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58화 (58/106)
  • 58.

    난관에 봉착했다.

    다급히 핸들을 돌려 그의 아파트에 도착했지만, 입주민 카드가 없이는 엘리베이터 버튼조차 누를 수 없었다.

    마냥 기다려달라 할 수가 없어 우진을 바로 보내버린 뒤였다. 대책 없이 엘리베이터 앞을 서성이다가 통화목록을 뒤적여 그의 번호를 찾았지만,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결국 병천과 닿은 연락은 허망한 결과로 되돌아왔다.

    - 엇! 이곳에 와 계신단 말입니까? 월호 님은 조금 전에 사신동으로 건너가셨는데…. 어허, 이런. 길이 엇갈린 모양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금방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저를 만나러 옥탑으로 떠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았다 했다. 그라면 1초 만에 날아갔을 테니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내의에 카디건만 걸치고 한달음에 내려온 병천은 서둘러 그의 세단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잖아도 전화를 먼저 해보시라 했건만, 돌아보니 금세 사라지셨지 뭡니까. 에효…. 지안 님이 이리 찾아오실 줄 알았더라면 저라도 먼저 연락을 드릴 것을 그랬습니다. 늦게까지 촬영이다 뭐다 바쁘실 듯하여 고민만 하느라….”

    옥탑으로 향하는 내내 병천은 걱정스런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으십니다. 기력도 쇠하셨는데 술까지 잔뜩 취해 오셔서는….”

    취할 만큼 술까지 마셨다니. 먼저 속을 들쑤셔놓고 왜 본인이 더 난리인지, 되레 기가 막혀 헛숨만 나더랬다.

    “아니, 막걸리로 등목을 해도 취하지도 않으시는 분이 대체 뭘 잡수신 겐지, 나 원 참.”

    병천은 마치 사춘기 아들을 둔 아비처럼 연방 한탄을 쏟아냈다.

    “겨우 전구도 다 달아놨더니 오자마자 또 몽땅 깨부숴버리시고. 그 고운 얼굴에 생채기가 또 늘었지 뭡니까. 아휴… 속상해서, 원.”

    홀로 열을 내며 중얼대다 슬쩍 눈치를 살핀 병천은 넌지시 물었다.

    “…월호 님이 지안 님께 결국 마음을 보이신 게지요?”

    그러고는 언제 열을 냈냐는 듯 금세 눈꼬리를 내리며 그를 변호했다.

    “999년 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감정이니 혼란스러우실 테지요. 하물며 지안 님은 인간이지 않습니까. 인간을 연모하게 되리라곤 감히 생각지도 못하셨을 것입니다. 워낙 자존심이 강강하신 분이라 더욱….”

    마음이 복잡해 이렇다 할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혹 고백조차 수작은 아니었을까, 한편에 품었던 의심이 병천으로 인해 밀려나 버리니 괜히 또 심장이 콩닥거려 심호흡만 깊이 내쉬었다.

    창밖에 못 박힌 시선이 어지러웠다. 그를 향해 가는 길이 이상하게 겁이 나기도 하고 두근대기도 했다.

    “이런 말씀을 어찌 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쉼 없이 아스팔트를 달린 세단이 골목에 다다랐을 때였다.

    “겉으론 까칠하고 강건해 보여도 길 잃은 신수들을 다 보살펴주실 만큼 정도 많고 여린 분이십니다.”

    신월당 앞에 멈춰 서서 브레이크를 꾹 밟은 병천은 눈썹 머리를 모으며 사정하듯 말했다.

    “지안 님을 마음에 들이고 말았으니, 이제 결코 지안 님의 허락 없이는 저주를 풀 엄두조차 내지 못하실 겁니다. 부디 우리 월호 님을 가엽게 보아주십시오. 지안 님껜 죄송하게도… 제 근심은 그뿐입니다.”

    그 또한 무어라 답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 ‘그래요. 이 한 몸 다 바쳐 영감님의 저주를 꼭 풀어드릴게요.’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저 태워다주셔서 감사하단 인사로 대답을 대신하고 차에서 내려섰다.

    땅에 발을 딛기 무섭게 심장이 콕콕 쑤셨다. 수아와 함께 목욕탕에 들렀던 날, 느닷없이 가슴을 옥죄었던 통증과 흡사했다. 아마도 그때처럼 그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구슬이 먼저 알아차린 것일 테다.

    황급히 대문을 넘어서자 스쳐 가는 밤바람에 그의 향이 실려 왔다. 텅텅, 철제 계단을 울리는 소리가 어쩐지 제 박동 소리를 닮아 있었다.

    “하아, 하아.”

    가뜩이나 저질 체력에 5층 계단을 냅다 뛰었더니 숨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병천의 얘기를 듣는 중에도 내내 멍했던 정신이 번쩍 뚫리는 기분이었다.

    무릎을 짚은 채 얼마쯤 숨을 고르던 지안은 굽혔던 몸을 세우며 현관을 돌아봤다. 한곳에 붙박인 시선이 망연히 축 늘어졌다.

    “하….”

