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66화 (66/106)
  • 66.

    서너 군데의 편집숍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옷가지를 챙기다 보니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둘이서 팔짱을 끼고 어찌나 신나게 돌아다녔던지,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점심까지 걸렀다. 끼니를 거르면 큰일이 나는 줄 아는 수아가 밥때를 놓칠 정도였으니, 그녀가 온종일 얼마나 들떠 있었는지 알만도 했다. 덕분에 피곤할 겨를도 없이 뜻밖에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은 지안도 마찬가지였다.

    뒤늦은 점심은 가까운 커리집에 들러 해결하고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미용실에 도착했다. 딱히 단골이랄 곳이 없어 수아가 이끄는 대로 따라와 보니, 재벌가 자제들과 연예인들이 주로 애용한다는 꽤 유명하고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번쩍번쩍한 외관에 습관처럼 기가 죽어 궁상맞게 주머니 사정이 먼저 걱정됐지만, 등을 꾹꾹 밀어대는 수아의 기세에 못 이겨 결국 문턱을 넘어섰다.

    한데 역시나, 두 번은 거절해 볼 것을. 머리 위로 스팀기가 뱅뱅 돌아가던 순간 후회가 밀려왔다.

    “세상에. 이게 누구야?”

    잡지를 넘기던 손이 멈칫했다. 보지 않고도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챈 지안은 무성의하게 거울 속으로 눈만 힐끗 치떴다.

    “네가 여긴 웬일이니?”

    아니나 다를까, 비딱하게 팔짱을 끼고 선 여경이 사뭇 경악스런 얼굴로 거울 속의 지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주제에 어떻게 여기에?

    무시와 멸시가 그득 담긴 한 쌍의 눈알이 황당한 듯 아래위로 지안을 훑었다. 상대하기도 귀찮아 한숨을 폭 내쉰 지안은 그만 시선을 거두고 유유히 잡지를 넘겼다.

    하나, 물어뜯기 좋은 먹이를 그냥 두고 지나칠 계집애가 아니었으니.

    “어머, 얘 진짠가 보네…?”

    홀로 무어라 이기죽대며 실소를 뱉던 여경은 구태여 거울 옆으로 자리까지 옮기곤 아니꼽게 입술을 뒤집었다.

    “너 오대민 감독 드라마 잡았더라?”

    요 며칠 오 감독의 신작 소식은 연일 화제 몰이를 하며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신인도 그의 드라마에 출연만 하면 성공이 보장된다는 정설이 있을 정도이니, 주요 인물들의 라인업은 단연 그 화제의 중심에 우뚝 서 있었다.

    호시탐탐 오 감독의 뮤즈를 꿈꾸던 여경이 메인 라인업에 오른 제 이름을 보고 얼마나 속이 뒤집혔을지 안 봐도 훤했다.

    지안은 권태로운 얼굴로 무심히 말했다.

    “그래. 축하 고맙다.”

    “하. 축하는 미친.”

    비소를 터트린 여경은 몸을 숙이며 은근한 투로 물었다.

    “진짜 돈 많은 영감이라도 하나 물었니?”

    어쩜, 생각하는 게 꼭 이렇게 저 같을까.

    “하….”

    한숨을 내쉬며 비껴든 얼굴에 절로 짜증이 솟구쳤다. 하나 그도 잠시. ‘내가 넌 줄 알아?’ 하며 눈빛으로 쏘아붙이던 순간 불현듯 승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게. 우리 영감님이 돈은 좀 많으니 묘하게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캐스팅 막힌 걸 뚫어준 것도 우리 영감님이고. 주여경네 영감보다 우리 영감님이 나이도 훠얼씬 많으니 딱히 큰소리칠 입장도 아닌 듯싶고….

    아… 애매한데, 이거….

    나름 진지하게 생각하느라 침묵한 사이, 제 소설을 기정사실로 굳혀버린 여경은 헛웃음을 치며 양껏 비꼬았다.

    “와아, 얘 진짜 웃긴 년이네. 스폰 안 받겠다고 세상 고고한 척은 혼자 다하더니, 이제 안 되겠다 싶었나 봐?”

    조잘대는 소리를 귓등으로 퉁겨낸 지안은 느닷없이 떠오른 승원의 얼굴에 배어나는 웃음을 꾹 삼켰다.

    문득, 그 ‘돈 많은 영감’이 999살의 잘생긴 구미호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 얄미운 계집애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던 거다.

    “누구니?”

    어느새 한 뼘 더 가까이 얼굴을 들이댄 여경이 시뻘건 입술을 들썩이며 속살거렸다.

    “GU 전자 조 사장, 얼마 전까지 옆구리 채운다고 난리던데 갑자기 조용하더라?”

    손톱만큼 또 거리를 좁혀온 여경의 눈이 얄망궂게 가늘어졌다.

    “그 영감탱이지? 아무렴, 그 영감 정도는 돼야 오 감독이 설설 길 거야, 그지?”

