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노을도 모습을 감춘 검푸른 저녁.
녹초가 된 몰골로 현관에 들어선 지안은 양손 가득 챙겨온 옷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고 철퍼덕 뻗어 누웠다. 신을 벗을 기력조차 없어 발목 아래는 현관에 걸쳐진 채였다.
“아… 피곤해.”
하루가 쏜살같았다.
붕 뜬 정신으로 대본 리딩을 어떻게 끝냈는지도 모르겠다. 하물며, 리딩이 끝난 후 줄곧 편집숍을 돌아다니며 의상을 픽업하느라 체력이 더욱 고갈돼버렸다.
꼼짝 않고 눈을 감고 있던 지안은 발치에 던져놓은 옷 가방을 내려다봤다.
“옷이 부족할 것 같은데… 큰일이네.”
이제껏 단역만 주로 맡았던지라 그간엔 의상을 크게 신경 쓸 일이 없었다.
이번엔 하필 ‘패션 감각이 남다른 카페 사장’을 연기하게 되어 필요한 의상이 한두 벌이 아닐 터였다.
당장 내일모레면 첫 촬영에 들어가야 하는데, 홀로 준비를 하기엔 시간이 너무도 빠듯했다.
“이래서 소속사가 있어야 하는 거구나.”
내게도 나만을 위한 스탭들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껏 단 한 번 욕심내 본 적도 없건만, 오늘은 이다지도 절실할 수가 없었다.
“에효… 이럴 때가 아니지.”
종일 땀에 전 몸도 씻어야 하고, 챕터 별로 의상도 나눠야 하고, 외우지 못한 대본도 살펴봐야 했다. 정말이지 할 일이 태산이었다.
무거운 몸을 꾸역꾸역 일으킨 지안은 대여해온 옷 가방을 방구석에 들여놓고 긴 머리칼을 질끈 동여맸다.
곧장 티셔츠를 벗어 던지다 무심코 한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방 한편에 꺼내놓은 밥상에 하얀 망사로 짠 상보가 덮여 있었다.
지안은 그 위에 붙어 있던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 지안 님, 늦더라도 끼니는 꼭 챙기셔요. -수아- ]
상보를 걷자 잡곡밥과 닭가슴살 스테이크, 다섯 종류의 각종 반찬이 한 상 가득 놓여있었다.
“지극정성이네, 정말.”
이제 촬영에 들어가면 제때 끼니를 챙기기가 쉽지 않을 텐데…. 설마 촬영장까지 찾아와 진수성찬을 차리는 건 아니겠지.
“가만. 그럼 큰일인데….”
‘지안 님! 식사하고 촬영하시어요!’ 하며 많은 스태프 사이에서 해맑게 손을 흔드는 수아의 모습이 언뜻 스쳐 갔다.
수아라면 왠지 그러고도 남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강하게 뇌리를 강타한다.
지안은 부르르 몸을 떨며 세차게 고개를 털었다.
“아. 안 되지. 절대 안 돼.”
기필코 당부해야 할 일이었다.
서둘러 탈의를 하고 욕실로 향한 지안은 빠르게 샤워를 마쳤다. 시간이 더 늦기 전에 승원과 식사에 관한 조율을 마쳐야 한다.
분명히 말하건대, 요 며칠 이상하리만큼 보이지 않았던 그의 소식이 궁금해서는 절대로 아닌 거다.
**
옥상 난간에 다가선 지안은 의아한 얼굴로 입바람을 당겼다.
“이상하네.”
늘 방구석이 좁다며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그를 알고 있었다. 해서 그의 옥탑 창엔 늦은 새벽까지 환한 빛이 머물곤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8시밖에 되지 않은 이 시간에 맞은편 옥탑은 불이 꺼져있었다. 하물며 무드등조차 켜두지 않은 채였다.
“무슨 일이 있나….”
계약서를 주고받은 그날 이후로 며칠째 그를 보지 못했다. 이따금 이상하다 싶긴 했지만 이래저래 정신이 없어 깊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한데 불 꺼진 창을 보니 이제야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한다.
혹여 또 누군가 그의 몸에 손을 댄 건 아닐까. 그 때문에 어딘가에서 끙끙 앓고 있는 거라면….
“그럼 연락을 했을 텐데….”
그래, 설마하니 그건 아닐 것이다. 그런 중차대한 일이라면 병천이나 수아가 일찍이 저를 찾고도 남았을 테니까.
하루 이상 떨어지면 안 된다고 하더니 괜찮은 건가….
자못 걱정스레 콧숨을 내쉬던 지안은 문득 헛웃음을 쳤다.
