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54화 (54/106)
  • 54.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저도 모르게 안 하던 짓을 하고 보니 뒤늦게 황당함이 밀려왔다.

    여인이라 한들, 그것이 신수라면 아무리 제 몸에 손을 대도 통증은 느끼지 않는다. 그 무감함이 어느 정도냐 하면, 홀딱 벗고 들이대도 암컷 신수에겐 남경마저 무감할 정도란 말이다.

    그믐의 욕정을 사사로이 신수에게 풀지 못하도록 아주 지랄 같은 저주를 걸어놓은 덕분이었다.

    그러니 ‘네가 아는 전시현도 실은 구미호다.’라고 얘기만 하면 되었을 일이다. 한데, 걱정스럽게 저를 살피던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왜 유치하게 장난이 치고 싶던지.

    후에 이 사실을 지안이 알게 되면 또 속으로 어마무시한 쌍욕을 퍼부을 것이 자명한 일인데….

    “참, 희한한 짓을 했네.”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하여 실소를 뱉고 있자니, 황급한 걸음이 바닥을 울렸다. 승원은 막간의 상념을 깨트렸다.

    “월호 님!”

    도시락 하나를 챙겨 들고 후다닥 달려온 우진이 부담스러울 만큼 꾸벅 허리를 굽혔다. 바닥까지 쓸고 온 머리칼이 높이 쳐들렸다가 차분히 이마를 덮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연락 주셨으면 얼른 달려왔을 텐데요!”

    우진은 다급히 차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열었다. 갑작스런 등장에 순간 당황한 나머지, 그가 차 문을 열지 못해 여태 서서 기다린 것이라 착각이라도 한 모양이다.

    승원의 눈썹이 망연하게 물결쳤다.

    “진정 이것이 맞단 말이지…?”

    스쳐 가는 혼잣말에 슬라이딩 도어를 밀어 열던 우진이 말간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예?”

    다 찌그러진 은색 승합차에서 유독 남다른 기운이 느껴지기에 설마 했거늘. 설마가 여우를 잡을 줄이야.

    승원은 움푹 찌그러진 차체를 툭 차며 마뜩잖게 미간을 구겼다.

    “이게 최선의 선택이야?”

    언뜻 이해하지 못한 우진이 동그랗게 뜬 눈을 말똥말똥 깜박였다. 승원은 실소하듯 덧붙였다.

    “왜. 차라리 손수레를 끌고 오지 않고?”

    그제야 그의 말에 담긴 가시를 제대로 파악한 우진은 머쓱하게 머리통을 긁적였다.

    “어엄… 그것이, 크기 별로 선별을 하다 보니 이 차종은 이놈뿐인지라…. 저도 사실 지안 님이 이걸 고르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래. 아무렴 그랬겠지. 그 고루한 성격에 세단을 타고 촬영장에 나설 생각은 일절 하지 않았을 테다.

    “하여튼 그놈의 궁상은….”

    쯧쯧 혀를 차던 승원은 우진이 들고 있던 도시락을 눈짓했다.

    “그건 뭐야. 서지안 거야?”

    “예! 수아가 방금 전해주고 갔습니다.”

    전처럼 진수성찬을 대령할 수 없으니 간단한 도시락으로 대처하기로 알아서 합의를 봤노라 전해 들은 참이었다.

    그마저도 촬영장에선 밥차를 이용하겠다며 극구 마다했다지, 아마.

    수아 이것이 결국 도시락을 챙겨온 걸 보니 고집은 수아가 한 수 위였던 모양이다.

    “이리 주고 그만 가봐.”

    “예? 아직 지안 님의 촬영이 남아있을 텐데요.”

    “내가 있을 것이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럼 지안 님의 짐은 내려놓겠습니다.”

    얼른 그의 손에 도시락을 넘긴 우진은 트렁크를 열어 지안의 옷 가방과 메이크업 박스를 꺼냈다. 한 벌은 갈아입고 급히 간 모양인지 우진의 손에 그저 달랑 들린 채였다.

    무식한 크기의 짐들을 가만 바라보던 승원은 가방이 땅에 닿기 직전에 제동을 걸었다.

    “잠깐.”

    “예?”

    “다시 넣어. 이 고철도 그냥 두고 가고.”

    그러며 지갑에서 뽑아든 만 원짜리 몇 장이 우진의 재킷 주머니 속으로 쏙쏙 날아가 꽂혔다. 그 역시 순간이동을 연마하지 못했으니 택시비나 하란 소리였다.

    “아아, 옙!”

    우진은 들고 있던 가방을 다시 차에 실어두고 방싯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월호 님!”

