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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는 밤-74화 (74/106)

74.

고풍스러운 마호가니 책상 위로 호롱 불빛이 은은히 번졌다. 양 팔꿈치를 그 위에 올리고 깍지 잡은 손은 절실한 기도라도 하듯 오래도록 이마에 맞닿아 있었다.

“후우….”

벌써 몇 번째 한숨이던가. 이 자리에 앉아 뿜어낸 숨을 모두 모았다면 작은 언덕 하나는 이루고도 남았을 터였다.

한참 만에야 손을 내린 병천은 의자 등받이에 깊이 등을 묻었다. 안경을 벗은 터라 흐릿한 시야가 어둑한 방안을 초점 없이 떠돌았다.

다시 새벽이 돌아왔다. 어젯밤 그가 준 하루의 시간을 꼬박 쓰고 만 것이었다. 하나 병천은 그럼에도 판단이 서지 않아 여전히 제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 난제로구나….”

복잡한 시선이 호롱 불빛 아래로 뚝 떨어졌다.

‘?靈의 記錄’

아직도 제 손안에 있는 오래된 서적이 골칫덩이가 되고 말았다.

차라리 찾지 말 것을. 아니, 다시 그 자리에 꽂아두고 모른 척이라도 할 것을. 괜히 공간을 비워두어 월호 님의 의심만 샀으니 짧았던 판단이 이제 와 못내 후회스럽다.

손을 뻗어 서적을 집어 든 병천은 까끌까끌한 겉면을 괜스레 매만져보았다.

“율령의 기록….”

무겁게 읊조려보는 제목이 야속하지 않을 수 없다. 며칠 전 책장을 뒤적대다 저 역시 집었던 적이 있었지만 제목만 보고 다시 꽂아버렸던 그것이었다. 몹시 단순하게도 그저 ‘독산’만 찾아 헤맸으니 이것이 찾고자 했던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거다.

30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월호 님의 서재에 꽂혀 들었던 그의 서적은 분명 ‘독산의 기록’이라 쓰여 있었다. 독산을 향한 월호 님의 적개심은 수백 년을 곪아있었으니….

‘ 이 미친 영감탱이가 이젠 하다 하다 나를 놀리려 드는 것인가…. ’

하여 독산의 생을 구구절절 나열해놓은 듯한 그것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불을 질러버렸던 그였다.

한데 이것이 어느 순간부터 이리 제목을 달리하여 되돌아왔던가.

그래, 어쩐지 이상하였다. 범화 님이 그려주신 몽타주와 달라도 너무 다른 얼굴이 의아하더란 말이다. 하나 그저 모습을 바꾼 것이겠거니 했었다. 한데 웬 것을. 완전히 다른 이였을 줄이야.

독산, 아니 율령의 장난이 지나치다 생각했다.

‘ 독산 어르신이 아니셨습니까? 헌데 어찌하여…. ’

어제 오후였다. 여태 독산인 줄로만 알았던 그를 찾아가 원망스레 물었었다. 그저 경소만 짓던 그는 다소 장난스레 말했다.

‘ 네놈의 무엇을 믿고 순순히 정체를 밝힌단 말이냐. ’

‘ 하이고, 어르신. 지켜보셨다면 아시지 않습니까, 월호 님을 향한 이놈의 충심을 말입니다. 알려주셨다 한들 제가 어디 떠벌리고 다닐 놈이랍니까? 애초에 이리 도움을 주시고자 했던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

겁도 없이 신에게 대들었다. 단지 원망스러워 순간 그가 누구인지도 망각하고 겁을 상실하였다. 하나 그 순간의 환장하는 심정으로는 그리할 수밖에 없었더랬다.

더 일찍 알았더라면, 속절없이 지안에게 빠져들기 전에 월호 님의 마음을 어떻게든 붙잡고자 노력했을 것이었다. 두 분의 연정을 응원하며 마냥 좋아 헤실거리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한데, 그의 사정을 알게 된 지금은 차마 원망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 기록을 보았으면 알 것이 아니냐. 나는 누구에게도, 무엇도 내 입으로 발설해서는 안 되었다. ’

별안간 아득해지던 그의 표정에서 애달픈 마음이 읽혔다.

‘ 모란 이자의 몸을 빌려 그 인간 계집을 탈 없이 돌보는 것, 천황신의 아량은 그것까지니라. …그리 서적에 몰래 실마리를 남겨둔 것을 알면 천황이 경을 칠 테지. 제목을 바꾸어 놓은 것도 나로선 아주 큰마음을 먹은 것이다. ’

당신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였다고 했다. 독산의 이름을 새겨놓으니 하도 태우고 버리기를 반복하여 하는 수없이 제 이름까지 내보였노라 하였다.

