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장맛비에 젖은 축축한 아침.
지안은 경계 어린 눈으로 창밖을 빼꼼 내다봤다.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얼마쯤 빤히 지켜봤지만, 맞은편 옥탑에선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아리송하게 고개를 갸웃거린 지안은 통달한 도인처럼 왼쪽 가슴을 진득이 눌렀다. 이렇듯 어설프게나마 집중을 하면 여지없이 그의 기가 뜨끔뜨끔 느껴지곤 했는데….
웬일일까. 구슬의 움직임도 희한하게 평온하다.
“진짜 출근한 건가?”
그제야 현관을 나선 지안은 난간 근처까지 다가가 맞은편 건물을 기웃기웃 건너다봤다.
정말 아무도 없구나 확신이 드니 안도는커녕 되레 의아함만 차올랐다.
‘ 오늘은 월호 님께서 어쩐 일인지 출근을 하신다 합니다. 저도 회사에 직접 나설 일이 있어 나가봐야 하고요. 수아도 부르지 말라 하시니 오늘 하루는 편히 쉬시지요. ’
이른 아침부터 끼니를 챙기러 온 병천이 일렀던 말이었다.
비몽사몽간에 흘려들었던 말이 언뜻 꿈인 줄 알았는데,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웬일이야….”
어쩐 일로 수아도 붙이질 않고. 이제 그만큼 믿음이 두터워진 건가…. 아니면 이제야 제가 가여워 보이기라도 했나.
물론 도망갈 생각은 없었지만 막상 자유가 주어지니 이상하게 찝찝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옆에 없어도 괜찮으려나….”
병천의 말로는 그날의 일로 그 역시 온전히 기력을 되찾은 것은 아니라 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엔 답지 않게 묵묵히 운전만 했었다.
관자놀이를 꾹 누른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모습이 이제 보니 통증 탓이었던가 싶기도 하다.
“아, 왜 또 사람 찝찝하게….”
괜히 꺼림칙한 마음에 멀뚱히 서서 이마만 긁적이던 때였다.
텅, 텅. 느릿하게 계단을 밟는 소리에 지안이 놀라 계단으로 향했다.
“어? 할머니!”
좀체 옥탑으론 올라오지 않던 모란이 난간을 붙들며 힘겹게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얼른 계단을 내려간 지안은 모란이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받아들었다. 따끈하게 찐 옥수수가 많이도 들어있다.
“힘든데 왜 여까지 올라오셨어. 전화를 하시지.”
“운동 삼아 쫌 움직끄리야지.”
“운동하실 거면 평지를 걸으셔. 계단 오르락내리락하다가 무릎 다 나간다니까.”
“됐다마.”
기어코 남은 계단을 오른 모란은 굽은 허리를 한 번 쭉 펴고는 평상에 몸을 놓았다.
“아침부터 웬 옥수수예요?”
“복덕방 할마씨가 부적값이라고 주대.”
“부적 써주고 또 먹을 것만 받으셨어? 그래서 돈은 언제 번대?”
“벌어가 뭐할끼고. 저승에 쥐고 갈 것도 아이고.”
“아유. 하여튼 못 말려, 우리 할머니.”
주방에서 쟁반과 접시 하나를 꺼내 온 지안은 평상에 퍼지고 앉아 봉지를 풀었다. 알맞게 익은 따끈한 찰옥수수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이왕 받은 거 맛나게 드셔요.”
“니 마이 무라. 이가 물러가 뜯지도 몬한다.”
다 방법이 있지, 하며 옥수수 알갱이를 정성스레 하나하나 떼어내 접시에 놓아두던 때였다.
“니, 그제는 어데서 잤드노.”
기습적인 질문에 알갱이를 뜯던 손이 흠칫 멎었다. 성인이 되고부터 자신의 귀가에는 썩 관심이 없던 모란이 하필이면 그날의 일을 물어오니 순간 가슴이 철렁였다.
지안은 붉어진 얼굴을 미처 수습하지 못한 채 얼른 핑계를 댔다.
“아…. 거, 건호네.”
괜히 제 발이 저린 지안은 얼른 주절주절 덧붙였다.
“건호네 가게서 치맥 한잔하다 보니까 시간이 늦었더라고. 아주머니가 자고 가라셔서.”
“엎어지면 코 닿을 덴데 만다고.”
골목 어귀만 돌아 나가면 건호의 치킨 가게가 있으니 이상할 법도 했다.
지안은 내심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그럴듯하게 얼버무렸다.
“그냥, 뭐. 밤새 수다나 떨자고. 아주머니 적적하시대서.”
