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68화 (68/106)
  • 68.

    바야흐로 천고마비의 계절이었다. 하늘은 몹시 높고 푸르렀으나, 바람은 어제보다 조금 찬 듯도 하였다.

    하나, 이곳 그의 펜트하우스에는 연일 봄의 꽃이 흩날리고 있었으니….

    “봄이 온 듯싶지요?”

    “암. 이것이 춘풍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날이 어찌 이리 따수운지, 마음이 살랑살랑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구나.”

    “그러니 말이어요. 히히.”

    심심한 농을 주고받다 얼굴을 마주한 병천과 수아는 눈꼬리를 접으며 마냥 즐겁게 웃음꽃을 피웠다.

    “허허허허.”

    “에헤헤.”

    참으로 행복하지 않을 수 없는 요즘이었다. 드디어 합방을 치른 것도 충분히 경사로울진대, 근래 두 분을 하나로 감싼 공기가 예사의 것이 아니지 않겠는가.

    숨김없이 애틋하게 눈을 맞추는 것은 기본이요.

    ‘ 왜요? 뭐 묻었어요? ’

    ‘ 그냥 예뻐서. ’

    밥을 먹을 때도 손깍지를 끼고 불편함을 감수한다거나.

    ‘ 괜찮아요? 수저질 불편하면…. ’

    ‘ 전혀. 아주 능숙한 상태야. ’

    저들의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입맞춤을 나누며 애정표현까지 아끼지 않으시니.

    ‘ 묘흔이 저기 있는데. ’

    ‘ 음… 안 보이는데, 난. ’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대던 지난날이 꿈이었나 싶을 만큼, 오롯이 정을 통한 연인의 모습이 그토록 어여쁠 수가 없더랬다.

    “이제 와 말이지만 저는 지안 님이 참으로 신기하였지 모예요. 어찌 우리 월호 님의 수려한 외모를 보고도 홀리지를 않으시는지. 혹여 독산 어르신이 지안 님께 단단히 주술을 걸어두었나 의심까지 하지 않았겠어요?”

    “그러게나 말이다. 대체 눈이 얼마나 높으면 그리 꿈쩍도 않으시는지, 나야말로 내심 원망도 참 많이 하였다.”

    병천은 꼼꼼히 살핀 서적을 책장에 꽂으며 문득 아련한 미소를 띠었다.

    “어찌 되었거나, 내 묘생이 다하는 날까지 월호 님을 뫼실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하등 걱정이 없다.”

    “아무렴이요. 평생의 소원이 이리 이루어지니 요즈음엔 꿈속에서도 꽃동산만 내달리지 않겠어요?”

    당장 저주를 풀기라도 한 것처럼 들뜬 얼굴로 재잘거리던 둘은 그 와중에도 독산의 서적 찾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요즘엔 지안에게 푹 빠져 독산을 찾는 일조차 잊으신 듯싶었으나, 어젯밤 문득 찾고는 있느냐 물으시기에 내심 뜨끔했던 참이었다.

    높은 사다리 꼭대기까지 폴짝 뛰어오른 수아는 맨 위 칸에 꽂힌 서적을 뽑아들며 물었다.

    “한데 독산 어르신은 왜 굳이 찾으려 하시는 걸까요? 제 보기에는 모란 그자가 그리 해가 될 것 같지는 않은데….”

    힐끔 수아를 올려다본 병천은 공연히 턱을 문지르며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모란의 몸을 빌린 이가 독산임을 수아에게도 알릴 수 없으니 괜스레 마음이 불편했던 거다.

    “글쎄 말이다….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으신 모양이지.”

    물론 그도 그러할 테지만, 저 역시 독산의 심중을 알 수 없으니 찜찜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더욱이 저주를 내린 이 치고는 그에게서 묘하게 월호 님을 향한 애정이 느껴지더란 말이다. 저주와 애정을 어찌 한마음에 담을 수 있으랴. 하여 독산과 독대를 마치고 돌아설 때마다 찜찜함만 쌓여가더랬다.

    모르긴 하여도, 합방을 이룬 것을 알면서도 잠잠한 것을 보면 월호 님의 앞날에 큰 해가 될 것 같지는 않은데….

    어찌 됐거나 이 찜찜함을 풀자면 월호 님이 하루빨리 그를 찾아가도록 물꼬를 터줄 수밖에 없음이다.

    한데 어찌한다…. 서적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고, 요즘 기분도 한창 좋으시니 미친 척 슬쩍 사실을 고해버릴까….

    병천이 볼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에 빠져있을 때였다.

    “어!”

    “어익, 깜짝이야.”

    갑작스레 솟구친 수아의 목소리에 병천의 두툼한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

    “어어엇!”

    연이어 사다리 위에서 호들갑스럽게 발을 동동 구르던 수아가 병천을 내려다보며 손에 든 서적을 펄럭펄럭 흔들었다.

    “찾았습니다! 찾았어요!”

    **

    스탭들을 태운 승합차와 발전차가 줄줄이 세트장으로 되돌아왔다. 인근에서 도로씬을 마치고 돌아온 지안은 마지막 차량에서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며 내려섰다.

