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53화 (53/106)
  • 53.

    서울 외곽의 조용한 동네였다.

    한창 신도시 개발이 진행 중이라 부지의 절반은 여전히 허허벌판이었다.

    그완 전혀 딴판으로 세련된 건물들이 속속 들어선 남은 절반의 끄트머리, 그곳에 드라마 ‘너나들이’의 세트장이 있다.

    꽃집, 제과점, 공방, 서점 등등.

    형형색색의 단층 건물이 줄지어 선 골목엔 수많은 스태프가 숨죽인 채 같은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 Cafe DanMi ’

    지안이 극 중에서 운영하는 카페 ‘DanMi’에서 한창 촬영이 진행 중이었다.

    카페의 맞은편 건물 2층에 사뿐히 발을 내린 승원은 텅 빈 내부를 휘둘러봤다. 아직 상가가 들어서기 전의 빈 건물이라 촬영 현장을 조용히 구경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각도 상 카페 안에 있을 지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스태프들의 까만 머리통만 무료하게 바라본 지 얼마쯤.

    “컷-!”

    쥐 죽은 듯 고요했던 창밖이 일시에 소란스러워졌다. 감독의 사인에 분주해진 스태프들이 다음 촬영에 맞추어 바쁘게 장비를 옮겼다.

    그들의 틈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승원은 비스듬히 입매를 기울였다.

    파란 플레어스커트에 하얀 셔츠, 정수리까지 한껏 끌어 올린 당고머리, 화려한 액세서리와 짙은 화장.

    언뜻 보면 모르고 스쳐 갔을 만큼 색다른 모습의 지안이 감독의 곁으로 총총 뛰어나오고 있었다.

    후줄근한 트레이닝복 차림에 민낯이 익숙한 그에겐 상당히 어색한 모습이었으나, 저도 계집이라고 꾸며놓으니 제법 곱기는 하다.

    그러게, 저리 찍어 바르면 꽤 어여쁜 것을… 축복받은 외모를 왜 그리 대충 쓰는지, 원.

    “아, 이쪽으로요?”

    “어, 그래. 딱 좋네. 그 정도만 돌립시다. 이왕이면 더 예쁘게 나와야지.”

    “하하. 네, 알겠습니다!”

    촬영장의 분위기가 좋았다. 그 안에 녹아든 지안의 웃음도 몹시 자연스러웠다. 감독과 모니터링을 하며 살갑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흡사 수십 년 차 베테랑 같기도 하다.

    첫 촬영이라 어색할 법도 한데, 벌써 적응을 마친 모양이었다.

    문득, 이젠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과거의 기억 하나가 스쳐 갔다.

    ‘ 연기 이제 안 할 거라고 말씀드렸던 거 같은데. ’

    저렇게나 생기가 넘칠 것을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잘도 지껄였지.

    “하여튼 입만 살아서는.”

    새삼 그 가즈러운 성정이 우스워 실없이 웃음을 흘리던 때였다.

    “…….”

    엷은 미소가 감겨있던 그의 얼굴에 일순 웃음기가 사라졌다. 점점 좁아지는 미간에 실금 같은 주름이 팼다. 동시에 회색빛으로 돌변한 눈동자에 경계심이 가득 차올랐다.

    진한 수국 향기. 참으로 오랜만이나 모를 수 없는 향이다.

    이 향기가 왜 뜬금없이 여기서….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순간 무언가를 기억해낸 승원은 아차 하며 질끈 눈을 감았다.

    아… 이런 젠장. 까맣게 잊고 있었다.

    된소리를 삼킨 그는 불시에 등 뒤의 허공을 덥석 쥐어 당겼다.

    직전까지 향기만 떠돌던 공간에 사람의 형체가 불쑥 딸려 왔다. 정확히는, 모습을 감추고 스멀스멀 다가오던 ‘그녀’의 결계를 그가 무너뜨려 버린 것이었다.

    찰랑이는 갈색 머리칼에서 짙은 수국 향이 양껏 뿜어져 나왔다.

    “와, 대박!”

    승원에게 손목이 붙들린 채 강제로 모습을 드러낸 시호는 상기된 얼굴로 오버스럽게 입을 틀어막았다. 굵은 쌍꺼풀이 진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진짜 오라버니였네?”