그러니까 그것이 30년 전.

수백 년간 독산과 전쟁을 치르고 불과 30년 전 결국 그자를 소멸시켰지만, 월호 님에게 내려진 저주에는 이미 독산의 악령惡令이 깊숙이 박혀버리고 만 것. 독산이 사라졌다 하여 저주까지 거두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였다.

「 허면 어찌해야 하나. 방법은 그뿐이었다. 저주를 풀 수 있도록 도움을 주면 될 일. 한데 빌어먹게도 천황이 편법을 용납지 않으니 그것 또한 여의치가 않음이다. 나의 목은 물론, 월호의 소멸까지 입에 올리니 당최 방법이 없다. 내 비록 화신火神이라고는 하나, 신들의 신을 어찌 이길 수 있으랴.

허나, 애초에 월호가 저주를 풀지 못하도록 호인의 후손들을 단명하게 한 것 또한 독산의 계략이 아니었는가. 」

병천은 서적의 한 페이지를 펼쳐 보았다. 언뜻 보기엔 비어있는 페이지였으나, 호롱불을 뒤에 비쳐 보니 흐릿하게나마 글자의 형태가 보인다.

「 하여 천황에게 호소하였다. 마지막 남은 계집은 그저 살게만 보살피겠노라고. 어차피 월호의 눈에 띄어 정기를 빼앗기면 끊어질 계집의 목숨, 단 스물여덟 해만이라도 월호에게 기회가 닿도록 보살피게 해달라고.

그리하여 묵묵히 지켜만 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비록 당장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것뿐이나, 결국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

안경을 집어쓴 병천은 침침한 눈을 가늘게 뜬 채 다음 장을 넘겼다. 이미 몇 번을 본 구절이었으나, 볼 때마다 심장이 아릿하여 숨이 막혀온다.

“아휴우….”

결국 탄식을 내뱉은 병천은 서적을 내려놓고 이마를 꾹 붙들었다. 투명하게 먹을 숨긴 한지 위로 호롱 불빛이 은은히 내려앉았다.

「 나는 내 목을 바쳐서라도 소하가 남기고 간 그 아이, 내 아들을 반드시 지켜낼 것이다. 」

**

암막 커튼이 꼼꼼히 달빛을 차단했다. 커다란 빔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달빛을 대신해 너른 거실을 아늑히 밝히고 있었다.

소파 위에 찰싹 붙어 누운 그와 그녀는 하얀 이불에 둘둘 말린 채 얼굴만 빠끔 내놓은 채였다.

“근데….”

승원의 팔을 베고 누워 스크린을 보던 지안은 어깨너머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이런 건 자꾸 어디서 보고 따라 하는 거예요?”

싱긋 미소 지은 승원은 저를 돌아보는 지안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인터넷에 없는 게 없어. 역시 대한민국은 IT강국이야.”

“하하. 못 살아, 정말.”

오늘 그가 선택한 ‘인간들의 평범한 데이트’는 영화 관람이었다. 지안의 퇴근이 늦어 영화관을 찾을 수는 없으니 차선으로 거실 벽면에 빔 스크린을 설치했다. 속옷만 걸치고 이불 속에 꼭 붙어 누워 있는 것은 영화관의 팝콘만큼이나 빠질 수 없는 옵션이란다.

지안은 아까부터 줄곧 제 가슴을 주물럭거리던 그의 손등을 콕콕 찌르며 장난스레 물었다.

“그럼 이것도 인터넷에 나와 있는 거예요?”

“이 정도는 기본이지. 본능이고.”

그러며 브래지어 캡 안으로 손을 구겨 넣은 그는 캡에 눌려있던 젖꼭지를 살살 굴리며 귀 끝을 깨물었다.

그의 손이 닿은 곳은 가슴이었으나, 찌릿찌릿 얄궂은 반응을 보이는 곳은 여지없이 다리 사이였다. 등허리를 찌르는 그의 몸도 이미 단단하게 부푼 상태였다.

하지만 오늘은 기필코 넘어가지 않으리.

지안은 삐져나오려는 신음을 간신히 삼키며 가슴을 지분대는 그의 손을 끌어내렸다.

“나 오늘은 정말 안 할 거예요. 5시간 후에 또 촬영….”

“알아. 한 번만 더 말하면 오만 번이다.”