    현관문에 머리와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하얀 얼굴이 달빛 속에 호젓이 멈춰 있다.

    벽도 잘만 통과하면서. 고단하면 들어가 눕기라도 하지, 왜 저러고 있냐고 대체….

    공연히 두근대고 겁이 나던 미묘한 긴장감이 일시에 툭 풀려버렸다. 뭔지 모르겠다. 원망인지 안도인지, 그저 황당함인지 반가움인지. 퍼즐처럼 척척 빈칸을 채우는 조각들이 죄다 갖가지 색이라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지안은 터벅터벅 그의 앞에 다가섰다. 하얀 얼굴 곳곳에 병천이 말했던 생채기가 붉게 나 있었다.

    기가 막혀, 진짜.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방황할 일인가. 하긴, 971살이나 많은 구미호가 자꾸만 남자로 보이는 것이 당황스러워 눈물까지 삐쭉 흘렸던 자신이 할 말은 아니긴 하다.

    지안은 복잡한 감정을 꾹 눌러 삼키고 부러 무심히 물었다.

    “왜 이러고 있어요?”

    그림처럼 미동이 없던 짙은 눈썹이 움찔 떨렸다. 십 리 밖의 움직임에도 민감하던 남자가 이제야 기척을 느낀 모양이었다.

    개개풀어진 눈이 게슴츠레 뜨였다. 흐릿한 시야를 다잡듯 눈꺼풀이 끔뻑끔뻑 천천히 여닫힌다.

    저를 제대로 보기나 한 건지, 얼마쯤 나슨히 눈을 깜빡이던 그는 바람에 흘려보내듯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곤해서.”

    “…….”

    이상했다. 고작 사흘이 지났을 뿐인데, 그의 목소리가 희한하게 낯설었다. 술에 취해 늘어진 모습을 처음 봐서일까.

    지안은 괜히 시선을 이리저리 분산시키며 담담한 척 물었다.

    “그럼 집에서 쉬어야죠.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여기서 이러고 있어.”

    “왔잖아, 지금.”

    실소하듯 따라붙은 대답에 할 말이 없었다. 그래, 오기는 왔는데…. 왜 안 하던 짓을 하느냐고, 괜히 기분 이상하게….

    어색해진 기분에 고개를 비껴들고 깊은숨만 내쉬던 때였다. 하얗고 커다란 손바닥이 무겁게 들렸다. 반쯤 풀린 그의 눈꺼풀이 느리게 꿈뻑, 검푸른 동공을 숨겼다 내놓았다.

    “치료.”

    이미 한 번 써먹었던 수법을 유유히 내뱉는 입술이 참 뻔뻔하기도 하다. 오늘은 진정 상태가 좋지 않은 걸 알면서도 괜히 새침하게 뜬 눈을 히끗 치떴다. 취기가 가득 서린 얼굴에 바람 같은 웃음이 피식 떠올랐다.

    “이번엔 진짜야.”

    고개는 비스듬히 기울고 커다란 어깨도 축 늘어진 채였다. 등을 기댄 문을 치워버린다면 곧장 무너질 듯 온몸에 힘이 없다.

    사흘을 멀리했던 구슬 탓인지, 술기운 탓인지 모를 일이었다. 지안은 제게 내민 손바닥을 가만 바라보다 짐짓 꾸중하듯 물었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도 않는다더니. 무슨 술을 얼마나 마시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고량주.”

    힘이 없는 와중에도 착실히 대답한 그는 손가락 두 개를 삐쭉 세우며 입꼬리를 올렸다.

    “두 병.”

    그러고는 반대로 고개를 까딱 넘기며 노곤히 웅얼댄다.

    “범화가 줬어. 아… 막걸릿집 좆 떨어진 호랑이. …내 죽마고우.”

    무슨 소린지 당최…. 진짜 취했네, 이 남자.

    999살 구미호가 술 취한 모습을 다 보다니. 지안은 쥐고 있던 긴장도 놓고 헛웃음을 치고 말았다. 철부지 아들을 보는 기분, 병천의 마음을 조금 알 것도 같다.

    하… 이 영감님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해.

    막막하게 바라만 보고 있자, 허공에 들린 손이 덜렁덜렁 흔들렸다.

    “빨리 잡아. 힘없어.”

    곧 곤드라질 듯 끔뻑이는 눈을 얼마쯤 바라보던 지안은 마지못해 그의 손에 제 손을 포개었다. 머쓱한 마음에 괜히 한 마디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번엔 영감님이 안 찾아왔던 거니까 내 잘못 아닌 거예요.”

    고개를 비스듬히 떨구며 피식 웃는 입술이 이 와중에 근사해 보이는 건 또 뭔지. 심장이 느닷없이 동동 발장구를 친다.

    얼른 고개를 돌려버린 지안은 그의 손을 가볍게 당기며 말했다.

    “들어가서 좀 누워요. 이러고 있지 말고.”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열고 현관에 들어설 때까지, 그는 지안의 손에 붙들린 채 얌전히 끌려왔다.

