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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는 밤-44화 (44/106)

44화

장맛비가 물러나고 오랜만에 맑은 밤이었다.

상쾌한 바람을 타고 고소한 치킨 냄새가 진동했다.

“건배!”

챙-! 맞부딪친 맥주잔의 마찰음이 하늘 높이 경쾌하게 울렸다.

하하 호호 즐겁게 떠드는 소리는 빌어먹게 싱그럽기도 하다.

…저런 반응을 원한 것은 결코 아니었는데.

나는 어찌하여 한순간의 치기와 짧았던 판단으로 저자의 생에 뜻밖의 행복을 선사하였는가.

이건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묘흔.”

팔짱을 낀 채 맞은편 옥탑의 잔치판을 바라보던 월호는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저렇게 잔치를 벌일 만큼 즐거워할 일이야?”

그의 곁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던 병천은 무신경한 얼굴로 답했다.

“아무렴 그렇지요. 일개 작은 부서의 대리가 무려 기업의 M&A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

월호는 심드렁하게 눈을 내리뜨며 병천을 돌아봤다.

“그 어려운 일을 왜 안 말렸어.”

허, 나 원 참.

병천이 헛숨을 툭 뱉으며 그를 마주 봤다.

“그걸 지금 시비라고 거십니까?”

본인이 생각해도 이런 억지가 없으니, 그는 혀를 쯧 차며 괜히 툴툴댔다.

“넌 일 처리가 쓸데없이 빨라서 탈이야.”

“허허… 예에, 제 탓이라 치시지요.”

쓸데없이 빨랐던 병천의 일 처리 덕분에 하늘 아래 둘도 없는 지기는 한날 경사를 맞았다.

건호는 느닷없이 초특급 해외 파견의 기회를 얻었고, 지안은 오대민 감독의 드라마에서 비중 있는 서브 주연으로 발탁됐다.

이 모든 것이 그의 계략대로 척척 이루어졌지만, 지안의 옥탑 평상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아무래도 월호 님이 오해를 하신 모양입니다.”

“무슨 오해.”

“3개월을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도 두 사람은 저리 축하만 나누며 좋아하지 않습니까.”

마침맞게 닭 다리 하나씩을 집어 든 건호와 지안은 세상 즐겁게 꺌꺌 대며 사이좋게 닭 다리를 뜯었다.

“저자가 지안 님과 깊은 정을 주고받은 사이라면 축하는 할지언정 이미 부둥켜안고 아쉬워 눈물을 흘렸겠지요.”

서로 가슴을 맞대어 안고 엉엉 울어 젖히는 그림을 상상하던 월호는 대번에 미간을 구겼다.

그 유별난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은 내심 다행이나, 저리 좋다고 궁둥이를 들썩대는 것 또한 꼴 뵈기 싫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저 지기 간에 필요 이상으로 가깝게 행동하던 지난 모습들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게 되었으니 영 꺼림칙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병천이 덧붙였다.

“저들에게 서로는 동성 친구나 다름없지 않나 싶습니다. 그만큼 격의가 없는 것이지요. 월호 님께서도 수백 해 전에 격의 없이 지냈던 기방의 행수가 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

그래, 그런 여인이 있기는 하였지. 홀딱 벗고 단둘이 온천수에 몸을 담가도 심심하게 세상 흘러가는 얘기나 나누었을 만큼 절친했던 여인이.

묘하게 설득은 되는데, 이러나저러나 답은 하나다.

“오해든 아니든, 난 저자가 그냥 거슬리는 거야.”

월호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건호를 빤히 노려봤다. 그런 그를 말끄러미 바라보던 병천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가 난데없이 이건호를 못마땅히 여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저는 이리 훤히 보이거늘, 과연 언제까지 본인의 진심을 ‘개소리’라 여기실는지.

‘ …뭔 개소리야? ’

‘ 그것이 아니라면 이건호 그자에게 왜 그리 신경을 쓰시는 겐지…. ’

‘ 행여 특별한 관계라면 곤란하잖아. 둘이 붙어먹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다 된 밥에 코 빠트릴 일 있어?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가서 처리나 해. ’

과했다. 평소보다 확실히 까칠한 반응이었다. 하여 병천은 이미 확신한 참이었다.

