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62화 (62/106)
  • 62.

    촬영 일정이 오후로 잡혀있어 다행이었다.

    사방에 치유초를 켜두고 울혈을 가라앉히고 나니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특히나, 오른쪽 등허리에 남은 상처를 치유하는 데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여우 꼬리가 달린 나비의 형상.

    호인의 표식이라 하는 그것을 그가 집요하게 빨아당기고 깨물어놓은 탓이었다. 마치 그녀가 호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며 안도라도 하듯, 등허리에 닿던 숨이 유난히 뜨거웠었다.

    오전 8시 무렵.

    ‘ 흐흐흥…. 어떡해요, 지안 님. 너무 좋아서 웃음이 멈추지를 않아요. 으히힛. ’

    치유를 하는 내내 호들갑을 떨던 수아를 겨우 돌려보낸 시각이 그쯤이었다. 그 와중에 후딱 차려놓고 간 아침을 그와 함께 먹었고, 설거지를 하다 어느 순간 눈 떠보니 그의 가슴이 등에 닿아 있었다.

    바지와 속옷이 한꺼번에 내려간 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하으, 방금, 치료, 읏, 했, 는데… 또! ’

    ‘ 그래서 바로 넣었잖아. ’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슴과 아래만 집중 공략하며 치고 들어오는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몇 번째인가. 손으로 꼽아보다 포기한 지도 오래다. 과연 5백 년 묵은 정욕이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 어쩌지. 아직 일주일 치밖에 못 풀었는데. ’

    그에겐 아직 499년 358일 치의 정욕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싱크대를 동아줄처럼 붙들고 한 번, 샤워를 하며 또 한 번, 그의 품에서 신음하느라 녹초가 된 지안은 옷을 갈아입을 무렵 다시 부피를 키워가는 그의 중심을 눈치채고 단호히 양 손바닥을 들었다.

    ‘ 더는 못해요. 진짜, 정말, 죽어도. ’

    그제야 아쉬움을 삼키며 물러난 그는 속적삼 고름을 야무지게 동여매고 성난 좆심을 애써 가라앉혔다.

    해방감과 묘한 아쉬움을 동시에 품고 집을 나선 시각은 10시 경이었다. 일찍이 도착해 하릴없이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우진은 지안과 함께 나선 승원을 보곤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엇! 월호 님 계셨습니까!”

    대강 눈짓으로 인사를 대신한 그는 제법 멀쩡한 외형의 SUV를 훑어보곤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가. 뒤따라 갈 테니까.”

    뒷좌석 문을 열어 지안을 태운 그는 어쩐 일인지 올라타지 않고 말했다. 지안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같이 안 가시구요?”

    불과 5분 전까지만 해도 동행하겠다며 굳이 따라나섰던 그였다. 우진이 새로 뽑아 온 차량의 승차감을 직접 확인해봐야겠다는 이유에서였다.

    “갑자기 볼일이 생각나서.”

    “아…. 알았어요. 이따 봐요, 그럼.”

    승원은 차 문을 닫고 한발 물러서며 우진에게 안전 운전을 당부했다.

    “옙! 저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천천히 구른 바퀴가 좁은 골목을 조심히 벗어났다. 어귀를 돌아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빨간 후미등을 바라보던 승원은 일순간 입꼬리를 뚝 떨구었다.

    얼마간 신월당 앞의 낡은 평상을 곁눈질하던 그는 불시에 손을 뻗어 무언가를 낚아채듯 허공을 쥐어 잡았다. 이내 그의 손에 의해 형체가 드러난 담배가 붉은 입술에 가볍게 물렸다.

    불붙은 장초를 깊게 빨아당긴 승원은 뿌연 연기를 숨처럼 뱉으며 평상 위를 돌아봤다.

    “오랜만이네, 할멈.”

    불량하게 뻗은 눈동자에 서서히 사람의 형체가 차올랐다. 오래지 않아 제 몸을 완전히 드러낸 모란은 담배가 사라진 손가락을 심드렁히 바라보다 대뜸 말했다.

    “아아-따, 마. 천장 무너질까 봐 식끕을 했다.”

    “……?”

    이 할멈이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나. 그의 한쪽 눈썹이 모나게 삐쭉 솟았다. 그사이 담뱃갑을 집어 든 모란은 새 담배를 꺼내어 물며 덧붙였다.

    “시도 때도 없이 그마이 처박으믄 아가 살긋나.”

    “…하.”

    난 또 뭐라고. 그걸 또 용케 지켜보셨단 소린가. 음흉한 할망구 같으니.

    기가 막혀 헛웃음을 치던 승원은 모란의 곁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삐뚜름히 기울어진 입술 사이로 말과 함께 연기가 흩날렸다.

    “언제는 빨리 자빠뜨리라더니.”

    “자빠뜨리라 캤지 직이라 캤나 어데.”

    “안 직였어. 멀쩡히 살아서 간 거 보고도 몰라?”

    “앵가이 해라 이기다. 가시나 숨넘어가믄 우얄끼고.”

    모란은 혀를 쯧 차며 물고 있던 장초에 불을 붙였다. 실소를 뱉으며 모란의 주름진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던 승원은 평상 아래서 깡통을 꺼내며 말했다.

    “아끼는 손녀 죽일 일 없을 테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마시고.”

    깡통 속에 툭 던진 꽁초에서 한 줄기 연기가 꼬물꼬물 피어올랐다. 까맣게 재가 돼가는 꽁초를 뜻 없이 바라보던 승원은 푹 꺼진 모란의 눈두덩을 히끗 돌아보며 넌지시 운을 뗐다.

    “독산 영감.”

