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어쩐지 아침부터 이상하시었다.
분명 깊은 새벽에야 귀가하셨을 터인데, 고작 두어 시간 눈을 붙이고 일어난 그는 이른 식사를 마치자마자 갑자기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하여 또 무슨 꾀를 부리시려나 했더니, 웬걸. 이번에야말로 진정 일다운 일에 골몰하여 종일 집무실을 벗어나지 않으시더란 말이다.
깐깐한 클라이언트를 만나 한창 애를 먹고 있던 AE의 고충을 척하니 덜어주시는가 하면, 국제 광고제에 출품할 작품에서 티끌만 한 오류를 콕 집어내어 아주 큰 공을 세우기도 하셨다.
어디 그뿐인가.
완성된 광고의 임원 시사회에 참여하여 제작팀의 사기를 높여주고, 세종이 서운해한다는 연유로 꼬부랑 말씨 쓰기를 꺼리던 그가 영국 법인 대표와 광고제에 관하여 장장 1시간 동안 무려 ‘영어로’ 통화까지 하셨으니….
허어, 이거야 원. 해가 북남쪽에서 뜬 것인가, 진정 나침반까지 꺼내어 하늘을 살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해가 떨어질 때까지 별다른 기색이 엿보이지 않기에 그저 몇십 년 만에 정신을 차리신 건가 했거늘….
그러면 그렇지. 아무렴, 아무런 일도 없이 하루아침에 일중독에 빠질 리가.
“헤엣취!”
달달 부딪히는 잇새로 기침을 토해낸 병천은 두툼한 옷깃을 꽉 여며 쥐었다.
한여름에 오리털 파카를 껴입게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하물며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이 후덥지근한 밤에, 창틀에 고드름이 대롱대롱 달려 있으니 이게 무슨 팥 심은 데 잣 나는 소린가 말이다.
그러니까, 대략 서너 시간 전부터였을까.
그가 온몸으로 내뿜기 시작한 한기가 이젠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러다간 W 사옥 전체가 몽땅 얼어붙진 않을까 덜컥 겁이 날 지경이었다.
병천은 찔끔찔끔 발을 움직여 승원의 곁에 다가섰다. 집무실을 가득 채운 냉기에도 얇은 슬랙스와 셔츠 한 장만 달랑 걸친 그는 소파에 고요히 누운 채 말이 없었다. 다만 단단한 신체 곳곳에서 여전히 한기만 뿜어져 나올 뿐이었다.
그의 발치에 멈춰선 병천은 추위에 꽁꽁 언 입술을 힘겹게 달싹였다.
“워, 월호 님. 바, 밤이 깊었습니다. 쿨럭! 그러니 이제 그만 퇴, 퇴근을 하시… 에, 에, 에헷취!”
품에서 얼른 손수건을 꺼내 든 병천은 팽하니 코를 풀었다. 눈이 시려 발개진 흰자위도 촉촉하게 젖은 채였다.
“…….”
벌써 여러 번 퇴근을 권하였건만, 그는 여전히 송장처럼 눈을 감은 채 미동이 없었다. 이마에 척하니 올려둔 팔도 꼼짝없이 그 자리다.
병천은 삐져나온 콧물을 훔치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휴우….”
요즘 들어 우리 월호 님이 어찌 이리 자꾸 조울증 환자처럼 감정이 널뛰기를 하시는지….
원인 제공자는 아무래도 또 지안 님이 분명할진대, 이리 한기까지 내뿜는 걸 보면 예삿일이 아니란 뜻일 터. 아무리 그에게 들이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지만, 이번만큼은 어쩐지 분위기가 음습하여 묻기조차 저어된다.
“흐음….”
더는 일어나시라 종용도 하지 못하고 머뭇대던 병천은 결국 조용히 몸을 돌렸다. 꽁꽁 얼어붙어 잘 열리지도 않는 문을 힘주어 열자, 막 집무실로 들어서려던 수아가 화들짝 어깨를 퉁겼다.
“엄맛!”
품에는 병천을 위해 챙겨온 핫팩이 한아름 들려 있었다.
