 증명하지 않았는가. 우리 월호 님의 마음도 응당 그러하리라. 필시 그 깊은 부성애를 저버릴 수는 없을 테다.

“자그마치 5백 년이 깃든 율령 어르신의 마음을 모른 척하시면 아니 됩니다, 월호 님.”

“…….”

차가운 등은 말이 없었다. 역시나 이 정도의 호소로는 부족했던가. 다시 입술이 마르고 조바심이 차오른다.

별안간 뜨거워진 눈두덩을 빠르게 여닫던 병천은 다소 젖어 든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저희는 또 어떻습니까.”

감히 저는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저를 향한 그의 진심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고귀한 마음에 한껏 품은 연정 앞에서 제깟 것이 무엇이겠나 싶은 생각에.

“수아와 제가, 월호 님의 곁에서 얼마만큼의 시간을 함께 하였습니까.”

한데 또 가만 생각해 보니, 저와 수아는 뒷전에 두고 연정만 심중에 두신다면 못내 서럽지 않겠는가 말이다.

“일전에 전했던 제 진심을 잊지 않으셨겠지요. 뫼시는 분을 먼저 떠나보내는 불충은 저지르고 싶지 않다 한 것 말입니다. 제 목을 걸고 진심이었습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이놈의 진심입니다.”

간신히 첫머리를 다달거렸던 직전의 모습은 이미 사라졌다. 한 음절, 한 음절 내뱉을 때마다 치받치는 감정에 무어라 떠드는지도 모르고 그저 간절히 쏟아내었다.

행여 당신을 포기하실세라, 어차피 언제고 죽을 인간을 살리고자 당신의 생명줄을 끊어버릴세라.

“이제 50일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지난 5백 년의 고통이 이제 고작 50일 후면 끝이 나는 것입니다. 허니 행여라도 다른 생각은 절대….”

“그만.”

한참 만에야 겨우 내뱉은 한 마디에 바닥이 무겁게 울렸다.

“그만 가보아라.”

침울한 공기를 가르는 목소리가 눈에 비친 모습만큼이나 위태롭다.

“월호 님….”

“숨을.”

말허리를 잘라버리는 음성은 다소 격앙되어 있었다. 호흡을 크게 삼키는 듯 그의 너른 어깨가 조금 치솟았다. 떨어지는 어깨와 더불어 한숨 같은 목소리가 힘겹게 흘러나왔다.

“숨을 쉬어야겠으니, 그만….”

맺지 못한 목소리 끝에 떨림이 묻어났다. 서적을 갈가리 찢어버릴 때도 미동이 없던 주먹이 이제야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의연한 척했지만 더는 힘이 드신 걸 테다. 이 와중에도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그의 자존심은 참으로 고달프고도 지독한 것이었다.

병천은 입술을 꽉 사리 물고 고개를 떨구었다. 지금은 어떤 말도 그에게 닿지 않을 터. 제 마음이 조급하다 하여 이 이상 그의 혼란을 가중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초조한 마음을 애써 억누른 병천은 천천히 뒷걸음을 걸어 서재를 나섰다. 숨죽인 채 조심스레 문을 닫는 순간, 무언가 날카로운 주파가 귀청을 쨍하니 뒤흔들었다.

그가 마주하고 섰던 통유리에 기어코 금이 가고 만 것이리라.

“하휴우….”

안경을 벗어 든 병천은 거칫하게 마른 얼굴을 진득이 쓸어내렸다.

**

쩍쩍 갈라진 유리창 속에서 그의 얼굴이 기괴하게 조각났다.

호롱을 터트리고 서적을 재로 만든 주먹 속에는 여전히 열기가 차있었다. 자신도 감당하지 못할 열기에 그의 손은 속수무책으로 벌겋게 익어갔다. 오래지 않아, 기어이 터지고 짓무른 살갗을 비집고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

승원은 까만 재로 흩어진 서적 위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충혈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태우고 태워도 징그럽게 되살아나던 서적의 질긴 마법은 끝나지 않았다. 피에 젖어가던 검은 재가 다시금 스멀스멀 바닥을 기어 흩어진 조각을 맞춰가고 있었다.

그는 사각의 형태를 갖추고 금세 누렇게 제 색을 찾아가는 징그러운 그것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靈의 記錄’

이내 오롯이 떠오른 글자에 허탈한 숨이 툭 터졌다.

율령, 그를 모를 리 없다. 화신성火神城 주인의 존함이자, 모친의 숨이 끊어지기 하루 전날에야 들었던 아비의 이름이었다.

‘ 율령 님을, 찾아가거라. 네 아버지… 율령 님에게 도움을… 네 저주를…. ’

느닷없는 소리였으나 무시할 수도 없었다. 400년간 궁금했던 아비의 이름이었으니 응당 그러했다.

