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현관 센서가 번쩍 불을 밝혔다.
너른 거실을 가로지르며 훌렁훌렁 벗어 던진 옷가지가 멀찍이 세탁실까지 휙휙 날아갔다.
묘흔에게 일찍이 귀가 시간을 일러둔 참이었다. 해서 욕실은 이미 훈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하얀 타일 바닥에 발을 디디자 뿌연 수증기가 맨몸을 휘감았다.
월호는 들러붙는 수증기를 헤치며 곧장 욕조로 향했다. 고요하던 수면이 출렁출렁 발을 삼키고 커다란 몸을 품었다.
따스한 물에 깊이 몸을 담근 그는 욕조에 느긋이 등을 기댔다. 목을 꺾어 들자 절로 나른한 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심히 고단했다. 빨빨거리고 쏘다니던 지안을 따라다니느라 며칠은 두고 썼을 에너지를 몽땅 써버린 기분이었다.
허약한 인간의 몸 안에서 구슬의 기를 유지하고자 보약을 좀 먹여놨더니, 애먼 육체만 강철로 만들지 않았나 싶다.
“역시… 괜한 걸 먹였지.”
혀를 내두르다 이마에 팔을 척 걸치고 눈을 감았다. 시야를 차단하니 몸이 한층 노곤히 풀어졌다.
아. 이 얼마나 편안하고 따스한 온기인가.
진즉에 밤 시간은 평창동에서 보낼 것을, 서지안 고 깐깐한 계집 때문에 좁아터진 욕실에서 물을 끼얹어야 했던 지난날이 문득 억울하기까지 하다.
기분 좋게 호흡을 고르며 오래도록 포근한 고요를 즐겼다. 잠잠한 숨에 밀려 부유하는 수증기마저도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렇게 얼마쯤.
수전에 매달린 물방울이 더는 낙하하지 않을 만큼의 시간이 유유히 흘렀다.
그간 그는 미동이 없었다. 다만 이마에서 조금 미끄러진 팔이 눈두덩을 진득이 누른 채였다.
훈기로 한층 붉어진 입술에 스리슬쩍 미소가 걸린 건 그때였다. 캄캄한 시야에 보일 듯 말 듯 어른거리던 얼굴이 불쑥 선명해졌다.
‘ 아니, 솔직히 내가 뭐 어때서요? ’
‘ …나도 어디 가서 빠지는 사람이 아닌데…. ’
볼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붉어져서는, 저도 나름 잘났노라 입술을 삐죽거리던 모습이 생각할수록 우스웠다.
그리 토라져 놓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젖히고 콧노래까지 불렀다니.
나 참, 이런 깜찍한 계집을 보았나.
유연히 늘어졌던 입술이 급기야 실없이 피식피식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런 앙큼한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밤잠을 설쳐가며 열을 냈다니. 그토록 하잘것없는 일에 홀로 노하다 웃고 있는 자신이 이제 와 황당하기도 했다.
대관절 그 째깐한 인간 계집이 뭐라고 이리 감정이 제멋대로 널을 뛰는 건지.
“기가 차네….”
월호는 단전에 두었던 손을 들어 얼굴을 진득이 쓸어내렸다. 마른 얼굴을 촉촉이 적신 물이 웃음 띤 입가에 맑게 맺혔다.
그러니까 인간 주제에 감히.
감히 이 월호를.
“아주 쥐락펴락… 가관도 아니구나, 네가.”
도통 웃음이 가시지 않아 입꼬리가 뻐근할 지경이었다.
그저 헛웃음일 테지.
고 앙큼한 계집, 하는 짓이 아무래도 황당해서. 갈수록 이리저리 휘둘리는 자신이 기가 차서.
한데, 실없이 피싯피싯 웃고 있자니 문득 심장이 이상하다. 피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간질간질 은근히 퍼지는 낯선 소양감. 숨이 조금 가쁠 만큼 둥둥 뛰는 박동.
“…….”
가만히 감겨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들렸다. 반쯤 드러난 검푸른 눈동자에 그도 모르게 은근한 당혹감이 스쳤다.
눈을 뜨고도 뽀얀 수증기 속에 떠오른 얼굴은 아직도 분홍빛을 띤 채 얄밉게 그를 흘기고 있다.
그런데.
이 앙큼한 얼굴을 떠올리며 왜 느닷없이….
천장을 향해있던 그의 시선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찰랑거리는 맑은 물속을 빤히 응시하던 눈에 별안간 실소가 감겼다.
“하.”
그러니까 이놈이, 언제부터 이리된 거지?
다시금 고개를 꺾어 든 월호는 금세 말라버린 얼굴에 젖은 손을 올렸다. 붉은 입술이 황당한 듯 피식 기울어졌다.
“미친 건가.”
그래, 미치지 않고서야.
그믐달도 뜨지 않은 밤에, 이것이 이리 성이 날 리가.
**
여명이 밝아오는 이른 새벽.
모든 준비를 마치고 현관을 나서던 순간 건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갑작스런 호출로 회사에 일찍 출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미안해서 어떡하지?
“미안하긴. 괜찮아, 택시 타고 가면 돼.”
어젯밤에 약속을 잡을 때만 해도 별일이 없었건만, ‘갑작스러운 호출’이라니….
‘ 이건호 대리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아서 아침부터 매우 바쁠 예정이니까. ’
뭔가 상당히 구린 냄새가 솔솔 풍기는 것은 과연 기분 탓일까.
- 그래도 명색이 주연 배우가 뽀대 안 나게 괜찮겠냐? 동한 형한테라도 연락해 봐.
“알았어,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얼른 출근해.”
- 그래. 파이팅이다, 서지안! 궁금하니까 촬영 끝나면 전화하고.