“에잉? 어찌 나오셔요? 월호 님 일어나셨….”
“쉬잇.”
입술 위에 검지를 꾹 누른 병천은 손을 휘휘 흔들며 수아의 어깨를 돌려세웠다.
“아무래도 오늘은 시간이 좀 필요하실 듯싶구나.”
“흐응… 걱정이어요, 참말….”
달칵.
조심스런 문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속닥거리는 병천과 수아의 음성이 문 너머로 얼마쯤 들려오다 멀어졌다. 하얗게 떠도는 한기 속에 음산한 정적이 내리깔렸다.
그리고 얼마쯤. 구름이 달빛을 삼키던 순간이었다.
천장에 달린 매립등이 느닷없는 냉기에 차례로 펑펑 터지며 유명을 달리했다. 스파크와 뒤섞인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순식간에 암전된 집무실은 달빛조차 가려져 빛 한줄기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완전한 어둠이었다. 지직, 지직. 터져버린 전구만 힘없이 신음하며 그나마 시간이 멈추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
시커먼 어둠 속에서 검푸른 동공이 드러난 것은 그때였다. 가늘게 뜨인 눈가 아래에 파편이 긁고 간 흔적이 붉게 남아 있었다. 하나, 나른하게 뜬 눈은 통증조차 느끼지 못한 듯 그저 덤덤했다.
“왜….”
가만히 벌어진 잇새로 숨처럼 외마디가 흘러나왔다. 맥락 없이 한 마디만 꺼내어놓고 그는 한동안 말끄러미 어두운 천장만 바라봤다.
구름이 흘러간 자리, 그제야 숨어있던 달빛이 서서히 되돌아왔다. 어둑했던 시야에 빛과 함께 떠오른 것은, 종일 어른거리던 눈물 젖은 지안의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왜.
왜 눈물을 흘렸을까.
고작 그것이 무어라고 종일 정신이 산만했다. 잊어보려 온갖 서류를 뒤적이며 안 하던 짓도 해봤지만, 결과는 이렇듯 제자리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 눈물을 담은 직후 가슴팍이 기묘하게 저릿했다. 900년이 넘도록 단 한 번 느껴보지도 못했던 낯선 감각이었다.
그간 수많은 인간의 눈물을 보아왔다. 하나 그따위 것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어디 눈물뿐이겠는가. 인간의 모든 것은, 그것이 목숨일지라도 그에겐 그저 하잘것없는 것이었다.
한데 왜. 그 댕그랑 눈에서 또로록 흐르던 그깟 눈물 한줄기에 덜컥 숨이 조였을까.
모르긴 해도 이 복잡한 감정 중 하나는 당황임이 분명했다. 그간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물며 홀딱 벗고 수음을 했을 때도, 눈앞에서 인간의 시체가 조각나도 눈물 한 번 보이지 않았던 강한 계집이었다.
한데, 이번엔 답지 않게 연약해진 눈망울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갑작스레 몰아쳐 놀랐던 것일까. 그리 강건한 척해놓고 저도 여인이라고 순간 심약해지기라도 했던가.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했다. 제어하지 못할 만큼 한순간 눈이 돌아버렸다. 온몸의 혈관이 팽창하고 백발로 변모하는 제 몸 상태도 인지하지 못했을 만큼 어느 순간 미친놈처럼 몰아붙였다. 입술도 젖가슴도, 살갗을 다 뜯어내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방해를 받지 않았더라면, 결국 그 자리에서 지안을 안고 말았을 것이다.
거부하지 않은 거라 생각했다. 젖가슴을 무는 순간 제 머리칼에 파고들던 손의 열기가, 스커트 속에서 풍겨오던 달뜬 여인의 향기가, 필시 기꺼운 대답이라 여겼다.
한데 착각이었나. 부르르 떨리던 몸의 진동이 그저 두려움일 뿐이었던가. 이젠 이 요망한 것이 속마음도 곧잘 숨겨버리니 들여다보려야 보이지도 않더랬다.
“…무슨 상관이라고.”
