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63화 (63/106)

63.

남자주인공 분량의 촬영을 진행하기 위해 모든 스탭이 B3 세트장으로 우르르 이동했다. 뿌연 먼지가 잠잠히 가라앉은 A2 세트장은 금세 평화를 되찾았다.

간단한 풀샷 촬영을 마치고 홀로 A2 세트장에 남은 지안은 극 중 자신의 카페인 ‘DanMi’ 홀 테이블에 앉아 다음 촬영을 준비 중이었다.

“하… 정신없네….”

입에 잘 붙지 않는 대사를 수차례 읊조렸지만 도통 집중이 되지 않았다. 간밤의 노동 아닌 노동의 여파로 피로도가 어마무시한 탓이었다.

더군다나.

‘ 하아, 아! 아흣! ’

잊을 만하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살색의 향연에 수차례 고개를 털어내야 했으니, 대본이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아아. 안 돼. 생각하지 마.”

부르르 고개를 턴 지안은 눈앞에 동동 떠 있는 월호의 나신을 손으로 휙휙 흩트렸다. 날이 더운 건지, 제 몸만 이리 후끈한 건지, 벌게진 얼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판이었다.

“집중 좀 하자, 제발.”

볼을 찰싹찰싹 때리며 정신을 다잡고 다시금 대본을 집어 들 때였다.

“안녕, 후배님?”

기척도 없이 불쑥 건너온 목소리에 지안의 고개가 흠칫 들렸다. 문틀에 삐딱하게 기대선 시현이 새치름한 얼굴로 지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 또 시작인가.

지안은 버릇처럼 한숨을 삼키며 권태롭게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가 호인의 후손임을 안 후로 시현은 완전히 본 모습을 드러냈다. 존대는 물론, 다정하고 살가운 선배의 모습으로 내숭을 떠는 짓은 집어치웠다는 뜻이었다.

‘ 네가 진짜 호인의 후손이야? 확실해? ’

‘ 구슬 먹은 지 얼마나 됐니? ’

‘ 너 어떻게 찾은 거래? ’

‘ 오라버니랑 잤어? ’

급작스런 태도 변화도 당황스러울 판에 볼 때마다 무슨 질문을 그렇게나 와다다 쏟아내는지, 시현만 마주하면 넋이 쏙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게다가, 굳이 멀찍이 앉아 있던 지안을 불러 잔심부름을 시킨다거나.

‘ 지안 씨! 미안한데, 나 저기 아이스박스에서 생수 한 병만 가져다주면 안 될까? ’

기껏 가져다주면 울상을 지으며 입술을 실룩거린다거나.

‘ 어머. 미안해. 어떡하지? 생수가 여기도 있었네? ’

요 며칠 중고등학교 때도 당해보지 않았던 유치하고 자질구레한 괴롭힘을 당하다 보니, 그녀 또한 시현을 향한 감정이 전과 같을 리 없었다.

또각또각, 새침하고 당당한 걸음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왔다. 제 옆의 의자를 빼내어 앉는 모습이 곁눈에 걸렸지만 지안은 꿋꿋이 대본만 들여다보며 무시로 일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안의 목덜미에 불쑥 얼굴을 들이댄 시현은 대뜸 코를 킁킁대곤 묘한 투로 말했다.

“어째 오늘따라 체향이 달달하다?”

크게 부푼 지안의 가슴팍이 차분히 떨어졌다. 별스럽지 않은 말엔 대꾸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흐응….”

턱을 괴고 삐딱하게 지안의 얼굴을 관찰하던 시현은 툭 던지듯 물었다.

“잤니?”

“…….”

대본을 넘기던 손이 멈칫했다. 짐짓 무신경하게 포장한 얼굴이 그제야 시현을 향했다. 대꾸 없이 바라만 보자 시현은 구태여 친절히 풀이를 덧붙였다.

“오라버니랑 성교를 했느냔 말이야.”

“하….”

지안은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면 시현의 관심은 오로지 그와의 성교뿐이었다. 처음엔 화들짝 손사래를 쳤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 넘어가니 대답하기조차 피곤해졌다.

하물며, 이제는 정말 역사를 달리 쓰고 말았으니 내심 뜨끔함을 금할 길이 없다. 지안은 대본을 소리 내어 덮으며 한숨 쉬듯 물었다.

