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52화 (52/106)

52.

손에 든 서적이 무의미했다.

사락사락 착실히 책장을 넘기고는 있으나, 수아의 시선은 내내 월호의 눈부신 옆태에 머물러 있었다.

오늘따라 우리 월호 님의 분위기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맑은 혈색과 세상 인자한 미소가 어쩐지 제가 알던 월호 님이 아닌 것만 같다.

한참 의아하게 그를 살피던 수아는 병천에게 슬쩍 다가가 속삭였다.

“아무래도 뭔가 좋은 일이 있으신 듯하지요?”

줄곧 서적만 살피던 병천이 그제야 월호를 돌아보았다. 병천의 눈에도 분명 평소의 그답지 않았지만, 병천은 짐짓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오랜만에 편히 주무셨으니 개운하신 걸 테지.”

수아는 가는 눈을 뜨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흐응… 단지 그뿐이 아닌 듯싶은데….”

까딱까딱 기울던 고개가 일순간 번쩍 바로 섰다.

“아!”

별안간 야릇하게 눈을 접은 수아는 병천의 귓가에 간지럽게 속닥댔다.

“혹, 지안 님과 합방을 이뤄내신 것이 아닐까요?”

병천의 세찬 콧숨이 쥐고 있던 책장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저도 기대하지 않은 바는 아니나, 그것은 제 바람뿐이었음을 간밤에 이미 확인했던 참이었다.

“그랬더라면 해가 서쪽에서 떴을 것이다. 그만 떠들고 어서 찾기나 하여라.”

“아… 예에….”

금세 시무룩해진 수아는 들고 있던 서적을 꽂고 대강 다른 것을 뽑아들었다. 고작 표지를 펼쳤을 뿐인데 대번에 하품이 삐져나왔다.

천장까지 빼곡히 차 있는 이 많은 책 중에 독산 어르신의 자서전을 찾아내라니. 대관절 아침부터 이것이 무슨 날벼락인지 모를 일이다.

가뜩이나 책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수아에겐 몹시나 가혹한 명이었다.

“하아-음!”

또 한 장을 넘기다 여지없이 입을 쩍 벌리던 수아는 화들짝 제 입을 틀어막았다.

“쯧쯧.”

혀를 내두르던 병천은 수아의 손에 들린 책을 쏙 빼 들었다.

“가서 차나 내오너라.”

“헤헤… 옙!”

단번에 광대가 솟은 수아는 쏜살같이 서재를 빠져나갔다.

어휴, 저리 해맑아서야.

신나게 사라지는 수아의 꽁무니를 한심스레 바라보던 병천은 은근슬쩍 월호를 곁눈질했다.

착각이 아니라면, 그는 30분 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자세와 표정으로 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물며 손에 든 서적 또한 변함이 없었다.

저와 수아에겐 독산의 자서전을 찾으라 이르고 당신은 독서 삼매경에 빠졌나 싶었으나, 가만 보니 그가 손에 든 고서는 조선의 뼈아픈 회한의 역사가 담긴 ‘징비록’이었다.

한데 눈물로 얼룩진 전쟁의 기록을 들여다보며 저리 웃고 있을 일인가. 실지로 저 몽글몽글한 눈에 비친 것은 필시 눈물의 역사가 아닐 터.

더욱이 확신이 가능한 것은, 그의 낯빛이 저토록 훤해진 시점이 오늘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 정확한 시점이 아마도 엊저녁 귀가한 직후였으니, 21시쯤이 되었을까. 잠시 마트에 들렀다 돌아와 보니 그는 말끔히 샤워를 끝내고 차를 내리고 있었다. 저 의미 모를 미소를 매단 채로.

고로, 수아에겐 대강 둘러댔지만 편안했던 잠자리 또한 그의 심경 변화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니란 뜻이다.

거참 희한한 일이로세.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지안의 옥탑을 노려보며 이를 갈던 그가 해가 떨어진 후엔 전혀 다른 얼굴이 되어있으니….

이거야 원, 어느 장단에 꽹과리를 쳐야 할는지 참으로 헷갈리더란 말이다.

해서 혹시나 하는 기대에 피식피식 웃고 있는 그를 향해 물었더랬다.