건호와 동한에겐 할머니 핑계를 대고, 할머니에겐 건호 핑계를 대고.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더니, 이게 진짜 무슨 짓인지.
행여 들키는 날엔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하나 벌써 눈앞이 캄캄하다.
“…….”
눈은 옥수수에 닿아 있었지만 제게로 향한 모란의 시선이 또렷이 느껴졌다. 어쩐지 말이 없는 몇 초가 억겁같이 갑갑했다.
뭐라고 또 주절주절 덧붙여야 하나, 초조하게 입술만 감쳐 물던 때였다.
“말만 한 가시나가 머스마 집에서 그래 디비 자가 되겠나.”
모란이 쯧쯧 혀를 차며 핀잔했다. 다행히 그냥 믿어 넘기시려는 모양이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폭 내쉰 지안은 옥수수 알갱이를 담은 접시를 모란의 앞에 밀어두었다.
“가시나 머스마 아니고 그냥 친구. 아시면서 뭘 그래.”
정성스럽게도 떼어놓은 알갱이를 가만 바라보던 모란이 회색 눈을 치뜨며 물었다.
“…별일은 없었고?”
지안은 대번에 기겁하며 대꾸했다.
“별일 있을 일이 뭐가 있어. 건호랑 나 진짜 친구라니까. 어서 드셔요, 간이 딱 됐네.”
옥수수 하나를 통째로 꺼내 든 지안은 와그작와그작 옥수수 옆구리를 맛나게 뜯었다.
연방 맛있다며 오버스럽게 감탄사를 뱉었지만, 사실 당황한 나머지 무슨 맛인지 도통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런 지안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며 오물오물 알갱이를 씹던 모란은 은근슬쩍 맞은편 옥탑을 건너다봤다.
점마가 인자 또 슬… 찾아올 때가 됐을 낀데….
고요한 창을 담은 회색 눈동자가 사뭇 흥미롭게 일렁이고 있었다.
**
기업인 조찬 모임에 다녀온 병천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승원을 바라봤다.
깊이 팬 미간의 주름과 돌돌 걷어 올린 셔츠 소매, 긴 손가락 사이에 낀 채 일정한 속도로 빙빙 도는 만년필.
하물며 손에 든 저것은 글로벌 M&A 계획서가 아니던가!
갑자기 무슨 연유로 지안도 홀로 두고 출근을 하셨나 했더니, 무려 ‘일’을 하실 줄이야.
아아. 일에 푹 빠진 이 섹시한 광경을 눈에 담은 것이 어언 몇십 년 만이던가.
급변하는 인간 세상을 무탈하게 살아가기 위해 1978년 월호 기획을 세우고 W가 된 지금까지 어언 40여 년.
설립 이후 10년간 특출한 능력으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대표’로서 단연 열심히 뛰어주신 후론 처음이니 이 어찌나 아득한 일인가 말이다.
이제는 대표자리도 제게 던져버리고 간혹 클라이언트 미팅만 나서던 그가 무려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고 있다니!
병천이 내심 감격한 얼굴로 그를 그저 바라만 보던 때였다. 섹시하게 그늘져있던 승원의 미간이 한층 깊이 팼다.
“디자인 3팀 이건호 대리 싱가폴로 파견 좀 보내.”
“…예?”
느닷없이 떨어진 명령에 병천의 눈이 멀뚱히 깜박였다.
“…….”
이내 그 속내를 짐작한 병천은 얇게 접은 눈초리로 승원을 건너다봤다.
대답이 없자 그제야 서류에만 박혀 있던 승원의 눈이 병천을 향해 들렸다. 가늘어진 병천의 눈매에 그는 당당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었다.
“왜. 또 뭐.”
쓰읍, 입바람을 당긴 병천이 고개를 스윽 비틀며 팔짱을 꼈다.
“설마 일전에 지안 님의 댁에서 뒷담화를 한 일로 유배를 보내시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뭐? …하, 참 내.”
헛숨을 뱉은 승원은 만년필을 던지듯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툭 묻었다.
‘ 아오오! 미친 변태 같은 놈. 돈 많고 잘생기면 다냐? 스폰은 빌어먹을. 왜 기운 빠지게 헛소리를 해서 애먼 사람 꿈을 다 죽여놓냐고! ’
물론 그 일도 상당히 괘씸하긴 했지만 그것이 언제 적 일이던가.
“내가 유치하게 그깟 일로 이러겠어?”
“그땐 당장 해고하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농담도 못 해?”
“허면 왜 갑자기 그자를 외국으로 보내라 하십니까?”
한숨을 폭 내쉰 승원은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빙빙 굴리며 말했다.