“대체 그게 왜 궁금하신 건데요?”

다소 까칠하게 건너간 질문에 시현은 느닷없이 놀란 얼굴이 됐다.

“어머….”

턱을 괴고 있던 손바닥도 내리며 입을 떡 벌린 그녀는 성큼 얼굴을 들이대며 눈을 반짝였다.

“진짜 했구나?”

“…….”

도대체 내 질문의 어디에서 그것을 유추해낸 것인가. 곱씹어봐도 당최 모르겠건만, 시현은 확신에 찬 얼굴로 조금 더 거리를 좁혀왔다.

“어땠어?”

부쩍 가까워진 얼굴을 피해 등을 물린 지안은 황당한 얼굴로 입만 벙긋댔다. 튀어나올 듯 댕그래진 눈이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좋지? 끝내주지? 막 눈앞이 번쩍번쩍 빛나고 털이 쭈뼛쭈뼛 서고, 그러지 않디?”

“…….”

정신없이 쏟아진 질문에 지안의 미간이 대번에 우그러들었다.

이것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해맑은 궁금증일까, 아니면 같은 세계를 경험한 이가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하는 것일까. 의도가 명확지 않은 난잡한 질문에 순간 기분이 언짢아졌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속내를 숨기지 못하고 불쾌한 얼굴로 묻자, 시현은 별안간 볼을 붉히며 음흉하게 속닥댔다.

“궁금해서 그러지, 궁금해서. 오라버니가 입으로도 빨아줬니? 아흥, 난 그게 그렇게 좋더라. 따끈하고 부들부들한 혀가 내 속살을 깔짜악, 깔짜악….”

“이, 이봐요!”

도를 넘은 잡소리에 경악한 얼굴로 버럭 말허리를 가른 순간이었다.

쿵-! 둔탁한 소음이 먼저였고.

“아아악!”

시현의 비명이 뒤따라 울려 퍼졌다.

“…허!”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놀란 지안은 입을 덥석 틀어막고 헛숨을 삼켰다.

어느 틈에 불쑥 나타나 시현의 얼굴을 테이블에 처박은 승원이 고고히 눈을 내리뜬 채 이를 앙다물었다.

“주둥이를 인두로 지져야 입을 다물 테지, 네가.”

“으… 으으….”

꼼짝없이 뒤통수를 붙들린 채 테이블에 처박힌 시현은 파닥파닥 발장구를 치며 고함을 꽥 내질렀다.

“아, 아퍼어어. 아프다고오!”

그제야 움켜쥔 머리칼을 뒤로 젖힌 승원은 먼지를 털어내듯 손을 탈탈 털었다. 찔러죽일 듯 그를 홱 노려본 시현은 인중을 스윽 훔치곤 버럭 성질을 냈다.

“아, 뭐야! 코피 나잖아!”

그는 시현의 오른쪽 콧구멍을 삐져나와 입술 위까지 펼쳐지는 레드카펫의 진풍경을 무심히 내려다봤다.

“남은 한쪽도 터트리기 전에 꺼져.”

“이, 잇씨…!”

벌떡 일어나 씩씩거리던 시현은 머쓱하게 지안의 눈치를 살피곤 홱 돌아 카페를 빠져나갔다.

고작 20초 남짓.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그가 나타난 직후부터 내내 입을 틀어막고 있던 지안은 멍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힐끗 눈을 내려 시선을 마주한 승원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지안의 곁에 앉았다.

“흘려들어. 저 계집이 하는 소리는 다 헛소리야.”

놀란 맘에 바짝 솟아있던 어깨가 그제야 축 늘어졌다. 아아… 하루하루가 이렇게 버라이어티해도 되는 건가. 시현의 박치기 한 방에 움푹 패어버린 테이블을 보니 차마 할 말이 없다.

“하… 어떡할 거예요, 이거….”

촬영 소품인데… 어쩌면 좋아, 이걸….

지안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느닷없이 생겨난 웅덩이를 어루만졌다. 지안의 손을 붙들어 내린 승원은 그 위에 묵묵히 제 손을 얹어두었다.

“그렇게 하면 원상 복귀되는 거예요?”

“5분만 기다려. 감쪽같을 테니까.”

