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61화 (61/106)
  • 61.

    창안으로 검푸른 새벽빛이 스며들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옷가지들과 삐뚤게 밀린 서랍장, 화장대 위에 볼링핀처럼 무질서하게 넘어진 화장품들.

    도둑이라도 든 것처럼 엉망이 된 방안엔 격렬했던 정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선잠이 든 지 고작 한 시간쯤 지났을까. 가만히 누워 방안을 휘둘러 본 월호는 탄식을 뱉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

    어쩌다 이렇게나 작살을 내버렸을까. 술기운이 완전히 물러나고 나니 덜컥 뒷골이 아찔해졌다. 한순간 미쳐 눈이 붉게 타올랐던 찰나의 기억이 조각조각 흩어져 머릿속을 떠돌았다.

    ‘ 젠장…! ’

    도무지 이성을 찾을 수 없었다. 전신에 작열감이 차오르고 거세게 맥동하는 혈관의 움직임이 생생히 느껴졌다. 단지 굶주린 짐승처럼 지안이 먹이라도 되는 양 씹어대기에 급급했다.

    그간엔 악인의 간을 뽑아먹을 때나 발현했던 적안이었다. 한데 어떻게 지안을 상대로 적안이 발현하고 만 것인가. 그믐날의 저주와도 같은 비정상적인 정욕이 휘몰아쳤다. 술기운까지 더해져 완전히 한계까지 내몰렸던 거다.

    만약 그대로 집 나간 정신을 다잡지 못했더라면, 결국엔 지안의 살갗을 몽땅 뜯어 삼키고 몸 안을 진탕 헤집어 놨을지도 모른다. 숨이 끊어질 듯 불타오르던 욕정을 꾸역꾸역 견디려 했던 이유였다.

    한데 이 바보 같은 계집은 두렵지도 않았던가.

    ‘ 마지못해 아니니까, 그만두지 말아요. ’

    ‘ 후회 안 할게요. 그러니까…. ’

    어찌하여 구미호의 적안을 맞닥뜨리고도 도리어 다가올 수 있었는가 말이다. 과연 호조사의 피가 흐르는 인간이라 가능한 것인가. 겁이 없는 줄은 알았지만 참으로 대범하기도 하다.

    한데, 아무리 그렇다 한들. 왜 거부하지 않았을까 뒤늦게 의아하기도 했다.

    월호는 저를 향해 누운 채 새근새근 잠든 지안을 돌아보았다.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할 듯 골똘히 바라보지만 잠든 머릿속이 보일 리가 없다.

    “아무렴….”

    그래, 아무렴 어떤가. 설사 단지 휩쓸린 것뿐이라 한들, 기꺼이 안겼으니 어떤 마음이었든 상관없는 일이다. 또다시 눈물을 흘릴 만큼 제가 끔찍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싱겁게 의문을 내려놓고 나니, 작고 하얀 얼굴을 차분히 훑는 시선이 이내 지긋해졌다. 장인이 빚은 도자기처럼 곧게 뻗은 콧대와 귀엽게 굴곡진 콧방울, 촘촘하고 길게 뻗은 속눈썹과 잘 익은 복숭앗빛 볼까지.

    “신기하기도 하지….”

    마음을 달리하여 달라 보이는 것인가, 원래부터 이리 어여쁜 계집이었던가.

    이제는 바라만 봐도 단전이 근질근질하고 풍기는 체향마저 달콤하기 그지없으니, 누군가를 품은 마음이라는 것이 이토록 신기한 것인가 싶다.

    유하게 미소가 걸린 눈이 조금씩 아래로 떨어졌다. 거칠었던 키스로 입술은 벌겋게 부어 피딱지가 앉아 있고, 이불 위로 드러난 어깨와 목덜미 곳곳엔 울긋불긋한 울혈이 가득했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물고 빨지 않은 곳이 없으니, 아마 이불을 들치면 온몸에 성한 곳을 찾기가 힘들 것이었다.