    들킨 것에 놀라지도 않고 그저 촐랑거리는 모습이 여전히 시호답다.

    “나 후각 장난 아니지? 저기 주차장에서부터 오라버니 향 맡고 바로 찾아낸 거 알아? 개쩐다, 진짜!”

    요상한 현세의 은어를 주워다 쓰는 것도 참으로 여전하고.

    “뭐야, 뭐야? 어떻게 여기 있어? 설마 나보러 온 거야?”

    전동기 달린 주둥이는 한층 더 요란해졌다.

    하… 골치 아프네.

    현세에서는 톱배우 ‘전시현’으로 살아가고 있는 900년 묵은 암구미호.

    ‘ 아. 그 드라마의 주연이 시호 님이라 합니다. ’

    언젠가 묘흔에게 분명히 들었건만, 이 중요한 사실을 어쩌다 잊고 말았을까. 최근 들어 확실히 정신이 혼잡했던 거다.

    승원은 피곤한 얼굴로 시호의 손목을 던지듯 놓았다.

    “너도 설마인 줄은 아는 모양인데. 못 본 척해. 잘못 짚었어.”

    시호는 새초롬히 눈을 흘기며 승원의 팔에 제 어깨를 툭 맞댔다.

    “에이, 자그마치 5년 만에 만났는데 어떻게 못 본 척을 하니?”

    “고작 5년이겠지.”

    “치….”

    뾰로통하게 입술을 삐죽이던 시호는 요망하게 눈웃음을 흘리며 그의 턱 아래에 얼굴을 들이댔다.

    “오라버닌 아직도 나보면 죽이고 싶어?”

    차게 눈을 내리뜬 승원은 눈꼬리를 살랑이며 아양을 떠는 시호를 무심히 내려다봤다. 여전히 냉정한 그의 눈빛에 시호는 서운한 듯 눈을 흘겼다.

    “너무 그러지 마. 나 이제 컨트롤 할 줄 알어. 진짜야.”

    암구미호는 1년에 한 번씩 지독한 발정기가 돌아온다.

    그때의 그녀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로 상대의 양기를 극한까지 빨아들이며, 결국엔 죽음에 이르게 하고 만다. 그녀에게서 살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그녀의 목을 끊어버리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가 눈이 완전히 돌아버린 시호에게 양기를 모조리 빼앗길 뻔했던 것이 딱 5년 전이었다.

    수백 년간 각자의 생을 살다 현세에서 우연히 재회한 후, 반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개기일식이 일어 세상이 어둠에 뒤덮였던 그 밤.

    그야말로 잠을 자다 날벼락이었다. 낯선 열기에 눈을 떴을 때, 나체로 제 위에 올라타 맨가슴을 핥고 있던 시호와 마주했으니 오죽 식겁을 했으랴.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양기에 이성을 잃어버린 시호도, 잠결에 자칫 동족의 목을 날릴 뻔했던 그도, 심히 아찔했던 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이후 그는 시호와 마주칠 때마다 급격한 피로감에 시달렸다. 그녀가 온몸으로 내뿜는 수국 향에 강한 거부감이 생긴 탓이었다.

    지난 5년, 결국 그는 시호와의 연결고리를 철저히 차단했다.

    또다시 발정기가 돌아오면 시호는 눈이 뒤집혀 그를 찾을 것이고, 그것이 반복된다면 그는 결국 제 손으로 그녀의 목을 날려버려야 할지도 몰랐다.

    냉정한 그의 결정에 마냥 서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시호도 까딱하다간 제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리란 사실을 충분히 알기 때문이었다.

    승원은 코앞에서 기우뚱 기울어진 시호의 머리를 검지로 밀어냈다.

    “컨트롤 좋아하시네. 죽기 싫으면 십 리 밖으로 떨어져.”

    “쳇… 여전히 까칠하네.”

    잠자코 밀려난 것도 잠시, 시호는 금세 콧소리를 내며 그의 팔에 달랑 매달렸다.

    “근데 진짜 여긴 어쩐 일이야? 나 있는 줄도 모르고 온 거야? 왜? 무슨 일인데?”

    승원은 오만상으로 얼굴을 구긴 채 짜증스레 말했다.

