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45화 (45/106)
  • 45화

    남자의 강인함이 물씬 풍기는 스모키한 우디향.

    이젠 익숙해진 향기였다.

    이 향기에 전신이 녹아났던 ‘그날 밤’ 이후로 그녀의 신경은 신기하리만큼 그의 향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얼마쯤 떨어진 곳에서 미미한 바람에만 실려 와도, 그가 없는 곳에서 비슷한 향기만 풍겨 와도, 그의 향을 기억하는 몸은 제멋대로 긴장해 슬금슬금 열이 오르곤 했다.

    하물며 그러한데, 그 품에 폭 안겨있는 지금은 오죽할까.

    “…….”

    지안은 눈두덩을 찌르는 햇살에 천천히 눈을 떴다. 뻑뻑한 눈꺼풀을 온전히 뜨기도 전에 먼저 느껴진 감각은 그의 향이었다.

    풀어헤친 속적삼, 깨끗하고 단단한 가슴, 근육의 생김을 따라 보기 좋게 그늘진 복근까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던 지안은 슬그머니 눈을 치켜들었다.

    툭 불거진 목젖과 수염도 나지 않은 매끈하고 갸름한 턱이 선명하게 각막에 맺혔다.

    이미 그때부터 눈앞의 현실을 깨달은 심장은 쿵쾅쿵쾅, 열심히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당황해 점점 커다래지는 눈동자가 시뻘건 입술을 지나 고요히 감긴 눈매에 닿던 순간이었다.

    그의 눈이 실처럼 가늘게 뜨였다. 그 안에 숨어 있던 회색 눈동자가 무심히 아래로 향했다.

    “…….”

    그와 눈이 마주친 지안은 어벙하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이게….”

    그간 당황스러운 일이 한두 번이었던가. 이쯤은 이제 놀랄 축에도 속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된 거예요?”

    멍하니 묻는 목소리엔 그저 황당함뿐이었다.

    얼마쯤 지안을 빤히 내려다보던 월호는 푹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할 말을 왜 네가 선수를 쳐.”

    “…….”

    언뜻 좁아지는 미간에서 무거운 피로감이 느껴졌다. 마치 이 피로의 원인이 ‘너’라는 듯 은근한 원망도 스민 채였다.

    도무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는 없으나, 이곳이 ‘그의 옥탑방’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인지하고 말았다.

    하물며 ‘왜 날 여기로 데려온 거예요!’ 라고 무턱대고 억지를 부릴 수 없는 이유는,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스멀스멀 꿈같은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콩콩, 현관에 이마를 박으며 비틀거리고 있는 자신의 실루엣.

    ‘ 영감니임, 자요? ’

    철컹철컹, 잠긴 문고리를 돌리며 꼬인 혀로 꼬장을 부리는 목소리.

    ‘ 푸후… 저 지안인데요오… 문 좀 열어봐요, 영감니임…. ’

    번개처럼 뇌리에 박히는 장면에 지안은 긴장 어린 얼굴로 더듬더듬 물었다.

    “설마… 내 발로 왔어요? 여기를?”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권태롭게 그녀를 바라봤다. ‘내 그럴 줄 알았지.’ 하는 얼굴로 실룩 기울어진 입술이 가만히 열렸다.

    “묘흔.”

    순간, 있는지도 몰랐던 병천의 기척이 발아래서 불쑥 튀어나왔다.

    “예에. 아구구, 허리야.”

    “허! 깜짝이야….”

    고개를 번쩍 쳐든 지안은 가슴팍을 덥석 붙든 채 발아래를 내려다봤다.

    얇은 카디건을 이불 삼아 구석에 틀어박혀 있던 병천이 뻐근한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몸을 일으켰다.

    “기침起枕하셨는지요.”

    지안을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병천의 몰골도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니, 왜, 거, 거기 그렇게….”

    병천은 멋쩍게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월호 님이 억울하시지 않게 증언은 해야 할 것 같아 여태 나가질 못하였습니다. 허허허….”

    “…….”

    에헴, 그러니까 그것이 어찌 된 영문인고 하니….

    병천의 담담한 ‘증언’이 이어질수록 지안의 얼굴은 서서히 붉게 물들어갔다.

    때는 축시寅時 경.

    ‘ 지안 님? 아니, 야밤에 어인 일로 예까지…. ’

    ‘ 아. 저 잠시, 영감님께 볼 일이 좀 있어서 그러는데… 주무시려나요? ’

    ‘ 그것은 아니온데…. ’

    ‘ 그럼 잠시만 실례를 좀…. ’

    ‘ 어엇! ’

    여전히 좁은 방구석에 적응하지 못하고 잠 못 이루던 새벽이었다.

