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73화 (73/106)
  • 73.

    “지안 씨도 이제 개인 스태프 좀 둬야 할 텐데. 혼자 의상에 메이크업에, 힘들지 않아요?”

    오늘은 특수분장이 필요한 촬영이었다. 해서 오전 일정을 마친 후 곧장 분장팀 컨테이너를 찾은 참이었다.

    지안은 제 팔에 단단하게 석고를 끼우고 붕대를 휙휙 감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아직은 할 만해요. 의상 픽업하러 돌아다니는 게 은근히 재밌기도 하고…. 메이크업은 이제 도가 텄는걸요.”

    “그래도 대본 외우고 일정 소화하는 것만도 힘든데 그게 보통 일이겠냐구. 요즘 촬영 환경이 좋아졌다지만 그래도 중노동인데.”

    푸근한 인상의 분장팀 박 실장은 알면 알수록 다정한 사람이었다. 촬영장에서 처음 본 날부터 지안에게 제 동생을 닮았다며 친근히 다가온 그녀는 한결같이 지안을 동생처럼 편히 대해주었다. 서브 주연이라는 부담스러운 포지션에 낯설고 어색한 현장에서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느낌이랄까. 현장이 외롭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물론 단역 시절엔 꿈도 꿔볼 수 없었던 친절과 관심이 어찌 보면 씁쓸했지만 그마저도 이젠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노동도 마냥 재밌는 거 보니까 아직 살 만한가 봐요. 그리고 스탭 생기면 실장님 손 빌릴 일도 줄어들 텐데 아쉬워서 어떡해요.”

    “으이그, 하여튼 넉살도 좋아.”

    실감 나게 깁스 분장을 끝낸 박 실장은 붕대 감은 팔에 슬링을 채워주고 펜슬을 집어 들었다. 볼 위에 슥슥 펜을 굴리며 상처를 그리는 손놀림이 능숙하다.

    “먹는 거라도 잘 챙겨 먹어요. 홍삼 같은 거 있잖아, 왜. 건강도 자만하다가 한 방에 훅 간다니까?”

    그럴게요, 하며 대답은 곧잘 하지만 웃고 넘기는 입술을 보니 한 귀로 흘려들었음이 분명하다. 가늘게 눈을 흘긴 박 실장은 사뭇 안타까운 듯 말했다.

    “이것 봐, 이거. 첨 봤을 때보다 얼굴에 살도 내렸구만.”

    “정말요? 오… 다이어트 되고 좋은데…?”

    “참 내. 하여튼 잔소리 밀어내는 데는 선수라니까. 그것도 내 동생이랑 똑 닮았어, 아주.”

    “하하. 언제 한번 만나 봐야겠어요, 실장님 동생분.”

    실없이 웃으며 재잘거리다 보니 어느새 분장이 마무리됐다. 메이크업 도구들을 챙기다 무심코 컨테이너 밖을 내다본 박 실장은 별안간 한숨을 내쉬었다.

    “아효, 저 화상은 또 무슨 시비를 걸려고….”

    덩달아 문밖을 돌아본 지안의 얼굴에도 대번에 웃음기가 가셨다. 외부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모양인지,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기대앉은 시현이 지안을 빤히 건너다보고 있었다.

    “그냥 무시해요. 말 섞어봐야 피곤하기만 하지.”

    지안을 향한 시현의 은근한 괴롭힘은 이제 현장에 파다하게 소문이 난 상태였다. 차마 주연 배우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어 누구도 알은체를 하지 않을 뿐.

    그저 웃으며 대답을 대신하고 컨테이너를 나선 지안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시현을 유유히 스쳐 갔다.

    하지만,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 대놓고 눈빛을 쏘고 있던 시현이 곱게 보내줄 리 없다.

    “야.”

    자갈 위에 뾰족한 구두 굽이 콕 박혔다. 결국 걸음을 멈춘 지안은 피곤한 얼굴로 시현을 돌아봤다. 아니꼬운 눈초리가 삐딱하게 지안을 향했다.

    “나 안 보이니?”

    무신경하게 풀어진 지안의 눈꺼풀이 권태롭게 깜박였다.

    “보여요.”

    “근데 무시를 해?”

    “기다렸다고 먼저 말씀을 안 하셔서.”

    “하.”

    되바라진 년. 어떻게 된 게 이년은 900년 묵은 구미호 앞에서도 겁을 먹기는커녕 기도 안 죽을까. 꼴에 호조사의 피를 받았다고 간도 바윗덩이만 한 것인가. 아니면 오라버니의 힘만 믿고 까부는 것인가.

    기가 막혀 뒤집히는 시현의 속이 구겨진 얼굴에 숨김없이 드러났다.

    뾰족하게 지안을 쏘아보던 시현은 돌연 등받이에 팔을 척 걸치며 궁흉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아주 중요한 얘기 하나 해줄까?”

    “아니요.”

    “닥치고 들어, 이년아. 다 너를 위해 해주는 말이니까.”

    하… 주여경이고 전시현이고, 어쩜 이렇게 나를 위해 해주고픈 말들이 많을까.

