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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는 밤-46화 (46/106)

46화

“엇. 어찌 나갈 채비를 하시고…. 지안 님을 따라나서시렵니까?”

주전부리를 챙겨 들고 현관에 들어서던 병천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밤새 잠을 설쳐 오늘은 쉬시겠거니 했건만, 그는 이미 멀끔한 차림으로 매무새를 다듬고 있었다.

“안 가. 볼일이 있어. 너도 어서 채비해. 서지안은 어차피 대본만 받고 올 테니 따라붙을 필요 없으니까.”

“예? 갑자기 무슨 일이시기에….”

승원은 어리둥절하게 묻는 병천의 눈앞에 종이 한 장을 척 들어 보였다.

병천은 검지로 안경테를 삐죽 올리며 눈을 가늘게 접었다.

“…이것이 무엇이온지….”

“독산 할아범 몽타주.”

그림을 빤히 들여다보던 병천의 눈이 사뭇 놀란 듯 번쩍 들렸다.

“…독산 어르신, 말입니까?”

“그래. 이 영감을 좀 찾아야겠다.”

종이를 갈무리한 승원은 허공에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퉁겼다.

이내 섬광이 번쩍 일어난 자리에 붉은 족자 하나가 둥둥 떠올랐다. 가운데에 돌돌 감긴 검은 실을 당겨 풀자 기다란 족자가 바닥까지 촤르륵 펼쳐졌다.

그것을 빠끔 들여다본 병천의 안경알 위로 검은 글씨가 빼곡히 들어찼다.

그 안에 적힌 이름들은 이 나라 곳곳에 정체를 숨긴 채 살고 있는 신수의 명단이었다.

이런. 이 많은 신수를 다 찾아가 물어볼 작정이신 겐가.

신중하게 명단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를 잠자코 바라보던 병천은 넌지시 물었다.

“독산 어르신은 갑자기 어인 연유로 찾고자 하십니까?”

승원은 나열된 명단을 차분히 훑으며 말했다.

“무당 할멈이 아무래도 수상해. 독산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분을 찾는 것이 그리 녹록지 않을 터인데….”

소심하게 중얼거리던 병천은 난색 어린 얼굴로 덧붙였다.

“만에 하나 찾는다 해도 어르신께서 쉬이 말씀을 해주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적어도 낌새는 느낄 수 있겠지.”

어허. 이거야, 원….

짐짓 심각하게 눈알을 굴리던 병천은 골똘한 얼굴이 됐다.

한량 같아 보여도 한다면 하는 분인데, 이를 말려야 하나 어쩌나….

병천이 입술을 짓씹으며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나저나 너.”

어느 틈에 병천을 돌아본 승원의 눈이 가늘게 접혀 있었다.

“무당 할멈에 대해 알아 오랬던 게 언젠데 아직 소식이 없어?”

뾰족한 눈초리에 괜히 마른침을 삼킨 병천은 냉큼 착실히 답했다.

“그것이, 태생부터 차근차근 밟고는 있습니다만 정말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평범하게 살다가 스무 해 때 신내림을 받은 후로는 내내 저 신월당에서 일절 몸을 옮긴 적도 없고요.”

“일전에 신당을 비웠던 일은.”

“아, 그때는 부산에 있는 사찰에 들렀다 온 것인데, 그곳에 승려로 있는 자가 할멈의 혈육이라 합니다. 한 해에 한두 번씩 다녀오는 모양인데, 그 사찰도 딱히 수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그래?”

가만히 듣고 있던 승원의 눈썹이 까딱 치켜들렸다.

“그걸 왜 이제 말해.”

“아니, 저는 그저… 말씀드렸다시피 정말 별것이 없기에….”

별것이 없으면 없었노라 일찍이 말을 했으면 되었을 일을, 왜 뭐라도 있는 양 물을 때까지 입을 다물고… 구시렁구시렁.

특별한 성과가 없는 것이 실망스러워 괜히 잔소리를 퍼붓던 때였다.