어쩐 일로 순순히 물러난 그는 자잘한 입맞춤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며칠을 연달아 괴롭혔으니 그도 나름 양심은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자. 잠들면 옮길 테니까.”

계획을 실천하고자 영화를 틀어두긴 했지만 이미 시작과 동시에 지안의 눈은 힘이 풀려 있었다. 꼬물꼬물 몸을 돌려 그와 마주 보고 누운 지안은 승원의 가슴에 볼을 묻고 무거운 눈을 감았다.

“응… 안 그래도 잠이 막 쏟아져요.”

톱니바퀴처럼 그와 맞물린 다리가 그렇게도 편할 수 없었다. 몸에 꼭 맞는 옷처럼 착 달라붙는 포근한 가슴은 말할 것도 없다. 버릇처럼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도 한없이 따듯하다.

금세라도 잠이 들 듯 새근거리던 지안은 별안간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들었다.

“아참. 내일은 밤 촬영 없어서 일찍 끝날 텐데, 제 친구 만나러 갈까요?”

범화를 만나고 온 후로 내내 고민하고 생각했던 지안이었다. 혹, 그도 제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기를 바라고 있진 않을까. 저 역시 이 멋진 남자가 제 곁에 있음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기도 했다.

“친구 누구.”

“동한 선배라고… 아! 전에 옥탑에 한 번 왔었는데. 기억나죠? 블루문 바 사장님.”

“아….”

길게 늘어지는 감탄사가 어쩐지 떨떠름하다. 사내라면 덮어놓고 기분이 언짢아지니 이것도 병이라면 병일 테다.

“친구라곤 건호랑 동한 선배 딱 둘뿐인데, 건호는 아시다시피 싱가폴에 있고. 우선 동한 선배 먼저….”

“사내놈은 썩 만나고 싶지 않은데.”

심드렁히 내리깔린 눈동자에 숨김없이 질투심이 드러났다. 내심 좋은 기색을 숨긴 지안은 사뭇 당당한 얼굴로 말했다.

“남자 아니고 진짜 친구예요. 서로 이성으로 본 적 한 번도 없어요, 정말.”

“…….”

그럼에도 마뜩잖은 눈빛을 거두지 않자, 지안은 은근한 투로 물었다.

“그렇게 따지면 호랑이 님도 암컷 아니신가?”

“그놈은 좆이 잘린 거라니까.”

“어쨌거나 두 분 관계랑 다를 바 없는 사이라구요, 우리두.”

아무렴, 관계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안의 가장 가까운 곳에 XY염색체를 가진 이가 둘씩이나 붙어있으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 뿐.

“내일 가는 거예요? 응?”

허리를 꽉 감아 당기며 어여쁜 얼굴로 아양을 부리니 당해낼 재간이 없다. 저도 모르게 피싯 웃어버린 승원은 지안의 머리를 품에 꼭 안으며 다시금 등을 토닥였다.

“알았어. 그만 자. 피곤할 텐데.”

노곤하게 눈을 감고 그의 품에 파고든 지안은 꿈을 꾸듯 속닥거렸다.

“아… 긴장된다. 10년을 알았는데 남자친구 보여주는 건 진짜 처음이라서….”

얼마나 잠이 쏟아졌던지, 속닥거리는 소리가 금세 나른하게 퍼졌다. 지안의 머리칼을 간종그리던 그의 손길도 덩달아 차분해진다.

“근데… 선배 놀라 자빠지면 안 되니까… 구미호라는 건 숨기고….”

급기야 몽글몽글 구름처럼 떠돌던 음성이 그의 맨가슴에 새근새근 스며들었다. 길게 뻗은 지안의 속눈썹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승원은 오뚝한 코끝을 슬쩍 누르며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남자친구라….”

가만히 읊조려보던 입술이 저도 모르게 귓불을 향해 한껏 찢어진다.

“나쁘지 않네.”

아니, 배 속이 간질간질할 만큼 아주 좋은 것 같기도 하고….

현관에서 기척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조심스레 문이 여닫히고 익숙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단내가 폴폴 풍기던 얼굴에 순식간에 무거운 어둠이 내렸다.

오래지 않아 발치로 시선을 내리자 결연한 얼굴을 한 병천이 서적과 호롱을 들고 서 있었다. 얼마나 고심이 깊었던지, 그 통통하던 얼굴이 하루 사이 핼쑥해졌다.

“…….”

그런 병천을 얼마쯤 바라보던 승원은 지안의 귓바퀴를 가볍게 덮으며 낮은 목소리로 명했다.

“서재에서 기다려. 눕히고 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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