그래, 설령 겁을 먹었다 한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아야 저다운 것인데.
생각할수록 심장이 저릿하다. 마치 금단의 열매를 잘못 건들기라도 한 듯 초조한 마음이었다. 내내 괜찮다가도 고 계집의 눈물이 신경 쓰여 결국 괜찮지가 않다.
‘ 지안 님을 깊이 마음에 들이지 마십시오. ’
이제야 묘흔의 근심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 행여 일을 그르치실까 이놈은 참으로 염려스럽습니다. ’
고작 눈물 한줄기에 이리 마음이 조여서야, 안으면 부서질까 말도 안 되는 번민이 차오르니….
과연 내가 살고자 너를 부숴버릴 수 있을까.
“하….”
뿌연 입김이 길게 꼬리를 물고 흩어졌다. 이 와중에도 종일 보지 못한 지안이 궁금하고 보고 싶어 쇄골 아래가 조금 욱신댔다.
개소리를 인정하고 보니, 애써 부정했던 마음의 깊이가 벌써 이만큼이었다.
**
낮이 짧아진 건지,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건지, 벌써 산 너머로 해가 저물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촬영이 쉬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크레인 카메라 아래로 환한 조명이 걸렸다. 좁은 골목을 겨우 비집고 들어온 살수차는 자리를 잡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아따. 장소 섭외 한번 그지같이 했네.”
험악한 인상의 기사가 담배를 꼬나문 채 구시렁거리며 힘겹게 차 꽁무니를 골목에 찔러넣었다. 성취감에 한껏 우쭐해진 기사는 “이 어려운 걸 또 해내요, 내가.” 하며 비를 뿌릴 위치를 잡느라 살수 장치를 오르락내리락 조종했다.
여기저기 불을 밝히느라 여념이 없는 조명 스태프들, 커다란 반사판을 들고 뛰어다니는 앳된 얼굴의 스태프, 메이킹영상을 찍느라 배우와 스태프들의 웃음을 유발하며 현장을 누비는 촬영 기사 등등.
모두가 바쁜 현장이었다. 하나의 씬이 마무리되면 촬영에 들어가야 할 지안도 어서 대본을 숙지해야 했지만, 시선이 자꾸만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이쯤에서 틸트다운 갑니다. 시현 씨는 앵글 뺄 때까지 동작 유지해주시면 되고.”
“으음. 손은 내리는 게 낫겠죠?”
“그럽시다. 손끝에 포커스 맞출 테니까 이 정도쯤 감정 들어가도 좋을 것 같고.”
여자주인공이자 극 중 지안의 오래된 친구 역을 맡게 된 전시현은 감독과 함께 열성적으로 동선을 맞추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붙는 씬을 촬영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각자의 몽타주를 떼어내는 촬영이라 한 앵글 속에서 대사를 주고받지는 않을 테지만, 어쨌거나 같은 세트장에서 마주한 것은 처음인 셈이었다.
아직은 대화도 몇 마디 나눠보지 못했지만 예전부터 배우 전시현을 동경했었다. 해서 저 홀로 시현을 향한 내적 친밀감이 충만한 상태였다. 뭔가, 오랜만에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옛친구를 만난 기분이랄까.
그런데 이젠 모르겠다. 단지 그와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어느 날 갑자기 미지의 세계에서 나타난 신비로운 전학생을 만난 것처럼 어색한 당신이 됐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것이 우습긴 하지만 어쨌든.
“하….”
정말 뭘까. 그녀는 그와 대체 무슨 사이일까. 아니, 그보다 어째서 전시현의 터치에도 그는 멀쩡할 수 있었던 걸까.
궁금증이 자꾸만 부피를 늘려갔다. 타이밍을 놓쳐 승원에겐 묻지 못했던 의문이 오늘 하루 내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이제 와 묻자니 어제의 일로 괜히 서먹서먹해져서는….
홀로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있을 때였다. 멍멍하게 닫혀있던 귀가 갑작스레 번쩍 뚫렸다.
“지안 씨?”