“나도 참…. 이젠 안 보인다고 걱정을 다 하고.”
자조적인 실소를 뱉으면서도 불 꺼진 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때였다.
“아… 그래?”
“……!”
갑작스레 뒤통수에 닿는 목소리에 지안은 가슴팍을 덥석 붙들었다.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평상에 다리를 꼬고 앉은 그가 발목을 까딱이며 싱긋 웃고 있었다.
한껏 치솟았던 지안의 어깨가 탄식과 함께 뚝 떨어졌다.
“아후… 깜짝이야.”
오늘은 어째, 늘 먼저 풍겨오던 향도 느끼지 못했다. 하물며 구슬도 별다른 기색이 없었건만 언제 갑자기 나타난 건지.
지안은 콩닥대는 심장을 다독이며 짐짓 원망스런 얼굴로 물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승원의 입꼬리가 짓궂게 휘어졌다.
“네가 내 걱정하던 때부터.”
“아, 진짜….”
내심 민망해 입술을 삐쭉대던 지안은 불퉁한 얼굴로 핀잔했다.
“놀랐잖아요. 소리도 없이 갑자기.”
“한두 번이야? 새삼스럽게 놀라기는.”
그러게, 언제는 불쑥불쑥 나타나도 놀란 척이나 했었던가. 오늘따라 그의 기척을 느끼지도 못한 구슬이 야속할 따름이다.
괜히 머쓱해진 지안은 난간에 등허리를 툭 기대며 말을 돌렸다.
“무슨 일 있었어요? 며칠 안 보이던데.”
“난 너 매일 봤어. 네가 못 봤을 뿐이지.”
“…그래요?”
형체를 지웠어도 제 눈엔 보였을 텐데, 엉큼하게 어디에 숨어 있었기에….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자, 그는 얄궂게 웃으며 물었다.
“왜, 보고 싶었어?”
지안은 대번에 경악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아아니요?”
제가 생각해도 유별나게 강한 부정이었다. 멋쩍은 기색을 얼른 숨기자, 승원의 미간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뭘 그렇게까지 경기를 해?”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참 내. 농담 두 번 했다간 기절하겠네.”
고깝게 빈정대는 목소리는 오늘따라 전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여느 때처럼 얄밉게 장난은 치면서도 묘하게 안색이 무거웠다.
역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어느 틈에 곰방대를 꺼내어 무는 그를 은근히 살피던 지안은 불 꺼진 그의 옥탑을 돌아보곤 물었다.
“고양이 님은 어디 가셨어요?”
깊이 빨아들인 연기가 그의 잇새로 몽글몽글 뿜어져 나왔다.
“바빠. 누구 좀 찾느라.”
“아아….”
병천까지 자리를 비웠다면 분명 뭔가 일이 생기긴 한 것 같은데….
설령 그렇다 한들 저완 하등 상관없는 일이지만, 눈앞에서 저리 무게를 잡고 있으니 신경을 끊으려야 끊을 수가 없다.
알은척 오지랖을 부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며 입술만 감쳐 물던 때였다. 그가 제 옆자리를 턱짓하며 말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와서 앉아. 안 잡아먹어.”
“…….”
그러잖아도 종일 쏘다니느라 다리가 저릿저릿하던 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안의 발꿈치는 갈 곳도 없는 난간에 되레 찰싹 붙었다.
설마하니 잡아먹을까 염려한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그의 곁에 다가서기가 영 민망했다.
알몸을 보인 후로 의지와 상관없이 심장은 벌렁대고 얼굴은 제멋대로 불타오르니, 매번 여간 난감한 것이 아니었다. 연기를 업으로 삼지 않았더라면 이렇듯 아무렇지 않은 척 대화를 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안은 애써 무신경한 척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요. 서 있는 게 편해요.”
단호히 철벽을 치자, 그는 곁에 두었던 의문의 보온병을 눈짓했다.
“그럼 이거 마시고 다시 서 있든가.”
“그게 뭔데요?”
“보약. 토끼가 전하래. 한 방울도 남기지 말라고.”
“웬 보약을 다….”
“너 말고 구슬 먹이려고 가져온 거니까 잠자코 와서 마셔.”
쳇… 그럼 그렇지.
구슬이 사람보다 호강하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나름 반항한답시고 꼼짝을 않자 그의 빤한 시선이 건너왔다. 실로 가시 돋친 협박보다 매서운 눈빛이 아닐 수 없었다.
에이씨….