    먼 산을 향해 내뿜던 한숨이 무감히 시현을 향했다. 기다렸다는 듯 시현의 입꼬리가 실룩 기울었다.

    “넌 오라버니가 널 진심으로 생각하는 듯싶지?”

    그냥 무시하고 가야 하나, 예의상 귀는 열어두어야 하나, 가만히 시선만 던지며 고민하는 사이 시현은 대꾸라도 들은 양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

    “하여튼 인간들은 이렇게 순진하다니까.”

    실소를 흘리던 시현은 짐짓 안타까운 듯 눈썹 머리를 좁혔다.

    “인간들이나 하는 간지러운 사랑놀음 같은 거, 우린 못해. 애초에 그런 호르몬이 생성될 수가 없는 몸이라니까?”

    과연 베테랑 연기자답게 눈썹 하나까지 풍부한 표정을 그리며 연설을 한다.

    “마냥 좋겠지. 손끝만 닿아도 황홀해서 몸이 아주 줄줄 녹아날 거야. 한데 그 손에 간이 뽑히고 눈알이 뒤집힌 년들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이나 가니?”

    400년간 인간들을 홀리고 간을 뽑아 먹다 저주에 걸렸노라, 언젠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들은 이야기였다. 해서 막연히 그렇게만 알고 넘긴 일이다. 구태여 과거의 그는 어땠는지 속속들이 물어보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연심이라 착각하지. 몸도 마음도 홀랑 빼앗기고 결국엔 목숨마저 바치게 되리란 건 꿈에도 모르고 멍청하게들 말이야.”

    시현의 잡소리는 몹시 정성스러웠으나, 무려 수백 년 전에 역사 속으로 흘러간 얘기 따위 관심조차 없었다. 단지 지금의 그를 모두 알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지안은 초지일관 권태롭게 깜박이던 눈을 꾹 감았다 떴다.

    “하고 싶은 말씀만 간단히 하세요. 촬영 들어가야 해서요.”

    벽처럼 단단한 지안의 반응에 답답한 듯 고개를 흔들던 시현은 퍽이나 개탄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너도 다를 바가 없단 소리야. 아니, 아주 조금은 다르겠구나. 오라버니가 네게 원하는 것은 정기를 채운 구슬뿐일 테니 목숨은 살려줄지도 모르지.”

    “…….”

    “넌 그저 오라버니를 살릴 도구에 불과할 뿐이야. 빈 껍데기로 비참하게 버려지기 전에 도망쳐. 그게 현명한 선택일 테니까.”

    “끝나셨어요?”

    오매불망 마침표만 기다렸던 사람처럼 단숨에 벽이 철컹 떨어졌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대꾸는 듣지도 않고 발을 떼는 지안의 모습에 시현은 기가 차 헛숨을 터트렸다. 멀어지는 뒷모습만 노려보다 꺾어든 시선이 무성한 은행나무잎 사이에 틀어박혔다.

    이내 의미를 알 수 없는 탄식이 나뭇잎을 뒤흔들 기세로 길게 뻗어 나갔다.

    “하아….”

    키득키득 미친년처럼 웃기도 하고, 실없이 헛웃음을 치기도 하고.

    떨어질 듯 말 듯 달랑거리는 노란 단풍잎을 올려다보던 눈동자가 일시에 괴악스럽게 가라앉았다.

    “저 맹랑한 년을 어떻게 밟아버리면 좋을까….”

    **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은 살수차가 바닥에 물을 흩뿌렸다.

    가을비가 촉촉이 내려앉은 거리, 우산이 성가실 만큼의 보슬비, 촉촉한 거리에 수북이 쌓인 단풍잎과 같은 빛깔의 노을진 하늘, 그 아래 간격을 두고 선 두 남녀.

    작가의 디테일을 곳곳에 살린 현장은 곧 재개될 촬영을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불편한 마음 때문에라도 반드시 한 번으로 끝내야 할, 키스씬 촬영이었다.

    “아니, 손은 더 뒤쪽으로. 너무 정직하게 귓바퀴 잡아당기면 그림도 안 예쁘니까.”

    간단히 동선을 밟으며 리허설을 하던 신재와 지안의 곁으로 감독이 성큼 다가왔다. 직접 지안의 얼굴을 당기는 시늉도 해가며 조금이라도 예쁜 그림을 만들기 위해 열성적인 디렉팅이 이어졌다.

    “고개는 이쪽이 낫죠?”

    감독의 디렉팅에 맞춰 지안의 얼굴을 가볍게 쥔 신재가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며 불쑥 얼굴을 들이댔다. 단지 시늉이었으나 갑작스레 가까워진 숨에 지안의 턱이 흠칫 당겨졌다.

    “엇, 미안해요. 놀랐어요?”

    말로는 미안하다 하면서도 빙글 웃는 입꼬리를 보니 은근히 놀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딴에는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장난을 쳤다며 덧붙이지만 애초에 긴장보다 더한 것은 걱정이었다. 진짜 한 번 만에 끝내야 하는데, 싶은 마음에.