    월호는 일순 미간을 찌푸리며 터진 입가를 조심히 매만졌다. 얼마나 아팠을까 싶으니 이제 와 마음이 불편해진다.

    미안함, 죄스러움. 이 따끔하고 낯선 감정이 아마도 그런 것이겠지.

    한데 한편으로 은근한 아쉬움이 드는 것은 또 무얼까. 조금 더 구석구석 제 흔적을 남기고픈 욕망, 그저 이대로 품에만 묶어두고픈 욕심. 이런 삐뚤어진 마음도 연모라 할 수 있는 건가.

    하여간 하다 하다, 요 신기한 계집 하나 때문에 별스러운 감정을 다 겪게 되었다.

    “으음….”

    잔잔하던 지안의 미간에 그늘이 진 것은 그때였다. 감은 채로 물결치는 눈매와 그의 손끝에 닿아있던 입술이 꼬물꼬물 의식을 깨고 있었다.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며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새삼 앙증맞아 절로 입꼬리가 휘었다.

    이윽고, 물결치던 눈꺼풀이 끔뻑끔뻑 무겁게 열렸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형체를 확인하려는 듯 수차례 눈을 깜박이고서야 안도와 같은 숨을 내쉰다.

    “아….”

    얼핏 힘을 들였던 목을 다시금 베개에 파묻은 지안은 갈라진 목소리를 근근이 내뱉었다.

    “…벌써 깼어요? 아직 어두운 거 같은데….”

    말을 하는 와중에도 제대로 뜨지 못한 눈이 손톱만큼 열렸다 닫히길 반복했다. 월호는 손가락으로 지안의 눈두덩을 가볍게 누르며 말했다.

    “더 자. 아직 새벽이야.”

    여전히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서 있는 숨소리가 얼마쯤 고르게 퍼졌다. 다시 잠이 들었을까, 천천히 손을 떼자 겨우 닫아주었던 눈꺼풀이 스르륵 열렸다.

    “더 자라니까.”

    지안은 눈을 비비며 조금은 또렷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깼어요.”

    그러고는 문득 아차 싶은 얼굴로 슬그머니 내안각을 문지른다. 어느새 모로 누워 빤히 지켜보던 월호는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눈곱 안 꼈어.”

    머쓱하게 입꼬리를 올린 것도 잠시, 은근슬쩍 입술을 가린 손등이 이번엔 입가를 스윽 문질렀다. 그의 입매가 조금 더 길게 늘어졌다.

    “침도 안 흘렸고.”

    그제야 안심하며 설핏 눈꼬리를 접은 지안은 금세 뻘쭘하게 눈을 굴렸다. 차마 그의 눈을 마주하지 못한 시선이 코언저리만 뱅뱅 배회했다.

    결국 빤하게 닿은 시선을 견디지 못한 지안은 쭈뼛쭈뼛 몸을 일으켰다.

    “어… 난 그럼 좀, 씻고 올….”

    하지만 그도 잠시. 그의 손에 되레 당겨진 머리가 너른 가슴에 콕 파묻혔다. 연이어 기민하게 뻗은 팔이 가녀린 등허리를 바짝 당겨 안았다.

    “아…!”

    온몸이 욱신대는 통증에 신음을 삼킨 지안은 금세 벌게진 얼굴로 입술을 감쳐 물었다. 맨살이 맞닿은 야릇한 감촉이 새삼 민망해진 탓이었다.

    하나 아무렇지 않게 나신을 끌어안은 그는 정수리에 턱을 콕 찍으며 말했다.

    “수아 불렀어. 치료하고 씻어.”

    품에 갇힌 얼굴이 의아한 듯 삐쭉 들렸다.

    “무슨 치료요?”

    월호는 터진 입술과 울긋불긋 난리가 난 그녀의 몸을 눈짓했다.

    “그 상태로 촬영장에 갈 순 없으니까.”

    “아….”