    검버섯이 자글자글하게 낀 볼이 담배 필터를 빨아당기던 그대로 움푹 팼다. 정면의 전봇대를 향한 시선은 움직임이 없었다.

    얼마간 가늘게 눈을 좁힌 채 모란의 반응을 살피던 승원은 일순 턱을 괴며 여상하게 물었다.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할멈.”

    천천히 그에게로 돌아 붙은 시선이 고요하다. 탄력 잃은 입술 사이로 아지랑이 같은 연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모란은 별스럽지 않은 투로 말했다.

    “그거를 와 내한테 묻노.”

    말없이 맞닿은 시선 사이로 늦여름의 더운 바람이 휘휘하게 스쳐 갔다. 작은 손목시계 속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올 만큼 괴괴한 정적이었다.

    얼마간 침묵하던 승원의 입술이 피싯 늘어졌다.

    “모르는 놈이란 소리는 안 하네.”

    “…….”

    승원은 옷자락을 털며 몸을 일으켰다. 그를 향해 거들뜬 노안老眼이 커다란 사내의 얼굴을 좇느라 한참이나 위로 치뜨였다.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해가 될 것 같진 않으니 살려두는 거야.”

    내리뜬 눈동자가 저를 향한 모란의 얼굴 위로 뚝 떨어졌다. 이내 하얗고 긴 손가락이 쭈글쭈글 쪼그라든 턱 아래를 가볍게 받쳐 들었다.

    그는 재미없는 미술 작품을 감상하듯 심심한 얼굴로 고저 없이 말했다.

    “조금이라도 좆같은 낌새가 보이면 네년의 목을 날려버릴 것이다.”

    “…….”

    오래지 않아 턱에 닿았던 온기가 하얗게 사그라들었다. 금세 비어버린 그의 자리를 끔벅끔벅 바라보던 모란은 한숨을 폭 내쉬며 중얼댔다.

    “아이고야… 심장 쫄리가 어데 살겠십니꺼.”

    꾸부정하게 굽은 몸 곳곳에서 별안간 붉은 기운이 퍼져 나왔다. 이윽고, 작은 노인의 몸에 용케 스며있던 커다란 사내의 형체가 직전까지 승원이 서 있던 자리에 우뚝 섰다.

    독산은 목덜미를 꾹꾹 주무르며 노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운을 다한 몸뚱이로 미련을 가졌더냐.”

    독산의 기를 받아 20년의 생을 더 얻었으니 마땅히 할 말이 없음이다. 모란의 입술이 머쓱하게 꾹 다물렸다.

    “걱정 말거라. 그저 지켜보는 것이 녀석에게 해되는 일은 아닐 터이니.”

    피싯 실소를 뱉은 독산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괜스레 지안의 옥탑을 올려다보았다.

    “그나저나 월호 이 녀석, 정력이 아주 넘치는구나. 집채가 어찌나 흔들리는지,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원.”

    말로는 핀잔을 하면서도 전에 없이 즐거운 얼굴이었다. 내심 언제쯤에나 옷고름을 풀 것인지, 그도 은근히 조바심이 들었던 것이었다.

    장난스럽게 웃음을 삼킨 독산은 적색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신월당의 유리문 안으로 스며들었다.

    “해시亥時까지 깨우지 말거라. 간만에 단잠을 잘 참이니.”

    문 너머로 붉은 기운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의 뒤를 바라보던 모란은 희끄무레한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담배 필터를 빨아당겼다.

    “인자 다 됐나….”

    그러니까 그것이 언제였던가.

    ‘ 너. 내가 보이느냐. ’

    인간도 아니요, 조무래기 령도 아닌 자를 만난 지도 딱 지안의 나이만큼이 되었다.

    빨간 천막 하나만 치고 지나는 이들의 운이나 봐주던 날에, 도리어 제 운명이 바뀌었다.

    ‘ 내 네게 명을 하나 내릴 것이다. ’

    요사스러운 적안을 번뜩이며 히죽 웃던 미남자의 얼굴에 이미 반은 홀렸던 참이었다. 하나, 무속인의 직감은 그 누구보다 예리한 것. 선한 영혼이 아닐 것임은 분명했다.

    ‘ 아이고. 송구해가 우짜지요. 일찌감치 뫼시는 령이 따로 있어가…. ’

    ‘ 하하. 떠도는 령 따위가 감히 신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

    무서울 것이 없는 생이었으나, 그자의 정체를 안 순간 부들부들 오금이 저리더랬다. 겨우 동자령이나 접신 해봤던 신력으로 무려 신을 영접하였으니,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리지 않은 것이 용한 것이었을 터.

    ‘ 네년은 앞으로 여덟 해를 채 넘기지 못하고 골방에서 쓸쓸히 눈을 감을 것이다. 백골에 구더기가 득실득실 기어 다닐 때나 겨우 발견되어 불에 타고 말 테지. ’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느긋하게 저주를 퍼붓는 목소리가 솜털이 바짝 설 만큼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그때는 아마도 조금, 진정 오줌을 지렸던 것 같기도 하다.

    ‘ 계집 하나를 거두거라. 스물여덟 해를 무탈히 살 수 있게 자알 보살펴야 할 것이다. 허면 내 네게 20년의 생을 더 얹어줄 것이니. ’

    그 시절 남은 여덟 해에 딱 20년. 도합 28년이라….

    그래, 그러고 보니 지안을 거두어 먹인 대가로 그에게 얻은 생이 이제 반년도 채 남지 않았다.

    “글래. 그단새 죽을 때가 다 돼뿟네….”

    구름도 보이지 않는 파란 하늘을 가는 눈을 뜨고 올려다보던 모란은 제 입에 가득 담은 연기를 구름인 양 몽글몽글 하늘로 올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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