    활력이 넘치는 발소리가 총총 멀어졌다. 시호에 이어 우진까지, 잠깐의 마주침에도 피로가 몰려온 승원은 차에 올라 낡은 시트에 툭 몸을 던졌다. 과연, 1할도 없는 기대에 부응하여 돌덩이에 앉은 기분이다.

    그러니까, 이 고철을 선택한 이유가 흡사 탈의실 따위로 쓰려던 것이렷다. 딴에는 머리를 좀 쓴 모양인데, 이왕이면 조금만 멀쩡한 상태였다면 좋았을 것을….

    “쯧….”

    아무래도 못마땅해 낡은 내부를 휘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앞유리창 너머로 멀찍이 지안의 모습이 보였다. 돌아간 시선이 향한 곳을 보아하니 귀가하는 우진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오래지 않아 차에 오른 지안은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우진 님은 가시는 거예요?”

    “들어가라고 했어. 내가 있을 거라.”

    “아아…. 인사도 못 드렸는데.”

    사뭇 아쉬운 시선이 창밖 너머로 길게 뻗어 갔다. 이젠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어졌으련만, 소용도 없을 시선이 어째 오래도 머문다.

    몇 시간이나 보았다고 그새 정이라도 든 것인가.

    문득 언짢아진 승원은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왜. 아쉬워?”

    그제야 그에게 돌아온 얼굴이 머쓱해졌다.

    “아니, 그게 아니라. 새벽부터 와서 도와주셨는데 감사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승원은 미간을 구기며 곁에 두었던 도시락을 집어 들었다.

    “알아서 전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밥이나 먹어.”

    얼떨결에 받아 든 도시락을 내려다본 지안은 사뭇 난색 어린 얼굴이 됐다.

    “수아 님 다녀가셨어요? 아후, 안 그러셔도 된다고 했는데….”

    괜히 수고롭게 배달까지 해주시고, 죄송하고 감사하고 어쩌고 쫑알쫑알…. 속닥대는 혼잣말이 줄줄이 늘어졌다.

    승원은 심드렁하게 내리뜬 눈으로 지안을 바라봤다. 이쪽저쪽 뭐가 그리 감사한 것이 많은지, 가만 보고 있자니 은근히 섭섭하지 않나.

    “네 목숨 살려준 내겐 전혀 감사한 마음이 없어?”

    도시락을 열던 지안의 눈이 그를 향해 힐끗 들렸다. 영감님이 언제 제 목숨을 살려주셨던가요, 진지하게 고민이라도 하듯 깜빡거리던 눈이 이내 얄팍해졌다.

    설마 ‘수음’을 도와준 일을 말하는 건 아니시겠죠, 황당하단 눈빛이다.

    “누구 때문에 죽을 뻔했는지는 잊으셨나 봐요.”

    “…….”

    애초에 구슬만 넘기지 않았어도 몹시 평범한 삶을 살았을 그녀이니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괜히 투정 한 번 했다가 본전도 못 찾은 승원은 팽하니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아버렸다.

    “됐어. 먹기나 해.”

    그답지 않게 싱겁게 꼬리를 내리자, 지안의 입매가 저도 모르게 슬쩍 기울어졌다. 그것이야말로 그녀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문득 당황스러워 얼른 입꼬리를 내린 지안은 그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근데, 정말 아픈 거 맞아요? 되게 멀쩡해 보이는데.”

    승원은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고저 없는 투로 말했다.

    “멀쩡한 척하느라 혼신의 힘을 다 하고 있어.”

    “으음….”

    어째, 보면 볼수록 혈색이 좋아 보이는데….

    지안은 속말을 흘리며 아리송하게 입바람을 당겼다. 아래위로 살피는 눈동자에는 여전히 98프로의 의심이 묻어 있었다.

    승원은 모른 척 창가로 고개를 돌리고 입술에 지퍼를 꾹 채웠다. 숨기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들어 먹을 욕도 늘어날 터인데, 괜히 약이 올라 진실을 고하고픈 마음도 들지 않는다. 그녀가 곰살갑지 않게 군 것이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솔직한 말로 제가 한 짓은 생각도 않고 참으로 뻔뻔한 듯싶기도 하다.

    느닷없이 자기반성을 하며 자조적인 한숨을 삼킬 때였다. 멋쩍은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듯 건너왔다.

    “…어제 같이 다녀주신 거랑, 우진 님 보내주신 건….”

    지안은 담담한 척 도시락을 열며 어색하게 뒷말을 이었다.

    “감사해요. 신경 써주셔서.”

    이것이 흔히 말하는 ‘엎드려 절 받기’라는 것이렷다.

    한데 어찌하나.

    애초에 이건호의 발을 묶은 것도 자신이라, 양심은 있어 차마 웃지도 못하겠다.