    자연스레 떨어진 지안의 시선이 공교롭게 그에게 짓눌린 젖가슴에 닿았다. 하필 보이는 건 그뿐이라, 몸에 가득한 울혈은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얼굴만 붉어졌다.

    얼른 그의 턱 아래로 얼굴을 숨긴 지안은 갈 곳 없는 손을 어정쩡하게 그의 가슴에 대었다. 그마저도 어설프게 주먹을 쥔 채라, 품에 안긴 자세가 어색하기 그지없다.

    월호는 잔뜩 힘이 들어간 등을 어루만지며 헛웃음을 쳤다.

    “뭘 이렇게 긴장해. 할 거 다 해놓고.”

    “…….”

    그러니까 내 말이. 새벽 내내 이보다 더한 것도 몇 번을 해놓고선 이제 와서.

    “그냥… 갑자기 이상해서요. 영감님이랑 이러고 있는 게….”

    초지일관 살갑지 않은 사이였다. 한데 정신을 차려보니 그를 향한 마음이 어제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단지 눈을 마주하기가 조금 불편하고, 하루라도 보이지 않으면 은연중에 걱정이 되고, 갑작스레 고백을 받은 이후론 괜히 의식이 되고…. 그냥 딱 그 정도였을 뿐인데.

    왜 이렇게 심장이 펄떡거리는지 모르겠다. 이젠 익숙해진 우디향에 왜 생뚱맞게 아랫배가 무지근해지는지, 왜 자꾸만 어울리지 않게 수줍어지는지…. 어쩌다 결국, 그와 여기까지 온 것인지.

    “뭐에 홀린 것 같기도 하고… 꿈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기분이 좀….”

    머뭇머뭇 내뱉는 그녀의 말에 월호는 짐짓 서운한 얼굴로 눈을 내리떴다.

    “그래서, 후회돼?”

    대번에 번쩍 들린 지안의 눈이 부인하듯 댕그래졌다.

    “아니에요. 그건 진짜 아닌데….”

    품에서 드러낸 얼굴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손에 붙들렸다. 엄지로 가만가만 턱을 지분대는 별것 아닌 온기에도 괜히 가슴께가 뻐근해진다.

    지안의 턱을 가볍게 붙든 채 입술 위를 맴돌던 그의 시선이 이내 다갈색 눈동자와 나른히 맞닿았다.

    “그럼 뭔데.”

    시선의 간격이 서서히 좁아졌다. 마치 압박하듯 좁혀오는 거리에 절로 호흡이 멈추었다.

    “자, 잠깐….”

    고개를 비틀어 가까스로 입술을 피했지만, 되레 귀를 보이며 혀가 들어찰 공간만 내주는 꼴이 됐다.

    “아….”

    귓바퀴를 가득 핥아 올린 혀가 작은 구멍을 꾹꾹 누르며 장난질을 쳤다. 귓전에서 오롯이 파고드는 젖은 소리에 솜털이 바짝 섰다.

    “흐으….”

    틈 없이 맞닿은 그의 몸이 어느새 단단히 굳어 있었다. 아랫배를 뻐근하게 찌르는 부피감에 꽉 붙은 허벅지가 배배 꼬였다.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건지, 요망한 다리 사이로 벌써 눅진한 열기가 몰려들었다.

    “하아….”

    감은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것은 새벽빛이 들이친 푸른 천장이었다. 어느새 바로 누인 몸이 그의 아래에 갇힌 채 흥분에 떨고 있다.

    이젠 정말이지, 그의 입김만 닿아도 이렇듯 순식간에 정신이 홀리고 만다.

    지안은 가슴까지 미끄러진 채 유두를 할짝대는 그를 내려다보며 뜨악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또 하려는 건 아니죠…?”

    힐끗 치뜬 회색 눈에 절망스런 대답이 선명히 묻어 있었다. 뾰족이 모은 혀끝으로 유두를 빙빙 돌리며 빤히 쳐다보는 눈빛이 얄망궂기 그지없다.