    ‘ 뭐야, 너. ’

    은은한 무드등 하나만 켜두고 책을 읽고 있던 월호는 어둠을 뚫고 비틀비틀 방안으로 침입한 지안을 그저 어리둥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 아휴우, 이놈의 구슬이 진짜… 소맥 좀 마셨다구 취했나 바아. 나 못 살겠네, 증마알. ’

    ‘ …뭐? ’

    전에 없이 요상한 말투로 중얼거리며 그의 곁에 철퍼덕 주저앉은 지안은 왼쪽 가슴을 퍽퍽 두드리며 느닷없이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 아니, 자려고 누웠는데에, 얘가 자꾸 영감님한테 가야 한다고오, 가야 한다고! 사람을 왜케 못살게 구는지, 증말 내가 짜증이 나서…. ’

    ‘ …얘 뭐라는 거야? ’

    ‘ 흠… 구슬을 품고도 이리 취하신 걸 보니, 구슬도 소맥은 미처 해독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

    여태 막걸리 이외의 술은 마셔본 일이 없었다. 아무리 들이켜도 신통방통한 구슬이 막걸리를 족족 해독해버리니 취하는 기분이 무엇인지 경험해 본 적도 없던 그였다.

    하나, 아무리 다른 술이라 한들 어느 정도는 감당이 되었을 텐데….

    ‘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너. ’

    ‘ 아,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것 좀 치워봐요, 쫌. ’

    무어라 혼자 꿍얼거리던 지안은 다짜고짜 그가 들고 있던 책을 뽑아들더니 그의 가슴팍에 콕 고꾸라졌다.

    ‘ 구슬이가요, 주인님이 그립대…. 빨리 좀 데려가라잖어…. 아우, 그니까 내 말이…. 쫌 데려가면 얼마나 좋겠냐구…. ’

    구슬을 밀어 넣기라도 하려는 듯 그의 맨가슴에 제 몸을 꾹꾹 비벼대는데, 가만 지켜보자니 기가 차 헛웃음만 나오더랬다.

    ‘ 하. 참, 가지가지 하네. ’

    찰싹 붙은 두 사람의 모습에 괜히 얼굴을 붉히던 병천은 지안의 팔을 조심히 붙들며 말했다.

    ‘ 월호 님은 그만 주무십시오. 제가 댁에 눕혀드리고 오겠습니다. ’

    ‘ 됐어. 여기서 재워, 그냥. ’

    ‘ 여기서 말입니까? 허나 방이 좁아서…. ’

    ‘ 그냥 둬. 여기. ’

    그러며 지안을 꽉 당겨 안는 그의 힘이 자못 어마무시했다.

    아아. 혹여 다른 ‘큰 뜻’이 있으신 건가.

    문득 훼방꾼이 된 것 같아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그는 카디건 하나만 휙 던져주곤 방구석을 턱짓했다.

    ‘ 가긴 어딜 가. 이 계집 눈 뜨자마자 펄쩍 뛸 것이 뻔한데 증언은 해야 할 거 아냐. ’

    ‘ 아… 예에. 그렇게 쓸데없이 깊은 뜻이…. ’

    그러한 뜻으로, 병천은 하는 수없이 방구석에 틀어박혀 주섬주섬 카디건을 덮었더랬다.

    그 후로 언뜻 잠이 들만 하면 벌떡벌떡 일어나 했던 소리를 또 하고, 또 하고….

    ‘ 구슬이 좀 데려가믄 얼마나 좋을까아… 네? ’

    묘시卯時가 다 돼가도록 그녀의 깜찍한 주정은 쉬지 않고 이어졌으니, 병천과 월호의 낯빛이 어찌 개운할 수 있으랴.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사건의 경위를 듣고 있던 지안은 송구한 얼굴로 고개를 푹 떨궜다.

    아… 젠장. 어쩐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도 않더라니. 이렇게 한 방에 갈 줄이야.

    “제가… 술이 너무 과했네요. 죄송해요, 고양이 님.”

    병천은 두툼하게 부은 눈을 싱긋 접으며 손사래를 쳤다.

    “괜찮습니다. 그러실 수도 있지요. 일백 년 전 철없던 시절에 월호 님께 대들다 밤중에 쫓겨나서는 쪽방 구석에 한지 한 장 덮고 쪼그려 잤던 추억도 새록새록 떠오르고, 이놈은 나름 향수에 젖었던 밤이었습니다. 허허허.”

    “아휴…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어익후, 아닙니다.”

    꾸벅 고개를 박는 지안을 따라 맞절을 하던 병천은 카디건을 곱게 접어두고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자, 저는 그럼 할 일을 하였으니 이제 그만 나가봐야겠습니다. 그럼 편히들 쉬시지요.”

    “아뇨, 저도 같이…!”

    뒤따르려 얼른 일으키던 몸이 별안간 휘청 기울었다.

    “엇!”

    손목을 붙들어 당긴 악력에 벌러덩 자빠진 지안은 다시 그의 품에 갇힌 채 반들반들한 가슴에 코를 박아야 했다.

    “더 자. 너 때문에 한숨도 못 잤어.”