9백 년을 넘게 사신들 무엇하나. 제 마음 하나 제대로 들여다볼 줄도 모르는 것을.

에효…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지, 원.

병천이 그 모르게 한숨만 짓고 있을 때였다. 또 한 명의 손님이 텅텅 계단을 울리며 등장했다.

“이야, 이게 무슨 일이야?”

양손이 무겁게 맥주와 소주를 챙겨온 남자는 재즈바의 주인, 박동한이었다.

“어? 왔어요?”

이미 몇 잔의 소맥을 야무지게 들이켠 지안은 발갛게 익은 얼굴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본 적 없던 지안의 해맑은 웃음에 월호는 기가 차 헛웃음을 쳤다.

“아주 살판이 났구나.”

어찌 된 것이 저 계집의 주변에는 사내들뿐인 것인지.

이미 저들 셋의 우정을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오늘따라 단란한 쓰리샷이 유난히도 거슬린다.

하물며 형체를 지웠다 한들 지안의 눈엔 분명히 그가 보일 테지만, 그녀는 사내들과 잔치판을 즐기느라 그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괘씸한 계집 같으니….

그들만의 즐거운 밤이 무르익어 갔다. 너나없이 상기된 얼굴로 떠드는 소리도 끊임이 없었다.

“그럼 너랑 전시현이랑 투톱 되는 거야?”

“에이, 투톱은 너무 거창하고. 말 그대로 그냥 서브인 거죠, 뭐.”

“어쨌든 서브 주연도 주연 아니냐! 크하, 진짜 대박이다, 서지안. 건호 넌 어쩌다가 갑자기 싱가폴까지 가게 됐냐?”

“에헴! 제가 이래 봬도 꽤 인정받는 사원 아니겠습니까! 이 이건호의 진가를 윗선에서도 알아주신 거죠, 핫하!”

제 가슴팍을 탕탕 치며 거만하게 턱을 치켜드는 건호의 모습에 월호는 황당해 실소를 터트렸다.

촐싹거리는 것이 영 꼴 뵈기 싫더니, 지랄염병의 재주까지 남다를 줄이야.

급격히 짜증이 몰려온 월호는 까칠하게 말했다.

“그냥 철회할 수 없어?”

“이미 늦었습니다. 그저 미운 놈 떡 하나 더 줬다 여기십시오.”

“떡도 어지간해야지. 쯧.”

결국 보다 못한 월호는 된소리를 구시렁대며 홱 돌아섰다. 그를 삼킨 바람이 오늘따라 유난히 차고 시리다.

그가 곁을 비우기 무섭게 지안의 시선이 힐끗 이쪽을 향했다.

눈이 마주친 병천은 인자한 미소를 띠며 공손히 묵례했다.

슬쩍 눈가를 접어 맞인사를 대신한 지안은 옥탑방의 창 쪽을 힐끔 돌아보곤 다시금 건배를 나누었다.

**

심히 불편하다. 신경 쓰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써도 뜻대로 되지가 않는다.

열심히 닭 다리를 뜯으며 즐겁게 웃고는 있지만, 실은 닭고기가 어디로 넘어가는지도 잘 모르겠다.

자주 가던 호프집에서 만나자던 건호에게 굳이 제집으로 오라 했던 이유는 오로지 구미호 어르신 때문이었다.

그가 불필요하게 신경 쓸 것이 마음에 걸려서.

기력을 온전히 찾은 것도 아니라는데, 괜히 또 성치 않은 몸으로 따라붙어 저 때문에 더 고단해지기라도 할까 봐.

그런데, 저렇게 대놓고 옥상에 서서 지켜보고 있으니 이건 또 이것대로 불편해 죽겠다.

아… 왜 저렇게 노려보는 거야, 대체….

막걸리만 마시랬는데 소맥을 말아먹어서 뿔이 난 건가.

혹여 그 때문인가 싶어 구슬은 전혀 문제가 없으니 걱정 마시라 속으로 열심히 어필도 해봤지만, 들은 건지 만 건지 그의 뾰족한 눈초리는 거둬지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를 등지고 앉을 것을, 곁눈에 자꾸만 걸리니 시간이 갈수록 괜히 얼굴이 화끈거려 죽을 맛이었다.