“영감님!”

창 너머로 속닥대는 지안의 외침이 불쑥 건너왔다. 불투명한 창에 비친 지안의 실루엣을 돌아본 승원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 저놈의 영감 소리는 대체….”

다시금 손가락을 퉁겨 족자를 감춘 그는 부드득 이를 갈며 명했다.

“저 계집 머릿속에서 ‘영감’ 좀 없애버려.”

“허허…. 가능한 일을 좀 시키십시오.”

마뜩잖게 혀를 찬 그는 귀찮은 기색을 폴폴 풍기면서도 쏜살같이 사라졌다.

홀로 남아 절절 고개를 내젓던 병천은 창 너머를 돌아보며 다시금 근심 어린 얼굴이 됐다.

잇새로 흐른 한숨이 길고도 짙었다.

**

계약서를 훑던 눈에 실소가 감겼다.

그가 추가하라 이른 조항 이외에 전과 달라진 내용은 없었지만, 3번 조항의 글씨 크기가 배로 커져 있었다.

얼마나 강조하고 싶었으면 끝음절 뒤에 마침표도 다섯 개나 야무지게 붙여놨다.

“참 내.”

헛웃음을 삼킨 승원은 두 장의 계약서에 기꺼이 사인을 휘갈겼다.

지안은 그가 펜을 놓기 무섭게 제 몫의 계약서를 홀랑 가져가며 말했다.

“이제 확실히 계약된 거예요. 맞죠?”

곱게 접어 다이어리에 꼼꼼히 챙겨 넣는 그녀의 모습에 승원은 짐짓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그믐의 고통을 경험하고도 포기할 줄 모르는 근성이 참으로 대단할 따름이었다.

“빨아달라고 매달리지나 마.”

“아… 진짜. 그런 말 좀 하지 말라니까….”

화장으로도 채 숨기지 못한 홍조가 대번에 양 볼을 붉게 물들였다. 여지없는 반응에 승원의 입꼬리가 절로 휘어졌다.

선머슴 같은 계집이 이럴 때만 수줍은 여인이 되니, 놀려먹는 재미가 은근히 쏠쏠했다.

“두고 보자고, 어쨌든.”

괜히 눈초리를 세운 지안은 얄밉게 그를 흘겼다.

한 번의 경험이 얼마나 호되었던가. 저도 차마 두 번 다시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장담할 수는 없으니 입은 꾹 다문 채였다.

붉어진 얼굴이 민망해 얼른 등을 돌린 지안은 옷장을 열며 말했다.

“그럼 용건 끝났으니까 이제 그만 가보세요. 저 나가봐야 해요.”

“하, 오라 가라 간도 크네.”

저 좀 봐요! 하며 제집으로 날아오라 손짓한 것이 고작 10분 전이었다.

아담하고 동그란 밥상을 협상 테이블 삼아 마주 앉은 지는 5분도 채 되지 않았건만, 볼일 끝났다고 내쫓으려는 꼬락서니가 고약하기 이를 데 없다.

술주정 부린 것이 면구스러워 시뻘건 얼굴로 꽁지를 내뺀 것이 얼마나 되었다고 또 저리 뻔뻔해진 것 좀 보라지.

볼 때마다 느끼긴 했지만, 저를 이토록 하찮게 대하는 인간은 하늘 아래 진정 처음이었다.

참 희한한 계집일세.

구미호라는 사실만으로도 겁을 먹을 만한데, 하물며 사람을 산산조각내어 죽이는 모습까지 보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겁을 내기는커녕 갈수록 맞먹으려 드니….

대체 저 머릿속엔 뭐가 들어 있을까.

바쁘게 옷장을 뒤적이는 뒷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승원은 새삼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넌 내가 무섭지도 않아?”

잠시 고민이라도 하듯 옷장을 뒤적대던 손이 멈췄다. 이내 자그마한 머리통이 한쪽으로 스르륵 기울었다.

그게 저렇게까지 골똘히 생각할 일인가.