    ‘DanMi’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승원은 멀찍이 보이는 지안의 모습에 습관처럼 미소를 지었다. 저를 보고 싱그럽게 웃으며 달려오는 모습이 어째 아침보다 더 어여쁘다.

    “좀 늦었죠? 차량 통제가 힘들어서 시간이 좀 걸렸어요.”

    주변을 살피며 소리를 죽인 지안은 그의 곁에 앉으며 능숙하게 복화술로 속삭였다.

    “뭐 하고 있었어요?”

    승원은 휴대폰을 슬쩍 들어 보이며 장난스레 말했다.

    “적과 맞서 싸우던 중이야.”

    “또? 아후, 그러지 말라니까.”

    근래 그의 취미라 한다면 단연 지안의 기사 댓글 창에서 악플러와 사투를 벌이는 일이었다. 며칠 전 지안에게 혈전의 현장을 걸린 후로는 참전에 나서는 일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알리곤 했다.

    피싯 웃음을 흘린 그는 “농담이야.” 하며 제 휴대폰을 지안의 허벅지 위에 올려주었다. 모습을 숨긴 그와 더불어 평범한 인간들에겐 보이지 않았을 형체가 그제야 온전히 드러났다.

    “영상 봤어. 너 얼마 전에 찍은 광고.”

    “어! 그거 나왔어요?”

    빠르게 주변을 훑은 지안은 그가 몰래 건네준 휴대폰을 들고 꺼진 액정을 밝혔다. 그의 말마따나 얼마 전 찍었던 이너뷰티 광고 화면이 액정 속에 멈춰 있었다.

    “근데 나 아마 5초 컷이었을 텐데.”

    “글쎄…. 3초 같은데.”

    “정말요? 에잇….”

    아쉽게 입맛을 다신 지안은 손가락을 꼽아가며 광고를 확인했다. “4초네, 뭐!” 하며 늘어난 1초에 행복하게 웃는 모습이 세상 해맑다.

    “그렇게 좋아?”

    “당연하죠. 1초가 얼마나 소중한데.”

    이래도 어여쁘고 저래도 어여쁘니, 그가 턱을 괸 채 흐뭇하게 지안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뭐 좋은 일 있어요?”

    불쑥 건너온 남자의 음성에 지안의 고개가 흠칫 들렸다. 히끗 치떠진 승원의 눈동자에 지안의 극 중 파트너인 신재의 얼굴이 비쳤다.

    “아까부터 계속 웃고 있던데.”

    신재는 빙글빙글 웃으며 지안의 맞은편 의자를 빼내 앉았다.

    “아….”

    해맑게 휘어져 있던 지안의 입꼬리가 머쓱하게 떨어졌다. 누가 봐도 혼자 앉아 실실거리는 모습이었을 테니 민망함이 몰려왔다.

    지안은 손에 든 휴대폰을 흔들며 대강 대꾸했다.

    “일전에 찍었던 광고가 나와서요.”

    “오, 그래요? 어디 봐요.”

    “아. 메인은 아니고….”

    “에이, 괜찮아요. 봐요, 한번.”

    쭈뼛쭈뼛 품으로 숨기려 했던 휴대폰이 막무가내로 뻗어온 손에 휙 빼앗겼다. 당황한 지안은 재빠르게 승원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턱을 괸 자세 그대로 신재의 손에 들린 제 휴대폰을 심드렁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오, 나온다, 나온다!”

    신재는 4초 만에 스쳐 가는 지안을 캐치하고 호들갑스럽게 엉덩이를 들썩댔다. 민망해진 지안은 은근히 손을 내밀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달싹였다.

    “몇 초 안 돼요.”

    신재는 어서 이리 내놓으라는 듯 내밀어진 손에 마지못해 휴대폰을 올려주었다. 싱긋 눈웃음을 지으며 자연스레 칭찬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메인보다 눈에 띄는데요? 지안 씨 마스크가 워낙 좋아서.”

    장신재는 언변이 좋은 사람이었다. 선한 인상의 얼굴엔 늘 미소가 박제돼있고 매너와 배려심도 깊어 현장의 여심은 물론 모든 스탭 사이에서도 분위기 메이커로 통했다.

    하나 배려와 칭찬에 익숙지 않은 지안은 신재의 살가운 행동들이 이따금 민망하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예쁘게 잘 나왔어요, 진짜.”

    신재는 엄지를 척 세우며 연방 비행기를 둥실둥실 태웠다. 지안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휘어졌다.

    “감사해요.”

    불편한 자리였다. 승원이 곁에 있어 더더욱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간 딱히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요 며칠 현장에서 신재와 대화를 나눌 때면 묘하게 어두워지던 그의 표정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리를 피할 만할 핑계가 어디 없을까…. 주변을 슬쩍 훑으며 머리를 굴려보던 때였다.

    “그나저나, 우리 며칠 후면 키스씬 찍어야 하네요.”

    갑작스런 신재의 말에 지안의 등줄기가 절로 뻣뻣해졌다. 오른쪽 눈꼬리에 걸린 그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확인하기가 덜컥 겁이 난다.

