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오후 촬영은 조금의 휴식시간도 없이 빡세게 진행됐다. 촬영 일정은 너무도 촉박한데, 오늘따라 유독 시현의 NG가 잦았던 탓이었다.
그것이 오로지 승원을 향한 소심한 복수임을 알았을 때, 지안은 개탄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 어쩌지? 오늘 촬영 늦게 끝날 거 같은데…. 그러니까 그만 버티고 들어가서 쉬어. 내가 뭐, 서지안 죽이기라도 할까 봐? ’
단지 그의 피로도를 높이고자 그 많은 스탭의 발을 묶어놨다니, 대체 수백 년의 나이는 어디로 먹은 건지 심히 궁금할 따름이었다.
결국 시현의 유치한 작태를 참지 못한 그가 기어이 왼쪽 콧구멍도 터트려버린 후에야, 시현은 마지못해 NG퍼레이드를 멈추고 촬영을 끝냈다.
그래 보았자 새벽 2시. 덕분에 오늘의 퇴근 시간도 결국 자정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간밤의 중노동과 더불어 빡센 촬영까지, 완전히 파김치가 돼버린 지안은 차에 오르기 무섭게 마취총에 맞은 듯 뻗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일주일 치 성욕을 하룻밤에 해치우고 오후 내내 눈에 불을 켠 채 시현을 예의주시한 승원도 마찬가지였으니…. 지안의 눈이 감기고 채 10분도 되지 않아 그의 숨도 새근새근 고르게 흘러나왔다.
“허허.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우진은 목적지로 향하는 내내 수차례 룸미러를 들여다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130여 년의 묘생卯生 중 월호를 보아온 지도 80년이 넘었으나, 그가 여인에게 친히 어깨를 내어준 모습은 진정 처음 본 것이었다.
물론 저주 탓에 여인이라면 병균처럼 멀리하던 그였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런 지안의 머리에 볼을 묻은 채 잠들어 있는 승원의 얼굴은 잠이 든 와중에도 심히 편안해 보였다.
“어찌 내가 이리 뿌듯할꼬… 허허허.”
발그레하게 볼까지 붉혀가며 므흣하게 웃던 우진은 불현듯 아차 하며 차선을 바꾸었다.
“아이코, 이런.”
한 쌍의 원앙 같은 그와 그녀를 힐끔거리느라 습관처럼 지안의 집으로 갈 뻔하였다. 오늘은 퇴근이 늦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청담동으로 지안을 모셔오라는 묘흔의 특명을 받은 참이었다.
마침맞게 눈앞에서 좌회전 신호가 켜졌다. 매끄럽게 곡선을 그린 바퀴가 여느 때보다 가볍게 아스팔트를 내달렸다.
**
눈을 떠보니 청담동이었다. 거의 동시에 잠에서 깬 그도 의아한 얼굴로 창밖을 건너다봤다. 사신동으로 가지 않고 왜 내 집엘 먼저 온 거냐는 그의 물음에 우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주춤주춤 답했다.
‘ 그것이, 묘흔 님이 늦더라도 꼭 지안 님을 이쪽으로 모시라 하셔서… 저는 월호 님께서도 알고 계시는 줄로 알았습지요. ’
승원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면 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여 조금은 긴장하며 그의 펜트하우스에 올라온 참이었다.
그리고 지금.
“…….”
“…….”
지안과 승원은 거실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약속이라도 한 듯 멍한 얼굴로 한 자리에 붙박여 서 있었다.
어쩐지, 문밖에서부터 낌새가 이상하였다. 이 새벽에 어째서 명절 때나 풍길 법한 기름 냄새가 진동을 하나 했더니….
“자자, 어서 이리 와 앉으십시오. 아주 오래 기다렸지 뭡니까!”
“어서 오셔요. 음식이 다 식습니다, 어서요!”
꽃무늬 앞치마를 두른 병천과 수아가 상기된 얼굴로 펄럭펄럭 손을 흔들었다. 열이 앉아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커다란 교자상에 갖가지 음식들이 빼곡히 차려져 있었다.
와… 이게 대체 무슨 난리야….
벙벙하게 음식들을 휘둘러보던 지안은 통유리 창에 삼각형 대열로 붙어있는 세 장의 한지를 돌아보았다.