‘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이십니다. 혹, 지안 님과 합방을 이뤄내신 건지요? ’

‘ 합방은 무슨. 손톱 하나 건든 적 없다. ’

‘ …어허, 저런. ’

그를 일희일노一喜一怒하게 만든 이는 지안 님이 분명할 터인데, 합방도 성공한 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인지….

병천이 사뭇 골똘한 얼굴로 그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

“…엇.”

이쪽으론 눈도 돌리지 않고 있던 그가 불시에 병천의 상념을 깨트렸다.

뒤늦게 병천을 돌아본 월호는 장난스레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왜. 새삼 잘 생겼어?”

병천은 떨떠름하게 눈가를 접으며 대꾸했다.

“…허허. 왜 아니겠습니까. 어찌나 빛이 나시는지 눈이 멀 지경입니다.”

월호는 피식 코웃음을 쳤다.

“급전 필요해?”

“단지에 차고 넘치는 것이 재물인 것을요. 그저 어제부터 기분이 좋아 보이시기에 궁금하여 좀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 들여다본다고 보일 속이 아닐 텐데.”

“예. 아무리 보아도 캄캄하니 답답하던 참입니다.”

월호의 입술이 소리 없이 유연하게 늘어졌다. 그저 웃어넘기는 것을 보아하니 그 캄캄한 속내는 역시나 시원히 내보이지 않을 모양이다.

대신에 그는 다른 말로 화제를 옮겼다.

“우진이 녀석은 어떻게 됐어. 제대로 찾아가긴 한 거야?”

“예. 촬영장까지 잘 뫼셨다 합니다. 지금도 아마 관리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을 것이고요.”

그가 지안에게 우진을 관리자로 보냈다는 사실을 오늘 아침에서야 전해 들은 병천이었다. 그러니까 현세의 말로 ‘매니저’라 일컫는 것이렷다.

‘ 우진이라면, 수아의 오라비 말입니까? 인천에서 중고차 매매 일을 하는 녀석이요? ’

‘ 그래. ’

그가 저를 통하지 않고 곧장 우진에게 연락했다는 것은, 그도 급히 결정한 사항이라는 뜻이었다.

“한데 어찌 직접 태워주지 않으시고요?”

월호는 그제야 읽지도 않던 징비록을 꽂아두고 책장을 휘둘러봤다.

“아침부터 욕 들어 먹기 싫어서.”

병천은 대번에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새 또 욕먹을 행동을 하셨습니까.”

되바라진 질문에 병천을 노려본 월호는 몹시 당당하고도 뻔뻔한 얼굴로 받아쳤다.

“내 회사의 고급인력을 좀 아낀 것뿐이야.”

“…예?”

당최 무슨 소리인지, 원.

어제 반나절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통 알 수 없으니 병천은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농땡이 부리지 말고 빨리 찾기나 해.”

병천은 금세 난색을 지으며 천장까지 빽빽하게 꽂힌 서적들을 휘둘러봤다.

“내다 버린 후에 또 어디에 들어와 꽂혔는지 기억이 안 나십니까.”

“하도 집어 던졌더니 그 영감탱이가 틈만 나면 위치를 바꿔버렸어.”

그렇게 이쪽저쪽 제멋대로 꽂혀 들어간 것이 장장 30년이니 아무리 월호인들 쉬이 찾아낼 재간이 없다.

“흐음….”

독산 어르신을 찾아가 여쭤보기라도 해야 하려나….

그 같은 고민을 하던 병천은 버릇처럼 월호를 흘끔 훔쳐봤다.

모른 척하라던 어르신의 당부가 있어 이미 그를 만났노라 이실직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 사실을 행여 월호 님이 알게 되는 날엔 진정 간이 뽑히고 말 터인데….

생각만으로도 부르르 진저리를 치던 병천은 문득 독산의 지난 목소리를 떠올렸다.

‘ 언제쯤에나 나를 찾을까 내내 기다리는 참이니라. 부러 단서도 곁에 두었음은 몰랐을 테지. ’

아…! 혹 단서라는 것이 그럼….

그럴듯한 추리에 번뜩 눈을 고쳐 뜬 병천은 안경을 추켜올리며 무수한 책을 신중히 살폈다.

제 입으로 이실직고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가 하루라도 빨리 독산을 찾아내길 도울 수밖에 없음이다. 간이 조막만 하니, 몰래 간자 노릇을 하는 것도 참으로 못 할 짓이었다.