    “넌 왜 해가 몇 번을 바뀌어도 말수가 줄지를 않아?”

    “엄머? 머리카락도 세월 따라 기는데 말수는 무슨 죄가 있다고 줄여?”

    “네 주둥이는 죄가 아주 많아. 그러니까 어지간히 좀 떠들어.”

    “아흥, 어쩜 이렇게 여전히 못됐니? 나 되게 설렌다, 지금?”

    “아… 이 또라이가.”

    떨쳐내고 들러붙기를 반복하며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전시현의 매니저가 곧 촬영에 들어가야 한다며 시호를 목 놓아 찾지 않았더라면, 그는 결국 그녀를 창밖으로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

    “에잇, 아쉽다. 오랜만에 봐서 좋았는데. 오라버니, 나 또 보러 와! 꼭! 알았지?”

    겨우 목숨 부지한 줄은 모르고 마지막까지 쫑알거리던 시호는 부러 페로몬을 듬뿍 담은 수국 향을 흩뿌리고 냉큼 사라졌다.

    “저런 미친.”

    손을 휘저어 떠도는 향기를 물리친 승원은 욱신대는 이마를 문질렀다.

    “하… 피곤하게 됐네.”

    생각지도 못했던 복병이었다. 저것을 피하자면 앞으로 촬영장엔 걸음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염병할.

    절절 고개를 흔들다 무심코 창밖을 내려다본 순간이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단 한 쌍의 눈과 정확히 시선이 얽혔다.

    언제부터였는지, 촬영을 마친 지안이 사뭇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지안 씨!”

    “…아, 네!”

    엉뚱한 곳에 정신이 팔려있던 지안은 흠칫 놀라 조감독을 돌아봤다.

    “이따 6시에 촬영 다시 들어갈게요. 진행 상황 봐야 하니까 좀 늦어질 수도 있고. 아시죠?”

    “네, 그럼요. 대기하고 있을게요.”

    걱정과 달리 오전 촬영을 무사히 끝냈다. 다음 촬영은 노을 진 하늘을 배경으로 담아야 했기에 저녁까지 여유가 생겼다.

    몇 시간의 대기조차 ‘여유’라 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단역 시절엔 밤새 대기를 하다 허탈하게 돌아갔던 적도 부지기수였다. 몇 시간의 대기쯤은 이제 그녀에겐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보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닌데….

    웃으며 조감독과 대화를 끝낸 지안은 금세 심각해진 얼굴로 눈앞의 건물을 올려다봤다.

    “어?”

    분명 직전까지 2층 창가에 서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건만, 잠깐 사이 그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 갔지?

    삐쭉 목을 늘이며 잘 보이지도 않는 창 안을 들여다보려 애쓰던 지안은 어수선한 주변을 휘둘러봤다.

    곧 전시현의 촬영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스태프들은 장비를 옮기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촬영 장소로 우르르 이동하는 스태프들을 살피던 지안은 시선이 분산된 틈을 타 후다닥 건물로 들어섰다. 성큼성큼 두 계단씩을 뛰어올라 금세 2층에 당도했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뭐야… 어디로 간 거야?”

    한 시간 전부터 구슬은 이미 제 주인의 기를 알아차렸다. 태연한 척하면서도 틈날 때마다 주변을 살폈던 지안은 일찌감치 그의 위치를 파악했던 참이었다.

    못 본 척 연기에 열중하다 촬영이 끝난 후에야 올려다봤을 땐,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연방 웃고 있던 여자.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그녀는 분명 전시현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대체….”

    둘의 관계에 대한 궁금증은 나중 문제였다. 그보다 먼저 심장이 철렁했던 이유는 그의 몸 상태가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아닌 여자의 손이 닿으면 까무러치는 그를 익히 알고 있었다. 이미 한 차례 사경을 헤매던 모습도 보지 않았던가.

    설마 어디 쓰러져 있는 거 아냐?

    덜컥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서 병천에게라도 연락을 해봐야 할 일이었다.

    휴대폰을 찾아 무심코 주머니를 뒤적대던 지안은 아차 하며 탄식을 뱉었다. 촬영을 하느라 휴대폰을 우진에게 맡겨둔 것을 깜박했다.

