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추분秋分이었다. 낮의 길이와 같아진 밤이 어제보다 이르게 세상을 덮었다. 유유히 흘러간 시침이 벌써 새벽 1시를 넘어갔다.
하나, 짙은 밤은 통유리창을 뚫지 못하고 하염없이 주변을 배회했다. 매립등 불빛이 은은히 번진 서재에 늦은 시각까지 아늑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관계를 확실히 하는 게 좋겠어요. …관계를 확.실.히! 확.실, 아… 발음이 왜 이래….”
소파에 엎드린 채 속닥속닥 대사를 읊던 지안은 일어나 양반다리를 올리고 볼펜을 물었다.
아에이오우, 아에이오우.
굳은 입을 풀며 무심코 돌아본 책상 앞엔 오늘도 여전히 승원이 앉아 있다. 엄지로 턱 아래를 받치고 검지론 입술을 누른 채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요 며칠 같은 풍경이었다. 거실에서든 서재에서든, 지안이 소파에 앉아 대본을 훑어보면 그는 얼마쯤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번듯한 명함만 쥐고 있을 뿐 일은 일절 하지 않는 줄 알았더니, 제법 진지한 얼굴로 일에 열중하는 모습이 몹시 의외였다.
각자의 일에 골몰해 있은 지 벌써 두 시간쯤이 흘렀을까. 문득 그의 관심에 갈증이 난 지안은 볼펜을 내려놓고 부러 조금 목소리를 키웠다.
“흠흠…. 관계를 확.실.히 하는 게 좋겠어요.”
그러며 힐끗 그를 곁눈질했지만 승원의 시선은 여전히 노트북 속에 붙박여 있었다. 연이어 조금 더 소리를 높여 대사를 읊어봐도 역시나 실패. 오늘따라 그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더욱 깊은 걸 보니 아무래도 많이 바쁜 모양이다.
“흐음….”
결국 무릎을 세워 볼을 기댄 지안은 대놓고 그를 빤히 바라봤다. 수초가 흘러가도록 똑바른 시선이 건너갔지만 그는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바쁘게 키보드만 두드릴 뿐이었다.
참 희한하기도 하지. 처음 며칠은 그가 어떻게든 제 관심을 끌어보려 오만 잡음을 다 끌어내곤 했는데, 이젠 가만히 내버려두니 되레 허전한 기분이 든다.
설마 이거, 서운한 건가.
“웬일이야, 진짜….”
문득 자각한 감정이 우스워 실소가 터졌다. 봐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다니. 세상에, 어쩌다 그에게 이런 기분까지 느끼게 됐을까.
그간 갖가지 일을 겪으며 오늘에 닿은 시간들이 새삼 아득하게 느껴졌다. 야금야금 변해가다 결국 여기까지 다다른 자신의 감정도 난데없이 새삼스럽다.
그저 수상하고 꺼림칙한 남자였는데. 집요함이 성가시고 뻔뻔함이 짜증 나고, 잘난 얼굴 말고는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던 요망한 여우였을 뿐인데.
“어쩌다가….”
그늘진 미간에, 신비로운 눈동자에, 크고 하얀 손등 위로 툭 불거져 나온 푸른 핏줄에, 고작 이런 것들에도 이토록 심장이 간질거리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점점 선명해진 감정들을 되새기며 아득히 시야를 흩트리던 지안은 문득 대본에 적힌 자신의 대사를 눈으로 훑었다.
‘관계를 확실히 하는 게 좋겠어요.’
‘우린 대체 무슨 사이예요? 어쩌다 생각나면 호텔이나 가고, 밥 먹을 사람 없으면 불러다 끼니나 같이 때우고. 고작 그게 단가?’
얌전히 모은 발가락이 꼬물꼬물 움직였다. 슬그머니 기울어지는 얼굴이 별안간 골똘한 표정이 됐다.
“관계… 무슨 사이….”
가만히 읊조려본 단어의 의미가 불현듯 복잡하게 다가왔다.
그러게. 우리야말로 무슨 사이일까.
그저 마음이 동하면 몸을 섞고, 시간이 맞을 때면 함께 식사를 하고, 이따금 서로도 모르게 애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는 보지만 딱히 말로써 애틋한 감정을 나눠본 적은 없던 우리는.
‘좋아해. 우리 사귈까? 오늘부터 1일.’ 풋풋한 청춘들처럼 간지러운 절차를 밟은 적이 없으니 이 대본대로라면 우리의 관계도 명확하지 않은 셈이었다.
“흠… 그러네.”