어이를 잃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고민을 끝낸 지안이 말간 얼굴로 돌아봤다.

“어차피 나 못 죽일 거잖아요.”

무기를 쥔 자, 무서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 고로 갑은 본인이란 뜻이었다.

이야… 어쩜 뇌도 이렇게나 맹랑할까.

“오늘만 살자가 삶의 모토야?”

탄식하며 묻자 순진한 얼굴이 의아함을 품고 멀뚱해졌다.

승원은 부러 섬뜩하게 미간을 좁히며 덧붙였다.

“백일이 지나면 굳이 널 살려둘 이유가 없는데, 난.”

“…….”

맹랑한 머리로 미처 거기까지 생각지는 못했는지 내내 분홍빛이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괜히 옷자락만 만지작거리던 지안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바꿨다.

“무섭, 긴 해요. …안 그런 척하는 거지.”

소리 없이 웃음을 삼킨 승원은 당당하게 끄적여놓은 계약서의 마지막 조항을 내려다봤다.

위 조항을 어길 시 갑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을의 야비한 계획을 무산시킬 수 있다.

하여튼 웃긴 계집애.

죽는 것이 두려워 냉큼 말을 바꾸면서 호기롭게 잘도 적어놨지.

실로 콩알만 한 간의 크기를 숨길 줄도 모르면서 이깟 종이쪼가리를 무기로 쥐고 있겠다는 패기가 참 귀엽기도 하다.

“근데….”

시치미를 뚝 떼고 옷을 챙겨 들던 지안이 문득 그를 돌아보며 운을 뗐다. 사뭇 진지해진 시선이 답지 않게 조심스러웠다.

“그 저주 말이에요. 백일 안에 못 풀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이 질문이 지금에서야 건너오는 것이 과연 정상인 것인가.

“그게 이제야 궁금해?”

지안은 머쓱한 얼굴로 뒷덜미를 문질렀다.

“아니, 되게 일찍 궁금하긴 했는데….

혹시 짐작하고 있는 그게 맞다면 괜히 부담스러울까 봐….

삼킨 뒷말이 주파를 타고 꼬물꼬물 흘러왔다.

그녀가 짐작하는 바는 응당 ‘죽음’뿐일 터. 제 손에 그의 목숨을 쥐고 있다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그것이 은근히 부담이 됐던 모양이었다.

아무렴 저 성격에 그러기도 할 테지. 해서 이 환장할 상황에도 차마 모른 척하지 못한 것일 테고.

그의 가슴 아래에서 느슨히 양팔이 꼬였다. 버릇처럼 기울어지는 잇새로 실바람 같은 한숨이 샜다.

차라리 죽음이었더라면 이렇게 그녀를 붙들고 살고자 발악할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5백여 년 전 그믐달이 떠오르던 그 밤.

그에게 독산의 저주를 대신 내리러 온 짐승의 모습은 실로 끔찍했다.

덩치는 코끼리를 방불케 하고 생김은 흡사 불도그를 닮은, 다리도 여섯이나 되었던 희귀한 괴수.

수북하고 지저분한 털에 박혀 서식하며 찐득한 점액질을 싸재끼던 이름 모를 기생충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득실댔다.

생각을 할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다. 독산에게 뇌를 조종당하여 오로지 늑대와 같은 울음소리만으로 의사표현을 하는 한낱 짐승일 뿐이었다.

소름 끼치게 포효하며 그 찐득한 앞발로 제 심장에 구슬을 박아넣던 그때의 순간은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그것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리라.

천여 년의 화려한 삶을 등지고 그 꼴로 영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그의 드센 자존심으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해서 차라리 죽고 말겠노라, 자결을 시도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찌르고 꺾고 도려내고 목을 매고.

하나 아무리 피를 흘려도 죽을 만큼의 고통만 잇따를 뿐. 정신을 차리면 눈앞은 여전히 현생이었다.

독산, 그 지독한 영감탱이 덕분에.