    하… 이 계집애의 편협한 사고방식은 어쩜 날이 갈수록 조잡해질까. 행여 기절초풍할세라 우리 영감님의 기함할 만한 프로필을 읊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지안은 그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잡지 위로 시선을 떨궜다.

    “머리 하러 왔으면 머리나 해, 주접떨지 말고.”

    윗입술을 들썩거리며 눈을 흘기던 여경은 굴하지 않고 지안의 발을 툭 치며 재잘댔다.

    “이왕 들킨 거 얘기 좀 해줘 봐. 얼마나 빽이 세면 오 감독 드라마엘 꽂아 넣나 정보 좀 얻게.”

    삐뚜름히 기울어진 지안의 잇새로 대번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네가 정보 얻어서 얻다 쓰려고? 왜, 네 영감님은 이제 끗발이 떨어졌니?”

    여경은 미간을 와그작 구기며 이를 앙다물었다. 시종일관 무신경한 지안의 얼굴이 다시금 여경을 마주 봤다.

    “아. 얼마 전에 기사 보기는 했어. 치매 걸렸다며? 설마 너 못 알아보니, 이제?”

    “하. 이 기집애가…. 치매 아니거든?!”

    척추를 번쩍 곧추세우고 예민하게 버럭 내지르는 것만 봐도 저 집안의 속사정쯤이야 알만도 하다. 스폰 받아 빛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남은 생을 치매 노인 수발이나 들어야 할 처지라니.

    지안은 짐짓 안타까운 얼굴로 혀를 내둘렀다.

    “그러게 스폰을 받을 거면 그것만 하지, 뭣 하러 조강지처 쫓아내고 안주인 자리까지 차지해서 그 고생을 해?”

    “이게, 씨….”

    사나운 얼굴로 입바람만 푹푹 불어올리던 여경은 퍽이나 걱정스런 얼굴로 흥분해 쏟아부었다.

    “야, 꼴에 뭐 하나 잡았다고 모가지에 힘 좀 들어간 모양인데. 나대지 마, 기집애야. 너 뜬금없이 오 감독 드라마 잡았다고 다들 뒤에서 쑥덕대는 건 알기나 하니? 괜히 스폰 걸리고 쪽팔려서 울지 말고 하던 대로 얌전히 바닥에 처박혀 있으라고. 이게 다 옛정을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라니까?”

    삐이- 타이머가 다 돌아간 스팀기에서 요란하게 기계음이 울렸다. 소리에 즉각 반응한 직원이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걱정해줘서 고마운데.”

    가까워져 오는 직원을 힐끗 살핀 지안은 여경을 향해 전에 없이 상냥한 얼굴로 눈꼬리를 접었다.

    “너나 잘하세요.”

    “이…!”

    무어라 된소리를 내뱉으려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성큼 다가온 직원에게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 여경은 마지못해 팽 돌아 자리를 벗어났다.

    루프탑으로 향하는 걸음이 몹시 사나웠다. 구두 굽을 으스러뜨릴 기세로 씩씩대며 계단을 오른 여경은 한산한 루프탑을 확인하곤 담배를 꺼내 물었다. 급히 빨아당긴 연기가 투박하게 풀풀 흩날렸다.

    “아후! 재수 없는 년.”

    굳게 걸어 닫은 문을 홱 돌아본 눈이 표독스레 찢어졌다.

    “대체 누굴 잡았길래 짜증나게 깝치고 지랄이야, 진짜?”

    돈 많은 영감탱이를 잡고도 저는 오디션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던 오 감독의 작품이었다. 나라님이 구슬려도 꿈쩍도 않는다는 오 감독을 구워삶았다면 보통 빽이 아니란 소린데, 제가 아는 리스트 중엔 그만한 영감이 없으니 답답하고 약이 올라 죽겠다.

    설마하니 당당하게 실력으로 뽑혔으리란 생각은 애초에 1도 하지 않는 여경이었다.

    “아씨, 어떻게 알아내지? 저거 잘 되면 꼴 뵈기 싫어서…. 아흐, 어떻게든 치워버려야 하는데.”

    까득까득 이를 갈며 구시렁거리던 여경이 흠칫 굳은 것은 그때였다.

    막 담배를 물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느닷없이 마비라도 된 듯 전신이 마네킹처럼 뻣뻣해졌다. 다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곤 댕그래진 눈알뿐이라, 왼쪽으로 삐걱삐걱 구르던 안구가 파르르 떨렸다.

    루프탑엔 분명 혼자였다. 문은 열리지도 않았음이다. 아니, 미처 발견하지 못한 누군가가 있었다 한들 4층 옥상 난간 위에 저토록 아무렇지 않게 쪼그리고 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여경은 순간 밀려온 공포에 바짝 굳어 가까스로 다리만 후들후들 떨었다.

    손가락 마디만 한 난간에 폴짝 올라앉아 턱을 괴고 있던 수아가 스르륵 고개를 기울였다.

    “흐응….”

    막 샴푸를 끝내고 머리에 둘렀던 수건이 난간 위로 툭 떨어졌다.