우린 대체 무슨 사이예요? 그에게 묻는다면 그는 과연 뭐라고 답할까. 아니 그 전에, 제 마음도 그와 같다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그러고 보니 그에게 마음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 그 역시 딱히 저를 좋아하느냐 물어본 적이 없었기에 구태여 쑥스럽게 입으로 옮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저는 그저 막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그간 본능에 끌려 어쩔 수 없이 섹스에 응한 거라 단정 짓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 혹여, 내 마음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치부한 거라면. 애초에 그의 고백조차 단지 저주를 풀기 위한 계략이었던 것이라면….
“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갑자기.”
얼른 고개를 털었다. 상념에 흐려졌던 시야가 번쩍 되돌아왔다. 뜬금없이 옆길로 새버린 생각이 당황스럽다. 명확하지 않은 관계에 불안해하는 것은 대본 속의 인물일 뿐인데, 느닷없이 현실로 끄집어내 버린 의심과 불안에 괜히 심장이 철렁했다.
“안 되겠다.”
잡생각이 많아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만 자야 할 때가 된 모양이다.
대본을 정리하고 몸을 일으키던 때였다. 자연스레 그를 향한 지안의 눈에 절로 미소가 스몄다. 그가 어느새 의자에 뒷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살금살금 소리 죽여 다가간 지안은 그의 눈두덩 앞에서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움찔하는 기색도 없는 걸 보니 그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들어가서 편히 주무시라 팔을 붙들었던 손이 별안간 멈칫했다. 무심코 스쳐본 노트북 화면 속에 시선이 고정된 탓이었다.
“…뭐야, 이게…?”
하얀 인터넷창이 비치는 눈동자가 차분히 화면을 훑어내렸다. 마우스패드까지 살살 굴려가며 스크롤을 내리던 지안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나, 붙들어도 붙들어지지 않는 입꼬리가 자꾸만 실룩실룩 볼 위로 주름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어째서 몹시 당연하게도, 그가 회사 일에 골몰해 있으리라 생각했을까.
“하… 미치겠다, 진짜….”
스크롤을 올려 제 얼굴이 커다랗게 실린 기사를 확인한 지안은 다시금 그의 흔적이 곳곳에 남은 댓글창을 확인했다.
jyg*** 서지안? 저 듣보잡은 머임?
?jsw*** 쓸데없이 말 줄이지 마. 세종이 서운해하니.
yg2*** 서지안 실물 본 1인. 겁나 못생김. 단미 역은 주여경이 훨 나았을 듯.
?jsw*** 네년이 그년이로구나….
bsy*** 서지안 스폰받은 거 팩트임? 돈 졸라 많은 영감탱이라던데 ㅋㅋ
[ jsw*** 영감탱이라니. 버르장머리 없는 새ㄲ… ]
쌍기역에서 멈춰버린 글자 뒤로 깜박이는 커서가 차마 입력 버튼을 누를 수 없었던 그의 고뇌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풉….”
결국 웃음이 터져버린 지안은 얼른 입을 틀어막고 그를 살폈다. 악플러들과 외로운 사투를 벌이느라 얼마나 고단했는지, 코앞에서 웃음을 터뜨려도 미동이 없다.
대체 댓글을 얼마나 남긴 거야….
다 찾아 읽기도 힘들 만큼 정성스럽게 남겨놓은 댓글들을 훑다가 그만 포기하고 허리를 폈다. 요 며칠 내내 그가 한 일이 이것이라면 얼마나 많은 기사에 ‘jsw***’가 남아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고개를 절절 흔들며 웃음을 삼키던 지안은 세상모르게 잠에 빠진 승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내가 미쳤지. 아무리 잠깐이라지만 이런 남자를 두고 계략이니 뭐니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했다니.
“어딜 봐서 내일모레 천 살이냐고….”
이러니 당최 와 닿지 않는 거다. 이러니 자꾸만, 그가 971살 연상의 구미호라는 사실도 잊고 속절없이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
답지 않은 충동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잠든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 섹시해보여서, 댓글 따위에 발끈하며 진지한 얼굴로 키보드를 때려 부쉈을 그를 생각하니 못 견디게 귀여워서, 스르륵 허리가 기울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어디서 샘솟은 용기인지, 새근새근 고르게 퍼져 나오는 숨을 한껏 들이마시곤 그의 입술 위에 살포시 제 입술을 포개었다.
따뜻하고 포근하다. 이제는 익숙해진 온기에 나른히 눈이 감겼다. 미친 척 아주 살짝만 입을 맞춰보려다 생각보다 진득이 입술을 누르고 말았다.
과감히 일을 쳐놓고 뒤늦게 심장이 콩닥콩닥 방망이질 친다. 엉큼한 도둑질을 들킬세라 새가슴이 벌렁벌렁 난리도 아니다. 떨리는 호흡에 점점 숨이 가빠와 그만 입술을 떼어내던 순간이었다.
촉, 떨어지려던 찰나 되레 달라붙은 입술이 앙증맞게 젖은 소리를 냈다. 이내 가볍게 벌어진 그의 입술이 지안의 아랫입술을 살포시 머금었다.