하나 만날 길이 없었다. 고작 400해를 살아온 구미호가 무슨 수로 화신의 영역에 들 수 있단 말인가. 무턱대고 화신성 성벽 앞에서 당신의 아들이 왔노라 소리친다 하여 어디 만날 수나 있는 분인가 말이다.

해서 그 밤, 사경을 헤매면서도 제 어미는 스스로 그를 찾아 나섰을까. 그리하여 어미의 시신은 찾지도 못하고 다만 어딘가에서 숨이 끊어졌노라 소문만 들어야 했던가.

몰랐던 일이었다.

「 품 안에서 소하의 숨이 끊어졌다. 수백 년간 양기를 얻지 못하여 그리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나는 어리석게도 독산의 꾐에 빠져있었다. 소하는 이미 제 여인이 되었노라는 독산의 장난질에 멍청하게 걸려든 것이었다.

그 어리석은 오해로 버림받은 가엾은 나의 정인은, 그럼에도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채 그리 말라가고 있었다. 나는 어찌하여 그 마음을 몰라주었는가. 차게 식은 몸을 끌어안고 나서야 후회하였다.

원망이라도 했더라면, 차라리 죽는 순간 내게 저주라도 퍼부었더라면 이 무거운 죄책감이 조금은 덜어졌을까.

한데 이 못난 계집, 마지막 숨이 끊어지던 순간에도 다만 간곡한 청 하나만 남기고 가더란 말이다.

우리의 아이를 살려달라 하였다. 독산이 저주를 내려 죽이려 드는 그 사내가, 내 핏줄이라 하였다. 내 아이임을 알아버린 독산이 그리 내 아들의 피를 말리고 죽게 하리라 하였다. 」

그들에게 무슨 사정이 있었던지 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두루뭉술하게 남긴 기록으로 말미암아 좆같은 연결고리가 엉켜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하나 거기서 끝이었다. 더는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다. 제게 그들의 절절한 사연은 그저 케케묵은 과거일 뿐이므로.

지금 이토록 가슴이 저미는 이유는 뼈를 깎고 피를 토했을 아비의 5백 년 세월 탓이 아니었다. 단지 저를 위한 일이었다곤 하나, 불손하게도 그 마음을 온전히 가슴에 담을 여유가 없다. 빌어먹을 독산의 장난질에 분노가 치미는가 하면, 그도 나중 문제였다.

「 …어차피 월호의 눈에 띄어 정기를 빼앗기면 끊어질 계집의 목숨… 」

끊어질 목숨. 내가 살고자 하면, 죽어 없어질 지안의 목숨.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이제 50여 일이 지나 지안의 가슴에 박아놓은 구슬을 빼내어 주고, 그때야 비로소 아무런 걱정 없이 유치한 사랑놀음이나 실컷 해보자며 설렘만 품었던 심장이 느닷없이 난도질당했다.

‘ 그냥… 좋아서요. ’

그 따스한 온기를 잡아먹고.

‘ 이사님이 좋아서요. ’

그 달콤한 육체를 썩게 하여 더는 세상에 남기지 않을 이가 바로 내가 되리라, 그 뜻이렷다.

“…하.”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 어찌한들 받아들일 수나 있는 이야기인가.

“개소리….”

필시 개소리다. 이보다 더 개 같은 소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입가에 비릿한 실소가 감겼다. 한참을 기가 막혀 헛웃음을 치다가 돌연 미간이 좁아 들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폭발할 것 같은 무언가를 꾹 눌러 삼켰다. 결국 찢겨나간 살덩이에서 비린 피 맛이 감돌았으나, 힘을 풀지 못했다.

머릿속이 새까맣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다. 꽉 쥔 주먹이 덜덜 떨리고 숨이 막힐 만큼 가슴이 답답했다. 소리를 내고 싶은데 소리가 나지 않아 애먼 가슴팍만 퍽퍽 내리쳤다.

“하아….”

망연하게 고개를 꺾어 든 승원은 가까스로 긴 숨을 뱉어냈다. 천장까지 치솟는 숨이 한겨울의 칼바람처럼 시리다. 하나 꾹 감은 눈은 반대로 몹시 뜨거웠다.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든 지안의 곁이 허전하게 비어있을 터였다. 목덜미 아래에 팔을 끼워 넣고, 감질나게 품에 차는 작은 몸을 끌어안고, 한 몸인 양 둥근 이마에 입술을 묻고 싶으나, 바들바들 흔들리는 두 다리를 좀체 움직일 수가 없다.

하늘을 가린 뭉툭한 먹구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렇게 어둑한 밤이 흘러가도록 그의 캄캄한 그림자 또한 제자리였다.

꽉 감아쥔 손에서 넘쳐흐른 피가 서적에 새겨진 율령의 이름만 하염없이 적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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