설마… 저러다 갑자기 저 백발의 모습으로 눈앞에 번쩍 나타나는 건 아니겠지?

“촬영은 언제부터야?”

내내 한쪽으로 치우쳐있던 정신이 동한의 목소리에 번뜩 되돌아왔다.

“아, 월요일에 대본 리딩하고 수요일에 바로 들어간대요.”

“헤에, 그렇게 빨리? 일정이 촉박하네.”

“일정은 오래전부터 잡혔는데 캐스팅이 좀 늦어졌다나 봐.”

“아아. 이래저래 준비하려면 정신없겠다.”

그러게, 정신이 없다. 촉박한 일정은 둘째치고 지금 당장 저 뾰족한 시선 때문에 정신이 없어 죽겠다.

무슨 맛인지도 모른 채 닭 날개를 오물거리던 때였다.

휘잉, 순간 차게 불어온 바람에 일순 뺨이 서늘해졌다. 누구도 느끼지 못했을 일이지만 이건 분명 일반적인 여름밤의 공기가 아니다.

그를 내내 곁눈질만 하던 지안은 그제야 맞은편 옥탑을 힐끗 돌아봤다.

아니나다를까, 그가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던 자리가 비어있었다.

와… 진짜 초능력자 다 됐네. 이걸 느끼다니.

“자자, 어쨌든 좋다. 건배 한번 하자!”

뒤늦게 병천과 눈인사를 나누던 지안은 꿈쩍 놀라 잔을 들었다.

벌써 네 번째 꽉 채운 잔이 상쾌한 밤공기를 가르고 맞부딪쳤다.

곧장 잔을 기울이며 슬쩍 건너다본 맞은편 옥상엔 그새 병천도 사라진 채였다.

불 켜진 창 안을 주시하며 꿀꺽꿀꺽 시원하게 잔을 비운 지안은 그제야 꽉 막혀있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 이제 좀 살겠네.

“크흐, 시원하다!”

네 번째 잔 만에 진심에서 우러나온 탄식이 터졌다. 그의 눈을 벗어나니 입안을 적시는 술이 이렇게도 달콤할 수 없다.

“너 이제 그럼 바에 못 나오겠다?”

“아아, 그러게…. 촬영 들어가기 전까진 나갈게요.”

“됐어, 인마. 시간도 촉박한데 컨디션 관리도 좀 해야지. 이번 드라마 대박 나면 벽에 사인이나 하나 걸러 와.”

“와, 내 사인 걸어주는 거예요? 백 장도 더 써주지, 그럼.”

혹시 몰라 얼마쯤은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수없이 불 켜진 창을 돌아보며 그의 동태를 살폈지만, 한 번의 건배가 더 이어지도록 그는 잠잠했다.

그 후로 30여 분. 그의 옥탑 창에 번지던 환한 빛이 캄캄하게 사그라들었다.

다행히 눈앞에 번쩍 나타나 함께 건배를 나누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을 모양이다.

“자, 한 잔 더 합시다!”

지안은 그제야 마음 편히 오늘의 파티를 만끽했다.

이따금 심장이 따끔거릴 때마다 불현듯이 수아의 당부가 스치긴 했지만….

‘ 월호 님은 그간 막걸리만 드셨기 때문에 아쉽게도 그 외의 술에 대한 반응은 파악하지 못했답니다. 그러니 다른 술을 드신다면 여우 구슬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저도 알 수가 없네요. ’

이미 평소의 주량을 넘기고도 정신은 외려 이전보다 또렷하니 희한한 일이었다.

그도 파악하지 못했던 반응이란 건 아마,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럴듯한 확신을 내리고 보니 어느 순간엔 손톱만큼 불안했던 마음도 말끔히 사라졌다.

“에잇, 그래. 먹고 죽자!”

“이 대리의 초고속 승진과 서 배우의 대성공을 위하여, 건배!”

새벽이 깊어가도록 유희를 만끽할 때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조심해서 가아! 정신 똑바로 잡고!”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건호와 동한의 뒷모습이 그 밤 기억에 남은 마지막 장면이 되리란 것을.

잠이 든 지도 모르게 밝은 햇살에 눈을 떴을 때, 벌어진 속적삼 사이로 훤히 드러난 가슴팍을 마주하게 되리란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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