“그냥 거슬려.”
으응? 병천의 두툼한 눈썹이 이맛살을 삐쭉 밀어 올렸다.
“거슬리다니요. 갑자기 그자가 어인 연유로…?”
물음에 대꾸는 않고 찻잔을 쥔 승원은 다 식은 연잎차를 호로록 삼키곤 느닷없이 물었다.
“눈알에 붙은 먼지를 입으로 불어주는 건 무슨 경우라고 생각해?”
“예…?”
“단지 지기 간에 그게 가능한 일인가?”
“…….”
갑작스런 질문의 의도도 파악하질 못했는데, 그는 빠르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양손이 멀쩡한데 굳이 제 입에 쑤셨던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먹여주는 건?”
“…….”
“굉장히 거슬리지 않아?”
어허. 당최 이게 다 무슨 소리인지.
이 느닷없는 질문이 생성되기까지의 과정조차 짐작할 수가 없는 병천으로서는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었다.
대강의 눈치로 알아먹은 병천이 눈썹 머리를 좁히며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것이 지안 님과 그자의 이야기란 말씀이신지요?”
아니, 설령 그렇다 한들 그것이 뭐 그리 거슬릴 일인지…?
병천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멀뚱하게 눈꺼풀을 여닫았다.
답답한 얼굴로 무어라 덧붙이려던 승원은 이내 포기하고 손을 휘휘 흔들었다.
“아, 됐어. 어쨌든 3개월만 싱가폴에 박아 놔.”
그러며 툭 던진 서류철 하나가 책상 모퉁이까지 미끄러졌다. 병천은 제 앞에 밀려온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그가 M&A 계획서와 더불어 내내 들여다보고 끄적이던 것이었다.
한낱 디자인팀의 대리를 이 중차대한 해외 기업 인수 합병 프로젝트에 투입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억지로 끼워 맞춰 꾸역꾸역 만들어낸 ‘해외 파견 명령서’였다.
“…….”
그럼 그렇지.
어쩐 일로 우리 월호 님이 그리 진지하게 일에 몰두하시나 했더니….
대체 그자는 어쩌다 그에게 눈엣가시로 찍혀 졸지에 나라 밖으로 쫓겨나게 생긴 것인가.
“그리고, 서지안 오디션 보는 것들 중에 쓸 만한 배역 하나 맡을 수 있게 손 좀 써.”
연타로 날아온 명에 서류를 살피던 병천이 흠칫 눈을 고쳐 떴다.
“배역을 말입니까?”
“그래. 그 계집 눈치가 빤하니 주인공까진 아니더라도 굽신거리진 않을 만큼만.”
그러며 자리에서 일어난 승원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누가 보면 사흘 밤낮을 새며 열일을 끝낸 것처럼 피곤하고도 후련한 얼굴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난데없이 내린 명들을 정리하느라 가만히 머리를 굴리던 병천은 문득 그의 뒷모습을 빤히 건너다봤다.
어째 요즘 들어 지안 님을 대하는 태도가 부쩍 이상하지 않으신가.
오늘은 지안 님이 피곤할 테니 수아도 붙이지 말라 이르시고, 이런 황당한 명까지 내리시니….
아무래도… 그러니까 아무래도 이것은….
짐작은 곧 합리적 의심이 되고, 그것은 곧 확신이 될지니.
“월호 님.”
넌지시 건너간 호명에 그가 어깨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왜.”
간만에 구름을 뚫고 쏟아진 햇살이 사내의 수려한 반쪽 얼굴을 환히 비추었다.
“혹여….”
내심 묻기가 저어되어 뜸을 들이자, 그가 답답한 얼굴로 재촉했다.
“뭐. 얘기해.”
괜히 마른침을 꿀꺽 삼킨 병천은 서류철을 꾹 말아쥐며 애써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혹여, 지안 님을 여인으로 마음에 들이신 겁니까?”
“…….”
잔털도 하나 없이 곧고 잘생긴 눈썹이 서서히 찌푸려 들었다. 일그러지다 못해 이맛살을 밀고 올라간 한쪽 눈썹은 뾰족한 산봉우리를 이루었다.
동시에 조금씩 기울어지는 입매는 기가 찬 듯 비소를 담고 있었지만, 그를 무려 120해가 넘도록 보아온 병천은 알고 있었다.
그가 버릇처럼 신성한 동물이라 말하는 견犬에 빗대어 과민반응을 보인다면 그것은 필시, 자신도 몰랐을 진심에 뜨끔하여 당황한….
“…뭔 개소리야?”
허어… 맙소사.
병천은 고개를 떨구며 이마를 꾸욱 짚었다.