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달이 몹시 밝았다.
창을 뚫고 들어오는 달빛이 저 깊은 방구석까지 늘어질 만큼이었다.
덕분에 공간을 부유하는 이불 먼지가 유난히 눈에 띄는 밤이었다.
부스럭 펄럭, 얼마 못 가 또다시 펄럭.
떠도는 먼지가 가라앉기도 전에 수차례 이불이 발광했다. 벌써 몇 시간째, 그는 좀체 자세를 잡지 못하고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결국 참다못한 병천이 몸을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어째, 오늘따라 더 불편하신 모양입니다.”
“…….”
길고 낮은 숨만 흐를 뿐 그는 말이 없었다. 탁상에 두었던 안경을 집어쓴 병천은 돌아누운 월호의 등을 내려다봤다.
“정 불편하시면 앞으로 밤잠은 청담동에서 주무시는 게 어떨는지요. 아침에 지안 님 곁으로 돌아오면 기력도 크게 약해지지 않을 테고요.”
늘어지게 하품을 뿜어낸 병천은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덧붙였다.
“지안 님도 더는 달아날 생각을 하진 않을 듯하니 말입니다.”
사실 자리가 좁고 불편한 것은 병천인들 다를 바 없었다. 지금만 해도 뒤척이는 월호에게 밀려 찌그러져 있느라 온몸이 뻐근했던 참이었다.
이제 밤 시간 정도는 댁으로 돌아가도 되겠지. 그리되면 아무래도 독산 어르신을 뵙기도 수월할 터이고….
며칠 생각만 했던 이야기를 마침맞게 꺼내었지만, 월호에게선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그새 잠이 드셨나….
목을 길게 빼고 커다란 어깨너머로 슬쩍 시선을 넘기던 때였다.
“…고얀 것 같으니라고.”
“예?”
느닷없는 소리에 병천의 두툼한 눈썹이 빼쭉 들렸다.
이윽고, 벌떡 상체를 세운 월호는 대뜸 헛웃음을 쳤다.
“하. 생각할수록 고얀 것이 아니냐.”
그가 예고도 없이 일어난 통에 흠칫 등을 물렸던 병천은 콧방울 위로 미끄러진 안경을 바짝 추켜올렸다.
“아니, 대관절 그것이 무슨…. 어떤 자가 감히 월호 님께 고얀 짓을 하였습니까?”
대신 꿀밤이라도 놓아줄 듯 짐짓 엄한 투로 물었지만, 그는 대꾸치 않고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드르륵-!
거칠게 창을 연 월호는 매서운 눈으로 맞은편 옥탑을 노려봤다. 작은 마당에 호젓이 놓인 평상이 성난 동공에 꽉 들어찼다.
이렇듯 눈앞에 두고 보니,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몇 시간 전의 상황이 더욱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러니까 대체, 그 앙큼한 반응은 뭐란 말인가.
“콜록! 아니, 그게 아니라, 콜록!”
무엇이 그리 놀랄 일이라고 한참 사레들린 목을 풀던 지안은 손부채를 펄럭이며 오버스럽게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아, 고양이 님 진짜 안 되겠네!”
허리춤을 척 짚고 서서는 헛웃음을 쳤다가, 이마를 붙들고 도리도리 고개도 젓다가, 기가 찬 듯 웃기도 하다가.
참으로 가관도 아니었더랬다.
“누가 누구를 무슨… 나 참 정말,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지.”
그래. 누가 누구를 무슨.
헛소리가 분명하긴 한데, 왜 서지안의 입에서 그 소리가 나오니 슬슬 기분이 언짢아지던지.
그러니까 행여라도 나란 놈은 저를 마음에 들이면 안 된다는 소리야, 뭐야.
괜히 비꼬아 생각하나 싶었지만 지안은 짐짓 위로라도 하는 투로 쐐기를 박았다.
“그래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았던 거예요? 하긴… 나도 껄끄러운데 영감님은 오죽하시겠어요.”
…껄끄러워?
내가 저를 마음에 들였다는 것이 뭐, 껄끄러워?
물론 개소리라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은 없으나, 행여 진정으로 마음에 들였다 한들 그것이 왜 껄.끄.러.운 일인가 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무려 이 월호의 마음에 품어주었다는데 큰절은 못할망정 어디서 감히 껄끄… 이런 괘씸한 계집 같으니.
“하, 어이가 없네.”
곧게 뻗은 눈썹이 사정없이 꿈틀댔다. 곱씹을수록 화가 치밀어 숨이 가쁠 지경이었다.
“그냥 무시해요. 헛소리 맞네, 헛소리.”