“그래, 연락할게.”
웃으며 전화를 끊자마자 입꼬리가 절로 뚝 떨어졌다. 크게 삼킨 숨이 바닥까지 길게 뿜어져 나왔다.
“하아… 암담하네.”
한 손엔 옷 가방, 또 다른 손엔 메이크업 가방이 묵직하게 들려있었다. 짐도 짐이지만, 버스를 타자면 몇 번은 환승을 해야 할 터였다.
새벽까지 바에서 일을 하고 단잠에 빠져 있을 동한을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촬영장까지 가려면 택시비가 만만치 않을 텐데….
“아흐, 진짜 못돼 처먹어서….”
필시 구미호의 농간임을 확신한 지안은 그의 옥탑을 흠씬 노려봤다.
된소리라도 꽥 질러주고 싶지만, 그는 하필이면 어젯밤 옥탑에 오지 않았다. 병천의 말로는 잠자리가 영 불편해 앞으로 밤잠은 펜트하우스에서 자고 오게 될 거라 했다.
그게 하필이면 어제부터라니.
아무래도 욕 들어 먹을까 봐 미리 대피한 것 같기도 하다.
괜스레 그의 옥탑을 흘기던 지안은 문득 시간을 확인하고 서둘러 계단을 디뎠다. 한가하게 서서 창문이나 노려볼 여유가 없었다. 잠을 설치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가뜩이나 시간이 촉박했다.
바쁜 마음에 뛰듯이 계단을 내려가 대문을 열어젖힌 순간이었다.
“……!”
움찔한 손이 대문 손잡이를 꽉 붙들었다. 양발은 저도 모르게 주춤 밀린 채였다.
아직은 푸른 어둠이 깔린 골목에 웬 시커먼 형체가 우뚝 선 채 그녀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다독인 지안은 가는 눈을 뜨고 남자를 살폈다. 검은 슈트를 단정하게 차려입고 공손히 서 있는 남자는 일면식도 없던 낯선 이였다.
남자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지안 님. 막 도착했는데 엇갈리지 않아 다행입니다.”
‘지안 님’이라 하는 걸 보니 짐작되는 바가 있긴 한데….
“…지승원 이사님이 보내신 건가요?”
“네. 촬영장까지 안전히 모시라 하셨습니다.”
지안은 흡사 탐정 같은 눈으로 선한 인상의 남자를 샅샅이 훑었다.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 박제된 듯 자연스러운 눈웃음, 입이 커서인지 시원시원하게 찢어진 입가의 미소.
혹시나 했지만 아무래도 수아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말랑한 기운은 찾아볼 수 없다.
“수아 님… 은 아니신 거 같고….”
발끝까지 남자를 꼼꼼히 훑던 지안은 괜히 주변을 살피며 속삭이듯 물었다.
“혹시, 사람이세요?”
누가 봐도 사람처럼 보이는 이에게 사람이냐 물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니. 제 입으로 묻고도 황당하긴 하다.
하지만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싱긋 웃으며 답했다.
“아! 저는 수아의 오라비입니다. ‘우진’이라 불러주시면 되고요.”
“…….”
순간 할 말을 잃은 지안은 뒤늦게야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수아의 오빠라면 그 역시 토끼….
문득, 이 세상에 100% 순수한 인간의 몸을 하고 있는 이는 생각보다 매우 적지 않을까 싶은 무서운 생각이 스쳤다.
이 와중에 이젠 토끼 한 마리가 더 튀어나와도 크게 놀랍지도 않으니, 이 비현실적인 동물농장에 완전히 적응해버린 제 머리가 경이롭기까지 하다.
얼마쯤 머쓱하게 뒷덜미를 문지르던 그는 제 등 뒤로 줄지어 세워놓은 차를 손짓하며 말했다.
“어떤 차량을 선호하시는지 몰라 다양하게 준비해봤습니다.”
그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린 지안은 놀라 탄성을 내뱉었다.
“세상에….”
승합차, SUV, 대형 세단, 경차까지.
좁은 골목에 빼곡히 서 있는 이 많은 차를 혼자 다 끌고 왔다는 말인가.
“이게 무슨 일이야….”
눈앞의 광경을 혼몽하게 바라보는 사이, 갑작스레 양손이 가벼워졌다. 직전까지 쥐고 있던 가방들이 순식간에 우진의 손에 들려있었다.
그는 지안의 가방을 깃털처럼 가볍게 들어 보이며 물었다.
“어떤 차로 모실까요?”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푸른 새벽의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났다.
지안은 초연한 얼굴로 헛웃음을 쳤다.
하. 이 영감님이 정말, 자꾸 병 주고 약 주시네.
참으로 감사하긴 하나, 어째 은근히 농락당하는 기분이랄까.
“…지안 님?”
조심히 건너오는 재촉에 지안은 덧없이 흘러간 시간을 확인했다. 단순한 객기로 그의 배려 아닌 배려를 마다하기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안은 하는 수 없이 가장 무난한 디자인과 실용적인 크기의 승합차를 가리켰다.
“저, 그럼 저걸로 할까요?”
우진은 생기 넘치게 웃으며 후다닥 승합차로 달려갔다.
“네, 어서 타시죠!”
다소 연식이 오래되어 덜덜거리던 승합차가 골목을 떠난 후, 줄지어 서 있던 남은 차들은 거짓말처럼 일시에 사라졌다.
같은 시각.
신월당 앞 평상에 걸터앉아 형체를 지우고 있던 독산은 혀를 내두르며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이놈 저놈 아주 다 소환할 기세구나.”
연기와 함께 흘러나온 옅은 웃음소리가 교교한 골목에 오래도록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