    정신머리하고는.

    입술을 꾹 감쳐 물며 서둘러 돌아서려던 순간이었다.

    “나 찾아?”

    “허…!”

    왼쪽 어깨 위로 허연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자칫 코끝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다. 놀라 힘이 풀린 무릎이 우스꽝스럽게 푹 꺾였다.

    기민하게 팔을 뻗은 그가 얼른 허리를 휘어잡지 않았더라면, 맨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을 테다.

    가뿐하게 지안의 몸을 받쳐 든 승원은 심심한 어투로 말했다.

    “깜짝이야.”

    지안은 힘 빠진 무릎을 세우며 버럭 핀잔했다.

    “건 내가 할 말이죠! 아, 깜짝 놀랐네.”

    “있는 거 알고 왔잖아. 놀라기는.”

    “안 보이다 갑자기 나타나니까 그렇죠.”

    정신이 없어 느끼질 못한 건지, 체취를 숨기려 그가 부러 도술을 부린 것인지. 꼭 이렇게 한 번씩 그의 기를 놓칠 때면 여지없이 심장이 거덜 나고 만다.

    새초롬히 눈을 흘기던 지안은 문득 그를 훑으며 걱정스레 물었다.

    “그나저나 괜찮아요?”

    그제야 지안의 허리를 놓아준 승원은 덤덤한 얼굴로 되물었다.

    “뭐가.”

    심히 별스럽지 않은 표정과 말투였다. 되레 당황한 지안은 그의 팔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물었다.

    “아니, 아까 전시현 선배가 이렇게 막 만지던데, 괜찮은 거예요?”

    그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을 받은 듯 의아한 얼굴로 눈썹을 삐죽 세웠다. 마치 ‘그게 왜?’ 라 묻는 듯 말똥한 눈빛이다.

    잠시간 눈꺼풀만 깜박이던 승원은 뒤늦게 외마디를 툭 뱉었다.

    “아.”

    그러고는 그제야 이마를 짚으며 힘없이 말했다.

    “안 괜찮아.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야, 지금.”

    “…….”

    누가 봐도 어색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라, 그를 훑는 지안의 눈길이 아리송해졌다. 물론 멀쩡하지 않아야 당연한 상황이지만, 왜 희한하게 멀쩡해 보이는 걸까.

    빤한 시선에 의아함이 짙어지자, 승원은 벽에 어깨를 툭 기대며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을 눈짓했다.

    “더럽게 맨바닥에 드러누울 순 없잖아.”

    그러니 이 고단한 몸을 억지로 세우고 있느라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실지로 쓰러져 골골대던 모습을 본 적이 있으니 무턱대고 의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얼마쯤 아리송하게 그를 살피던 지안은 우선 의심을 거두며 걱정스레 말했다.

    “그럼 일단 집에 가서 좀 누우세요.”

    그는 고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구슬이 옆에 없으면 소용없어.”

    “아… 난 아직 촬영이 남았는데….”

    지안은 곤란한 얼굴로 창밖을 돌아봤다. 해가 지려면 아직 반나절은 더 남은 시각이었다. 그런 다음에야 진행될 촬영은 언제쯤에나 끝날지 기약도 없다.

    어떡하지….

    난색을 지으며 뒷덜미만 문지르자, 그는 무겁게 몸을 바로 세우며 말했다.

    “괜찮아. 백 리 밖에 떨어져 있는 것만 아니면 살 만하니까. 촬영은 언제 끝나.”

    “오전 촬영은 끝났는데, 이따 6시에 또 들어가야 해요.”

    손목시계를 확인한 승원은 잠시 고민하다 벽에 기대었던 어깨를 툭툭 털었다.

    “그럼 아침에 타고 왔던 차로 와. 거기 있을 테니까.”

    “지금….”

    무어라 대꾸도 하기 전에 그는 홀연히 사라졌다. 여우 꼬리처럼 살랑 흔들리다 사라지는 연기를 망연히 바라보던 지안은 금세 미간을 좁히며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뭐지….”

    지난번과 비교하자면 혈색도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희한하게 아픈 것 같기도 하고, ‘매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대놓고 발연기라 되레 연기인지 아닌지 도통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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