    아… 젠장. 나 아직 얘기 못 했는데.

    키스씬 촬영 일정이 잡힌 것은 사흘 전이었다. 그저 입만 닿았다 떨어지는 것도 구슬에 영향이 있을까 내심 걱정은 됐지만, 차마 다른 남자와 입맞춤을 하게 됐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아 본의 아니게 여태 그에겐 함구하게 됐다. 한데 신재를 통해 알게 되는 과정은 더더욱 옳지 않은 게 아닌가.

    아오. 진짜, 진심, 맹세코, 오늘은 말하려고 했는데…!

    환장하는 지안의 심정을 알 길 없는 신재는 짐짓 안타까운 얼굴로 물었다.

    “애정씬이 너무 빨리 나왔어요. 그죠?”

    식은땀이 삐질 난다. 나무토막처럼 곧게 선 목이 뻐근해진다.

    “아… 촬영이 회차대로 가는 게 아니니까요. 어쩔 수 없죠, 뭐.”

    “나야 경험이 많으니까 상관은 없는데…. 지안 씨는 어때요? 키스씬 찍어봤어요?”

    “아니요…. 전 극 중에서 연애다운 연애도 처음 해보는 거라….”

    입은 마지못해 대꾸하고 있으나, 눈은 그만 그 입을 다물어주시라 간곡히 부탁하고 있었다.

    “허. 진짜요? 으아… 이거 긴장되는데….”

    하지만 도통 입 닫을 생각이 없는 신재는 내심 설레는 기색을 감추지 않고 어깨를 들썩였다.

    “우리 그전까지 좀 더 친해져 봐요. 아무래도 애정씬 찍으려면….”

    신재의 재잘거림은 거기까지였다. 갑작스레 뚝 끊긴 목소리에 지안은 의아한 얼굴로 신재를 건너다봤다.

    웃고 있는 입꼬리, 다정하게 접힌 눈, ‘찍으려면’에서 멈춰버린 입 모양. 그제야 사위의 잡음도 모조리 고요해졌음을 깨달았다. 그가 시간을 멈춰버린 것이었다.

    지안의 고개가 승원을 향해 홱 돌아 붙었다. 심드렁하게 반쯤 감긴 그의 눈이 어느 틈에 제게 붙박여 있었다. 표정이 좋지 않다. 당장 신재의 주둥이를 썰어버릴 것만 같다.

    지안은 서둘러 변명을 쏟아냈다.

    “죄송해요. 오늘 말하려고 했는데, 진짜예요. 오늘 진짜 말하려고 했어요.”

    “…….”

    “키스씬까진 아니고 그냥 뽀뽀씬. 살짝 이렇게. 진짜 이 정도.”

    제 손바닥을 살짝 붙였다 떼며 열심히 항변했지만, 제대로 먹히기나 한 건지 변함없는 눈빛만 봐서는 알 수가 없다.

    눈치를 살피며 입술을 감쳐물던 지안은 걱정 어린 얼굴로 얼른 덧붙였다.

    “이 정도면 구슬에 크게 막… 영향 갈 만큼 양기가 들어오거나 그러진… 않겠죠?”

    얼마간 지안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승원은 눈을 꾹 감으며 이마를 문질렀다.

    “하아….”

    길게 늘어지는 그의 한숨이 시간이 멈춘 공간 속에 풀풀 나부꼈다.

    아무렴. 그깟 입맞춤 한 번에 구슬이 영향을 받을 리는 없지. 다만 그깟 입맞춤 한 번에 상당히 기분이 더러워질 제 유치한 감정이 문제일 뿐이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액션 영화에나 꽂아버리는 건데.

    “그래서 뭐.”

    겨우 치기 어린 감정을 다스린 승원은 마뜩잖은 얼굴로 물었다.

    “언제 찍는다고?”

    “금요일이요. 이번 주….”

    잘못도 없이 의기소침하게 꼬물거리는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더는 뭐라 말도 못하겠고.

    “금요일….”

    승원은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웃고 있는 신재의 얼굴을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그날은 못 오겠는데….”

    왜요? 하며 건너오는 지안의 눈길이 느껴진다. 승원은 차마 “저자를 죽여버릴 것 같아서.”라고 답하지 못하고 고뇌에 찬 한숨만 삼켜야 했다.

    같은 시각.

    맞은편 건물 옥상 난간에 기대있던 시호는 멈춰버린 땅 위의 광경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길게 늘어뜨렸다.

    “흐응…. 보기 좋네.”

    이윽고, 미소 아닌 미소가 걸려있던 입꼬리가 차갑게 뚝 떨어졌다.

    “…짜증 나게.”

    잔잔하게 불어오던 가을바람이 일순 서늘하게 휘몰아쳤다. 어디서부터 날아온 건지 알 수 없는 붉은 낙엽이 시호의 구두 굽에 걸린 채 팔랑팔랑 나부꼈다.

    오래지 않아, 시호가 사라진 자리에는 검은 재로 부서진 낙엽만 호젓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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