    대꾸가 없으니 뻘쭘해진 지안은 허벅지 위에 도시락을 올리고 묵묵히 수저를 움직였다. 힐끔힐끔 그를 살피다 넌지시 입이 떨어진 것은 다소간의 침묵이 지난 다음이었다.

    “근데… 전시현 선배랑은 어떻게 알아요? 가까워 보이던데….”

    “…….”

    그것까진 뭐라고 둘러댈지 생각해 놓지 않았으니 할 말이 없었다. 글쎄. 그 계집을 뭐라고 해야 할까….

    마땅한 핑계를 찾지 못한 승원은 눈 감은 채 대충 대꾸했다.

    “그냥 알아.”

    “…그냥이요?”

    “그래. 그냥.”

    그냥이 뭐래….

    꿍얼거리는 속말이 들려왔지만 지안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저 물을 삼키는 소리만 호로록 들릴 뿐이다. 뻘쭘한 수저질이 다시 시작되었다.

    본의 아니게 침묵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말소리를 삼킨 정적 속에 사부작사부작 도시락을 비우는 소리만 잠잠히 울렸다. 사락사락, 이따금 대본을 넘기는 소리도 조용히 귓가에 흘러들었다.

    그가 잠이 들었다 생각한 모양인지, 지안은 반찬 하나도 조심히 씹으며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연방 저를 살피며 천천히 대본을 넘기는 손, 웅얼웅얼 속삭이며 대사를 읊는 소리, 이따금 자세를 고쳐 잡을 때마다 삐걱대는 시트에 화들짝 움직임을 멈추는 모습들.

    눈을 감고도 지안의 행동과 표정이 훤히 그려지니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아마도 온 신경이 집요하리만큼 그녀에게로 향해 있기 때문이리라.

    “하-암.”

    삐져나오는 하품마저 조용히 뱉은 그녀는 그러고도 얼마쯤 대본을 넘기며 대사를 웅얼거렸다.

    또렷한 의식이 담겨 있던 숨소리가 잠잠히 흐른 것은, 그로부터 십여 분이 흐른 후였다.

    툭. 둔탁한 소리가 짧게 울렸다. 고집스럽게 감겨 있던 그의 눈에 그제야 지안의 얼굴이 오롯이 비쳤다.

    목은 한쪽으로 푹 꺾인 채 힘 빠진 팔이 허벅지 옆으로 툭 떨어져 있다. 꾸역꾸역 버텨보다 결국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손끝에 간당간당하게 매달려 있던 대본을 쏙 뽑아든 승원은 대강 곁자리에 내려두고 다리를 척 꼬았다. 시선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잠든 얼굴로 향한 채였다. 동시에 창 쪽으로 기울어진 고개는 가볍게 쥔 주먹이 알맞게 지탱했다.

    대놓고 구경할 태세를 제대로 갖춘 것이었다.

    “…….”

    째깍째깍, 시침이 여러 칸을 넘어가도록 말도 없이 잠든 얼굴을 바라만 보았다.

    이 계집 생김이 원래 이러했던가. 째깐한 얼굴에 오밀조밀 붙어 있는 이목구비가 새삼 낯설기도 하다.

    “입 다물고 있으니 이리 어여쁜 것을….”

    꾸벅꾸벅 시동을 걸던 가냘픈 모가지가 대꾸라도 하듯 푹푹 꺾였다. 대략 5초 후면 화들짝 놀라 눈을 뜰 기세다.

    아니나 다를까, 갈수록 반동이 커지는 고갯짓에 매끈했던 미간이 곧 깨날 듯 움찔 떨렸다.

    그의 자리가 홀연히 비어버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스르륵 기울던 얼굴이 어느 틈에 옆자리로 옮겨온 그의 어깨에 툭 부딪혔다.

    승원은 숨마저 참은 채 오목하게 오므라진 지안의 손끝을 주시했다. 깨어날 듯 말 듯, 검지 끝에 까딱까딱 희미한 의식이 몰려들고 있었다.

    하나, 결국 의식을 밀어버린 피로는 다시금 새근새근 그녀의 숨을 고르게 매만졌다.

    후우….

    그제야 참았던 호흡을 뱉은 승원은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댄 지안을 흘끗 내려다봤다.

    이게 뭐라고 숨도 못 쉬고 긴장을 하였나.

    새삼 기가 차 피식 웃던 것도 잠시, 잠든 얼굴을 담고 있던 눈동자가 문득 흐리게 침잠했다.

    “…….”

    참으로 묘한 충동이었다. 오늘따라 뽀얀 볼이 갓난쟁이의 것처럼 말랑해 보여서. 요 매끈하고 통통한 입술은 톡 건들면 터지진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이 새록새록 피어올라서.