마지못해 쭈뼛쭈뼛 다가앉은 지안은 밥그릇만 한 보온병 뚜껑에 진한 보약을 쫄쫄 따랐다.
이름 모를 약초의 시큼한 향이 따끔하게 콧속을 찔러댔다.
그래도 약이라는데 성분도 모르고 막 먹어도 되는 건가….
그 같은 걱정이 피어오르자 불현듯 지안의 미간이 우그러들었다. 그에게 낚이기 시작했던 그 날의 막걸리 사태가 번뜩 떠오른 탓이었다.
“이거 설마….”
“이상한 거 안 탔어.”
지안의 생각을 빤히 꿰뚫어 본 그가 미연에 군소리를 차단했다. 그럼에도 미심쩍게 냄새를 킁킁 맡는 그녀를 보며 승원은 실소를 뱉었다.
“목숨 걸고 맹세라도 해?”
어차피 죽지도 않으면서….
하등 미끼도 되지 않는 소리였지만 지안은 못 이긴 척 입을 가져다 댔다.
계약서까지 쓴 마당에 허튼짓을 하진 않겠지.
고작 종이 나부랭이를 생각보다 몹시 의지하고 있는 그녀였다.
“할 얘기는 뭔데.”
찔끔 보약을 들이켜던 지안은 쓰디쓴 맛에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와중에 삐쭉 솟은 눈썹은 ‘무슨 얘기요?’ 하며 묻고 있었다.
“할 말 있어서 기웃거린 거 아냐?”
“아…! 그….”
냉큼 용건을 뱉으려던 입술이 어쩐지 꾹 다물렸다.
가까이에서 보니 역시 그의 눈빛이 영 복잡해 보인 까닭이었다. 이 분위기에 밥 얘기나 하자니 괜히 눈치가 보인달까.
뭐… 어차피 수아에게 해도 될 얘기니까….
“아니에요. 다음에 할게요.”
“왜.”
“그냥, 기분이 좀 안 좋아 보여서요.”
승원의 입꼬리가 기가 찬 듯 삐쭉 솟았다.
“어쩐 일로 배려하는 척이야?”
아우. 하여튼 밉게 말하는 것도 재주야, 진짜….
“나도 분위기 파악은 할 줄 알거든요?”
바람처럼 피싯 웃어넘긴 그는 먼 산으로 시선을 돌리며 곰방대를 깊이 빨아들였다. 가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희뿌연 연기가 느리게 새어 나왔다.
“기분이 안 좋은 게 아니라.”
말과 함께 흐르는 연기가 오묘하게 밤하늘로 퍼져나갔다. 연기를 피해 눈을 살짝 찌푸린 모습은 답지 않게 시니컬하다.
“헛소리를 들어서 상당히 예민한 상태야.”
새삼 지나치게 잘난 그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던 지안은 얼른 눈을 고쳐 뜨며 태연한 척 되물었다.
“무슨 헛소리요?”
잠시간 입을 다문 그는 얼마쯤 먼 산을 바라보다 지안을 돌아봤다.
“…….”
이마에서 눈으로, 코끝에서 입술로, 턱선을 따라 다시 눈으로.
말도 없이 지그시 바라만 보는 시간이 숨 막히게 길어지고 있었다.
난데없이 제 얼굴을 훑는 그에게 왜 그러느냐 묻지도 못했다. 마치 구석구석 핥아내리 듯 깊고도 녹녹한 눈빛이 왈칵 숨을 옥죈 탓이었다.
바짝 힘이 실린 손끝이 하얗게 피를 몰아냈다. 양 볼에는 여지없이 홍조가 차오르고 있었다.
어색하게 눈동자만 굴리던 지안은 결국 시선을 푹 떨궜다. 쓴맛도 까맣게 잊은 채 공연히 보약만 한가득 입안에 머금었을 때였다.
“묘흔이 그러던데.”
다소간 침묵하던 그의 입이 열린 것은, 하필이면 그 순간이었다.
“내가 널 여인으로 마음에 들였다고.”
“푸후웁…!”
휘황찬란하게 뿜어져 나간 갈색 물방울이 달빛 아래 보석처럼 반짝였다.
0.1초 후의 날벼락을 용케 짐작한 그는 기민하게 세운 결계 뒤에서 심드렁히 눈을 내리떴다. 투명한 막에 가로막힌 갈색 액체가 허공에서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게 이렇게 면전에 대고 물 뿜을 일이야?”
“콜록! 아니, 그게 아니라, 콜록!”
뒤늦게 입을 틀어막고 벌떡 일어난 지안은 시뻘게진 얼굴로 한참 동안 기침만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