알고 있다. 내 999년 호생狐生에 그보다 우스운 소리를 들어본 일이 없다.
한데, 제 입으로 헛소리라 일갈하고도 저 앙큼한 것이 대번에 맞장구를 치니 왜 속이 뒤틀리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에잇, 난 또 뭐라고….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잖아요. 별거 아니네, 뭐. 나 그럼 들어가요. 대본도 외워야 하고 할 일이 많아서.”
기가 막혀 일언반구도 않고 헛숨만 쉬고 있었더니 어느 순간 눈에 보이는 것이 요망한 뒤통수였다.
야멸치게 닫아버린 문 너머에서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흘러나오는데, 와… 뭐 저런 계집이 다 있나 싶은 것이 어처구니가 없어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했다.
참으로 별난 계집인 줄은 알았지만 이런 황당한 일로 속에 천불까지 나게 할 줄이야.
눈이 시리도록 지안의 옥탑을 노려보던 월호는 부드득 이를 갈았다.
“이제 보니 저것을 만나게 한 것이 독산의 저주였구나.”
그의 뒤에서 눈치만 살피던 병천이 까치발을 들고 월호의 어깨너머를 힐끗 건너다봤다.
그의 성난 시선이 꽂힌 곳을 보아하니 ‘고얀 것’이 누구인지 알만도 하다.
“지안 님과 또 무슨 대거리를 하신 겝니까?”
이제는 지겨울 만도 하여 한숨 쉬듯 묻자 월호는 거칠게 창을 닫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이내 뾰족하게 빗뜬 눈이 난데없이 병천에게로 향했다.
“이게 다 네놈 때문이다.”
느닷없이 화살을 맞은 병천은 억울한 얼굴로 턱을 툭 떨궜다.
“허어. 갑자기 제가 왜 소환이 된답니까?”
“네놈이 헛소리를…! 아, 됐어. 잠이나 자.”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월호는 한동안 열에 받쳐 씩씩댔다.
죄도 모르고 혼쭐이 나 의기소침해진 병천은 이부자리 가운데에 대자로 뻗어 누운 그를 곤란한 얼굴로 바라봤다.
“아니, 그리 누우시면 저는 어찌….”
말해 뭣하나, 입만 아플 노릇이지.
병천은 하는 수 없이 쭈뼛쭈뼛 그의 발치에 쪼그려 누웠다.
펄럭, 또다시 이불 먼지의 발광이 시작됐다. 병천의 혼잣말이 부유하는 먼지 틈에 소심하게 섞여들었다.
“아휴우… 잠자기는 글렀구먼.”
밤이 깊어갔다. 환장하는 월호의 심경을 비웃듯, 무수한 별은 참으로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
일찍부터 일어나 부지런을 떨었다.
부족한 의상을 찾자면 오늘도 바지런히 편집숍을 돌아다녀야 했다. 오후에는 포스터 촬영을 하러 가야 하니 마음이 바빴다.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돌돌 감싸며 욕실을 나서자 구수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샤워를 하는 틈에 우렁각시처럼 다녀간 수아의 흔적이 밥상 위에 마법처럼 남아 있었다.
“어? 벌써 가버렸나?”
오늘 만나면 촬영할 때는 끼니를 챙기기가 힘들 것 같다고 얘기해볼 참이었는데, 참 날래기도 하다.
“에이… 저녁에 얘기해야겠네.”
작은 뚝배기 속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를 들여다본 지안은 우선 화장대에 앉아 스킨 뚜껑을 열었다.
찍어 바를 것이야 스킨과 로션, 쿠션 정도뿐이니 밥상을 향해 돌아앉은 것은 금방이었다.
여느 때처럼 물로 입을 축이고 고슬고슬 잘 지은 쌀밥을 오물거리다 보니 문득 헛숨이 샜다.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적응한 것 좀 보라지.
이젠 수아나 병천이 차려주는 밥상이 당연한 듯 느껴지니, 제가 생각해도 참 어이가 없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면서도 후루룩 찌개를 퍼먹고 삼삼하게 간을 맞춘 반찬도 빠짐없이 골고루 집어 먹었다.
적적하게 홀로 앉은 밥상에서 수저 소리만 차분히 울리기를 얼마쯤.
“아… 진짜.”
실로 갑작스러우나, 간밤의 제 상태를 돌아보자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순간이었다.
별안간 수저를 탁 내려놓은 지안은 불쾌한 얼굴로 고개를 세웠다.
“생각할수록 기분 나쁘네.”
일어나 샤워를 하고, 로션을 바르고, 밥과 반찬을 꼭꼭 씹어먹으면서도 저 구석진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들끓던 생각이 불쑥 튀어나와 이성과 충돌했다.