유연하게 호를 그린 입술이 대단한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마를 붙들고 고개를 내저은 지안은 사뭇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시현 선배 얼굴은 어쩌구요. 곧 촬영 들어가야 할 텐데.”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신수 걱정이야. 알아서 치유할 테니 걱정 마.”

어젯밤만 해도 그의 얼굴에 가득했던 생채기가 감쪽같이 사라진 걸 보니 영 못 믿을 소리는 아닌 듯싶은데….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여자 얼굴을 이렇게나 무자비하게 짓뭉갤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내 안의 악마 같은 본성은 어쩔 수 없으니 조금 고소하긴 하다만….

“그나저나, 언제부터 안 거야?”

5분도 안 되어 금세 테이블을 새것처럼 돌려놓은 그가 불현듯 물었다. 시현의 비밀에 관한 질문일 터였다.

“그게….”

지안은 지난 사흘간 시현과 있었던 이야기를 보따리 매듭 풀 듯 풀어놓았다. 물론 행여나 시현의 남은 콧구멍도 레드카펫을 풀세라 자질구레하게 괴롭힘을 당했던 일은 눈치껏 생략했다.

차근차근 매듭을 다 풀어놓은 지안은 넌지시 물었다.

“시현 선배랑은… 가까운 사이였어요?”

그의 반듯하고 하얀 얼굴에 대번에 실금이 쫙쫙 그어졌다.

“아주아주 멀어. 동족만 아니었으면 진즉에 죽였을 거야.”

거침없는 그의 말에도 지안은 꺼림칙한 얼굴로 입술만 감쳐 물었다. 스스럼없이 얼굴을 처박아 버리는 것만 봐도 살가운 사이는 아닌 듯싶지만, 시현이 흩뿌리고 간 말이 내심 신경 쓰였던 탓이었다.

‘ 오라버니가 입으로도 빨아줬니? 아흥, 난 그게 그렇게 좋더라. 따끈하고 부들부들한 혀가 내 속살을 깔짜악, 깔짜악…. ’

그러니까 그 말은, 그의 입술이 제 속살에도 닿은 적이 있다는 소리인가.

‘ 좋지? 끝내주지? ’

발그레한 얼굴로 동조를 구하던 모습도 재차 상기해보니 역시나 애매하다. 가뜩이나 다른 신수들과 달리 그를 오라버니라 부르며 친근하게 구는 것도 영….

“그거 혹시 질툰가?”

어느새 상념에 빠져있던 지안은 흠칫 눈을 고쳐 떴다.

“…뭐가요?”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그녀를 바라보던 승원은 지안의 이마를 살포시 누르며 입꼬리를 올렸다.

“방금 여기로 중얼거린 거.”

“…아.”

그게 또 거기까지 소문이 났나.

제 머릿속을 그가 훤히 들여다본다는 사실을 순간 망각했다. 최근엔 꾀가 늘어 머리를 비우는 스킬까지 터득했건만, 방심하고 말았다.

지안은 열없이 목덜미를 문지르며 얼버무렸다.

“아니, 그냥…. 자꾸 그런 얘기로 사람을 피곤하게 하니까… 도무지 의도를 모르겠어서….”

제가 생각해도 어설픈 핑계였다. 이미 조금 불긋해진 볼이 명백한 ‘질투’임을 시인하고 있었으니 더더욱 소용없을 군소리였다.

하나 겉과 속이 다른 인간 여자를 대해본 경험이 부족한 승원은 어설픈 핑계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아쉽게 입소리를 냈다.

“좋다 말았네.”

저도 모르게 여과 없이 진심을 내뱉은 그는 머쓱하게 눈을 굴리다 괜히 지안의 대본을 집어 들었다. ‘뭔 내용이야, 이게.’ 하며 중얼거리던 것도 잠시.

“빨아준 적 없어, 맹세코.”

“…….”

“그 계집한텐 아무 짓도 안 했어. 진짜야.”

느닷없이 결백을 주장한 그는 하릴없이 대본을 펄럭펄럭 넘기며 심심하게 말했다.

“그냥 그렇다고.”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지안은 슬슬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붙드느라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뜨거웠던 하룻밤의 마법인가.

내일모레 천 살 되는 구미호가 갑자기 귀여워 보이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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