괴수의 모습을 떠올리다 괜히 부득 이를 갈던 승원은 저도 모르게 쥐었던 주먹을 툭 풀며 말했다.

“죽어.”

간단명료한 대답에 지안의 움직임은 흡사 정지화면처럼 뚝 멈췄다.

얼마쯤 눈도 한번 깜빡이지 않고 말끄러미 그를 건너다보던 지안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진짜, 죽어요?”

그는 짐짓 무덤덤한 얼굴로 재차 말했다.

“그래.”

구태여 괴수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테다. 어차피 그에게 그것은 죽음과 매한가지였다.

“…….”

괜히 숙연해진 지안은 할 말을 잃고 입술을 감쳐 물었다. 제 코가 석 자인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가여워 보이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러게 그저 짐작만 할 것이지, 뭐하러 확인은 해서는.

승원은 느닷없이 어색해진 분위기를 가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니까….”

소리도 없이 사라진 형체는 지안의 눈앞에서 번쩍 나타났다.

갑자기 코앞에 밀려온 향기에 몸을 물릴 새도 없었다. 졸지에 옷장과 그의 사이에 갇힌 지안은 댕그래진 눈을 흠칫 치켜들었다.

특유의 나른함이 물씬 깃든 검푸른 눈동자가 홀리듯 그녀의 시선을 빤히 당겼다.

“웬만하면 그냥 좀 안겨.”

늘 그랬듯 뻔뻔한 명령이 어처구니는 없는데, 이번만큼은 된소리도 내지 못했다.

지나치게 가까웠다. 제멋대로 쿵쾅대는 박동을 단속하기에도 정신이 빠듯했다. 이젠 눈만 마주쳐도 붉어지는 얼굴은 이미 화끈화끈 난리가 났다.

“9백 년을 넘게 살았어도.”

길고 하얀 손이 느린 화면처럼 그녀의 왼쪽 볼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죽음에 초연해지진 않으니까.”

아슬아슬하게 솜털을 스친 감각에 지안은 화들짝 몸을 떨었다.

이윽고, 느닷없이 손가락 사이에 집힌 머리칼이 조금 팽팽하게 당겨졌다 싶던 순간.

“칠칠맞게 밥풀은 그만 좀 붙이고.”

“…….”

지안은 참았던 숨을 툭 뱉으며 그가 머리칼에서 떼어낸 밥풀을 얼른 거두었다.

**

지난 이틀간 곳곳에 숨은 신수를 찾아다녔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등잔 밑은 캄캄한 법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달이 기울어가는 야심한 밤.

옥탑방에서 생활한 후로 늘 잠을 설쳤던 월호는 오늘에서야 업어가도 모를 만큼 단잠에 푹 빠졌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곳곳을 돌아다니던 와중에도 틈틈이 지안을 살피는 것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기력이 축날 만도 할 것이었다.

그의 숨이 고르게 번진 지 한두 시간 남짓.

곁에 쪼그려 누워 미동도 않고 있던 병천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코끝까지 끌어올린 이불을 슬쩍 내리며 월호의 동태를 살피는 모습이 몹시 조심스러웠다.

그의 잠귀가 워낙 밝으니 숨이나 옳게 쉴 수 있으랴.

호흡마저 꾹 참고 이부자리를 벗어난 병천은 까치발을 들고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현관을 나섰다.

문을 닫고도 얼마쯤 문 너머의 기척을 살피던 그는 속으로 꼬박 열을 센 후에야 움츠렸던 등을 곧추세웠다.

“후우….”

깊은 심호흡이 여름밤 공기 속에 길게 늘어졌다.

이윽고, 두툼한 몸이 날래게 난간에 뛰어오른 것은 한순간이었다.

비록 순간이동은 연마하지 못했으나, 사뿐히 난간을 오르내리는 것쯤은 200년 묵은 고양이에겐 일도 아니었으니….

덩치만큼이나 묵직한 바람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지상으로 내려온 병천은 힐끗 옥상을 살피곤 냉큼 등잔 밑으로 몸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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