‘ 祝! 合房 ’
공교롭게도 동시에 같은 곳을 돌아본 승원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인내에 찬 한숨을 내뿜었다. 연이어 잇새로 흐른 목소리가 바닥까지 내리깔렸다.
“이게 뭐하는 짓들이야.”
주방에서 데워 나온 갈비찜을 상에 올린 병천이 분홍빛 볼을 반짝이며 흥분에 차 말했다.
“축! 합방! 저기 보이지 않으십니까? 즐거운 날이니 마땅히 잔치를 벌여야지요!”
“예잇! 그렇고 말고요!”
소파 위에는 저들끼리 이미 한바탕 풍악을 울린 모양인지 장구와 꽹과리까지 놓여있었다.
맙소사. 그와 자신의 합방을 이렇게까지 염원했었다니. 지안은 민망함과 당황을 넘어 그저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승원은 뒷덜미를 주무르며 가까스로 화기를 참고 있었다.
“하….”
길게 뿜어져 나오는 그의 한숨에 피로가 그득했다. 이 괴짜들을 보아온 것이 어디 한두 해던가. 저뿐이었다면 꿀밤 한 대 치고 넘어갈 일이지만, 지금까지 촬영에 매진하느라 노곤할 지안까지 굳이 데려다 이 짓을 벌이니 심기가 편할 리 없음이다.
승원은 까칠하게 미간을 구기며 버럭 꾸중했다.
“머리에 든 건 곱창이야? 지금 시각이 몇 신데 피곤한 사람까지 불러서 이 짓거리를 벌여?”
그의 사나운 꾸짖음에도 병천은 그저 행복한 얼굴로 너털웃음을 지었다.
“오늘의 흥분된 마음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하였습니다. 흥이 깨지면 아니 되지요! 이 갈비찜 하나 뜯어보시면 피로도 싸악 가실 것입니다.”
심호흡을 삼키는 승원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 어쩐지 뭔가 사달이 날 것 같아 지안은 조마조마한 얼굴로 그의 옷자락을 살포시 붙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푸른 섬광을 번쩍 내뿜은 그의 손안에서 쌍도끼가 불쑥 튀어나왔다.
“내 이것들을 그냥…!”
“으어엇!”
“히익!”
목숨의 위협을 느낀 고양이와 토끼는 날래게 사방으로 튀었고.
“허! 안 돼요, 영감님!”
화들짝 놀란 지안은 냉큼 승원의 등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힘껏 발을 묶었다.
“잠깐 놔 봐. 저놈의 손모가지를…!”
“진정해요, 진정! 아우, 이게 무슨 난리야, 진짜!”
절절매며 그의 노기를 달래면서도 어쩐지 지안의 입꼬리는 점점 휘어지고 있었다.
합방 한 번 했기로서니 돌잔치라도 하듯 통유리에 붙여놓은 플래카드 하며, 상다리를 부러뜨릴 기세로 차려놓은 음식들, 얼마나 쳐댔는지 가죽이 찢어진 장구와 찌그러진 꽹과리.
결정적으로 그의 성정을 알면서도 기어이 일을 치고 꽁지를 내빼는 고양이와 토끼의 뜨악한 표정까지.
쌍도끼가 바람을 가르는 이 살벌한 난리 통에도 어느 하나 웃음이 나지 않는 구석이 없으니, 자꾸만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막을 수가 없음이다.
“말로 할 때 이리 와.”
“어허잇, 도끼는 치우고 말로 한다 하십시오!”
“히잉, 무서워요, 월호 님….”
아… 이 어르신들을 어떡하냐고, 정말.
결국 그의 허리를 꽉 붙든 채 커다란 등에 이마를 묻은 지안은 어깨를 들썩이며 한참 동안 웃음을 삼켜야 했다.
**
“괜찮겠어?”
문틀에 기대선 승원이 사뭇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다. 정수리 위로 긴 머리칼을 돌돌 말아 올리던 지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괜찮아요. 수아 님 말마따나 여기서 촬영장이 훨씬 가까우니까 조금 더 잘 수도 있을 테고. 방도 많은데 신세 좀 지죠, 뭐.”