    술 취한 구미호는 평소와는 반대로 꽤 온순해지는 건가.

    행여 놓칠세라 제 손을 꽉 붙드는 악력에 순간 가슴이 조금 몽글해졌다. 모성애와 비슷한 것이었을까.

    999년 묵은 구미호에게 모성애를 느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긴 하지만.

    **

    언제 고장 나 버린 건지 전기 포트가 먹통이었다.

    하는 수 없이 작은 냄비를 꺼낸 지안은 물을 담아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며칠 요리를 멀리했더니 몇 번이고 레버를 돌리고서야 겨우 불이 붙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물 금방 끓을 테니까.”

    커다란 머그잔을 꺼낸 지안은 꿀을 몇 숟갈 담아 두고 말이 없는 그를 돌아봤다. 이부자리에 곧게 누워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벌써 잠이 든 듯 잠잠했다.

    속 쓰리다더니, 그냥 자려나.

    현관에 발을 들이자마자 명치를 부여잡고 끙끙댔던 그였다. 천하의 구미호도 고량주 두 병은 차마 이길 수 없었던 모양이다.

    꿀물이나 좀 타주려 했더니….

    이미 머그잔에 덜어놓은 꿀만 하릴없이 들여다보다가 싱크대에 등허리를 기댔다. 조금 기울어진 시선이 반듯하게 누운 남자의 얼굴에 빤히 닿았다.

    마음이라는 게 참 요사스럽다. 고백 한번 받았다고 왜 이리 예민하게 의식이 되는지. 그를 향한 제 마음도 자꾸만 고민하게 되니 머리가 좀체 쉴 틈이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은. 이 마음은 대체 뭘까.

    제가 옆에 없으면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자꾸 걱정이 되고, 가만 보고 있으면 멋대로 얼굴이 붉어져 눈을 마주치기도 힘들고, 울림이 깊은 목소리엔 이따금 가슴이 간질거리고.

    지금도 이렇게,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릴 만큼 온몸이 가려우니….

    그럴 리가 없는데. 사람도 아닌 그를, 멋대로 나타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린 괘씸한 여우를 남자로 느낀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인데.

    “…홀려버렸나….”

    나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야금야금, 저 요사스런 구미호에게 홀리고 만 건가.

    지금만 해도 홀린 듯 멍하니 그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니 영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힘없이 자조한 지안은 손바닥으로 뻑뻑한 눈을 꾹 눌렀다.

    “하… 피곤하다, 정말.”

    걱정도 긴장도 일시에 내려놓고 나니 참았던 피로가 몰려들었다. 자리도 좁은데 싱크대 앞에서 쪼그려 자야 하려나…. 싱거운 생각을 하다 보니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레버를 잠그고 냄비를 집어 든 지안은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가득 따랐다.

    주인을 잃었으니 제 속이라도 달랠 요량이었다. 집안에 가득 퍼진 술 냄새 탓인지, 어쩐지 속이 쓰린 기분이다.

    쪼르르, 잔을 채운 냄비를 개수대에 넣어두고 티스푼으로 꿀물을 휘젓던 순간이었다.

    “…….”

    왼쪽 어깨 위로 내리뜬 시선에 별안간 까만 머리칼이 걸렸다. 연이어 반대로 데굴 굴러떨어진 눈동자엔 싱크대를 지탱하는 하얀 손등이 비친다.

    어느 틈에 등 뒤로 다가온 그가 어깨 위로 얼굴을 툭 떨궜다.

    “……!”

    일순 경직된 몸이 나무처럼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서지안.”

    마른침이 따갑게 목을 긁었다. 티스푼을 쥔 손끝에 하얗게 힘이 몰렸다. 어깨에서부터 번진 뜨거운 숨에 목덜미는 이미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였다.

    “하….”

    차오르는 취기를 이기지 못한 그는 밭은 숨을 내쉬며 한동안 호흡을 골랐다. 지안은 갑작스런 상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해 눈만 깜빡였다.

    “왜 괜찮아지질 않지…. 구슬이 여기 있는데.”

    똑바로 보지 않고도 나른히 깜빡이는 그의 눈동자가 곁눈에 오롯이 걸렸다.

    불안정하게 삐져나오던 숨이 기어이 목구멍에 콱 막혔다. 그의 얼굴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검푸른 눈동자도, 붉은 입술도, 그 사이로 흐르는 뜨거운 입김도.

    “이것까지 해야 하나….”

    꽉 붙들고 있던 티스푼을 놓쳐버렸다. 미끄러지듯 다가오던 입술이 결국엔 목덜미에 깊이 파묻힌 직후였다.

    귓불 아래 진득이 달라붙은 입술이 젖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술에 취해 흔들리는 호흡이 깃털처럼 목덜미를 간질이고 있었다.

    “어떡할까.”

    쿵쿵, 심장이 방망이질 쳤다. 그러게 내 말이. 나야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하얘진다.

    다시 목덜미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지던 입술이 살갗을 머금은 채 나직이 속삭였다.

    “울어도 소용없을 거 같은데…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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