뜨겁게 들이치는 햇살 아래에서 묵묵히 서적만 뒤적이길 얼마쯤.

탁-!

들고 있던 서적을 소리 내어 덮어버린 월호는 느닷없이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빙빙 굴렸다.

“아. 더는 안 되겠다. 기력이 딸려.”

병천은 여느 때보다 혈색이 맑은 그를 돌아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벌써 고단하십니까? 잠도 푹 주무셨을 텐데요.”

월호는 세상 멀쩡한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짐짓 피곤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글이 당최 눈에 들어오질 않아. 아무래도 구슬의 기를 받으러 가야 하겠다.”

“…….”

떨어져 있은 지 고작 10시간이나 될까 싶건만, 벌써 기력이 딸린다니. 더군다나 입가에는 그답지 않은 미소가 대놓고 걸려있음을 알고는 계실는지 모르겠다.

저 없는 동안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저 꾀병의 원인은 짐작 가는 바가 있었으니….

병천은 들고 있던 책을 슬렁슬렁 넘기며 무뚝뚝한 어투로 말했다.

“지안 님이 보고 싶단 말을 참 얄궂게도 하십니다.”

“…….”

열심히 눈두덩을 굴리던 손이 우뚝 멎었다. 병천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린 월호는 실소하며 물었다.

“이제 그냥 대놓고 들이대기로 했어?”

사뭇 근엄하게 턱을 세운 병천은 한껏 잘난 척 눈을 내리떴다.

“대놓고 눈에 보이니 모른 척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요.”

“하.”

헛웃음을 치던 월호는 책장에 삐딱하게 어깨를 기대어 병천을 마주 봤다.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 넌 대체 뭘 보고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병천은 대강 훑은 서적을 책장에 꽂아 넣고 다른 것을 빼 들며 차분히 말했다.

“흐음, 글쎄요. 지안 님 때문에 일희일노 하시는 모습이라든가, 전에 없던 배려라든가, 질투라든가, 뭐 그런…?”

배려? 질투? 대체 누구를?

월호의 눈썹이 황당한 듯 삐쭉 솟았다. 곁눈에 그의 표정을 담고도 병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덧붙였다.

“지안 님을 바라보는 월호 님의 눈빛 또한 예사의 것이 아님을 익히 보았고요.”

“아주 막 지껄이는구나, 네가.”

삐뚜름히 들린 그의 잇새로 여지없이 실소가 터졌다. 하나, 병천은 들고 있던 책을 덮으며 제법 옹골차게 월호의 눈을 마주 봤다.

“그렇다면 가정해 보십시오. 만에 하나, 지안 님께 깊이 연모하는 이가 생긴다면 월호 님의 심중은 어떠실 것 같습니까.”

“…….”

“그것 보십시오. 단번에 답을 못하시지 않습니까.”

“장난해? 고작 0.2초 지났어.”

“예전 같았으면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등 상관없다 일축하셨을 테지요.”

말은 바른말로, 예전에 그였더라면 ‘만에 하나’가 나오던 시점에서 이미 홀연히 사라지고도 남았을 테다.

부정할 수 없기에 월호는 이렇다 할 반박을 하지 못했다. 다만 그다운 방법으로 회피를 택할 뿐이었다.

“아, 시끄러. 다녀올 테니 책이나 찾아놔.”

병천은 속적삼 자락을 휘날리며 냉큼 스쳐 가는 그를 허탈한 얼굴로 돌아봤다.

확신은 이미 진즉에 하였으나, 이젠 반박도 않으시니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에효. 마음이라는 것이 어디 뜻대로 되는 것이던가….”

하나, 그 마음이 왜 하필이면 그저 도구로써 이용하고 버려야 할 이에게 가 닿은 겐지. 이래서야 이용도 하기 전에 감정에 휩쓸릴 판이 아닌가 말이다.

혼잡한 마음에 한숨을 폭 내쉬던 병천은 불현듯 고개를 세웠다.

“가만.”

그러고 보니, 촬영장으로 향하는 그의 걸음이 어째 거리낌이 없다.

그렇다는 것은….

“시호 님이 그곳에 계시다는 걸 잊으신 건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