    “아… 나 정말 힘든데….”

    빈약한 호소가 신음처럼 흘렀다. 유륜을 입안 가득 머금고 빨아대던 그가 가당찮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 난리 난 건 알고 하는 소리야?”

    어느 틈에 다리 사이를 파고든 그의 손이 흠뻑 젖은 음순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지안은 대번에 난연해진 얼굴로 은근슬쩍 그를 흘겼다.

    “거야 자꾸 건드리니까… 읏…!”

    짓궂은 손가락이 젖은 구멍에 틀어박힌 건 그때였다. 발작처럼 골반이 튀어 오르고 척추가 활처럼 휘었다. 그 바람에 그의 눈앞에 봉긋하게 솟아오른 젖가슴은 자연스레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아…!”

    손마디 하나쯤 간지럽게 왕복하다 깊숙이, 애액을 가득 묻혀 음핵까지 빠져나오다 불시에 다시 구멍 깊은 곳으로.

    “아흣…!”

    밤새 젖고도 또 금세 흥건해진 구멍이 그의 손가락을 농란하게 물고 늘어졌다.

    아아, 진짜 힘든데. 더는 그 커다란 물건을 품을 기력이 없는데…. 밤사이 그에게 제대로 학습된 몸은 더한 것을 바라고 있으니 참으로 미칠 노릇이다.

    “아윽. 손, 그만… 아!”

    망측하게도, 차라리 그것을 넣어달라 제 입으로 애원을 하기 직전이었다.

    별안간 옆얼굴에 한기가 불어닥쳤다.

    “월호 님, 저 왔….”

    “……!”

    “에그머니나!”

    갑작스런 기척에 현관을 향해 홱 돌아간 지안의 얼굴이 화석처럼 흠칫 굳었다.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현관에 우뚝 선 수아가 호러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성큼성큼 시야에 가득 차 들어왔다.

    허. 맙소사. 젠장.

    당혹감이 불시에 들이닥치니 되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당장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회로가 멈춘 기분이었다.

    그는 수아도 마찬가지라, 동시에 얼어붙은 두 여인의 눈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댕그랗게 맞닿았다.

    “…….”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 속에서 저 홀로 덤덤한 그의 입술엔 여전히 지안의 젖가슴이 물려 있었다. 질구에 틀어박힌 손가락은 이불에 가려져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까.

    수아를 향해 그의 무신경한 시선이 돌아간 것은, 그러고도 몇 초는 흐른 다음이었다. 마치 사탕이라도 뱉듯 아무렇지 않게 젖꼭지를 뱉어낸 그가 무심히 말했다.

    “30분 후에 다시 와.”

    얼음처럼 굳어 있던 수아는 그제야 번쩍 어깨를 퉁기곤 냅다 고개를 숙였다.

    “끄어…! 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라락, 허겁지겁 뒤돌아선 수아의 몸이 연기처럼 문을 통과해 사라졌다. 순식간에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건너간 형체가 어쩐지 잔뜩 흥분해 제자리를 통통 뛰었다.

    “어머멈머, 세상에, 세상에! 웬일이야, 웬일이야!”

    호들갑스럽게 방방 뛰던 수아는 이내 휴대폰을 귓가에 올리고 신이 나 재잘재잘 떠들었다.

    “묘흔 님, 묘흔 님! 지금 주무실 때가 아니어요! 월호 님이 드디어 해내셨다구요! …아이참! 합방 말이어요, 합방!”

    딴에는 몹시 속닥거린 것이 분명한데, 바로 곁에서 떠드는 것처럼 또렷이 들려오는 건 기분 탓인가.

    창 너머로 깡충깡충 튀어 오르는 뒤통수를 바라보던 월호는 내심 뿌듯하게 입꼬리를 올렸으나, 지안은 깊은 탄식을 뱉으며 불타는 얼굴을 감싸 쥐어야 했다.

    “아… 못살아, 정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