    “이것이 우리 지안 님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못된 무리 중 하나렷다….”

    여경의 목구멍을 타고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이는 사이, 바로 눈앞까지 폴짝 날아온 얼굴이 벙벙한 동공에 가득 찼다.

    “…허!”

    “아이코… 어쩜, 상판대기가 씹다 버린 개 껌처럼 상스럽게도 생겼구낭?”

    쯧쯧 혀를 차던 귀여운 얼굴이 매섭게 굳어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아이처럼 새까맣고 둥글둥글하던 눈동자가 일순 빨갛게 물들었다.

    “너.”

    급기야 흰자위까지 온통 빨개진 토끼의 눈이 여경의 얼굴을 집어삼킬 듯 기이하게 일렁였다.

    “한 번만 더 우리 지안 님의 앞에서 되지도 않은 잡소리를 지껄이다 내 눈에 띄는 날엔 네년의 그 조잡한 손톱을 몽땅 뽑아다가 눈알에 쑤셔버릴 것이다.”

    “…끅!”

    화려하게 손질한 여경의 손톱이 움찔 오므라들었다. 이내 전신에 진동기가 붙은 것처럼 젓가락 같은 몸이 덜덜덜 경련했다.

    그새 곱고 앙증맞은 얼굴로 되돌아온 수아는 빙그레 웃으며 여경의 볼을 다정히 쓰다듬었다.

    “허니 주둥이 단속을 좀 잘하시어요. 응?”

    “흐… 흐으으…으으으.”

    미친 듯이 사지를 떨던 몸뚱이가 결국 전신을 휘감는 기이한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벌러덩 나자빠졌다. 그러고도 눈이 뒤집힌 채 파닥파닥 경련하는 모습은 마치 번개라도 맞은 형상이다.

    그 곁에 쪼그려 앉아 무릎을 끌어 안은 수아는 놀란 아이를 달래듯 여경의 가슴을 가만가만 토닥였다.

    “아구, 이리 눈깔이 뒤집힐 줄은 몰랐는데 어쩌누….”

    수아의 머리 위로 혀 차는 소리가 흩날린 건 그때였다.

    “쯧쯧….”

    수아는 화들짝 고개를 비껴들었다.

    “앗!”

    살랑 불어온 바람에 긴 백발이 나부꼈다. 내리뜬 회색 눈동자에 한숨이 가득 차올랐다.

    “알아서 하겠다더니 졸도를 시켰구나.”

    수아는 의기소침해진 얼굴로 쭈뼛쭈뼛 턱을 당겼다.

    “히잉. 살짝 겁만 주려 하였는데 어찌하다 보니….”

    한숨을 폭 내쉰 월호는 절절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여경이 나타나기 전부터 숍 구석에 자리를 잡고 지안을 바라보고 있던 참이었다. 고깟 잡지 나부랭이가 뭐 그리 재미난지, 제가 온 줄도 모르고 눈길 한 번 주지 않더랬다.

    덕분에 어여쁜 얼굴을 실컷 구경하다 보니 지난날 바bar에서 한바탕 지안을 울렸던 계집이 또다시 심기를 건드리는 꼴을 보게 됐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영감을 잡았느냐며 지안을 귀찮게 굴기에 ‘내가 그 영감이다.’ 하며 얼굴을 들이댈 뻔한 것을 수아의 만류로 겨우 참았다. 괜히 모습을 드러내어 지안을 더 곤란하게 만들지 말라는 이유였다.

    “어째 네가 더 곤란하게 만든 듯싶은데.”

    월호는 여전히 사지를 파닥거리며 경련하는 몸뚱이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삼켰다. 싱긋 미소를 띤 수아는 검지를 세워 여경의 얼굴 위로 차분히 원을 그렸다.

    “걱정 마시어요.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허나 이제 이 계집은 이유도 모르고 지안 님을 두려워하게 되겠지요. 아마 십 리 밖에서부터 오줌을 줄줄 지리고 달아날 것이어요.”

    파닥파닥 튀어 오르던 몸뚱이가 서서히 젖은 솜처럼 늘어졌다. 이내 제자리를 찾은 눈동자는 흐리멍덩하게 수아의 손끝을 따라 빙빙 굴렀다.

    과연 그 어떤 신수보다 총명하고 영특한 토끼다운 실력이 아닐 수 없다. 피식 입꼬리를 올린 월호는 기특한 듯 수아의 정수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제법이구나.”

    “헤헤.”

    빙그레 찢어진 수아의 입술에 세상 해맑은 미소가 걸렸다. 완전히 최면에 취해 스르륵 눈을 감는 여경을 심드렁히 내려다보던 월호는 사뭇 걱정 어린 얼굴로 당부했다.

    “지안에겐 비밀로 해야겠다.”

    “물론이지요. 지안 님 성정에, 어후우… 아주 혼쭐이 날 것입니다.”

    결코 말 못 할 비밀을 품은 그날의 오후가 소란한 듯 고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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