    하여 참지 못했다. 하등 참을 이유를 찾지 못하였다. 해서, 주저 없이 뻗은 손을 하얀 볼에 대어보았다. 보기보다 더 작은 볼이 제 큰 손안에 한가득 담기고도 남는다.

    “…뭐가 이렇게 작아.”

    참으로 여렸다. 보드라운 살결을 가만가만 매만져보니, 슬쩍 힘만 주어도 움푹 팰 듯 한없이 여린 살갗이다.

    이미 발가벗겨 가장 깊숙한 곳까지 맛을 본 몸이었다. 한데 그땐 왜 몰랐을까. 이토록 작고 부드러운 계집이었음을.

    ‘ 지안 님이 보고 싶단 말을 참 얄궂게도 하십니다. ’

    실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고작 하룻밤 옥탑을 비웠을 뿐인데, 눈뜨면 보이던 계집이 없으니 희한하게 마음이 허하더랬다.

    그것이 보고 싶은 감정이었을까.

    ‘ 흐음, 글쎄요. 지안 님 때문에 일희일노 하시는 모습이라든가, 전에 없던 배려라든가, 질투라든가. 뭐 그런…? ’

    인정하긴 싫지만 그 또한 맞는 말이다. 이 계집 말 한마디에 노하였다가 미친놈처럼 웃어댔으니 묘흔의 눈에 그리 보인 것도 무리는 아닐 테다.

    어디 그뿐인가. 지금만 해도 잠든 머리통에 친히 어깨를 내어주고 있으니 이 또한 저완 어울리지 않는 배려였다.

    하면 질투는 또 어떤가. 저 아닌 모든 이들에게 곰살가운 웃음은 죄다 언짢으니, 그래 빌어먹을… 아니라곤 못하겠다.

    ‘ 지안 님을 바라보는 월호 님의 눈빛 또한 예사의 것이 아님을 익히 보았고요. ’

    지금의 나는 너를 어찌 보고 있을까.

    간밤에 느닷없이 심장에 번지던 소양감이 가슴팍에 은근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볼을 매만지다 슬쩍 입술을 한 번 건드려본 다음에는 둥둥 흔들리는 박동도 제 길을 잃었다.

    이것을 연모라 할 수 있는가.

    들끓는 애정, 사무치는 그리움, 귀히 여겨 아끼는 마음.

    하나 그것은 분명 아닐진대. 나는 그저, 이 마음은 그저 조금….

    “으음….”

    작은 머리통이 흔들렸다. 눈꺼풀 속에서 구르는 안구를 따라 긴 속눈썹이 잔잔히 파도를 친다. 이번에야말로 깨어날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볼에 닿은 손을 떼지 않았다.

    다만 더욱 진득이, 손마디 끝이 귓불을 스쳐 들어가도록 되레 깊숙이 볼을 감쌌다.

    “…….”

    결국 조금씩 열린 눈이 주춤주춤 그를 올려다보았다. 언제고 술 취해 품에 안겼던 그 다음 날의 아침처럼, 혼몽한 눈동자가 말똥말똥 그를 향해 깜박인다.

    “이게 어….”

    “치료.”

    멍하니 물어오는 말을 가르고 뻔뻔하게 거짓을 이었다. 오늘따라 제법 어여쁜 얼굴에 어쩐지 조금 홀린 듯하여.

    “닿지 않으면 곧 죽을 것 같아서.”

    말도 안 되는 거짓을 술술 속삭이는 음성이 그도 모르게 조금 젖어 있었다.

    지안은 당황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달싹이는 입술이 자꾸만 시선을 빼앗는다.

    그 앙증맞은 움직임을 빤히 바라보던 그는 다갈색 눈동자를 향해 나른히 시선을 들었다.

    “눈.”

    툭 던진 말을 이해하지 못한 지안이 바쁘게 눈을 깜빡였다. 미끄러진 엄지가 어느 틈에 도톰한 입술 위에 닿아 있었다.

    “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그럼에도 댕그랗게 뜬 눈은 연방 깜박이며 당혹감에 물들어 있다.

    이마저도 그저 귀여워 보인다면, 역시 홀리고 만 것이겠지.

    입술 위에서 툭 꺾인 엄지가 아랫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절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아랫니가 슬쩍 드러났다.

    곧 벌어질 일을 직감한 지안이 다급히 입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잠…!”

    붉게 물든 얼굴 위로 깊은 그늘이 졌다. 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혀가 작고 말랑한 것을 흠씬 휘감았다.

    쿵, 심장이 크게 울렁인 것은 다만 그녀만이 아니었다.

    흔들리다 요동친다. 바짝 열이 오른다. 입술을 빨아당기고 혀를 얽을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 혹여, 지안 님을 여인으로 마음에 들이신 겁니까? ’

    젠장, 이래서야….

    더는 개소리라고 시치미도 뗄 수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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