실은 밤새 한숨도 자질 못 했다. 눈 밑의 퀭한 어둠이 그 증거라면 증거였다.
그의 앞에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껄껄대고 콧노래까지 흥얼거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함을 금치 못하겠다.
“묘흔이 그러던데. 내가 널 여인으로 마음에 들였다고.”
그런데 뭐, 그게 왜?
아니, 그게 그렇게 신경이 예민해질 만큼 기분 나쁠 일인가?
“헛소리를 들어서 상당히 예민한 상태야.”
어차피 헛소리라 치부했으면 무시하고 넘기면 그만이지. 뭘 또 그렇게까지 대놓고 언짢은 얼굴로, 사람 기분 나쁘게.
“참 내.”
막말로 내가 뭐 어때서. 난 좋아할 가치도 없는 사람인가? 오해 좀 받은 게 그렇게까지 황당할 일이야?
물론 좋아해 주길 바라는 건 결.단.코 아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희한하게 기분이 상하더란 말이다.
“에이, 진짜. 고양이 님은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는.”
괜히 뚝배기 속만 푹푹 찔러대던 지안은 다시금 수저를 내려놓고 밥상을 물렸다.
“아, 몰라. 입맛도 없네.”
심통이 난 와중에도 깔끔하게 척척 개수대에 넣어 둔 밥그릇과 접시들은 이미 말끔히 비운 후였다.
**
바짝 쳐든 까치발에 온 힘이 실렸다.
연방 맞은편 옥탑을 살피며 살금살금 내딛는 걸음이 숨이 막힐 만큼 조심스러웠다.
잔뜩 움츠린 품에 에코백을 꽉 끌어안고 한 걸음, 두 걸음.
단 몇 초면 후다닥 내려오고도 남을 계단을 한참 만에야 벗어났다.
“휴우….”
성공적으로 지상에 발을 디딘 지안은 그제야 어깨를 활짝 펴고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오늘은 왠지 그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토록 단순한 일로 앵돌아진 마음이 참 유치하다 싶지만, 뜻대로 마음이 풀리지 않으니 저도 어쩔 수 없음이다.
품고 있던 에코백을 어깨에 둘러멘 지안은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대문을 나섰다.
하지만.
“…….”
문턱을 넘어선 발은 한 걸음 내딛지도 못한 채 바닥에 콕 박혀버렸다. 절망에 휩싸인 다갈색 눈동자에 그의 멀끔한 얼굴이 들어 차 있었다.
젠장.
요 며칠은 보이지도 않더니, 왜 하필이면 오늘따라 아침부터 나타나신 건지.
“타.”
세단에 등허리를 기대고 서 있던 그가 가볍게 턱짓하며 제 차를 가리켰다.
지안은 애써 여상한 얼굴로 에코백을 고쳐맸다.
“괜찮아요. 버스 타고 가면….”
“타라고.”
말허리를 끊어버린 목소리가 사포처럼 까칠했다. 삐뚤어진 눈썹과 치켜들린 눈매 역시 심히 사나웠다.
아직도 그 ‘헛소리’ 때문에 몹시 예민하신 모양이다.
참 내.
단번에 빈정이 상해버린 지안은 숨김없이 미간을 찌푸리며 뾰로통하게 대꾸했다.
“나 바빠요. 의상 픽업하러 가야 해요.”
“누가 뭐래? 차 필요할 거 아냐.”
“…….”
제 일정쯤이야 이미 그의 손바닥 안임을 잠시 망각했다.
그러니까 지금, 친히 기사라도 해주겠다는 건가.
무거운 옷 가방을 옮기자면 물론 그편이 좋긴 하겠지만, 저토록 까칠한 얼굴로 뜬금없이 베푸는 호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실컷 열 오르게 하고 해열제 주는 거야, 뭐야….
“안 탈 거야?”
어투로 짐작건대, 다음 대사는 분명 ‘싫으면 말든가.’일 테다.
지안은 양손에 커다란 옷 가방을 들고 종일 쏘다니다 꾀죄죄한 몰골로 포스터 촬영 현장에 당도할 제 모습을 떠올렸다.
그 사이, 참을성의 깊이가 몹시 얕은 그가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대사를 끄집어냈다.
“싫으면 말….”
“그럼 신세 좀 질게요.”
얼른 말허리를 가르고 저벅저벅 보닛을 돌아간 지안은 냉큼 보조석에 올라탔다.
에잇, 몰라. 유치하게 토라진 감정 따위가 뭐 그리 대수겠는가.
사람임에 어쩔 수 없다. 그녀는 결국 편의에 굴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