나슨히 감겨있던 지안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미 게슴츠레 열려있던 그의 눈과 시선이 맞닿고 말았다.
아… 젠장. 들켰다.
흠칫 입술을 떼어낸 지안은 당황해 말도 못하고 커다란 눈만 깜빡였다. 은근하게 벌어진 그의 잇새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나른히 흘러나왔다.
“…눈뜨자마자 좆이 서니까 상당히 당황스러운데.”
“…….”
당혹감에 물든 눈이 저도 모르게 그의 중심 위로 뚝 떨어졌다. …맙소사. 불룩해진 앞섶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당당히 드러내고 있다.
“아…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기울였던 몸을 바로 세운 지안은 슬금슬금 뒷걸음을 걸었다. 곧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간의 경험으로 충분히 깨달아 버린 것이었다.
“어디 가.”
아니나 다를까, 냉큼 뻗어온 손에 손목이 붙들렸다. 까딱거린 스냅 한 번에 가볍게 당겨진 몸이 순식간에 그의 허벅지 위로 풀썩 무너졌다.
“하던 거 마저 해.”
부드럽게 볼을 스친 손이 귓바퀴를 감싸 쥐었다. 연이어 맞닿은 입술 사이로 매끄럽게 혀가 밀려들어 왔다. 보드랍고 따스한 손이 얇은 섬유 위로 젖가슴을 지분대는 모습이 묘하게 자극적이다.
은근슬쩍 턱을 당기며 뒤늦게 내숭을 떨던 것도 잠시, 지안은 결국 그의 목을 둘러 안고 고개를 기울였다. 이내 과감히 밀어 넣은 혀가 이젠 제법 능숙하게 그의 혀를 핥고 휘감는다.
“하아….”
오늘따라 이상하다. 오늘따라, 전신을 휘도는 감각이 유난히 은밀하고 간지럽다.
아늑한 조명과 깊은 밤. 새삼 자각해버린 그를 향한 마음과 못 견디게 귀여운 그의 행각. 그 모든 것에 흐무러져 버린 이성이 자꾸만 안 하던 짓을 하도록 부추기는 탓이다.
“하….”
혀뿌리까지 닿을 듯 깊숙이 얽히는 호흡이 금세 뜨거워졌다. 야릇한 기분에 한껏 달아버린 몸은 요염하게 골반을 고무락거리며 엉덩이 아래에 닿은 그를 은근히 자극하고 있었다.
어쩌다 완전히 지안의 리드에 밀려버린 그가 되레 당황한 듯 감은 눈을 떴다. 승원은 농염하게 풀린 지안의 얼굴을 훑으며 사뭇 의아한 듯 미간을 좁혔다.
“술 냄새는 안 나는데….”
이미 몰래 입을 맞추던 순간부터 제가 알던 그녀가 아니었을 터.
“왜 이래, 갑자기.”
혹여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건가, 뜬금없이 이마까지 짚어보는 걸 보니 어지간히 놀라긴 한 모양이다.
피싯 웃음을 흘린 지안은 붉어진 얼굴이 민망해 승원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제 품에 안기는 그녀를 둘러 안는 팔이 이젠 너무도 자연스럽다.
“그냥….”
뭐라고 해야 할까.
오늘 같은 기분이라면 한 번쯤은 입 밖에 꺼내봐도 괜찮지 않을까. 말랑하지 못한 성격에 너무도 어렵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수줍은 마음을 표현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냥… 좋아서요.”
그래, 이 한 마디면 구태여 우리의 관계를 정의 내리지 않아도 될 테니까.
“영감… 아니, 이사님이 좋아서요.”
수줍게 꺼내 본 고백이 단단한 어깨에 푹 파묻혔다.
“…….”
말이 없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꽉 맞닿은 심장의 거센 박동만으로도 훤히 그려진다. 하물며 엉덩이 아래에 닿은 그의 몸은 불끈불끈 젖은 곳을 꾹꾹 찌르며 대꾸도 한 셈이다.
“어… 그러려고 한 말 진짜 아닌데….”
내심 같은 생각을 숨기고 내숭을 떨어보지만. 그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 밤, 묵혀뒀던 그의 시간이 또 며칠 왕창 줄어드리란 것을.
그러니까 이제… 499년 230일쯤.
“…하.”
그가 참고 있던 숨을 신음처럼 툭 내뱉었다. 품에서 떼어내어 마주한 얼굴이 역시나 잔뜩 상기되어 있다.
“음…!”
결국 다급한 호흡이 목구멍 깊숙이 밀려들었다. 따끈한 열기가 젖가슴을 꽉 움켜쥔다. 꾹 맞닿은 아래가 흠씬 비벼지고 정신없이 달막였다.
기나긴 밤이 기어이 시작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