    물론 그가 지켜보고 있지는 않지만 괜히 저 홀로 마음이 찜찜한 것이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문틀에 기대선 채 시무룩하게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내내 어른거린 탓이다.

    촬영을 끝내고 돌아가면 우리 영감님을 위해 한 번만에 후다닥 끝냈노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이것 참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자, 스탠바이 합니다!”

    리허설을 마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신재와 지안은 멀찍이 서로를 마주하고 섰다. 이윽고 확성기를 타고 쩌렁쩌렁하게 스탠바이가 울렸다.

    시선의 간격 사이로 보슬비가 흩날린다. 남자는 석고 붕대를 둘둘 감은 여자의 팔과 상처 난 얼굴을 보며 애잔하게 미간을 좁힌다. 여자는 복잡한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그가 다가와 주기를 기다린다.

    모니터를 보며 배우들이 감정을 다잡기를 기다리던 감독은 이내 손을 까딱이며 액션을 외쳤다.

    애절하게 맞닿는 시선, 시야를 가리고 흩날리는 작은 물방울, 그 사이로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오다 어느 순간 빠르게 구르는 남자의 두 발. 순식간에 눈앞까지 달려온 남자가 두 손을 들어 올린다.

    그리고 볼을 감싸 쥐기 직전, 딱 그 순간이었다.

    흐리게 시야를 가리던 물방울들이 공기 중에 둥실 떠오른 채 움직임을 멈추었다. 눈앞까지 성큼 다가온 신재의 얼굴은 다소 우스꽝스럽게 마네킹처럼 굳은 채였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멈춰버린 공간 속에서 커다랗게 뜬 지안의 눈동자만 깜빡깜빡 숨을 쉬었다.

    “…엇!”

    별안간 팔이 당겨진 것은 그때였다. 동시에 무력하게 돌려진 얼굴이 커다란 손에 덥석 붙들렸다. 볼을 감싸는 온기를 온전히 느끼기도 전에 뜨거운 호흡이 입속으로 흠뻑 밀려들어 왔다.

    “!”

    매끈하게 기울어진 그의 목선이 한눈에 찬다. 제게 입을 맞춘 채 가늘게 내리뜬 검푸른 눈동자에 웃음이 걸려있다. 그의 입술 사이로 깊게 빨려 들어간 입술이 이내 촉촉한 소리를 내며 풀려났다.

    승원의 붉은 입술이 눈이 부시도록 근사하게 미소를 띠었다.

    “역시, 이 그림이 더 좋을 거 같은데.”

    아… 이젠 적응할 때도 됐는데. 콩닥콩닥, 심장이 뛰어 아주 못살겠다.

    지안은 떨리는 박동을 애써 숨긴 채 천연덕스럽게 눈을 흘겼다.

    “뭐예요. 안 온다더니….”

    “안 보이니 더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대번에 구겨지는 얼굴을 보니 100프로 진심임이 분명했다. 웃음을 삼킨 지안은 그의 허리를 둘러 안으며 아양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보니까 좀 괜찮아요?”

    “괜찮았으면 이 짓도 안 했어.”

    촉촉, 짧은 입맞춤이 연신 쏟아졌다.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저를 향한 그의 눈빛이 온통 분홍빛이다.

    “대본을 다 불태워 버릴까.”

    “에이, 불태운다고 안 찍을 수 있나, 뭐?”

    “상실초를 피워야지. 키스씬 나부랭이가 있었다는 걸 아무도 기억 못 하게.”

    “오… 그런 말도 안 되는 방법이….”

    모든 시선이 그들에게 몰려든 채 멈춰있었다.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않은 공간 속에서 그와 거리낌 없이 입을 맞추고 장난스레 코를 비벼댔다.

    새삼 신기하다. 늘 그저 평범한 사람 같다가도 이럴 때면 새삼 그가 사람이 아님을 깨닫곤 한다.

    하지만 그래도.

    ‘ 넌 오라버니가 널 진심으로 생각하는 듯싶지? ’

    아무렴 이 눈빛이, 이 손길이 어떻게 진심이 아닐 수가 있을까.

    “저놈 입술을 그냥 지져버리는 건….”

    “아… 그건 너무 극단적인데.”

    이 모든 것이 연기라면 지금 카메라 앞에 설 사람은 내가 아닌 그여야 했을 테다.

    “근데 이건 언제 풀 거예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다시 성마르게 입술을 삼키는 그와 혀를 얽고 틈 없이 몸을 맞대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여기서 더 하면 진짜 안 될 거 같은데…. 분명 생각은 하면서도 저 역시 도통 이 짜릿한 키스를 멈출 수가 없으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둘만의 시간 속에서 이성은 자꾸만 흐려진다. 입술이 얼얼하고 다리 사이가 축축이 젖어들 만큼 오래도록 그의 숨을 만끽하고 말았다.

    보는 눈은 몹시 많았으나, 결국 치솟은 욕정을 참지 못한 그가 그녀의 속옷을 내려버린 사실은 그 누구도 몰랐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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