지안은 화들짝 눈을 고쳐 떴다. 어느새 곁에 다가온 시현이 방긋 웃으며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닌데 괜히 발이 저려 심장이 철렁했다.
“아! 네, 선배님.”
싱긋 눈웃음을 지은 시현은 화단에 앉아 있던 지안의 곁에 몸을 내리며 살갑게 말을 붙였다.
“대사 입에 좀 붙어요? 아… 난 시간이 좀 걸리네. 너무 안 붙어, 대사가.”
지안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울적하게 미간을 우그러뜨렸다.
“저두요. 계속 읽고는 있는데 외우기가 쉽지 않네요.”
“응, 그니까. 대본 받고 촬영까지 너무 촉박했어. 그죠?”
그러게요, 하며 가볍게 미소를 짓고 보니 정적이 깔렸다. 가뜩이나 어색한 사이에 묻지 못할 의문을 품고 있으니 더더욱 불편한 정적이었다.
말도 없이 그저 나란히 앉은 채로 대본만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시현이 대본을 넘기며 먼저 침묵을 깼다.
“지안 씨. 나 궁금한 거 있는데.”
지안은 기꺼운 얼굴로 시현을 돌아봤다.
“네, 말씀하세요.”
시현의 시선은 여전히 대본에 닿아 있었다. 어쩐 일인지 잠시간 뜸을 들이던 시현은 그제야 지안을 돌아보며 은근한 투로 물었다.
“지승원 이사 어떻게 알아요?”
“…네?”
종일 제가 묻고 팠던 질문이 되레 건너왔다. 순간 당황한 지안은 의아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시현이 서둘러 덧붙였다.
“새벽에 봤거든. 주차장에서 두 사람.”
“아….”
순간 청승맞게 눈물을 찔끔거리다 그의 차에 올랐던 새벽의 일이 스쳐 갔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공교롭게도 근거리에 시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선뜻 대답지 못하고 입술을 감쳐 물자, 시현은 머쓱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니, 뭐.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나도 좀 잘 아는 사이라, 그 남자랑.”
“…….”
친근해 보이던 모습을 이미 보아 알고는 있었지만 괜스레 기분이 묘했다.
잘 아는 사이. 그 남자랑….
시현의 입을 통해 몹시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그의 이야기가 이상하게 명치를 쿡쿡 찌르는 기분이었다.
잠시 할 말을 고민하던 지안은 대답 대신 은근한 궁금증을 내비쳤다.
“저도 어제, 두 분 봤어요. A2 세트장 빈 건물에 계셨을 때.”
“응?”
곱게 다듬은 시현의 눈썹이 이맛살을 휙 밀고 올라갔다. 신비로울 만큼 옅은 갈색 눈동자가 A2 세트장까지 다녀올 기세로 빙그르르 굴렀다.
오래지 않아 기억을 떠올린 시현은 제 허벅지를 가볍게 내리쳤다.
“아아, 그때! 어머, 그랬어요?”
별안간 상기된 얼굴에 환한 웃음이 걸렸다.
“난 너무 오랜만에 만났거든. 반가워서 막 날아갔지 뭐예요? 그때 본 거구나?”
실없이 빙글거리던 미소가 뚝 떨어진 건 그때였다.
“가만.”
시현은 흠칫 눈썹 머리를 좁히며 지안을 홱 돌아봤다. 진정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이던 시현은 소리를 조금 낮추며 사뭇 섬뜩하게 물었다.
“…우리가 보였어요? 어떻게?”
“네…?”
거야 보이니까 보였다고….
뜻밖의 질문에 되레 당황한 지안은 점점 가까워지는 시현의 눈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봤다.
부담스러울 만큼 지안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시현은 느닷없이 지안의 가슴팍에 손을 척 가져다 댔다.
“엇…!”
당황해 밀린 몸이 흠칫 기울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현의 손은 더욱 진득이 지안의 가슴팍을 꾹 내리눌렀다.
“세상에.”
연갈색 눈동자가 한층 댕그래졌다. 시현은 망연히 탄식을 터트렸다.
“구슬이 왜 여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