한바탕 난리를 치고 결국엔 수많은 음식을 한입씩 맛보고 나니 4시가 다 되고 말았다. 시간이 늦었으니 자고 가라던 수아와 병천의 말에 고민 끝에 그러마 하며 그의 잠옷까지 빌린 참이었다.
물론 집주인은 난데 왜 너희가 생색을 내느냐며 그가 황당한 얼굴로 핀잔하긴 했지만, 그도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매우 흡족해하는 미소를 분명히 본 것 같은데…. 어째 답지 않게 외박을 걱정하니 되레 의외였다.
야무지게 머리칼을 올려 묶은 지안은 그의 근심을 덜어주려 구구절절 덧붙였다.
“할머니도 나 일할 땐 귀가 체크 잘 안 하세요. 현장이 워낙 예정 없이 밤샘도 많고 해서.”
비딱하게 골반을 비튼 그는 문틀에 머리를 툭 기대며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걱정하는 건 그런 게 아닌데.”
‘그럼 뭐….’ 하며 그를 돌아보던 눈이 금세 가늘어졌다. 찰나로 음흉해진 눈빛이 적나라하게 묻고 있었다.
너 거기, 괜찮겠냐고.
지안은 사뭇 경악스레 이맛살을 우그러뜨렸다.
“설마 또….”
승원은 보란 듯이 제 아래를 눈짓하며 당당하게 말했다.
“아까부터 준비는 제대로 돼 있어.”
“…….”
지안은 차마 불룩해진 중심을 확인하지 못하고 얼른 그가 꺼내준 잠옷을 챙겨 들었다.
“판소리라도 좀 불러봐요. 나 더는 힘들어요, 진짜. 욕실 이쪽 맞죠?”
저도 모르게 벌게진 얼굴을 들킬세라, 냉큼 뒤돌아 욕실로 향하던 때였다. 빙글거리는 목소리가 등줄기를 야릇하게 간질였다.
“같이 씻을까?”
지안은 찰나로 철렁인 심장을 애써 무시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아니요.”
“왜. 성교도 했는데 더 부끄러울 게 남았나?”
“그게 아니라.”
우뚝 걸음을 멈춘 지안은 얇게 눈초리를 접으며 그를 홱 돌아봤다.
“씻기만 할 거 아니잖아요.”
어느새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승원은 한쪽 눈썹을 실룩 올리며 장난스레 말했다.
“눈치챘어…?”
얄밉게 눈을 흘긴 지안은 몇 마디 말로도 이미 축축해진 속사정을 숨기려 짐짓 냉정히 돌아섰다.
“각자 씻자구요. 욕실도 많은데.”
쾅, 닫히는 문소리 다음으로 달칵 잠기는 문고리가 얄짤없다.
한데 잊은 것인가. 저런 한낱 미물 따위야 다 때려 부술 수도, 그냥 통과해 들어갈 수도 있음을 말이다.
“아… 곤란한데.”
승원은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굳게 닫힌 욕실 문을 말끄러미 건너다봤다.
괜찮은 척하지만 피곤이 턱 끝까지 내려온 얼굴이 눈에 선하니 막무가내로 몰아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저 문 너머에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499년 358일 치의 남은 정욕이 부글부글 끓어 견딜 수가 없으니….
사락, 사락 옷을 벗어 걸어놓는 미세한 소리까지 닫힌 문을 뚫고 또렷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윽고, 시원하게 떨어지는 샤워기 물소리에도 이미 준비를 마친 남경이 더욱 불끈불끈 자기주장을 펼쳐대니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음이다.
“하… 이를 어찌한다….”
그는 가만히 눈 감은 채 공연히 검지를 까딱였다. 쏴아아- 쏟아지는 물소리는 더욱 굉연히 청각을 휘어잡고, 감은 눈 안에 펼쳐진 그녀의 나신은 산란하게 욕정을 부추긴다.
이거야 원. 고작 문 하나를 두고 이토록 치열하게 고민할 일인가.
결국 까닥이던 검지가 우뚝 멈추었다. 스르륵 열린 눈꺼풀 속에는 이미 월호의 회색 눈동자가 떠오른 후다. 일시에 길게 늘어진 백발이 바람 한 점 없이 살랑 나부꼈다.
오래지 않아, 그가 기대어 서 있던 자리에 뽀얀 연기가 나풀나풀 흩날리다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