    지안은 커다란 손에 뒤통수를 붙들린 채 벗어나려 어깨를 꼬물댔다.

    “아, 아니, 그러니까 그만 가볼 테니 편하게 주무시라구요.”

    “밤새 괴롭혀놓고 어딜 도망가. 양심도 정도껏 없어야지.”

    철컥, 그 틈에 병천이 저 홀로 방을 빠져나간 소리가 야속하게 울렸다.

    꼼짝없이 그에게 갇힌 지안은 민망해 붉어진 얼굴로 눈을 홉떴다.

    “복수하는 거예요?”

    “알았으면 얌전히 있어.”

    “하… 주정 부린 건 정말 죄송한데요….”

    이미 날도 밝았고, 밥도 먹어야 하고, 나 빨리 준비하고 대본도 받으러 가야 하는데….

    차마 큰소리는 내지 못하고 꿍얼대는 소리가 한참 가슴팍을 간질였지만, 평온하게 감긴 그의 눈은 미동이 없었다.

    다만, 은근슬쩍 휘어지는 입꼬리는 그답지 않게 짙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

    장맛비가 말라붙어 신월당의 평상이 영 지저분했다.

    들고 온 신문 하나를 떼어내 평상 위에 깔아놓은 승원은 그 위에 앉아 신문을 쫙 펼쳐 들었다. 곁에는 따끈한 연잎차도 함께였다.

    오늘따라 동네가 고요했다. 신문 세 장을 정독하도록 사람은커녕 길고양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에 활자를 담기엔 최적의 환경이었으나, 사위의 기운에 가만 집중하고 보니 공간을 떠도는 기가 사뭇 기묘했다.

    이는 분명, 저 허름한 문 너머에 있을 할멈이 평상에 죽치고 앉은 그를 익히 느끼고 있으리란 뜻일 터.

    “이 할멈은 알고도 나와보질 않네.”

    승원은 비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신문을 넘겼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 밤이 새더라도 버텨볼 작정이었다.

    후로 신문 넘기는 소리만 사락사락 골목을 울리길 얼마쯤.

    별안간 귓가에 싸한 바람이 일었다. 이내 서너 뼘 떨어진 곁자리에 낯선 온기가 내려앉았다.

    승원의 입매가 실소를 품고 삐죽 솟았다.

    설마하니 이렇게 등장할 줄이야.

    “이젠 시치미 떼기도 포기했나 봐?”

    남은 차를 호로록 비운 그는 경소를 띄며 덧붙였다.

    “도술을 막 부리네, 할멈.”

    참으로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실력이었다. 병천과 수아 정도의 신수였다면 감히 느끼지도 못했을 만큼 능수능란하다.

    평상 위로 한쪽 다리를 올려 무릎을 끌어안은 모란은 버릇처럼 담배를 물며 다짜고짜 물었다.

    “가시나는 자빠뜨맀나 우예 됐노.”

    “하.”

    황당해 헛숨을 터트린 승원은 신문을 넘기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남의 은밀한 사생활을 너무 대놓고 물으시네, 민망하게.”

    모란은 담배 연기를 뿜으며 코웃음을 쳤다.

    “지럴을 한다.”

    그저 들고만 있던 신문을 그제야 곁에 내려놓은 승원은 다리를 척 꼬며 모란을 돌아봤다.

    언젠가 이 얼굴을 본 적이 있었던가. 몇십, 아니 몇백 년 전에라도.

    노쇠한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머릿속에 가득 쌓인 기억들을 대강 훑어봤지만, 도통 모르겠다. 하긴 9백 년의 기억을 이 짧은 순간에 다 끄집어내기란 애초에 무리였다.

    “나이나 좀 압시다.”

    뜬금없는 소리에 모란의 흐린 시선이 힐끗 그를 향했다.

    “난 신유년 현종 12년생인데, 할멈은 어떻게 되시나?”

    쭈글쭈글 주름진 입술 사이로 뽀얀 연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모란은 입속에 떠돌던 연기를 말끔히 뱉어낸 후에야, 피싯 웃으며 말했다.

    “알아가 뭐할낀데.”

    “연장이면 존대라도 해드려야지. 이래 봬도 예도는 아는 놈이라.”

    “퍽도.”

    거친 입술에 비웃음이 걸렸다. 깊게 빨아들인 필터 끝에서 빨간 불씨가 길게 타들어 갔다.

    후우…. 짙은 연기를 시원하게 뿜어낸 모란은 평상 아래에 넣어둔 깡통을 꺼내어 몇 번 태우지도 않은 담배를 비벼 껐다.

    “천 년이 얼마 안 남았을 낀데.”

    “…….”

    “살라카면 버뜩 자빠뜨리야 안 되겠나.”

    시익, 늘어진 늙은 입술이 얄궂은 웃음을 머금었다.

    무어라 대꾸도 하기 전에 번쩍 사라진 빈자리를 보며 승원은 가늘게 눈을 접었다.

    “참… 알다가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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